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정석, 주인공은 과거의 꿈을 꾼다
꿈을 꾸었다.
언젠가의 꿈.
나의 천사를 처음 만난 날의 꿈이다.
17살의 그 날.
나는 알고 있었다.
그 여자의 배 속에 아이가 들어있다는 것을.
그토록 치고받고 싸우기 바쁘던 둘이 어느 틈에 그런 짓을 해서 아이를 낳은 걸까.
그때의 나에게는 그저 역겹기만 했다.
당연히 그 아이도 처음에 달갑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혐오스러웠다.
전혀 사랑하지 않는 둘에게서 태어난 아이.
그 아이가 과연 어떤 아이로 자랄 것인가.
그것이 혐오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그 아이를 혐오한 것은 아니다.
그저 그 아이에게 비친 나를 혐오한 것일 뿐.
사랑 없는 행위 자체를 혐오한 것일 뿐.
그때의 나는 몰랐다.
그래서 그저 그 아이를 혐오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사랑 없는 행위의 결과물을.
“···.”
그 아이는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어디에 와있는지 모르는 것처럼.
아니, 그 어린아이가 뭘 알까.
그 아이는 당연히 몰랐을 것이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자신의 부모가 어떤 사람들인지.
자신이 지금 사람의 세상에서 겪을 수 있는 수많은 지옥 중 하나 속에 있다는 것을.
집에 가니 그 여자가 드러누워 있었다.
아이를 낳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병원에 간 적 없었다.
그녀가 병원에서 술을 먹고 난동을 부렸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몸을 이끌고 어찌 술을 샀을까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남자가 술을 사 들고 갔다고 한다.
자신이 먹을 생각으로라고 했지만,
그 남자가 술을 사 가면 그 여자가 안 마실 리 없었다.
그걸 알면서도 그는 사 간 것이다.
술이란 참으로 위대했다.
다른 산모들은 몸을 일으켜 앉는 것도 힘들다고 했는데
물건을 던지며 난동을 피우게 만들 힘을 주었으니.
그래서 나는 가지 않았다.
“···.”
아이는 참 이상하게 생겼었다.
그리고 유난히 작았다.
내가 아이를 잘 몰라서 그런 건가 싶었다.
하지만 아이가 크면 클수록 알 수 있었다.
그 아이는 이상했다.
유독 머리가 작았다.
광대뼈가 없었다.
뭔가 입술이 이상했다.
말이 이상할 정도로 느렸다.
어린이집의 다른 또래들을 보면 다 그 아이보다 컸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이 유창하게 말을 하기 시작할 무렵에도
그 아이는 간단한 말밖에 하지 못했다.
대부분은 언니, 엄마, 아빠였다.
그 외의 말은 거의 하지 않았다.
나중에 알았다.
그 아이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하지만 진짜로 문제가 있는 쪽은 어디일까.
그 아이는 처음부터 사랑이 넘치는 아이였다.
유독 사람을 좋아하고 따랐으며, 항상 웃는 아이였다.
말이 느려도 사람들을 잘 따랐다.
뭔가 이야기하려 노력했다.
대부분은 알아들을 수 없는 옹알이였지만.
나는 아이에게 문제가 있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버려 뒀다.
그 아이는 내게 있어 아무것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어니, 가? 아니야···.”
그 아이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떠나는 나를 붙잡고 눈물 가득한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물건 이름 하나 제대로 못 외워서 가져오지 못하던 그 아이가
뭘 안다고 날 붙잡았던 걸까.
그 날 나는 그 아이의 작은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달래지도 못했다.
그저 그 아이를 붙들고 울었다.
아이는 영문도 모르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덩달아 울었다.
그렇게 우리는 한참이나 울었다.
나는 그 아이였다.
그 아이는 나였다.
그리고 나는 다짐했다.
내가 사라지는 것을 슬퍼해 주는 사람이 있다.
내가 죽으면 슬퍼해 줄 사람이 있다.
그 아이가 있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그 아이를 지옥에서 꺼내주는 것.
설령 그것이 그 아이가 바라는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 아이가 지옥에 있다는 걸 알고 있는 나는···.
“···.”
눈을 떴다.
거기에는 가느다란 뒷모습이 있었다.
사람을 묘하게 따스하게 해주는 분위기를 휘감은 뒷모습.
아아.
그렇구나.
저건 슈피다.
아까 음악을 듣다가 잠들어버렸나.
하하.
바보 같네.
멍하니 앉아서 잠을 깨운다.
좀처럼 잠이 깨지 않는다.
으음.
대체 얼마나 오래 잔 거지.
“···슈펠리에?”
멍하니 슈피를 부른다.
