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흑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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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
작품등록일 :
2012.11.17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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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09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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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2.24 0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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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제 15막. 협상 테이블.

DUMMY

란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기대를 한 자신이 어리석었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어련하시겠어요.”


“뭐예요? 애초에 당신이 너무 구체적으로 말하니까 그렇죠. 그렇게 틀에 딱 맞춘 여자가 세상에 어디 있겠어요. 조금 더 너그러운 마음으로 신붓감을 찾아보시든가요.”


사실을 말해줬는데도 알아듣기는커녕 뭔가 자신을 무시하는 말투에 샤를리즈는 인상을 찌푸리곤 다시 고개를 낮춰 마지막 종이를 읽기 시작했다. 사실 샤를리즈가 이렇게 퉁명스럽게 말하는 것은 당연했다. 마치 잘 만든 인형처럼 여러 가지 조건을 붙여서 그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라고 말하다니.


저 모든 조건을 갖춘, 고위 귀족 가문의 아가씨를 어떻게 찾을 수 있겠느냔 말이다. 게다가 이 나라에서뿐 아니라 다른 나라의 공주님들까지 포함한다면 그 범위는 넓어지고, 더욱 찾기는 힘들어지겠지.


물론, 왕의 신붓감을 찾아 마담뚜가 되어 짭짤한 수입을 올리는 것도 좋겠지만, 그러기엔 시간이 아깝다. 샤를리즈는 마지막 문장을 읽은 뒤, 눈썹을 으쓱인 뒤 말했다.


“자, 다 읽었네요. 그럼 우리 협상을 시작해볼까요?”


“본래라면 몇 십 분 전에 시작했어야 할 ‘그 협상’을 말하는 거로군요.”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이 만나자마자 바로 진행되었어야 할 협상이었다. 하지만 샤를리즈는 상단에서 끝내야 할 일을 마치지 못했고, 결국 이 자리까지 가지고 왔다. 그것은 명백하게 샤를리즈의 잘못이었다.


하지만 10분이면 끝날 일이 몇 십 분까지 길어진 것에는 란의 책임도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신붓감 찾기 따위를 하느라 시간이 허비되었으니까. 그래서 샤를리즈는 어깨를 으쓱인 뒤 말했다.


“어쩔 수 없잖아요. 난 요즘 아주 바쁘다고요. 이제 겨우 루타와 정당한 거래를 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 루타로 달려가고 싶지만, 이 나라에서의 일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해서 있는 거예요.”


“그것 참 고맙네요.”


그 말과는 달리 란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그에 샤를리즈는 고개를 까딱인 뒤 입을 열었다.


“이제 말꼬리 잡는 건 그만두도록 하죠. 그래서 왕위를 되찾고 싶은 저하께서 일개 우리 상단에게 원하는 것이란?”


샤를리즈가 빙긋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란은 그것을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헛기침을 한 뒤 입을 열었다.


“나를 따르는 귀족들은 결코 해줄 수 없는 것. 그리고 당신의 상단은 그것을 해줄 수 있죠. ‘말’. 이 나라 아니, 이 나라뿐만이 아니라 스니케드와 다른 나라에까지 퍼질 말말입니다. 내가 살아있고, 내가 정당한 왕위 계승자라는 것을 널리 퍼뜨릴 말. 나는 그게 필요합니다.”


“그러시겠죠. 현왕의 평가는 어떨지 몰라도 지금의 태자 저하의 평가는 지나치게 좋으니까요. 보아하니 당신은 내란을 일으켜서 왕위에 오를 생각은 없는 것 같고, 최대한 당신의 권리를 주장하되, 정당하게 자리를 요구하고 싶어 하는 것 같군요. 그리고 그에 대해서는 태자 저하께서도 지지를 하시고. 문제는 저하와 당신 사이에 있었던 그런 일, 아무도 모른다는 거지만. 뭐, 사람은 잘 찾아오셨군요. 당신의 판단대로 난 그걸 들어줄 수 있어요. 내 상단에 속한 상인들은 이 나라뿐 아니라 많은 나라들을 돌아다니고, 그들로 하여금 말을 퍼뜨리는 일은 쉬우니까. 각 지부장들에게 시키고, 그 밑의 간부들에게 시키면 말은 퍼지겠죠. 하지만 문제는 ‘어떤 말’이냐는 거예요. 당신이 정당한 계승자이니, 현왕이 부적절하게 왕위를 이었다느니, 그런 말들은 쉽게 퍼지지 않아요. 재미가 없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태자 저하의 이야기는 다르죠. 모두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로맨스의 주인공이고, 그 결실이 작년에 태어났어요. 그리고 그 결실은 당신이 없다면, 아주 먼 훗날 왕이 되겠죠. 그 정도는 되어야 재미있는 이야기이고, 잘 퍼지는 법이죠. 아름다운 동화 속 이야기. 그런데 당신은요? 당신은 그 아름다운 동화 속 이야기보다 더 자극적이고, 더 매혹적인 이야기를 가지고 있나요?”


