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흑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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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
작품등록일 :
2012.11.17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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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2.16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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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제 15막. 협상 테이블.

DUMMY

샤를리즈는 제 붉은 머리칼을 하나로 묶은 뒤, 종이들을 팔랑거리며 넘겼다. 넘기는 속도는 꽤 빠른 편이었는데, 아마 샤를리즈가 그 종이들에 적힌 내용들을 모두 읽고 이해한 뒤 넘긴다는 것을 안다면 그것이 꽤 빠른 편이 아닌 매우 빠른 편에 속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잘 아는 란은 책장을 넘기는 척을 하며 흘긋흘긋 그녀를, 말 그대로 엿보고 있었다. 그러한 시선을 느꼈던 것일까? 샤를리즈는 여전히 종이에 눈을 붙인 채 입을 열었다.


“뭐예요?”


그 말에 흠칫 놀란 란이 샤를리즈를 바라보자 샤를리즈도 이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인상을 살짝 찌푸린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아까부터 할 말이 있는 것 같아서요. 뭔데요?”


“아, 별 일 없나 싶어서...”


란은 일전에 그라니언 가의 마구간에서 샤를리즈가 울고 있었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저 자존심 강한 여자가 울 일이란 꽤 엄청난 일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오늘은 분명 그녀의 기분이 좋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샤를리즈는 늘 그랬던 것처럼 의례적인 표정으로 그를 대했고, 그가 건넨 조건들이 적힌 종이를 무심하게 펼쳐보고 있었다. 그럴 리 없었지만, 마치 숙제를 검사하는 선생님처럼 엄격했고, 그래서인지 뭔가 꽤 불편한 란이었다. 그런 란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샤를리즈는 고개를 까딱인 뒤 다시 종이로 눈을 돌리며 말했다.


“없어요.”


“그렇군요.”


참으로 단순한 대화가 끝이 났고, 샤를리즈의 손은 다시 바쁘게 움직였다. 그러나 란은 이제 대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바쁘게 움직이던 샤를리즈의 손은 이내 멈추었다. 그리고는 짜증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좋아요. 뭔데요? 아까 시릴이 여기 방문했다고 했는데, 그 자식... 아니, 시릴이 뭐라고 하던가요?”


그 말에 움찔 놀란 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별 말 안했어요. 그냥 뭐, 좀 친해졌다는 이야기를 하더군요.”


“하? 시릴이요?”


“네.”


그러자 갑자기 샤를리즈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목을 가다듬은 뒤 말했다.


“재밌네요. 올해 들은 말들 중에서 제일 웃겼던 것 같아요.”


“그런가요? 적어도 난 그 말이 진짜라고 생각했는데.”


시릴이 은근히 샤를리즈를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물론, 이성으로써의 감정이 섞인 것은 절대 아니었다.-을 알게 된 란이었기에 샤를리즈의 반응은 의외였다. 눈치가 빠른 여자이니 그 정도는 눈치 채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나 샤를리즈는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째서요?”


“리즈라고 부르더군요. 당신을요. 에단 씨도 그렇게는 안 부르는 것 같던데.”


란이 마치 하나도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 툭 던지듯이 말했다. 그러면서도 괜히 신경이 쓰여 곁눈질로 샤를리즈를 바라보았다. 샤를리즈는 완전히 짜증이 났다는 표정을 지었다.


“미치겠네. 당신 앞에서 날 리즈라고 칭했단 말이에요? 내가 그렇게 그런 식으로 부르지 말라고 말을 했는데도. 미리 이야기하자면, 시릴과 난 전혀 친하지 않아요. 오히려 시릴은 내 성질을 건드리기 위해 만들어진 그런 존재 같다고나 할까? 아무튼 시릴이 빈트뮐러 상단에 들어오고 나서 내가 고함을 지르지 않은 날이 없어요. 그리고 오늘 또 고함을 지를 이유를 제공했네요. 감히 나를 그런 식으로...!”


샤를리즈는 더 이상 분을 참을 수 없다는 듯 부르르 떨었다. 그에 란은 피식 웃고는 묻는다.


“그냥 애칭으로 부른 것뿐이잖아요.”


“그 애칭으로 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어요. 그리고 그 사람은 작년에 죽었고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담담하게 샤를리즈가 말하자 란은 입을 다문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잘 아는 사람들 중 하나가 란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일의 배후에는 좋든 싫든 그의 약혼녀가 아주 깊게 관여되어 있었다.


그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리 없는 란이었다. 란의 표정이 애매모호해지자 샤를리즈가 그럴 필요가 없다는 듯 고개를 까딱인다. 그리고는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

“하긴, 그런 애칭으로 의미부여하는 걸 보면 저도 참 어이없긴 하네요. 누구나 부를 수 있는 그런 애칭인데 말이에요.”


