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흑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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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
작품등록일 :
2012.11.17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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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09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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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2.27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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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제 15막. 협상 테이블.

DUMMY

“하.”


샤를리즈가 저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그리고는 곧바로 웃음을 터뜨렸다.

놀라움과 당황스러움이 섞인 그 웃음소리는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샤를리즈는 조금 느슨해진 자신의 머리끈을 푼 뒤, 다시 묶으며 말했다.


“물론, 상단 소속 병사들은 제법 되요. 특히나 위험지대를 가야하는 병사들 같은 경우에는 웬만한 군인들보다 훨씬 더 뛰어나다고 자부할 수 있죠. 아마 당신이 원하는 만큼의 수는 충분히 되리라 생각해요. 하지만 그들을 빼내기는 힘들어요. 그랬다간 우리도 거래에 타격이 생기니까. 적어도 그들을 빼내면 대체 인력들이 필요한데, 그게 또 소모적인 일이에요. 제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겠죠?”


“그만한 대가를 치를 만한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뜻이겠죠.”


란이 뭘 당연한 것을 묻느냐는 듯 답하자 샤를리즈는 피식 웃는다. 역시 대화는 통하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면, 일일이 다 말해줘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


보통은 아닌, 아니 어쩌면 자신보다도 더 넓은 시야를 가진 이라는 것은 틀림없었다. 스스로를 위해 변명하자면, 자신은 상단을 운영하는 사람이었기에 란보다 더 넓은 시야는 필요하지 않았지만. 샤를리즈는 애써 그 생각을 지우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런데 궁금한 것이 있어요. 당신은 귀족들을 견제하기 위한 당신만의 군대를 만들고 싶다고 했죠. 그렇다면 우리가 나중에 그걸 빌미로 당신에게 뭔가 계속 요구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나요? 당신도 알다시피 사람의 욕심이란 끝이 없잖아요. 설마하니 당신을 믿는다는 둥과 같은 이유일 것 같지는 않고.”


샤를리즈가 마치 결코 듣지 못할, 우스운 말이라도 하듯 웃으며 말했고, 란 또한 동의한다는 듯 웃었다. 그런 허무맹랑한, 삼류 로맨스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는 둘에게 어울리지 않았으니까. 아마도 더 그럴 듯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샤를리즈는 그 이유가 짐작이 가지 않았기에 그것이 궁금했다. 란 또한 샤를리즈가 그 이유에 대해서 물을지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인지 적절한 단어를 고르기라도 하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입을 열었다.


“당신은 귀족이 아니라 상인이니까. 그리고 내가 판단하건데, 당신은 귀족이 될 생각이 없는 상인이니까. 그러니 당신은 거래가 끝나면 곧장 당신의 자리로 돌아가겠죠. 우리는 서로 원하는 것을 얻게 될 것이고, 그 끝은 아주 깨끗할 거예요. 그래서 당신을 선택한 거죠.”


그 말에 샤를리즈는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어떻게 저렇게 판단할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이 귀족이 될 생각이 없다고 어떻게? 샤를리즈의 표정과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일까? 란은 턱을 괴며 말했다.


“당신이 나를 관찰한 만큼 나도 당신을 관찰해왔어요. 물론, 당신은 내 정체를 알고서 접근을 했을 테니 당신만큼 자세히는 관찰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당신이라는 개인과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상단의 총수를 따로 관찰해왔고, 그 결과를 종합해보면 쉽게 알 수 있는 거예요. 평범한 사람이 부를 얻게 되면, 명예와 권력을 갖고 싶어 하게 되고, 결국 어디 촌구석에 박혀 있는 귀족 집안의 이름을 사게 되죠. 어느 나라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란이 숨을 들이쉰 뒤 말을 이었다.