샤를리즈의 물음에 란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푸른 눈동자와 샤를리즈의 녹색 눈동자가 마주쳤다. 꽤 오랫동안 그들은 서로를 응시했고, 먼저 눈을 피한 것은 란이었다. 아니, 눈을 피했다고 하기 보다는 그녀의 물음에 대답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것이었지만. 하지만 그의 입 밖에 나온 말은 끄덕거림과는 반대되는 말이었다.


“없습니다.”


“없다고요?”


“예. 없어요.”


“그럼 왜 내게 온 거죠? 금방 들통 날 거짓말로 사람들의 눈을 속이고, 비참하게 자리에서 끌려내려 올 생각이라면 난 여기 앉아있을 필요가 없는데.”


샤를리즈는 마치 얼른 자신을 만족시킬 만한 대답을 하라는 듯 턱을 살짝 치켜세웠고, 란은 그녀의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겠다는 듯 숨을 들이쉰 뒤 말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은 없다는 뜻이었죠.”


“지금은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건, 앞으로는 생길 것이라는 뜻인데. 이건 마치 날더러 예언을 퍼뜨려달라는 말처럼 들리네요.”


“뭐, 그렇다면 더 좋겠죠. 하지만 그 전에 밑밥 정도는 깔고, 그 다음 예언을 푼다면 더욱 재미있는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요?”


“해봐요.”


“가령 이런 거죠. 선왕에게는 아주 어린 왕자가 있었는데, 그는 행방불명이 되었고 아마도 현왕에 의해 제거를 당했을 가능성이 컸어요. 왜냐하면 그 어린 왕자를 끝까지 지키려 했던 왕비의 주검이 발견되었으니까. 그렇게 현왕은 왕위를 이어받았고, 왕국은 평화로웠죠. 북부를 제외하고는.”


“북부는 평화로웠던 적이 없었죠, 굳이 말하자면. 왕가와의 대립으로 인해 그곳에서 일어나는 전쟁을 모두 감당해야 했으니까. 거기다 북부는 유달리 ‘쿼트’의 침입도 잦으니, 자잘한 전쟁들도 많으니.”


쿼트는 본래 작은 도적무리였는데, 최근 들어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때문에 그들의 침입이 잦은 북부 지방의 피해가 상당했다. 그럼에도 아스피트 가문이 그들을 처리하지 않는 것은 일종의 왕가와의 힘겨루기 때문이었다. 물론, 북부 지방의 피해도 있긴 했지만, 가장 피해를 받는 것은 북부를 통해 다른 나라로 가는 왕가의 신하들이었으니까.


아무리 왕가라 하더라도 북부의 아스피트 가문의 땅에 쿼트를 모두 제거할 만큼 충분한 수의 군대를 보내기 위해서는 아스피트 공작의 동의가 있어야 했다. 샤를리즈로써는 그런 시시한 힘겨루기 때문에 짜증나는 소요가 생기는 것이었다. 샤를리즈 또한, 북부를 통한 다른 나라와의 물류 교환을 할 때는 쿼트에게 충분한 뇌물을 먹여야 했으니까.


거기까지 생각한 샤를리즈는 갑자기 눈을 반짝였다. 그리고는 알았다는 듯 코끝을 찡긋거리곤 말했다.


“확실히 로맨스의 주인공보다는 영웅이 더욱 자극적이긴 하죠. 그래서 당신이 말한 그 ‘서장’격에 속하는 이야기를 밑밥으로 깔고, 다 자란 어린 왕자가 그들을 처치해줄 것이라는 뭐, 그런 예언을 퍼뜨려 달라는 거군요.”


“일종의 쇼죠.”


“하지만 거기엔 많은 조건들이 필요할 텐데요. 뭐, 군대를 모으는 것이야 당신을 따르는 귀족들을 설득하면 될 일이겠지만. 쿼트는 만만치 않은 상대에요. 그 출신이 도적이라고는 하지만, 북부의 넓은 숲을 그들보다 잘 아는 이는 없죠. 심지어 우리 상단에서 그곳을 잘 아는 이도 쿼트보다는 못해요. 게다가 그 숫자도 이젠 도적이라곤 볼 수 없을 정도예요. 믿을 만한 정보통에 따르면, 그들은 다른 소수민족들도 영입했거든요. 본래 아스피트 가문 땅의 주인이었던 자들 말이에요. 아주 오래전이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아스피트에게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고 있고, 그들 중 일부는 뛰어난 전사들이기도 하죠. 왕가와 아스피트 가가 멍청한 힘겨루기를 하는 동안 저들은 꽤 많은 힘을 길렀어요. 그리고 조만간 침략해오겠죠.”


샤를리즈의 말이 옳다는 듯 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아무런 표정도 띄우지 않고 입을 열었다. 담담하게.