“의미부여할만 하죠. 한 사람만 불러준 애칭이니. 제 애칭 같은 경우에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본명으로 알고 있어서 의미부여할 필요가 없지만요.”

“아, 그러고 보니 ‘란’이라는 이름은 애칭이네요. 그리고 태자 저하의 애칭은 아마 ‘룬’이었죠? 신기하네요. 마치 짠 것처럼 애칭이 비슷하니 말이에요.”


“우연의 일치였죠. 아, 하지만 형님의 경우에는 본래 이름이 룬이었어요. 후에 제 아버지께서 다시 왕족에 어울릴만한 이름을 다시 지어준 거예요.”


“아.”


샤를리즈가 새삼 놀랐다는 듯 탄성을 지르자 란이 뭐냐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샤를리즈는 신기하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태자 저하를 형님이라고 칭하니까 이제 좀 진짜 왕자님 같아서요. 여태까지는 그냥 왕자인가보다, 라고 생각했다면 지금은 ‘진짜 왕자네.’라고 느꼈어요. 그렇게 생각하니 제가 좀 경솔했군요. 지금부터라도 란 씨라고 부르지 말고 저하라고 불러야 하는 게 맞겠죠?”


“그럴 것까지야. 그냥 나중에 프랜시스같은 귀족들 앞에서는 그렇게 부르는 게 당신을 위해서라도 좋겠지만, 이렇게 둘이 있을 때나.... 아니면 시릴과 함께 있을 때 정도는 괜찮아요. 오히려 저하라고 부르면 제가 어색할 것 같네요.”


“흠. 뭐,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사실 시릴은 당신한테 저하라고 꼬박꼬박 말하는데 전 그러지 않으니까 시릴이 조금 절 견제하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그게 사실 재미도 있었고요. 제 삶의 소소한 낙이 사라지진 않겠네요. 당신한테만 말하는 거지만, 솔직히 성질로는 시릴에게 밀리는 느낌이 들어서요.”


“당신이 시릴에게 밀린다고요? 그건 좀 의외인데.”


란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하자 샤를리즈는 자신도 밝히기 좀 그렇다는 듯 짜증스럽게 말했다.


“말싸움에서 진다는 뜻은 아니에요. 그냥... 제 주변에는 항상 나름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들만 있었는데, 막상 저보다 비슷하거나 혹은 그 이상인 불같은 성격이 옆에 있으니까 적응이 되질 않아서 밀린다는 뜻이에요. 최종적으로 항상 싸움의 끝은 제가 결정하니까.”


“그거야 당신은 아쉬울 게 없는 사람이고, 시릴은 아쉬울 게 있는 사람이니까 그런 거 아닌가요?”


“그렇게 생각하면 그런 거겠죠.”


샤를리즈는 차마 인정하기는 싫지만 그렇게 말하니 어쩔 수 없이 인정한다는 듯, 꽤 힘겹게 대답했다. 그에 란은 피식 웃고는 책으로 눈을 돌린다. 자신이 곤란한 말을 했으니 슬슬 공격할 때가 되었는데, 라고 생각하는데 샤를리즈가 톡 쏘듯 말했다.


“그래, 요즘 약혼녀분과는 잘 지내시나요?”


생각지도 못한 공격에 란은 어설프게 웃었다. 그러나 영 표정관리가 되지 않는지 이내 표정을 굳히고는 입을 연다.


“갑자기 왜 그리로 불똥이 튀는지 모르겠네요.”


“최근 만나 뵌 적이 있어서요. 프리실라 양, 귀엽죠? 우리 상단의 물건을 꽤 많이 팔아주셔서 어찌나 고마운지. 다음에 따로 뭔가를 챙겨드려야 하는데 혹시 그 분의 취향을 안다면 말해주세요. 취향에 맞지 않는 선물을 했다가 괜히 미움을 살 순 없으니.”


샤를리즈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듯 순진한 척 묻자 란은 그만 두라는 듯 손을 저었다.


“꼭 절 곤란하게 만들려고 작정을 하려면 프리실라 이야기를 꺼내더군요. 마치 뭔가 알고 있는 것처럼.”


“당신 취향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 정도는 알죠. 그리고 당신이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호의를 베풀지 않는다는 것도요. 이 두 가지 정도면, 당신 성질을 긁는데 프리실라 양만큼 효과적인 무기는 없다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죠.”


“흐음. 당신이 말한 것 중에 틀린 게 있는데, 프리실라는 엄밀히 말하자면 제 약혼녀는 아니에요.”


그 말에 샤를리즈는 설명해보라는 듯 란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란은 자신의 의자에 등을 잔뜩 기댄 뒤 말했다.


“혼담이 오가는 정도죠. 정식으로 약혼식을 한 것도 아닌데다가 성직자를 두고 약속을 한 것도 아니란 말이에요. 다만, 아무래도 상대가 프리실라이다 보니 다른 가문에서는 왕비 자리에 도전하지 않더군요. 누가 그라니언을 상대하려고 하겠어요?”


