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흑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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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
작품등록일 :
2012.11.17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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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2.08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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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제 15막. 협상 테이블.

DUMMY

시릴과 란의 시선이 공중에서 마주쳤다. 먼저 눈을 피한 시릴은 뭐가 문제냐는 듯 고개를 끄덕인 뒤 말했다.


“예, 리즈요. 걔 이름이 네 음절이나 되잖아요. 비경제적이죠.”


시릴의 괴상한 논리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인지 란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는 다시 무관심한 표정으로 돌아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다시 책을 바라보았다. 그가 다음 장을 넘기면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많이 친해졌나보군. 처음에는 잡아먹을 것처럼 싫어하더니 말이야.”


그 말에 시릴은 무어라 말을 하려다 이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이내 인상을 살짝 찌푸리고는 그의 앞에 놓인 종이들을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마치 주제는 정해져있는데 그 주변만 맴도는 대화. 그리고 어딘가 모르게 갑자기 까칠해진 란의 태도.


시릴은 샤를리즈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들을 접했다. 특히 그는 낭만을 아는 대학생들과 자주 친하게 지냈었지. 시릴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애를 굳이 싫어할 이유도 없어졌습니다. 걔가 우리 상단을 거의 먹은 건 사실이지만, 그 덕분에 우리 상단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으니까요. 제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할 수 없었던 걸 걔는 쉽게 해냈어요. 물론, 그 만한 자본이 있었고 제가 실패했던 건 걔의 견제가 있어서였기도 했지만. 아무튼 리즈, 그 계집애는 능력이 있단 말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지 않은 능력이요. 그리고 결과적으로 저는 빚을 진 셈이 되었고요.”


시릴은 숨을 조금 삼켰다. 그리고는 마치 모험수를 두는 것처럼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고마운 일이죠.”


얇은 실을 양손으로 가득 잡아당긴 것만 같은 긴장감이 흘렀다. 둘은 서로를 의식하지 않는다는 듯 각자의 손에 쥐고 있는 책과 종이뭉치들을 바라보고 있었으나, 그 누구보다도 서로를 의식하고 있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란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군. 하긴, 그럴 만도 하지. 게다가 같이 계속 있으면...”


“아뇨.”


시릴이 란의 말을 끊는 것은 아주 이례적인 일이었기에 란은 고개를 들어 시릴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불쾌함이 아닌 놀라움에서였다. 순수한 놀라움. 그리고 마치 자신이 실수라도 한 것이 아닐까 싶은 불안감 또한 섞여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는 듯 시릴은 란의 눈동자를 직시하며 말했다.


“제 인생에 여자는 한 명으로 족했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는 1년 전에 죽었고요. 그러니 저하께서 생각하시는 그런 거 절대 아닙니다. 그리고 그럴 일도 없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걱정하지 마라니 뭘 말인가?”


“아까부터 신경 쓰고 있지 않습니까? 아니라고 말하실 수 있습니까?”


시릴의 조금 공격적인 어투에 란은 입을 다물었다. 그것이 그가 시릴을 곁에 두는 이유였으니까. 란의 주변사람들과는 달리 시릴은 아니다 싶은 것이 있거나, 혹은 불쾌한 것이 있다면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한다.


항상 떠받들어 모셔진 란에게는 그런 것들이 익숙하지 않아 가끔 저도 모르게 방어적으로 불쾌할 때도 있었지만, 그것을 내색하지는 않는다. 그가 왕위에 오르면 저것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한 일이 일어나진 않을 테니까.


그리고 최종적으로 시릴이 저렇게 표현하는 것은 결국 그를 위해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까. 란은 그제야 애써 부정하고 있던 그의 마음을 인정이라도 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분명 머리는 일에 집중하고 있는데 정신의 일부는 다른 데 가있어. 자네 말이 맞아. 신경 쓰여. 그라니언의 저택에서 내 정체를 그녀가 말했을 때부터였던 것 같군. 아니, 그 전이었나? 아무튼 자네를 기분 나쁘게 하려던 건 아니었어. 미안하네. 나도 내가 뭘 원해서 그렇게 자네에게 짜증나게 굴었는지 모르겠어.”


란이 짜증난다는 듯 중얼거리자 시릴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상할 일도 아니죠. 성질이 더러워서 그렇지 그 정도면 미인이고, 능력도 있으니까요. 게다가 저하의 앞에서 못됐게 굴었을 리는 없었을 테고, 대화도 통했겠지요. 저하께서 만난 여자들이야 뻔하고, 그 중 가장 가까이 지냈다는 그라니언 가문의 여식은 저하의 성에 차질 않았을 테니. 자신과 대화가 통하는 여성을 만나기란 어려운 일이죠. 특히 요즘 시대에는 말입니다.”


“마치 당연한 자연현상이고, 그것이 오래 지속되지는 않을 것처럼 이야기하는군.”


란이 힘이 빠진다는 듯 웃었다. 그러나 시릴은 하나도 웃기지 않는다는 듯 조금 인상을 굳힌 채 말했다.


“그래야죠.”


