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흑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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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
작품등록일 :
2012.11.17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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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09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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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1.11 0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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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DUMMY

왕과의 대담이 끝나고 난 뒤, 크산느 백작은 자신의 날카로운 검은 수염을 매만지며 왕궁의 복도를 거닐었다. 그라니언 공작이 그라니우스로 돌아가고, 그 자리를 어린 그라니언이 대신하고 있는 지금, 수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귀족은 바로 크산느 백작이라 할 수 있었다.


언제까지나 그라니언 공작의 뒤에서 2인자 노릇만을 해야 했던 그에게 있어서는 왕궁의 분위기를 바꿀 절호의 기회가 온 셈이기도 했다. 다행이도 어린 그라니언은 그 아버지와는 달리 순한 성격이라고 하니, 자신이 활개를 친다 하더라도 그리 불만을 품거나 신경을 쓰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막상 왕궁의 귀족들이 모두 모여 있는 홀에 오니, 그를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삼삼오오 모여 망측스럽다는 듯, 혹은 놀랍다는 듯 이야기를 나누고만 있었다.


“제레미.”


자신의 본명이 불리자 흠칫 놀란 크산느 백작은 고개를 돌린다. 그곳에는 자신의 오랜 벗, 셰르먼드 후작이 서 있었다. 그는 이마에 흐르던 식은땀을 손수건으로 훔치며 말했다.


“이상한 소문들이 돌고 있네. 잠깐 보지.”


크흠, 하고 목을 다듬은 셰르먼드 후작은 귀족들 사이로 빠져나갔다. 그를 따라가던 크산느 백작은 어느 귀족무리-어느 가문의 출신이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을 정도였다.-들이 말하는 것을 운 좋게 엿들을 수 있었다.


“세상에, 그럼 그 그라니언 부인이 제 딸보다 어린 클랜디스와?”


“임신을 했다는 소식이야 워낙 퍼진 소문이라 알고는 있었지만... 물론, 그 애의 아비가 그라니언 공은 아닐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그래도 충격 아니오?”


“이래서야 프리실라 양도 그라니언 가문의 피가 아닐지 누가 장담할 수 있단 말인가?”


“흥. 꼴좋군, 그 드센 망아지 같던 게 이제야 기가 꺾이겠어.”


종합하자면 요즘 떠돌고 있던, 그라니언 부인이 가진 아이의 생부가 클랜디스 드 로즈퍼드라는 건가? 이건 또 무슨 망측한 소문이란 말인가? 클랜디스, 그 청년의 난잡한 성생활에 대해서는 듣고 싶지 않아도 듣게 될 정도로 유명한 것이라지만 그라니언 부인은 달랐다.


항상 정숙하고, 스스로에게 엄격한, 그래서 ‘역시 공주님답군.’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그런 여자였다. 그랬기에 그라니언이 아무리 홀대하더라도 항상 그만을 바라보던 여자였는데. 그런 여자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그것도 자신의 딸보다도 어린 남자의 아이를 가지다니!


게다가 로즈퍼드 가문은 그 작은 그라니언의 외가가 아닌가? 제 3자인 자신이 들어도 이렇게 아찔한 이야기를 당사자인 그라니언 공작이 들었다면 어땠을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만일 자신이었다면, 감히 이런 짓을 벌인 데에 대한 대가랄 톡톡히 치르게 하고 가문에 영영 발을 들이지 못하도록 쫓아냈을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한 왕국의 공주였다고 해도 말이다.


“혹시 들은 바는 있는 겐가?”


어느 새 홀에서 벗어나 난간에 서게 되었다. 셰르먼드 후작의 물음에 크산느 백작은 혀를 차며 말했다.


“자네는 항상 말하지만 아내의 입단속을 제대로 시켜야 할 게야. 지난 번 공작부인이 다른 사내의 아이를 가졌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을 낸 것도 자네의 부인이 아니었나?”


