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계물의 정석, 주인공은 적응한다
평온한 시간은 화살처럼 지나간다.
나는 조금씩 밝게 지내는 척을 했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테베에게 보이던 쭈뼛거리는 태도를 비우고 친애의 태도로 채운다.
공포와 불신으로 가득한 눈동자를 비우고 신뢰와 안정으로 채운다.
나로서는 지금이 더 힘들다.
내가 그리 겪어보지 못한 감정들이기 때문에.
나는 카이델과도 썩 나쁘지 않게 지냈다.
가끔 카이델의 목소리가 커지거나 태도가 조금이라도 거칠어지면
괜스레 두려워 떠는 척을 한 번씩 해 주었다.
그러면 카이델은 스스로 자중했다.
뭐, 그도 그렇겠지.
카이델은 나와의 첫 만남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
그것을 자극하는 것에는 의외로 죄악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음.
뭐, 그도 그렇겠지.
나는 카이델에게 여러모로 당한 게 많으니까.
어딘지 남 일처럼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 실감이 나지 않는다.
어릴 때부터 학대받았던 나로서는 내 감정을 읽는 것이 너무나 힘들다.
차라리 남들의 감정을 읽기가 훨씬 쉽다.
학대받는 아이는 주변의 눈치를 보느라 자신을 살필 겨를이 없어진다.
그렇기에 남과 접하는 방법은 모르는 주제에 남의 눈치는 잘 본다.
그것이 얼마나 나 자신을 상처입히는 일인지 잘 알면서도.
“후···.”
유일하게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
목욕 시간만이 지금의 내게 주어진 작은 자유시간이다.
처음에 시녀를 붙여주려 할 때 나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그녀가 내게 두려움의 감정을 보이거나 내 몸에 닿거나 할 때마다 소리를 질러댔다.
물론 일부러다.
그게 몇 번 반복되자 시녀는 내 시중을 들기를 거부했다.
거부했다기보다 난감해했다.
내 예상대로 테베는 있는 그대로 카이델에게 보고했다.
사람의 마음은 왕이라 한들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녀가 두려움을 품고 있는 것을 카이델이 명령한다 한들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그리고 카이델은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왕이다.
카이델은 내 목욕시중을 드는 시녀를 모두 물렸다.
그리고 내 방에 있는 시녀도 모두 물렸다.
대신 내 방에 있는 종을 시녀들의 방과 연결하여 필요할 때마다 부를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렇게 되니 자연히 데바인과도 멀어지게 되었다.
그리 오래지 않은 이세계 생활이지만 그동안 나름대로 데바인에게 의지하고 있었던 걸까.
잔소리쟁이에 이중인격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없으니 없는 대로 쓸쓸했다.
그 빈자리를 채워주는 것이 테베였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아샤님.”
아침에 일어나 부스럭거리며 인기척을 내면 10분 정도 후에 문을 두드린다.
본래라면 시녀가 시중을 들어주어야 하겠지만 내게는 시녀가 없다.
그래서 테베가 시녀가 해야 할 일까지 해주고 있었다.
시녀가 하는 일이라고 해도 별 건 없다.
옷은 잠옷이나 평상복같이 혼자서도 입을 수 있는 옷만 입고 있고,
목욕은 스스로 알아서 하고 있다.
필요한 것은 식사 시중과 차 시중 정도.
물론 나는 하루에 세 번 꼬박꼬박 식사를 했다.
하루에 두 번 꼬박꼬박 차도 마셨다.
그러면서 테베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에는 다소 딱딱하던 테베도 지금은 꽤 부드러운 미소를 보여주게 되었다.
내 신상 이야기를 들은 후에는 더 그런 것 같다.
이전의 나는 내 신상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
한 것은 내가 살던 세계에 관련된 이야기뿐.
하지만 이번에는 다소 다르다.
나는 이번에 다소 연약하고 섬세한 여자를 연기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여자에게는 꼭 과거가 있기 마련.
어지간한 과거를 지어내는 것보다 내가 겪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편이 효율이 좋다.
그렇게 판단했다.
“잘 잤나요, 로이스터 경?”
테베는 예상 이상으로 내 이야기에 집중해주었다.
어릴 적에 겪었던 학대.
그로 인한 트라우마.
그들에게서 벗어나면서 얻었던 자유.
그리고 자유를 누리던 중 생긴 갑작스러운 사고.
물론 사고란 이 세계에 오게 된 것을 말한다.
내기를 위해 이 세계에 왔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래서야 캐릭터 설정이 무너진다.
