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또보다 더한 것
-출금이 완료되었습니다.
기계적인 여성의 목소리와 함께 ATM기의 출금구가 열렸다.
그 안에는, 5만 원 짜리 지폐가 가득 담겨있었다.
도진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떨리는 손으로 지폐뭉치를 집어들고는, 지폐를 한 장씩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한 장을 넘길 때마다 오만 원 권에 그려진 신사임당의 얼굴을 확인하길 수십 차례.
“구십구···백. 후우······.”
마침내, 지폐를 마지막까지 전부 센 도진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부들부들 떨고는, ATM 옆에 비치된 종이봉투에 돈다발을 우겨넣었다.
-자금력의 사용법은 시뮬레이션에서와 거의 같아요. 지금 인도자님께서 하신 것처럼 돈으로 사용할 수도 있고, 상응하는 금액의 귀금속이나 자원으로 변환할수도 있죠. 그 과정은 다른 행성인들이 보기에 합법적이고 정상적인 것으로 보일 거고요.
도진의 옆에 둥둥 떠 있는 여성, 아리아가 설명을 시작했지만 도진은 그 말이 들리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온통 ATM기에 달린 작은 화면에 집중되어 있었다.
[잔액: 13,755,213,320원]
137억.
무려 500만 원을 인출했음에도 자릿수가 변하지 않은 어마무시한 잔고금액을, 도진은 멍하니 쳐다봤다.
‘진짜···진짜였다니.’
ATM기에서 돈을 뽑기 전까지만 해도 반신반의했던 그였지만, 이제는 달랐다.
최소한, 그가 손에 쥔 흰 봉투의 두께감만큼은 진짜였으니까.
그가 굳이 ATM기까지 와서 500만 원을 뽑은 이유 또한, 스마트폰에 찍힌 잔액이 진짜인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만약 저 137억이 거짓이거나 오류라면, 그의 손에 현금이 쥐어질 리 없으니 말이다.
그리고, 도진은 마침내 확인에 성공한 것이다.
‘100억, 100억······.’
로또를 너댓 번 쯤은 맞아야 손에 넣을 수 있는 금액.
평생 번 돈을 모두 모아도 근접조차 할 수 없는 금액의 돈이, 그의 계좌에 들어있다.
그 사실을 확인한 순간, 도진의 머리가 흥분으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흐흐···흐흐흐······.”
한밤중에 괴소를 흘리면서 집으로 향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길가던 사람들이 흠칫흠칫 놀랐지만, 도진은 이미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상태였다.
100억.
그 숫자의 금액이 주는 행복감은 가히 폭력적이었다.
집에 들어가기까지 몇 번 길에서 넘어졌음에도 하나도 아프지 않을만큼 말이다.
“으으······.”
집에 들어오자마자 거짓말처럼 아파오는 무릎을 부여잡으며, 도진은 뜨거워졌던 머리가 식는 것을 느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그러니까···이제 이거로 지구의 문명을 발전시켜야 한다는거지?”
흰 봉투에서 삐져나온 5만 원 짜리 지폐다발을 내려다보며, 도진은 생각에 잠겼다.
그 이유는 하나였다.
“···이거, 가능한 거 맞아?”
100억.
개인에겐 큰 돈이지만, 지구 전체라는 관점으로 보면 티끌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수준의 금액이다.
‘스타로드’에서도 자금력 1000이란 초기자원이 굉장히 빡빡했던 건 사실이지만, 현실에서는 더더욱 쉽지 않은 금액이었다.
-그러니까, 열심히 움직여야겠죠? 앞으로 10년밖에 안남았다고요!
“···그래, 해야지. 돈도 받았는데.”
무엇보다, 10년 뒤에 예정되어있는 외계인의 침공을 막아야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걸 막지 못하면, 도진과 가족을 포함한 인류 전체의 운명이 외계인 손에 넘어간다는 것도 말이다.
“후우, 정신차리자. 일단은······.”
책장에서 큼지막한 노트 하나를 꺼낸 도진은 빈 공간에 무언가를 열심히 적기 시작했다.
그 것은, 일종의 공략집이었다.