“자, 여기 우리 왕국 역사상 유래 없는, 강력한 상단의 주인이 있군요. 하지만 그 혹은 그녀는 자신의 얼굴도 이름도 알리지 않은 채 조용히 칩거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 건지 사람들은 생각하기 시작하죠. 첫째, 몰락하거나 혹은 왕가의 눈밖에 벗어난 귀족 가문의 자제가 아닐까? 일리 있는 주장이죠. 둘째, 끔찍한 화상이 있거나 혹은 괴물일 것이다. 이건 좀 믿기 어렵군요. 적어도 얼굴을 가릴 수 있고, 이름까지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하니. 셋째, 아주 먼 옛날부터 내려오는 전설처럼 사람이 아닌 다른 무언가일 것이다. 뭐, 당신이나 나나 그런 신화는 믿지 않으니 이 가정도 넘어갑시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듯 난 첫 번째 가정이 가장 그럴듯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내 정체를 알게 되었죠.”


“맞아요. 그래서 전 생각했죠. 여성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정체를 숨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여기서 두 가지 의문점이 생기더군요. 첫째, 당신은 공식적으로 작가 활동을 하고 있단 말입니다. 비록 이 나라는 이제 여성이 사회적인 활동을 하기엔 너무 큰 제약을 가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말이에요. 그리고 당신은 그렇게 될 수 있었던 이유를 그라니언 가문의 비호를 받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죠. 그런 당신이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정체를 숨길 것 같지는 않았어요.”


“작가와는 달리 상단의 주인이라는 건 좀 더 문제가 될 만한 위치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아무리 내가 그라니언의 비호를 받고 있다고는 하나, 왕가의 인장을 받은 단 하나의 상단의 주인이라면 그라니언도 날 보호해주진 못할 거라고요.”


“그럴 수도 있겠죠. 그렇게 대답을 할 거라면 두 번째 의문점에도 대답해 보세요. 만약 당신이 권력욕이 있는 야심가라고 가정합시다. 그리고 당신은 어마어마한 재력을 가지고 있죠. 그런 당신에게 귀족이 되는 방법은 아주 쉽다고요. 아마도 남성보다도 더 쉬울 겁니다. 남성이라면 한미한 가문의 주인밖에 되지 못할 테지만, 재력이 있는 여성은 재정난에 허덕이는 이름 있는 가문의 안주인이 될 수 있으니. 비록 다른 귀족들에게 인정은 받지 못할지도 모르겠지만 그게 당신에게 문제가 될 것 같진 않군요. 당신은 지참금을 지불하고 나서도 돈이 남을 테니까. 그러니 충분히 당신의 아군을 살 수 있겠죠. 아닙니까?”


그 말에 샤를리즈는 입을 다문 채 란을 바라보았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으니까. 실제로 그녀는 버릇처럼 에단에게 ‘백작부인정도는 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곤 했었다. 샤를리즈는 조금씩 구석으로 몰리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이대로 계속 가다간, 그럴 리는 없겠지만 란이 자신의 진정한 출신에 대해 알게 될지도 모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남을 다그칠 때, 남들도 이렇게 느꼈을까? 이런 조마조마한 불안감을?


“이 두 가지 의문점을 해결할 수 있는 답은 한 가지입니다.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당신은 귀족이 될 생각이 없다는 거죠. 솔직히 말하면 왜인지 궁금합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가끔씩 정말로 귀족적이니까. 긍정적인 의미로요. 그런 재능을 썩힐 타입은 아닌 것 같은데 어째서 귀족이 될 생각이 없는지. 당신만의 사정이 있겠죠. 궁금하지만 굳이 캐내지는 않을 겁니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귀족이 될 생각이 없고, 그렇기 때문에 당신과 나의 거래는 아주 깔끔하게 끝날 것이라는 거죠.”


그 말에 샤를리즈는 고개를 숙인 뒤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모두가 행복해지는 결말이라는 거군요.”


“그런 셈이죠.”


“하지만 그를 위해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는 건 알고 있겠죠?”


“물론. 이 거래에 있어서 우리는 동등한 직위를 가진다는 것. 내가 왕족이라는 것이나 당신이 평민이라는 그런 규칙은 이 거래에 통하지 않을 겁니다.”


