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폭행교사(暴行敎唆)
“으아아아악!”
한결이 방에서 나가자마자 한기호의 분노가 폭발했다. 한기호는 테이블 위에 있던 재떨이를 문에다 던졌다.
하마터면 자스민차를 들고 서 있던 여비서의 머리에 맞을 뻔했다.
“진정해, 진정.”
김홍재가 한기호의 어깨를 다독이며 진정시키려 애썼다. 그러나 한기호는 폭주를 멈출 생각이 없었다.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새파랗게 어린놈한테 협박이나 당하고···”
한 번 날뛰기 시작하면 아무도 못 말린다. 스스로 지쳐 진정되기 전까지는.
자리에서 일어난 한기호는 자기 책상 위에 있는 서류철도 다 집어 던졌다. 그리고 사장실 한편의 골프 연습장에 있는 골프채를 들고 마구 휘둘렀다.
하필 아이언을 들고 휘두르다 바깥으로 난 통유리를 쳤다. 아무리 방탄유리라고 하지만 쇠로 만들어진 골프채를 성인 남자가 풀스윙을 했으니 무사할 리 없었다.
통유리에 거미줄처럼 거대한 자국이 남았다.
그제야 김홍재가 재빨리 다가가 한기호의 팔을 잡았다.
“놔, 놔. 이거 안 놔?”
“제발, 진정해. 여기서 저 유리 박살 내면 위험해.”
겨우 진정이 됐는지 한기호는 아이언을 바닥에 던진 후 소파에 앉았다.
아, 이 새끼 성질머리는 정말··· 우리 딸, 공부 열심히 하고 있지? 아빠는 이렇게 돈 벌어서 우리 딸 학비 대주고 있어.
“박대호 불러.”
“응, 누구?”
“아 X팔, 귓구멍에 X 박았어? 왜 사람 말을 못 알아들어? 박대호 사장 부르라고.”
야, 이 새끼야. 못 알아들어서 물어본 게 아니잖아. 여기서 박대호가 왜 나오냐고.
“알았어.”
“에이 X팔, 반말 하지 마! 나 열받았을 때는 특히.”
그냥 오늘 저 새끼 죽이고 감빵 갈까.
“네, 알겠습니다.”
김홍재는 휴대폰을 꺼내 박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
“사장님, 잘 계셨습니까.”
“오, 박 사장 왔어? 여기로 와서 앉아.”
한기호는 박대호의 얼굴을 보자 생기가 도는 것 같았다. 알고 지낸 지 2년이 넘었지만 단 한 번도 반갑게 맞은 적이 없었다.
박대호도 한기호의 환대에 약간 어리둥절한 듯했다.
100kg이 넘는 덩치의 박대호가 자리에 앉자 목덜미 뒤와 팔 끝 살이 드러나며 이레즈미 문양이 언뜻 보였다.
“우리 박 사장 보면 언제나 든든해. 그렇지 않아?”
한기호는 고개를 돌려 김홍재에게 동의를 구했다.
“네, 그렇습니다, 사장님.”
예상치 못한 칭찬에 박대호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데 무슨 일 때문에 부르신 건지. 회사 관련한 사항은 지난주 김 상무께 이미 다 보고드렸는데···”
“어허, 이 사람. 우리가 뭐 꼭 일이 있어야만 만나고 하는 그런 사인가?”
그럼, 일없이 언제 만난 적 있냐. 박대호는 입이 근질거렸다.
“그래도 평일 낮에 백화점까지 부르실 정도면 분명히···”
한기호는 속내를 들켰다는 듯 갑자기 크게 웃었다.
“하하하. 이 친구, 그동안 눈치가 많이 빨라졌구만. 이제 못 속이겠어.”
어설픈 연극을 보는 것 같았다. 뻔히 뭔가 부탁할 게 있어서 불러놓고 이게 뭐 하자는 건지.
“부탁하실 일이 있으신 모양인데 말씀하십시오.”
박대호가 더 이상 시간 낭비 그만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자고 재촉했다.
“박 사장이 바쁜 일정이 있는 모양이네. 알았어, 그럼 바로 본론을 얘기하지.”
한기호가 김홍재에게 눈짓을 하자 김홍재가 가지고 있던 서류철을 테이블 위에 툭 던지듯 놓았다.
박대호는 서류철에는 손도 대지 않고 김홍재의 눈을 마주쳤다.
“거기 펼쳐봐.”
한기호의 말에 그제야 박대호는 서류철을 펼쳐보았다. 서류에는 젊은 남자 사진과 종이에는 그의 인적사항이 적혀있었다.
사진은 CCTV에 찍힌 영상을 인화한 듯 화질이 별로 좋지 않았다. 뚜렷하지 않은 화질에도 남자의 잘생긴 외모는 숨길 수 없었다.
“이게 뭡니까? 혹시 아이돌 데뷔 준비하는 연습생입니까?”
아이돌 연습생이라는 말을 듣고 한기호는 코웃음을 쳤다. 그러다 박대호 손에 들린 사진을 빼앗아 자세히 살펴봤다.