자신이 3년동안 ‘스타로드’의 불가능 난이도를 공략하며 쌓아온 게임에 대한 정보들.
단순히 게임 속 정보라 치부할 수도 있었지만, 그 정보들 모두가 실제 은하와 문명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아는 이상 허투루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일단 정리는 끝났고······.”
두시간 동안 자신이 적은 내용들을 한 번 훑은 다음, 도진은 페이지를 넘긴 다음 빈 페이지의 가장 위에 제목을 넣었다.
[테크트리]
그 다음, 도진은 그 아래에 ‘스타로드’에 등장하는 과학기술들의 순서를 나열하기 시작했다.
마인드맵처럼 온갖 기술들의 이름을 순서에따라 선으로 이어놓자, 빈 페이지는 마치 거미줄처럼 선과 원으로 가득 찼다.
그렇게, 도표를 작성한 도진은 이번엔 기술들에 1번부터 번호를 매기기 시작했다.
그가 수 많은 플레이 끝에 정립한 기술의 우선도를 표기한 것이었다.
“이거, 현실에서도 통하는 거 맞지?”
-거의 그렇죠? 물론, 세부적인 사항은 인도자님께서 직접 실행하셔야 하지만요.
“좋아. 후우······.”
아리아의 확인까지 받고 나자, 도진은 한결 편해진 표정으로 의자에 몸을 기댔다.
창 밖에선 어느새 해가 떠오르고 있었고, 붉은 햇살이 어두침침했던 원룸방을 서서히 밝히기 시작했다.
“뭐야, 벌써 시간이 이렇게···어휴, 빨리 나가야겠네.”
그제서야 급히 시계를 확인한 도진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머, 벌써 계획을 실행하러 가시는 거에요? 이번 인도자님은 생각보다 부지런하시네요!
당장이라도 밖으로 뛰쳐나갈 것처럼 급히 양치질을 하는 도진을 바라보며, 아리아는 기쁨의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뭥 소이야?”
입에 칫솔을 문 채 말하는 도진의 대답은 그녀의 예상과 달랐다.
-방금 정리했던 계획, 진행하시려는 거 아닌가요?
“퉷.”
의아한 표정을 짓는 그녀를 향해, 도진은 양칫물을 세면대에 뱉고는 입을 열었다.
“아침이잖아, 출근해야지.”
-네?
“난 직장인이라고.”
벙찐 표정을 짓는 아리아를 뒤로 한 채, 도진은 재빨리 세수한 다음 옷을 갈아입었다.
‘오늘은, 평소랑은 좀 다르겠지만.’
옷을 갈아입으며 오늘의 할 일들을 떠올리는 도진의 눈은, 의욕으로 가득 차 있었다.
***
세광산업.
대기업 계열사 3차밴더의 하청을 맡고 있는 화성의 작은 중소기업에 출근한 도진은 들어오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최 부장이 왜 벌써 온 거야?’
최 부장.
사장의 조카인 덕분에 부장 자리를 차지한 사람이었다.
그것 뿐이라면 문제는 없었겠지만.
“뭐야. 권 대리, 왜 이제왔어?”
문제는, 왠진 몰라도 최 부장이 도진을 싫어한다는 것이었다.
대리보다 못한 자신의 일머리가 부끄럽기 때문인지, 아니면 도진의 학벌을 질투해서 그러는 것인지 까지는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건, 도진이 하는 행동 하나하나에 지적하고 화를 내는 사람이란 사실이었다.
‘평소엔 출근도 잘 안하더니, 오늘은 왜 이렇게 일찍 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권 대리, 지금이 몇 시야? 회사 놀러다녀?”
최 부장이 자신을 깔 건수를 찾았다는 것.
-어휴, 시끄러워. 인도자님은 이런 사람 밑에서 일하는 거에요?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리아가 귀를 막았다.
할 수 있다면, 도진도 귀를 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쯔쯧, 목청만 커 가지곤.’
잘 걸렸다는 듯, 언성을 높이며 화를 내는 최 부장의 모습은 도진이 가장 싫어하는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평소라면 어떻게든 회사에 붙어있어야 한다는 이유로 온갖 모욕을 묵묵히 감내해야만했다.