“뭐... 그 소문을 말하는 거라면 내 부인도 아니네. 홍등가에서 퍼진 소문이야. 그것도 꽤 신빙성 있는 마담 페트리시아 쪽에서 들려오는 소문이라 거의 사실이라 보아도 될 걸세. 게다가 내 부인이 어디... 내 말을 들을 위인인가? 나도 그 여자를 좀 길들여봤으면 소원이 없겠군. 그래도 다행인 건 다른 사내의 아이를 배지는 않았으니 그것만큼은 고마운 일이지. 자네도 알다시피 내 부인도 그... 클랜디스 그 놈과 추문이 있었지 않나?”


“그러니 단속을 잘 시키란 말이야. 그럴 자신이 없으면 나처럼 영지에 쳐 박아두고 수도 구경은 시키지도 말든가. 원, 아무리 우리가 가문의 명성을 되찾으려 애써도 여자들이 그것을 망치니.”


“난들...! 됐네. 자네가 그 여자와 살아보지 못해서 하는 소리야. 게다가 내가 여자라도 클랜디스 놈이 작정하고 덤비면 못 당할 걸세. 빌어먹을 새끼. 하여튼 제 어미의 재능은 모조리 물려받았어! 도대체 그 놈 때문에 풍비박산 난 가문이 도대체 몇 개냔 말이야! 하여튼 귀족의 이름에 먹칠이나 하고 다니는 모양새하곤. 그래서 출신이 천한 것들은 받아들여선 안 된다는 것이야!”


클랜디스에 대한 감정이 남다를 법한 셰르먼드 후작의 으르렁거림에 크산느 백작은 괜히 말을 꺼냈다 싶어 입을 다물고는 멋쩍은 듯 수염만 매만진다. 그리고는 셰르먼드 후작의 말에 조용히 동의한다.


애초에 자신 또한 자신의 딸들과 부인을 동부의 영지에 머물도록 한 이유들 중 하나가 바로 클랜디스 그 놈의 마수에서 놀아날까 지레 겁을 먹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순간 나타나서 미쳐 날뛰는 그 클랜디스 때문에 사교계의 대부분 계집애-다행인 것은 고위 귀족 계집애들은 여기에 속하지 않았다.-들은 처녀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았다.


어디 그 뿐인가? 이제는 남편이 있는 부인들에게까지 추파를 던지지 않는가? 안 그래도 이것 때문에 왕에게 간언을 한 적 있었으나 왕은 이상하리만치 클랜디스에 대해서는 관대했다. 웬만하면 자신의 청을 들어주는 왕이었음에도 클랜디스에게 벌을 주자는 그의 청은 이상하게 거절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라니언 공작 또한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이런 추문이 돌 정도면 그라니언 공 또한 알았을 터. 그럼에도 아직까지 클랜디스 드 로즈퍼드의 목은 제 몸에 붙어 있었고, 오늘도 어느 계집애와 나자빠져있을 것이다. 그리고 공작부인은 그 놈의 자식을 품고 있고 말이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젠장. 왜 이야기가 이쪽으로 넘어간 건가? 이게 다 빌어먹을 그 새끼 때문이야. 아무튼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그것이 아니었네. 그것보다 더 이상한 소문이 상인들 사이에서 돌고 있다는 게야.”


“이보다 더 이상한 소문이 있단 말인가? 그건 더 충격적인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듯 크산느 백작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셰르먼드 후작은 마치 누군가 들을까 염려되는 듯 주변을 살피고는 목소리를 잔뜩 낮추어 말했다.


“선왕의 아들이 살아있다는 소문일세.”


“뭐야?”


“말 그대로야. 지금 귀족들이 굳이 클랜디스와 공작부인의 추문을 크게 떠들어대는 이유도 혹여 왕께 밉보일까 싶어 그러는 것이야. 하지만 다들 들어서 알고는 있을 게야. 선왕의 아들이 살아있다는 것 말이야.”


“헛소문이네. 아니, 헛소문이어야만 하네!”