“그래야 한다니? 아, 설마하니 내가 그런 감정 때문에 대사를 그르칠 것이라고 생각하나? 그런 걱정은 하지도 말게. 만약 그랬다면 내가 먼저 거리를 둘 거야. 지금도 최대한 그녀를 언급하려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지 않나? 나도 잘 알아. 이 일을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하고 있는지. 그들을 위해서라도 나는 절대 그러지 않을 거니, 걱정하지 말게. 여느 전설에나 나오는 멍청이들처럼 고작 한 사람 때문에 대의를 그르치지는 않을 거야.”


“압니다. 만약 저하께서 그런 사람이었다면 진즉에 저하의 옆을 떠났을 겁니다. 저하는 그럴 사람이 아니죠. 믿습니다.”


그 말에 란은 기분이 좋았는지 어깨를 으쓱이고는 물었다.


“고맙네. 헌데, 자네가 나를 믿는다면 왜 그렇게 말했나?”


“솔직히 말하자면 저하를 걱정한 것이 아니라 리즈, 그 계집애를 걱정한 겁니다.”


“샤를리즈 양을?”


“예. 그 재능이 아깝지 않습니까? 왕의 정부로 살다 가기엔.”


시릴의 청록빛 눈동자가 매섭게 란을 노려보았다. 마치 ‘당신의 옆에 있으면 그 애는 죽어.’라고 말하듯. 그리고 그것이 마치 상처를 후벼 파내듯, 저릿한 통증으로 다가왔다. 란은 제 짙푸른 눈동자를 애써 돌리며 말했다.


“그렇게 만들 생각은 결코 없었네.”


“생각도 해보지 않으셨겠지요. 지금은 신경이 쓰이는 정도일 테니까요. 하지만 저는 잘 압니다. 그 감정이 얼마나 빠르게 변할지 말이죠. 곧 저하께서는 저하의 이성이 어떻게 막아설 수 없을 정도로 그 애를 생각하게 될 겁니다. 운이 좋으면 이뤄질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애를 왕비로 맞이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 동화책에서나 나올법한 이야기,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는 통하지를 않죠. 안 그렇습니까? 특히 저하께서는 더욱이 안 되시죠.”


시릴의 말은 옳았다. 애초에 동화 속의 세상은 그들에게 일어날 일이 없다는 것 말이다. 그리고 아주 특별한 경우에는 일어날 수도 있겠지만, 란에게는 결코 일어날 수 없다는 것도 옳았다. 본래 자리에 앉아있는 왕을 밀어내고 왕위에 올라야 하는 란이다.


그러니 그의 편에 섰던 귀족들에게 적절한 보상을 내려야 할 것이고, 그 중 가장 훌륭한 보상 중 하나가 결혼이겠지. 그라니언 공작이야 프리실라와의 혼사가 틀어져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평민인 여자를 왕비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은 아니었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다른 귀족들이 반대할 것이다.


당장 프랜시스만 하더라도 자신의 동생들이 훨씬 나을 것이라고 반발하고 나설 것이다. 그 수많은 귀족들의 반대를 물리칠 힘은 없다. 시릴은 그것을 깨우친 란에게 말했다.


“결국 비극입니다, 저하께는. 이루어지지 않아도, 이루어져도 말입니다. 그럴 거라면 한 사람이라도 행복한 결말이 낫겠죠.”


시릴은 자신의 손목시게를 슬쩍 보고는 자신이 가져온 종이뭉치들을 다시 가방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퍼뜩 정신이 들었는지 란은 그것을 바라보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는 가끔씩 내게 너무 잔인할 때가 있어.”


“신경 쓰이는 시점에서 관두시길 바라서 그런 겁니다. 못됐게 말한 것 같으면 용서해주시죠. 다 저하를 위해서 하는 말입니다. 경험에서 하는 말이에요.”


“...아까 죽었다는 그 여자를 말하는 건가? 자네 때문에 죽은 거였어?”


“그럴 리가요. 전 그 정도 신분이 못됩니다.”


종이뭉치를 가방에 다 집어넣은 시릴은 짧게 한숨을 내쉰 뒤 말했다.


“그 여자가 결코 자신이 바라봐서는 안 될 가문의 남자와 혼인을 하려다 죽었습니다. 그 전에 제가 그 여자를 꾀어냈다면 죽지 않았겠죠. 그게 후회되긴 하네요.”


“그렇군.”


“곧 리즈 그 계집애가 오지요? 낮에 보니까 잔뜩 신이 나 있던데. 물론, 저하께 뭔가 뜯어먹을게 있나 싶어서 말이에요.”


“그 여자답군.”


란이 웃으면서 말하자 시릴은 뭘 새삼스럽게 말하느냐고 하는 듯 입술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뭔가 번뜩 생각났다는 듯 란에게 말했다.


“아, 그리고 아까 제가 리즈 걔를 생각해서 했다는 말은, 혹시나 하더라도 걔한테 말하지 마세요.”


“그럴 일은 없겠지만 왜 그러나?”


“그걸 알고 걔가 깐족거릴 걸 생각하면 재수 없어서요.”


시릴이 진심으로 짜증난다는 듯 말하자 란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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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 여러 시선. +8 14.03.09 1,007 33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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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4 14.02.19 603 21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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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4 14.01.15 785 30 12쪽
190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4 14.01.11 896 25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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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 제 15막. 협상 테이블. +5 14.01.01 1,036 25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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