나는 어디까지나 소설을 읽고 있었을 뿐인데 정신 차려보니 이세계에 전이되어 있었던,
그냥 보통의 평범한 여자여야만 했다.
나는 은화가 했던 이야기를 거의 그대로 반복했다.
혼자 살던 생활 중 좋아하던 판타지 소설을 읽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책이 담긴 기계가 환하게 빛났다.
눈을 떠보니 나는 그 숲속에 있었다.
그리고 카이델과 만났다.
내 이야기가 끝났을 때 테베는 울고 있었다.
그는 두 주먹을 모아쥔 채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어째서일까.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나까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샤님은··· 정말 대단한 분이십니다.”
테베는 우는 채로 엷게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이 묘하게 예뻐서 나는 나도 모르게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테베는 말했다.
“저는, 부모님에게 충분히 사랑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샤님의 상황을 전혀 이해할 수 없고 공감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만약 제가 그런 상황이었다고 생각하면···.
저는 아마 견디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테베의 눈에서 흘러나오는 눈물은 겉보기에는 투명한 얼음방울 같았지만
몹시도 따스했다.
나는 그 눈물을 입으로 가져왔다.
왜였을까.
그 따스함을 나눠 받고 싶었던 걸까.
그런 것은 이미 예전에 포기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멍하니 그 묘하게 짭짤한 액체를 입술로 맛보고 있었다.
테베는 그제야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부끄러운 듯 얼굴을 감추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례하겠습니다, 아샤님.”
나중에 되돌아온 그의 눈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차가워 보이는 외견과 달리 그는 의외로 마음이 따스하고 부드러웠다.
그 따스함에 위로받았다는 것을 절대 부정하진 않겠다.
하지만.
“아샤님, 오늘 아침 식사는 무엇으로 하시겠습니까?”
테베는 내게 부드러운 미소를 보였다.
그 모든 것은 작가가 쓴 대로.
테베는 작가가 만들어낸 가공의 인물이다.
그렇기에 테베에게서 아무리 위로받더라도 그건 소설 속 캐릭터의 말에 위로받는 것 같은,
간접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 아침에는 부드러운 게 먹고 싶네요.
그때 그 달걀로 한···.”
“아, 오믈렛 말씀이시군요.
알겠습니다.
차는 어떤 거로 하시겠습니까?”
“차는···.
음.
이 세계의 차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그 붉은 색의 꽃향기 같은 게 나던 차가 뭐였죠?”
“아, 헬로이나의 꽃차입니다.
그걸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테베는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연신이가 이불에서 얼굴을 쏙 내밀고 나를 바라보았다.
“잘 되고 있는 거야?”
“응?”
“항상 똑같은 일상의 반복인 것 같은데.”
“···그렇지.”
반복은 중요하다.
일상이 쌓인다는 것은 추억이, 기억이 쌓인다는 것.
연신이에게는 지루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게 쌓여야 나중에 사건이 생겼을 때 폭발력을 가진다.
이러한 사건들이 소설이나 만화 같은 데서는 꽤 자주 생략된다.
독자에게 임팩트를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며칠 후, 몇 달 후 등의 시간의 흐름에서 알 수 있다.
그 정도의 시간이 그들에게는 필요했던 것이다.
내가 성에 온 지 어느덧 이주.
시간은 더 쌓여야 할까?
아니면 이제 충분할까.
그 가늠이 지금의 나로서는 힘들다.
다만 나는 추측하고 있다.
주인공이 모든 것을 헤쳐나가야 하는 것은 맞지만 상황을 만드는 것은 작가다.
주인공은 작가가 깔아놓은 레일의 위에서 비틀거리던 똑바로 나아가던 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충분한 시간이 지나면 분명히 무언가 사건이 일어날 것이다.
내가 굳이 일으키지 않더라도.
하지만 이런 말을 연신이한테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나는 그저 웃으며 연신이의 머리를 손끝으로 간질였다.
“아, 뭐야!
요즘 나랑 왜 이야기를 많이 안 하는 건데!
예전에는 다 알려주더니!”
그랬던가?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글쎄···.
이제 확실히 중심을 잡기로 한 이상 흔들릴 요소는 최대한 배제하고 싶다.
연신이의 깐죽거림은 그냥 흘려 넘길 수 있는 정도긴 하지만
아주 가끔 흘려넘길 수 없을 정도로 정곡을 찌를 때가 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이야기하지 않으면 된다.
요즘의 나는 그런 생각을 하는 듯하다.
“글쎄?
내가 그랬던가?
그것보다 얼른 일어나.