“알고 있었군요.”


“북부에 있는 다른 나라와 교역을 하기 위해 숲을 건너는 이가 우리 상단엔 꽤 있으니까요. 그 정도는 알고 있어야죠. 거래에 큰 타격이 될 텐데. 아, 혹시 이런 사실을 왕가에 알리지 않았다고 실망한 건가요? 그래서 비난이라도 하려고요?”


“왕가와 아스피트의 어리석은 힘겨루기를 말리지도 못한데다가 이제는 그걸 이용하고자 하는 내가 무슨 자격으로요?”


란의 물음에 샤를리즈는 힘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눈동자를 굴리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당신이 선봉을 서겠군요. 아스피트는 당신을 왕위로 올리기 위해 그것을 도울 테고요. 왕가와 대립하더니 이번 기회에 화해를 꾀하고, 꽤 많은 대가를 원하겠네요. 그 전쟁은 틀림없이 분위기를 완전히 반전시킬 테니까. 이쯤 되니 궁금해지네요. 당신은 왕위에 오르기 위해 수많은 귀족들의 힘을 빌렸고, 거기다 이 왕국에서 가장 강력한 두 가문-그라니언과 아스피트-에게 큰 빚을 지게 되었어요. 당신이 왕위에 오르게 되면, 그들에게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겠죠. 다른 귀족들이야 그렇다 치고, 그라니언에게 왕비를 쥐어준다면, 아스피트에겐 무얼 줄 생각인가요? 그리고 기세등등한 그들을 어떻게 견제할 건가요?”


샤를리즈의 물음에 란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무언가 꽤 어려운 말이라도 하려는 듯 뜸을 들였다. 샤를리즈는 그것을 기다렸다. 어쩌면 다른 귀족들은 아무도 모를 수도 있는, 그런 이야기일 수도 있었으니까.


특히나 그녀가 마지막에 한 질문에 대한 답은, 어쩌면 란을 도와준 귀족들의 등 뒤를 찌를 수 있는 검이 될 수도 있을 테니.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답할 수 없겠군요. 아직 정해진 바가 없으니. 하지만 두 번째 질문은 당신에게 꼭 대답해야 할 질문이죠.”


“나에게요?”


“내가 당신을 찾은 두 번째 이유이니까.”


“뭐... 잠깐만요. 이해가 안 되는데. 귀족들을 견제할만한 수단과 우리 상단이 관련이 있다고요? 일개 상단인 우리가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듯 샤를리즈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럼에도 란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그 쯤 되자 샤를리즈의 표정이 조금 짜증스럽게 변했다. 얼른 설명해보라는 듯.


“귀족들이 표면적으로 대가를 요구할 수 있는 명분은 결국 전쟁에서 세울 전공일 겁니다. 다른 이유들도 있겠지만, 그 명분이 가장 커요. 그리고 그 대가를 통해 그들은 권력을 키울 것이고, 결국 왕의 권력에 도전하게 되겠지. 마음 같아선 내 개인적인 군대가 있었으면 하지만, 당신도 알다시피 내겐 그런 힘은 없습니다. 사실상 허울뿐이니까요.”


“그래서요?”


“하지만 당신은 병사들을 가지고 있죠. 도시와 도시, 나라와 나라를 건너는 상인들을 호위하는 병사들이 말이에요. 이 나라에서 가장 거대한 상단을 가진 당신이 지닌 병사들은 상당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제야 샤를리즈는 란이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그리고 순간, 그녀의 몸에 전율이 일었다. 보통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여태까지는 자신이 란의 뒤통수를 쳐왔기에 저도 모르게 자신이 란의 생각을 모두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눈치 채고 있었던 란의 생각은 전부가 아니었다. 란이 말했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병사들이 나에겐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전쟁에서 가장 큰 공을 차지해야만 하죠. 그리고 난 그렇게 만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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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5 14.01.21 1,071 35 12쪽
191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4 14.01.15 786 30 12쪽
190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4 14.01.11 897 25 9쪽
189 제 15막. 협상 테이블. +4 14.01.06 823 24 12쪽
188 제 15막. 협상 테이블. +5 14.01.01 1,037 25 10쪽
187 제 15막. 협상 테이블. +7 14.01.01 1,082 26 8쪽
186 제 15막. 협상 테이블. +5 13.12.27 829 24 11쪽
» 제 15막. 협상 테이블. +4 13.12.24 712 25 12쪽
184 제 15막. 협상 테이블. +5 13.12.16 765 28 12쪽
183 제 15막. 협상 테이블. +3 13.12.11 739 18 10쪽
182 제 15막. 협상 테이블. +5 13.12.08 974 26 9쪽
181 제 15막. 협상 테이블. +3 13.12.05 1,062 29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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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 제 14막. 돌이킬 수 없는. +4 13.11.17 795 28 10쪽
178 제 14막. 돌이킬 수 없는. +4 13.11.10 989 27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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