“헛소문이라고 하기에는 그 규모가 너무 커. 전국 각지에서 갑자기 들고 난 소문이란 말이네. 나도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 어제 내 가문의 영지에서 전령이 오고서야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네. 수도에서야 지난주부터 돌았고, 그 때야 나도 헛소문이라고 생각했네. 그런데 이게 영 오싹해. 혹시나 해서 다른 귀족들에게 물어보았는데 다들 제 영지에도 그런 소문이 돌고 있다고 하더군. 동, 서, 남, 북, 할 것 없이 말이야. 이게 말이 되나? 일주일 안에 이 나라 전역에 그런 소문이 돌고 있다는 게?”


셰르먼드 후작의 말에 크산느 백작은 마른 침을 삼켰다. 불가능하다. 최소한 전쟁이 아닌 이상 이렇게 빠르게 소문이 돌 수는 없었다. 어떻게? 어떻게 그렇게 빨리 소문이 돌 수 있지?


아니 그것보다 그렇다면 사실이란 말인가? 선왕의 아들이 살아있다는 것이? 그 선왕의 아들이? 크산느 백작은 불안한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안 돼. 그래선... 그래선 안 돼. 젠장! 데스마타..! 그 빌어먹을 노인네가 일을 다 벌여놓고는 갑자기 잠적하는 바람에 내가 다 뒤집어쓰게... 아니지. 아니야...”


“자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겐가?”


“아, 아니야. 아무튼 그건 헛소문이네. 그러니 그런 소문은 신경 쓰지 말고 그 공작부인의 소문이나 떠들고 다녀. 그 쪽이 훨씬 재밌군.”


크산느 백작은 애써 별 것 아니라는 듯 웃었다. 그러나 그의 오른쪽 뺨은 미세하게 떨렸다. 그것을 놓친 셰르먼드 후작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헛소리라 하더라도 대책은 세워야지. 만일 그 소문이 사실이라면 왕위 계승권에 가장 가까운 건 선왕의 아들이야. 게다가 현재의 왕은 밀려날 수도 있단 말이네. 그러니 어디에 줄을 설지 생각을 해야...”


“아니라니까!”


셰르먼드 후작의 주절거림은 크산느 백작의 노기어린 고함소리에 묻혔다. 갑작스러운 외침에 눈을 크게 뜬 셰르먼드 후작은 ‘이게 지금 무슨 행동인가?’라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고, 크산느 백작은 실수였다는 듯 고개를 빠르게 저은 뒤 말했다.


“아니네.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게. 아니어야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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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 제 17막. 어떤 음모. +13 14.07.13 660 24 10쪽
201 질문과 답변 & If +9 14.03.12 1,266 23 22쪽
200 여러 시선. +8 14.03.09 1,007 33 16쪽
199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4 14.02.23 745 26 7쪽
198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4 14.02.19 603 21 9쪽
197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8 14.02.15 544 25 9쪽
196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3 14.02.08 786 29 9쪽
195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9 14.02.04 635 28 9쪽
194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7 14.01.31 1,061 30 10쪽
193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6 14.01.26 755 33 11쪽
192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5 14.01.21 1,071 35 12쪽
191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4 14.01.15 786 30 12쪽
»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4 14.01.11 897 25 9쪽
189 제 15막. 협상 테이블. +4 14.01.06 822 24 12쪽
188 제 15막. 협상 테이블. +5 14.01.01 1,036 25 10쪽
187 제 15막. 협상 테이블. +7 14.01.01 1,081 26 8쪽
186 제 15막. 협상 테이블. +5 13.12.27 829 24 11쪽
185 제 15막. 협상 테이블. +4 13.12.24 711 25 12쪽
184 제 15막. 협상 테이블. +5 13.12.16 764 28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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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 제 15막. 협상 테이블. +5 13.12.08 974 26 9쪽
181 제 15막. 협상 테이블. +3 13.12.05 1,061 29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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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 제 14막. 돌이킬 수 없는. +4 13.11.17 795 28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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