이제 곧 테베가 식사를 가져올 테니까.”
“에휴, 걔도 고생한다.
어쩌다 너 같은 게 여주인공이 돼서
왕의 수호기사씩이나 되는 놈이 너 같은 거의 밥이나 갖다 나르고 있냐.”
너 같은 거.
흠.
자주 들었던 말이다.
평소라면 웃어넘겼을지 모르지만···.
아니, 아마 이 말만은 평소라도 웃어넘기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들이 나에게 가장 많이 했던 말 중 하나가 그거였다.
“너 같은 게 어쩌다가 태어나서···!”
“너만 아니었으면 내 인생이 이렇게 떨어지진 않았을 텐데.”
“너 같은 게 생기지만 않았어도!”
어릴 때의 나는 그들에게 빌었다.
미안하다고.
초등학생 때의 어느 날, 나는 조금 반항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말했다.
“태어나서 죄송해요.”
그녀는, 그는 충격받은 듯 보였다.
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저 사람들의 진짜 마음은 그렇지 않을지도 몰라.
사실은 나를 사랑하고 있는 건지도 몰라.
만약 그렇다면···.
하지만 그들은 악마였다.
희망을 준 후 그 뿌리까지 뽑아내 버린다.
다시는 피어날 수 없도록.
“알아?
알면 나가 죽어!”
“요즘 애들 가출도 잘 한다던데, 저건 어쩜 나가지도 않아.”
나는 다시 한번 깨달았다.
나는 그들에게 있어서 아무것도 아님을.
정말로 태어나지 않았어야 했음을.
“뭘 그렇게 무서운 얼굴로 생각해?”
연신이가 내 눈 바로 앞에서 파닥거리고 있었다.
생각에 잠겨 보이지 않던 것이 갑자기 보이자 나도 모르게 흠칫 놀라서 물러났다.
연신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귀신이라.
그런 것은 무섭지 않다.
그런 것은 나를 해칠 수 없으니까.
진짜 무서운 것은 사람이다.
“아무것도 아냐.
밥 먹자.”
나는 화장실로 향했다.
테베가 오기 전에 얼굴을 씻어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얼굴의 식은땀과 함께 이 기억도 씻겨 내려가면 좋을 텐데···.
*********
나는 멍하니 화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처음 봤다는 것처럼.
그 규모에 압도당했다는 것처럼.
카이델은 그런 나를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마음에 드는가?”
“네, 폐하.
너무 아름다워요.”
나는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아아.
이런 거 성격이랑 진짜 안 맞는데···.
게임 선택지를 고른다고 생각하고 하자.
응.
“틀림없이 그대가 좋아할 것이라 생각했다.
이 정원은 우리나라의 자랑 중 하나이니 말이다.”
카이델이 드물게도 환하게 웃었다.
내가 좋은 반응을 보이는 것이 어지간히 기쁜 모양이었다.
테베는 카이델의 뒤에 서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내게 엷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는 가볍게 눈인사를 한 후 카이델에게 시선을 돌렸다.
테베는 집착이 심하지 않지만, 카이델은 다르다.
카이델 앞에서 테베와 그런 분위기가 조금이라도 풍기면 곧바로 문제가 생길 거다.
내가 왜 시녀의 시중도 모두 물렸는데.
지난번에 느낀 거지만 시녀들의 입은 싸다.
그녀들에게 나를 모함할 의도가 있었든 없었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카이델의 상상을 부추기기에 그녀들의 수다는 너무나 위험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없으면 된다.
테베와의 시간을 보는 이가 없으면 별문제가 없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다른 이들을 보면 바들바들 떠는 척을 했다.
“폐하께서 자랑하시기에 충분하다고 생각됩니다.”
나의 눈에 문득 화향화가 들어왔다.
카이델이 가장 사랑하는 꽃.
전장의 색.
내 시선이 잠시 화향화에 머무르자 카이델의 시선이 따라왔다.
카이델은 잠시 붉은 꽃을 바라보더니 나를 보며 웃었다.
“저 꽃이 마음에 드는가?”
···.
뭐, 하얀 꽃을 좋아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화아사.
지금 여기 있는 것은 아샤다.
나는 내가 설정한 아샤로서의 대답을 꺼냈다.
“네, 아름답습니다.
마치 타오르는 불꽃 같은 색이네요.”
카이델이 만족한 듯 웃었다.
그리고 화단 쪽을 바라보았다.
“아, 마침 오는군.
그대에게 소개해줄 사람이 있네.”
소개해줄 사람···?
나는 카이델이 바라보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기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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