“8시 40분인데요.”
어제까지는 말이다.
“···뭐?”
순간, 사무실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직원들과 경리를 비롯한 사무실 안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두 사람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도진은 개의치않고 입을 열었다.
“8시 40분이요. 출근시간 9시까지 아닌가요, 부장님? 20분 일찍왔는데요.”
“지, 지금, 나한테 말대꾸하는 거야?”
회사에 들어온 이후 처음 대드는 모습에 최 부장은 당황했지만, 곧 언제 그랬냐는 듯 버럭 화를 내기 시작했다.
“9시는 업무시작 시간이고! 업무시작 시간 30분 전에 오는 건 기본 아냐, 기본? 권 대리, 회사 헛 다녔어?”
괘씸죄가 추가된 것인지, 쏘아붙이는 부장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커져있었다.
“대리 씩이나 됐으면 알아서 좀 행동해야 할 거 아냐, 알아서! 내가 이런 것 까지 말해야 하나?”
최 부장이 사무실 사람들이 듣는 앞에서 소리를 지르는 목적이 뭔지, 도진의 눈엔 뻔히 보였다.
‘어떻게든 날 깔아뭉개고, 자기를 높여보겠단 거겠지.’
“하.”
업무능력이 좋지 않은 자신을 포장해보겠다는 심산인 게 너무나 투명하게 보이자, 도진은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내뱉었다.
“권 대리, 지금 웃겨? 장난하는 거 같아?”
마침 잘 걸렸다는 듯, 최 부장은 있는 성 없는 성을 다 내가며 도진을 깔아뭉개려 했다.
하지만.
“장난 아닌데요.”
돌아온 것은 비웃는 도진의 대답이었다.
“뭐?”
“장난 아니라고요.”
100억으로 가득 채운 것은 통장뿐만이 아니었다.
평소와는 다른 여유와 용기, 그리고 자신감이 그의 전신에서 흐르고 있었다.
“지, 지금······.”
“낙하산으로 왔으면 열심히 좀 하세요, 부장님. 앞에서 소리만 지르면 뭐가 됩니까?”
“뭐, 인마?”
“소리지를 시간에 업무 공부 좀 하시고, 엑셀도 배우시고 하세요. 되도 않는 팡숀 금지같은 소리 하지 말고요.”
“아, 아니······.”
“그럼, 전 사장님 좀 뵈러 갑니다.”
뚜벅 뚜벅
그 말을 끝으로, 도진은 몸을 돌려 2층의 사장실로 향했다.
“야-이-새끼야-!”
뒤늦게 등 뒤로 분노한 부장의 욕설이 쏟아져나왔지만, 도진은 조금도 신경쓰지 않고는 사장실의 문을 노크했다.
똑똑
“어어, 들어와.”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사장의 목소리에, 도진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어어, 권 대리.”
후웅-!
도진이 사장실에 들어가자마자 보인 건, 건성으로 인사하면서 허공을 향해 골프채를 휘두르는 사장의 모습이었다.
후웅-! 후웅-!
자칫 사람이 맞을수도 있을만큼 거친 스윙이었지만, 언제나와 같은 사장의 모습에 도진은 아무렇지 않게 사장에게 다가갔다.
”밖이 시끄럽던데, 무슨 일 있나?”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그래? 그건 그렇고, 권 대리는 어쩐 일로 온 거야?”
후웅-!
도진은 말과는 달리 자신쪽으로 눈길 하나 주지 않는 사장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품에서 흰 봉투를 꺼내들고는 사장의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그의 입이 열렸다.
“저, 그만두겠습니다.”
순간.
사장의 골프채가 허공에서 뚝 멈췄다.
이내 사장의 고개가 도진에게로 돌아갔다.
“···진심이야?”
“네.”
“권 대리, 빚도 있다고 하지 않았어? 근데 갑자기 퇴사한다고? 뭐, 로또라도 맞은거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사장의 물음에, 도진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고요.”
‘로또보다 더한 걸 맞긴 했지.’
사장을 바라보는 도진의 입가엔, 자신감 넘치는 미소가 맺혀있었다.
- 작가의말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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