“당신 말대로라면 약혼은 하지 않았지만, 거의 확실히 약혼을 할 예정이고 결혼을 할 예정인 그런 관계라는 거네요.”


샤를리즈가 비꼬듯이 말했다. 그 말에 란은 졌다는 듯 한숨을 내쉰 채 양손을 들었다. 마치 항복이라도 하겠다는 듯. 그에 샤를리즈는 키득거리며 웃더니 이내 다시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려 그녀의 손에 가득 들린 종이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란은 이내 ‘시릴의 경고’를 잊은 채 입을 열었다.


“그런데 내 취향을 안다고요?”


“네?”


“아까 그랬잖아요. 프리실라가 내 취향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고.”


“그랬죠. 하지만 정확하게 알지는 않아요. 그냥 프리실라 양이 당신 취향이 아니라는 것만 추론적으로 알 뿐이지.”


“그래, 당신이 알고 있는 내 취향이 어떤데요?”


란의 물음에 샤를리즈는 무슨 의도로 묻느냐는 듯 란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란은 아무 뜻 없이, 정말로 궁금해서 그런다는 듯 어깨를 으쓱인다. 그러자 샤를리즈는 쥐고 있던 종이들을 마침내 책상 위에 올린 뒤 말했다.


“아무래도 오늘 이걸 다 읽긴 글렀네요. 누군가가 계속 방해를 해서. 아무튼 당신 취향 말이죠? 간단해요. 당신이 하는 행동들을 보면 알 수 있거든요. 가령 예를 들면, 당신은 가끔씩 자신과 대화가 통하지 않는 사람들을 조금 무시하는 경향이 있더군요. 그러니 적어도 대화는 통해야겠죠. 그런데 프리실라 양은, 제가 알고 있기로 그런 쪽으로는 영 거리가 머니까.”


“뭐, 맞추긴 했네요.”


란이 애써 인정한다는 듯 말하자 샤를리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샤를리즈가 물었다.


“그 외에 어떤 여성이 당신의 취향인데요? 말해 봐요. 난 많은 가문의 여자들을 알고 있어요. 혹시 알아요? 당신의 취향에 딱 맞는, 고위 가문의 여자를 알고 있을지.”


그 말에 란은 머뭇거리다가 이내 별 거 없다는 듯 말했다.


“그냥. 평범하죠. 당신이 말한 대로 대화가 좀 통했으면 좋겠고. 아, 이왕이면 같이 밤을 샐 정도로 토론할 수 있을 정도로 아는 게 많았으면 좋겠어요. 난 그런 걸 좋아하니까. 그리고 내게만 매달려있기 보다는 뭔가 독립적으로...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죠. 아마도 내가 왕위에 오르면 일이 바빠서 잘 챙겨주지 못할 테니까 그걸 이해해줄 수 있었으면 좋겠고. 그리고 내가 잠깐 수도를 비우면, 귀족들이나 자신의 가문에 휘둘리지 않고 수도를 지킬 수 있으면 더욱 좋겠네요. 그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져서 뒤처리하는 건 좀 힘든 일이 될 테니까. 그러려면 제 사람에게는 상냥하되 적이라고 생각되는 자에게는 피도 눈물도 없어야겠군요. 이쯤이면 대충 알겠죠? 내가 평범하고 상냥한 왕비감을 찾는 건 아니라는 거.”


“네. 그리고 그러한 자질을 갖춘, '미인'을 찾으실 테니 절대 평범하진 않네요.”


샤를리즈는 상상만 해도 한숨이 나온다는 듯 말했다. 그러자 란은 깜빡했다는 듯 말했다.


“대신, 성격은 그렇게 착할 필요는 없어요. 물론, 나한테도. 그 정도는 참을 수 있죠. 오히려 다혈질이면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하네요. 물론, 시릴만큼 다혈질이면 곤란하겠지만.”


“시릴 같은 다혈질의 왕비는 끔찍하죠.”


샤를리즈는 상상도 하기 싫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란이 조금 기대한다는 듯 물었다.


“그래서 있습니까? 당신이 아는 사람 중에.”


그에 샤를리즈는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런 여자는 세상에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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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4 14.01.15 786 30 12쪽
190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4 14.01.11 897 25 9쪽
189 제 15막. 협상 테이블. +4 14.01.06 822 24 12쪽
188 제 15막. 협상 테이블. +5 14.01.01 1,037 25 10쪽
187 제 15막. 협상 테이블. +7 14.01.01 1,081 26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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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 제 15막. 협상 테이블. +4 13.12.24 711 25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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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 제 15막. 협상 테이블. +3 13.12.11 739 18 10쪽
182 제 15막. 협상 테이블. +5 13.12.08 974 26 9쪽
181 제 15막. 협상 테이블. +3 13.12.05 1,061 29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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