슈피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 얼굴에는 검은색 물감이 묻어있었다.
아까 연신이를 그릴 때 묻었었나?
“일어나셨어요?”
“···미안해요.
내가 하모니카 연주해달라고 해놓고 잠들어버렸네요···.”
“괜찮아요.”
슈피는 엷게 웃었다.
나는 그런 슈피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가까이 다가갔다.
슈피는 움찔 몸을 뒤로 당겼다.
으음.
왜 도망가고 난리야.
나는 살짝 눈을 찌푸리고 슈피의 얼굴을 잡았다.
“아, 아샤님?”
“가만히 있어 봐요.”
으음.
어떻게 해야 지워질까.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손으로 쓱쓱 문질러 보았다.
다행히 오래된 건 아닌지 잘 지워졌다.
“···아, 됐어요.”
만족스럽다.
응.
나는 씩 웃고는 슈피에게서 멀어졌다.
슈피는 멍하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으음···.
···.
아.
나 지금 무슨 짓을 한 거래.
방금 내가 연출한 장면은 소위 그거다.
여자주인공이랑 남자주인공이 마치 키스할 듯 애매한 분위기를 풍겨놓고
실제로는 별거 안 하는 그런 거.
슈피 입장에서는 꽤 긴장됐을 것이다.
음.
미안하네.
“아, 미안해요.
얼굴에 검은 얼룩이 있어서···.”
“아, 아니, 감사합니다, 아샤님.”
슈피가 드물게도 말을 더듬었다.
아아.
긴장했겠지.
응.
나 같아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멍한 얼굴로 다가와서
가만히 있어 보라고 속삭이면···.
설레지, 응.
“지금 몇 시예요?”
“벌써 저녁때입니다.
식사하러 가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나는 연신이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으음.
내 근처에서 자고 있거나 꼬물거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어디 간 거야.
“아샤님의 새라면 저기에···.”
슈피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연신이는 멍하니 자신의 그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거의 숭배하는 눈빛이다.
자신을 그린 그림에 저렇게까지 하고 싶을까···.
하긴 내가 봐도 잘 그려졌다.
생생하면서도 미묘하게 실물보다 좀 더 귀엽게 그려졌으니까.
“가자.”
나는 연신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
뻘쭘하네.
나는 연신이를 톡톡 두드렸다.
여전히 반응이 없다.
오히려 귀찮다는 듯 몸을 옆으로 피해버렸다.
“···너 여기 있을 거야?”
연신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으음.
뭐, 알아서 잘 찾아오겠지.
“미안해요, 슈펠리에.
이 아이, 이 그림이 마음에 드나 봐요.
혹시 괜찮으면 내일 내가 올 때까지 맡아줄래요?”
“저는 상관없습니다만···.
이 아이가 괜찮을지요?”
“괜찮아요.
영리한 아이니까요.
가끔 혼자 창밖으로 날아갔다 오기도 해요.”
뭐, 그렇게 말해도 불안하겠지만.
보통의 새는 그렇게 머리가 좋지 않다.
머리가 작으니까.
자연물을 좋아하는 슈피니까 잘 알겠지만.
“잘 부탁할게요!
먹는 건 그냥 슈피가 먹는 거랑 똑같이 줘도 돼요.”
“하지만···.”
“그럼 갈게요!”
슈피가 뭐라고 하려는 걸 끊고 재빨리 밖으로 나왔다.
저녁때가 되었다더니 밖에는 석양이 가득했다.
저쪽으로 해가 지니까 저쪽이 서쪽이겠지?
으음.
“아샤님?”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으아.
사람 기척이 없었는데?!
조심스럽게 뒤를 돌아보자 거기엔 놀란 얼굴의 테베가 있었다.
엥?
테베가 왜 카이델 옆에 안 있고 여기 있지?
“아, 그···.”
“왜 여기에···.
이제 곧 저녁 시간입니다.”
“아하하.
조금 일이 있어서요.”
아.
망했다.
카이델한테 말하려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테베는 조용히 문을 열고 오두막 안으로 들어갔다.
기다리라고 해서 기다리면 말괄량이 캐릭터가 아니지.
응.
가자.
그런 생각으로 슬그머니 발을 옮겼다.
하지만 몇 발자국 옮기기도 전에 테베가 밖으로 나왔다.
“아샤님.”
···.
나는 얌전히 발을 멈췄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테베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세요?”
“모셔다드리겠습니다.”
···.
아니, 어색한데.
안 그래도 되는데?
나는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테베는 완강했다.
“아샤님.”
“ㄴ, 네?”
“아샤님께서는 폐하의 손님이십니다.
