칠흑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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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
작품등록일 :
2012.11.17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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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09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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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14.01.01 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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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8쪽

제 15막. 협상 테이블.

DUMMY

그 말에 대답할 리 없는 제인은 잔뜩 심통이 난 표정으로 연못가에 앉는다. 그리고는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치맛자락을 과감하게 들어 무릎까지 올린 뒤 발을 담그고는 에드리안 쪽으로는 시선조차 주지 않는다. 에드리안은 어색하게 그 옆에 앉은 뒤 한숨을 폭 내쉰다.


쉬러 왔는데 일이 다시 더 는 기분이다. 어차피 제인은 자신의 기분이 좋지 않으면, 상대가 에드리안이라 하더라도 입을 좀처럼 열지 않는다. 근 1년간의 경험으로 그 사실을 매우 잘 아는 에드리안은 굳이 제인에게 말을 걸지 않고, 제인의 화가 풀리기를 기다리며 멍하게 공상에 빠진다.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멍하게 있는 것이야말로 그에게는 최고의 휴식이었으니까.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화가 풀린 것인지, 혹은 궁금한 것이 있었던 것인지 제인이 여전히 시선은 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오빠가...”


“응?”


“오빠가 말했어. 인기 많다며?”


“내가?”


“응.”


엘루이즈가 또 쓸데없는 소리를 했구나 싶어 에드리안이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가 좋아서 그런 건지, 아니면 우리 가문이 좋아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좋겠네?”


“인기 많은 게? 안 좋아.”


무슨 그런 말을 하냐는 듯 에드리안이 말하자 제인은 흥미라도 생긴 것인지 그제야 얼굴을 보여준다. 이런 이야기에 관심이 있었던가 싶어 에드리안은 심드렁하게 말한다.


“곤란하지. 아버지가 시킨 일도 많고, 학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려면 공부도 많이 해야 하는데 시간을 빼앗기니까. 너무 바빠. 그런 걸 신경 쓸 시간이 없을 정도로. 오죽하면 아버지가 그냥 적당한 여자와 약혼을 시켜주길 바랄 정도야. 어렸을 때는 좀 더 낭만적인 연애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젠 다 귀찮아져.”


정말로 피곤하고, 짜증이 난다는 듯 에드리안이 인상을 찌푸렸다. 에드리안의 그런 표정은 샤를리즈조차도 보기 힘든 표정이었기에 제인은 놀랐다는 듯 눈을 깜빡인다. 그리고 말의 내용에 다시 한 번 놀란다. 에드리안의 입에서 저러한 내용의 말이 나올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해서.


마치 저 말투와 내용은 그라니언 공작의 입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가 아닌가? 물론, 제인은 직접적으로 그를 본 적은 없었지만, 적어도 자신의 아버지와 오빠가 하던 이야기를 통해 충분히 그라니언 공작에 대해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랬기에 지금의 에드리안은 묘하게 그를 닮아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인지하지 못한 것인지 에드리안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있지. 난 가끔씩 왜 우리 아버지가 어머니를 좋아했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어. 우리 어머니는 분명 미인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정도 미인이 귀족들 가운데 없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이제는 좀 알 것 같아.”


에드리안이 씁쓸하게 웃었다. 고작 열아홉 살인 주제에 말이다.


“주변에는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이 제각각 자신만의 환상으로 나를 바라봐. 학자들은 내가 온화하고 많은 지식을 가진 젊은 청년으로 바라보지. 그리고 훗날 그들의 이론을 바탕으로 살아가길 원해. 나와 친해지려고 노력하는, 내 또래의 녀석들은 나를 자신의 직위를 높여줄 도구로써 바라봐. 그래서 나를 다루기 쉽다고 생각하고, 휘두르려고 해. 그리고 그건 날 좋다고 쫓아다니는 여자애들도 마찬가지지. 자신의 직위를 높여줄 발판이자 상냥한 남편이 되어주길 바라. 그라니언 가문에 충성을 바친 이들은 또 어떤 줄 알아? 내가 내 아버지처럼 되어 주기를 바라. 냉정하고, 적에게는 잔인한 그런 것을 말이야. 아버지는 내 온화한 성격을 마음에 들어 하지만, 가끔씩 나를 적대시하는 이들에게 있어서는 혹독하게 대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이 모든 것들이 나에게 바라는 상이야.”


벌써부터 답답해져오기라도 하는 것인지 에드리안은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는 이마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그들에게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그들이 원하는 상을 연기해야해. 이제까지는 내가 어리다는 이유로 많이들 봐주는 눈치였지만, 서서히 그들이 원하는 상을 요구하기 시작하니까. 난 말이야. 하라면 할 수 있어. 그런데 가끔씩 그 여러 가지 상들이 충돌을 할까봐, 상황에 맞지 않는 상을 연기해서 곤욕을 치를 까봐, 다른 모든 사람들이 나를 이상하게 생각할까봐 너무 무서워.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야. 단 한 번의 실수로 모든 것을 잃어버릴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어느 새 에드리안은 두 손으로 얼굴을 파묻은 채 중얼거렸다.


“그리고 진정한 내 자신을 잃어버릴 것만 같은 두려움 때문에 미칠 것만 같아.”