란이 제법 단호하게 말하자 샤를리즈는 만족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강조하듯, 샤를리즈가 말했다.


“맞아요. 당신 말대로 나는 당신에게 내가 바라는 대가 그 이상을 요구하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당신도 약속해야만 할 거예요. 당신이 오늘 이 순간 말한, 당신이 원하는 것 이외에 내게 요구할 수 없다는 걸 말이에요. 우리에게 충성을 요구할 수 없다는 거예요.”


그에 란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그런 건 절대 요구하지 않을 거예요.”







* * *







오랜만에 방문한 스웨어 가문의 저택은 여전히 조용했다. 바람에 진동하는 나뭇잎 소리가 아니었다면, 정말로 너무 조용해서 자신도 모르게 잠들고 말았을 것이라고 에드리안은 생각했다. 그리고 간간히 들려오는 새들의 노래는 자장가처럼 아늑하고 포근하게 느껴져 마치 이곳이야말로 진짜 자신의 저택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었다.


물론, 저택의 모든 곳이 이렇게 조용한 것은 아니었다. 스웨어 가문의 주인은 자신의 아버지와는 달리 시끌벅적한 것을 좋아했으니까. 다만, 그 딸인 리제이나 드 스웨어는 자신의 아버지만큼이나 시끄러운 것을 싫어해서 따로 별채를 만들어야만 했다고 들었다.


그리고 이 별채만큼은 그라니언 가문의 저택만큼이나 조용했다. 그렇게 조용한 가운데 갑자기 어디선가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자신의 뒤로 누군가가 빠르게 다가와 끌어안았다.


“왁!”


에드리안의 시야에는 가늘고 하얀 팔밖에 보이지 않았던지라 적잖이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에드리안은 엘루이즈나 에단처럼 무예에 능통하지 않았고, 그랬기에 누군가가 뒤에서 갑자기 이런 식으로 덮치면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곧 그 팔의 주인공이 누군지 깨달은 에드리안은 눈을 깜빡이고는 입을 열었다.


“제인?”


에드리안의 부름에 에드리안을 끌어안고 있던 하얀 팔이 풀어졌고, 이내 제인이 그의 앞에 섰다. 항상 봐왔던 제인과는 다른 모습이다. 자유롭게 풀고 다니던 백금빛 머리칼은 여느 귀족 가문의 아가씨 못지않게 단정했고, 요즘 유행하는 머리핀도 꽂혀 있었다.


거기다 어디서 구해온 것인지 모를, 평민들이나 입을 법한 원피스가 아닌, 격식에 맞는 드레스를 입고 있다. 그 모습이 낯설어 에드리안은 어색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지?”


“응.”


고개를 끄덕인 제인은 무언가를 기대하기라도 하는 것인지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에드리안을 올려다본다. 무엇을 기대하는지 알 턱이 없는 에드리안은 여전히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엘루이즈가 그러더라. 요즘에는 말도 퍽 잘한다고. 나한테 고마워하던데 내가 한 게 없어서...”


“그거 말고.”


“어?”


“리안. 변했어, 나.”


요즘에는 말도 잘한다는 엘루이즈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항상 모호하게 말하던 제인이 아닌가? 이 정도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거기다 어디에 눈을 둬야 할지 모를 옷매무새까지도. 그래서 에드리안은 제인이 ‘나 어때?’라고 말한 것이나 다름없는 그 말에 멍청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네.”


그 간결한 대답에 제인의 초롱초롱한 눈빛은 순식간에 꺼졌고, 이내 특유한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머리를 예쁘게 고정하고 있던 핀을 빼 땅바닥에 던진다. 갑작스러운 반응에 에드리안은 머리핀을 주어든다.


그 사이 무슨 심경 변화가 있었던 것인지 제인은 홱 고개를 돌려 자신의 연못으로 걸어간다. 이유를 알 턱이 없는 에드리안은 당황한 표정으로 제인을 쫓아간다.


“제인! 갑자기 왜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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