설마 그런 아샤님께 해를 가하는 사람이 있진 않겠지만
그래도 조심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마침 저랑 마주치셨으니 모셔다드리겠습니다.”
테베는 반론을 허가하지 않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단호하다.
단호박이다.
···.
이런 말장난을 할 때가 아니지.
어색한데.
그래도 계속 거절하면···.
“알았어요.”
나는 일단 수긍했다.
그리고 먼저 성을 향해 걸었다.
테베는 내 세 발자국 뒤에서 내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
“···.”
침묵이 감돈다.
어색하다.
테베랑 이렇게 어색한 건 오랜만이다.
어색하다.
으으.
어쩌지.
연신이도 없고.
할 것도 없고.
말할 것도 없고.
“꼬, 꽃이 참 예쁘네요.”
···.
으아아.
뭐야, 이거.
거의 오늘 날씨가 좋죠? 급 아냐?
근데 할 말이 이거밖에 없는데 어떡하라고!
“···아샤님은 꽃을 좋아하십니까?”
“으음.”
좋아하냐, 싫어하냐 로 나누면···.
굳이 말하면 좋아하지 않는다.
그나마 하얀 꽃을 좋아하는 편이다.
“좋아하진 않아요.
그래도 흰 꽃은 좋아해요.”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테베에게는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으니까.
아마 지금도 카이델의 명령으로 슈피를 만나러 왔을 것이다.
지난번 테베 공략 때를 생각해보면 슈피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 슈피랑 아는 사이는 아닐 것이다.
즉, 테베에게 하는 내 이야기가 슈피에게 들어갈 일은 없다.
“하얀 꽃···.”
테베는 뭔가 생각하는 듯 발걸음을 늦췄다.
괜히 신경 쓰여서 나도 같이 발걸음을 늦췄다.
그러자 테베가 내 앞을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에?”
테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뭐지.
따라오라는 건가.
그렇게 한참을 걸었다.
내 걸음에 맞춰주지 않는 테베의 걸음은 진짜 빨랐다.
아니, 잠깐.
왜 내가 테베를 얌전히 따라가고 있는 거지?
그냥 성으로 가면 되잖아?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얌전히 테베를 따르고 있었다.
왜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윽고 테베의 발이 멈췄다.
“···.”
거기에는 새하얀 꽃이 한가득 피어있었다.
이름을 모르는, 생긴 것도 처음 보는 그런 꽃들.
정말로 아름답다.
하얀 꽃은 좋다.
나와 다르게 순수하고 순진한 느낌이 들어서.
그 아이에게 잘 어울리는 꽃이다.
테베는 묘하게 흐뭇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뭘까.
왜 나를 여기로 데려왔을까.
이번의 테베랑은 첫날과 둘째 날 만난 이후로 처음 만난다.
공략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테베는 나를 여기로 데려왔을까.
“왜··· 여길?”
“···모르겠습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테베가 고개를 저었다.
테베답지 않다.
“다만···.”
“다만?”
“왠지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
왠지, 라···.
테베가 보던 내 뒷모습은 어땠을까.
석양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내 뒷모습은.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썩 기분 좋아 보이진 않았던 모양이다.
“···고마워요.”
꿈의 여운이 남아있었던 걸까.
그 아이를 떠올리고 있었던 걸까.
그래서 테베는 날 여기로 데려온 걸까.
아니면 그냥···, 일까.
어느 쪽이건 고맙다.
조금 마음이 진정되는 기분이 들었다.
“···별말씀을요.”
나는 한참 동안 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선 채로.
멍하니.
왠지 질리지 않았다.
테베는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어쩐지 테베를 공략하던 그 날로 돌아간 것 같다.
“···이름이 뭐예요?”
이번의 나는 테베의 이름을 모른다.
아마 한 번쯤 들었을지도 모르지만 그걸 기억하는 건 보통은 무리겠지.
그래서 나는 이름을 물었다.
“···테베인 디 로이스터입니다.”
새하얀 얼굴이 석양으로 붉게 물든다.
아아.
그렇구나.
그런 거구나.
나는 이 기분이 뭔지 알았다.
하지만 지금 내게는 쓸데없는 기분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가요, 로이스터 경.”
나는 성으로 걸음을 옮겼다.
테베는 얌전히 나를 따라왔다.
석양이 저문다.
이제 곧 날이 어두워질 것이다.
그러면 이 기분도 가려지겠지.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일직선으로 난 길을 눈을 감은 채 걸었다.
흔들리지 말자.
그대로 앞으로만 가자.
그러면 된다.
나를 위해서,
그 아이를 위해서.
나는 재차 다짐하며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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