이렇게 보니 잘생기긴 했군. 그래도 아이돌 연습생이라고 착각한 건 좀 오번데?
한기호는 사진을 다시 테이블 위로 던졌다.
“아이돌 연습생은 무슨··· 참교육이 필요한 애야.”
“참교육이요?”
“집안 어른한테 아주 건방을 떤 녀석이야. 예의를 좀 가르칠 필요가 있어.”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던 박대호는 고개를 들어 김홍재에게 도움을 청했다.
“박 사장.”
“네, 사장님.”
“자네는 밑에 애들이 말을 안 들으면 어떻게 하나?”
“야단칩니다.”
“야단쳤는데도 말을 안 들으면?”
“아무래도 주먹이 나가야겠지요.”
“지금이 그런 비슷한 상황이야.”
박대호는 그제야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된다는 듯 사진을 들어 다시 눈앞으로 가져왔다.
“걔가 내 조카야. 한결이라고. 근데 애가 예의가 도통 없어. 작은아버지 무서운 줄 모르고 아예 협박을 하더라니까.”
박대호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내 말 이제 알겠지?”
한기호는 나중에 법적인 문제를 우려한 듯 구체적인 표현을 삼가고 있었다.
“견적은 어느 정도가 좋겠습니까?”
박대호도 한기호의 마음을 이해한 듯 약간 돌려서 물어봤다. 전치 몇 주 정도가 적당하겠냐는 말.
“골절이면 보통 4주던가?”
박대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골절은 무조건 4주 이상 나오죠. 10주가 지나도록 뼈가 안 붙는 경우도 있어요.”
“그건 좀 곤란한데··· 얼마 후면 아버지 생신인데 그때 조카 얼굴 봐야 하니까 4주 정도가 딱 적당하겠네.”
“전치 4주. 접수했습니다.”
박대호가 고개를 숙이며 복명복창을 하자 한기호는 마음에 든 듯 미소를 지었다.
**
“진짜 싫어요.”
김희선은 이불을 들어 얼굴을 덮었다.
김장곤은 병상 옆에 서서 어쩔 줄 몰라 하며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여보, 당신이 좀 설득해 봐.”
김장곤은 자기 말이 도저히 먹히지 않자 부인 홍선화에게 바통을 넘겼다. 홍선화도 방법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언제 얘가 우리 말을 들은 적 있어요? 자기가 싫다는데 어떡해요?”
“아니 세황에서 계속 사람을 보내 귀찮게 하잖아. 적당히 합의만 하면 좀 좋아?”
김희선은 김장곤 부부가 나이 40이 넘어 얻은 늦둥이 막내딸이었다. 김희선이 태어난 이후 갑자기 교세가 크게 확장하기 시작하면서 20년 만에 등록 교인 20만명을 돌파했다.
김장곤 부부에게 김희선은 복덩이였다. 딸이 해달라는 건 다 해줬다. 다만 교인의 폭증으로 점점 교회 일이 바빠지면서 막내딸과 보내는 시간이 턱없이 줄어버렸다.
김희선은 초등학교 시절 잠시 반항기를 보였다가 이내 순응하는 듯했다. 이후 공부도 잘하고 속 썩이는 일도 없자 자연스럽게 방치하게 됐다.
막내딸에 대한 사랑은 뭐든 요구하는 대로 들어주는 것으로 표시했다. 이런 과정에서 김희선은 부모에 대한 애정 결핍인 채로 겉은 명랑하지만 속은 냉소적인 어른으로 자랐다.
“희선아, 아빠 부탁 좀 들어주지 않을래?”
“나가요, 나가! 더 할 말 없어.”
김희선은 이불을 뒤집어 쓴 채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희선아, 엄마야.”
“엄마도 나가!”
“희선아, 그러지 말고. 너 때린 학생이 지금 엄청나게 반성하고 있대. 매일 반성문도 쓰고···”
홍선화는 병상 옆에 꿇어앉아 김희선을 달래려 애썼다.
김희선은 덮고 있던 이불을 확 걷어냈다. 그녀의 눈은 눈물로 범벅이 돼 있었다.
“세상에 어느 엄마 아빠가 이래? 딸이 밖에서 억울하게 맞고 왔으면 더 큰소리치면서 그쪽을 나무라지는 못할망정 합의하라고 이렇게 강요한다는 게 말이 돼?”
김장곤 부부는 할 말이 없었다.
“도대체 거기서 얼마나 돈을 준다고 했길래 두 분이 같이 이러는 거야? 한 백억 준대?”
김장곤은 뜨끔했다.
실제로 세황에서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해왔기 때문이었다.
김장곤은 양평에다 기도원을 하나 건설할 계획이었다. 기도원 건설을 위해 지난 1년 동안 건축헌금을 모으는 중이었는데 경기침체로 돈이 잘 모이지 않고 있었다.
원래 내년에 착공할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가다가는 내후년에도 힘들어 보였다. 금리상승으로 금융비용이 크게 늘어났는데 착공이 늦어질수록 손해가 커지게 된다.