그것은 그 누구에게도 하지 못한 고백과도 같은 것이었다. 자신에게 기대를 걸고 있는 공작에게도 샤를리즈에게도.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에드리안은 애써 분위기를 환기시키려고 하는 듯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상냥하게 미소 짓는다.


“그래서 아버지가 우리 어머니를 좋아했던 이유는 버팀목이 되어주었기 때문이었을 거야. 아버지는 멋대로 행동하긴 했지만, 결국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잘 해왔거든. 그리고 아버지를 아버지답게 있게 만들어준 이가 어머니였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니까 기분이 좋아.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꼭 필요한 존재였다는 거니까. 물론, 난 얼굴도 모르지만. 그런데 우리 누이랑 많이 닮았대. 그래서 상상은 할 수 있어.”


샤를리즈의 얼굴에 갈색 머리칼, 그리고 갈색 눈동자였을 것이다. 물론 미묘하게 다른 부분도 있겠지만, 어떤 분위기였는지는 대충 알 수 있었으니까. 가끔씩 얼굴도 모르는 어머니가 그리울 때가 있는데, 바로 이럴 때였다.


“있지.”


여태까지 입을 꼭 다물고 있던 제인이 입을 열었다.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에드리안을 바라보던 제인이 말을 이었다.


“리안의 누나 말이야. 그 사람도 연애를 귀찮아 해?”


“어?”


“그냥. 유전인가 싶어서.”


제인의 시큰둥한 말에 에드리안은 저도 모르게 무슨 말을 하냐는 듯 바라보다가 이내 키득거리며 웃었다. 제인 나름대로는 제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한 말이리라. 그래서 에드리안은 그 시도에 응해주기로 한다. 자신도 모르게 분위기를 우중충하게 만든 것은 사실이었고, 그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는 것 또한 사실이었으니.


“우리 누이는 그런 건 아닌데... 여태까진 여유가 없었지만, 요즘 그런 것 같지는 않고. 뭐, 그런 것을 다 제쳐 두더라도 사실 우리 누이가 연애를 할 만한 사람이 주변에 없었지. 항상 누이가 책임을 져야 했던 사람들뿐이었으니까.”


“그런 사람들과는 못해?”


“꼭 그런 건 아닌데, 우리 누이는 그런 것 같더라.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많아도 항상 누이는 그 사람들을 그렇게는 인식하지 못했어. 그러니까 우리 누이가 누군가를 좋아하려면, 적어도 누이가 지키기 않아도 되는, 동등한 사람이어야겠지. 그런데 사실 그런 사람을 찾기가 힘든 것 같아. 우리 누이의 입장에선 말이야.”


“그래?”


“응. 사실 내가 이 자리에 올라오고 싶었던 이유도 누이의 그런 짐을 덜어주고 싶었기 때문이었어. 누이에게 있어서 가끔씩 누이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짐처럼 느껴질 만도 했으니까. 그런데 그게 쉽지가 않네.”


몇 년은 늙은 것처럼 에드리안이 힘없이 웃는다. 그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한 번 환하게 웃으면서 말한다.


“그래도 힘내야지. 그렇지?”


“그래.”


에드리안의 말에 반사적으로 제인이 대답했고, 그에 에드리안은 고맙다는 듯 손을 들어 제인의 머리에 얹는다. 그리고는 기껏 단정하게 빗어 올린 머리칼을 헝클며 말했다.


“고마워.”


작가의말

흐름상 짧게 끊었습니다. 1월 1일 중으로 다음 편을 올리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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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 제 17막. 어떤 음모. +5 14.08.06 468 2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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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 제 17막. 어떤 음모. +5 14.07.31 494 19 10쪽
203 제 17막. 어떤 음모. +6 14.07.20 486 25 9쪽
202 제 17막. 어떤 음모. +13 14.07.13 660 24 10쪽
201 질문과 답변 & If +9 14.03.12 1,266 23 22쪽
200 여러 시선. +8 14.03.09 1,007 33 16쪽
199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4 14.02.23 746 26 7쪽
198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4 14.02.19 603 21 9쪽
197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8 14.02.15 544 25 9쪽
196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3 14.02.08 787 29 9쪽
195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9 14.02.04 635 28 9쪽
194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7 14.01.31 1,061 30 10쪽
193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6 14.01.26 755 33 11쪽
192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5 14.01.21 1,071 35 12쪽
191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4 14.01.15 786 30 12쪽
190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4 14.01.11 897 25 9쪽
189 제 15막. 협상 테이블. +4 14.01.06 823 24 12쪽
188 제 15막. 협상 테이블. +5 14.01.01 1,037 25 10쪽
» 제 15막. 협상 테이블. +7 14.01.01 1,082 26 8쪽
186 제 15막. 협상 테이블. +5 13.12.27 829 24 11쪽
185 제 15막. 협상 테이블. +4 13.12.24 711 25 12쪽
184 제 15막. 협상 테이블. +5 13.12.16 765 28 12쪽
183 제 15막. 협상 테이블. +3 13.12.11 739 18 10쪽
182 제 15막. 협상 테이블. +5 13.12.08 974 26 9쪽
181 제 15막. 협상 테이블. +3 13.12.05 1,062 29 10쪽
180 제 14막. 돌이킬 수 없는. +10 13.12.01 967 29 10쪽
179 제 14막. 돌이킬 수 없는. +4 13.11.17 795 28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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