그런데 세황건설에서 사실상 원가로 기도원을 지어주겠다고 제안해 왔다.
그 차액은 고스란히 김장곤의 통장으로 입금되는 조건으로··· 대충 계산해도 100억원.
사실 세황건설도 무조건 빠지는 장사는 아니다. 어차피 국내 대기업들은 절세를 위해 각종 명목으로 기부를 한다. 기도원 건립 비용을 기부금으로 처리하면 세금을 적당히 세이브할 수 있다.
“오늘은 일단 갑시다. 저녁에 예배도 있으니···”
“희선아. 엄마, 저녁에 또 올게.”
김장곤 부부가 나가자마자 김희선은 핸드폰을 들고 톡을 날렸다.
[병원에 좀 와줄 수 있어?]
[쌤, 몸은 좀 어때요?]
[안 좋아. 그래서 네가 와서 위로 좀 해줘.]
[···]
[왜, 오기 싫어?]
[친구들도 있을 텐데 굳이 가르치는 학생을 부르는 이유가···]
그러고 보니 김희선도 스스로 좀 이상했다. 왜 한결이 떠올랐을까. 톡만 날리면 당장이라도 달려올 남자들이 한 트럭은 될 텐데.
[그건 그런데 나도 모르겠어. 왜 오기 싫어?]
[아, 아뇨. 가기 싫은 게 아니라··· 알겠어요, 엄마한테 말씀드리고 갈게요.]
[ㅎㅎㅎ]
[왜 웃으세요?]
[마마보이 같아서. 겉은 완전 멋있는데 속은 여자들이 학을 떼는 마마보이.]
[저보고 게이라면서 여자들이 학을 떼든 말든 뭔 상관이겠어요.]
[참, 그건 그렇네.]
아니, 이보세요. ‘그건 그렇네’라는 반응은 좀 아니지 않나요?
[1시간 안에 갈게요. 지금 체육관이라서···]
**
한결은 병문안을 오면서 컵라면과 과자 등을 잔뜩 사 왔다.
“우리 사이에 뭐 이런 걸 다 사 왔니?”
“남들이 들으면 오해하겠어요. 우리 사이가 어떤 사이길래···”
“연인이 되기 전 썸 타는 관계?”
“물 받아 와요?”
한결은 김희선의 말을 무시하고 컵라면을 꺼내 흔들었다. 저런 농담은 이미 차세린 덕분에 면역력이 생겼다.
“오, 컵라면 너 참 반갑다. 근데 재벌 3세도 컵라면 먹니?”
김희선도 강적이었다. 자기 말을 씹혔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아시겠지만 난 재벌 3세가 맞긴 해도 혼외자 계열이라서 남들이 생각하는 그런 삶을 살아오지 않았네요.”
“그럼 어떤 삶을 살아왔는데?”
말은 했지만 정작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한결은 알 수 없지 않은가.
“그냥, 강남에서 돈 좀 있는 사람들이 사는 삶 정도? 쌤이 훨씬 유복하고 잘 살았을 거 같은데···”
김희선은 컵라면을 아주 능숙한 솜씨로 포장을 뜯은 후 라면스프를 라면에다 골고루 뿌렸다.
“앞으로 그냥 누나라 불러. 꼴랑 두 살 차이에 뭔 쌤이냐.”
“··· 네.”
“그리고 지난번에 내가 말했지만 난 혼자 집에 있는 경우가 많았어. 컵라면은 나의 소울푸드야.”
“밥 차려 주시는 분 계셨을 거 같은데···”
김희선은 컵라면에다 물을 부어오라는 듯 컵라면 용기를 한결에게 건넸다.
“커다란 식탁에서 혼자 밥 먹기가 싫어서 그냥 혼자 컵라면으로 때우는 경우가 많았어.”
“언니 오빠들은 다 어디 가시고?”
“외국 유학 중이었지. 한국에서 제대로 된 대학에 갈 실력이 안 됐거든. 오빠는 특히 이 교회를 물려받아야 하는데 국내에서는 사고만 치니까 아빠가 미국으로 내쫓아버렸어.”
재벌이나 교회 재벌이나 사고 치는 자식들 미국으로 쫓아 보내는 건 매한가지구나. 그런데 미국에서 사고를 치면 스케일이 더 큰데··· 한기호를 보면 알 수 있듯.
“알았어요. 나가서 뜨거운 물 받아 올게요.”
“어딘지 알아?”
“제가 이 방에서 한 달 반을 누워 있었다니까요?”
“아, 그랬지.”
한결이 막 병실 밖으로 나가려 할 때 바깥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 크기로 보아 바로 이 병실 앞에서 나는 소리였다.
한결은 뭔 일인가 싶어 문을 활짝 열었다.
거기에는 검은 정장차림의 60대 노신사와 그의 뒤를 따르는 10여 명의 정장 차림 남자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김희선 양을 좀 뵐 수 있을까요?”
중저음의 굵직한 목소리였다. 평소 남들에게 지시만 해온 듯한 위엄이 서려 있었다.
“누구시죠?”
“김충헌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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