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승시청 웹소설국 로맨스판타지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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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내리화
작품등록일 :
2024.08.17 21:54
최근연재일 :
2024.09.16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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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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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8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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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3) 최악

DUMMY

내가 살면서 저지른 모든 잘못에는 그럴싸한 이유가 있다.


“이름 짓기가 장난이야? 한번 정하면 수정도 못하는데. 말해 봐, 왜 황제의 딸 이름을 데이지라고 지었어?”


문제는 나에게만 그럴싸하다는 거지만.


“데이지는 샛노란 중심에 얇은 흰색 꽃잎을 가진 꽃이니까, 백발과 금안을 가지고 있는 황녀의 외모와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해서···.”


날 매섭게 노려보던 설이설 팀장이 입술을 앙다물었다. 순간 치솟은 비난을 꾹 참는 듯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몇 초의 침묵 끝에 그는 둔탁한 발소리를 내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바닥만 바라보고 있던 내 시야 끄트머리에 그의 신발코가 들어왔다. 퍼뜩 어깨를 떨곤 해야 할 말을 뒤늦게 전했다.


“···죄송합니다.”


신입인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답변이었다. 심장이 쿵쿵 뛰자 온몸의 혈관들도 동요하기 시작했다. 까마득한 밑바닥으로 떨어지는 기분은 심란하게도 낯설지 않았다.


“이유가 그게 다야?”


“설이설.”


누군가 제지하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설 팀장이나 나나 알아들을 여유가 없었다.


“데이지는 아름다움과는 별개로 시골 들판에서 수두룩하게 피어. 500년 만에 태어난 고귀한 황녀의 이름으로 쓰이기엔 흔하고 소박한 꽃이라는 생각이 안 드나?”


500년이면 조선 왕조가 시작했다 끝났을 정도로 긴 기간. 나는 비로소 내가 무엇을 놓쳤는지 깨달았다. 마주잡은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우리가 만드는 건 소설이야. 단순히 외모만 반영하고 말 게 아니라 황녀라는 캐릭터의 이미지와 귀하다는 특징도 반영하는 이름이었어야지! 하다못해 이름 뜻에 빛을 의미하는 라틴어라도 응용하던가! 옛날에 소설 쓸 때 고려 안 해봤어?”


안 해봤다. 입이 열 개가 아니라 열한개라도 할 말이 없군.


“그만해, 설이설 팀장.”


다른 팀원들이 달려와 우리 사이에 비집고 섰다. 일단 물리적으로 떨어뜨리려는 노력과 무색하게도, 설 팀장의 격양된 목소리는 화살처럼 달려와 귓가를 때렸다.


“빙의된 망자들은 안타까운 죽음을 뒤로 하고 행복해지기 위해 새 삶에 도전하는 거야. 이곳은 그 망자에 대한 존중과 배려심을 가지고 사력을 다해야 하는 곳이고. 적어도 이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면 일을 대충 하진 말았어야지!”


“그만하랬다.”


“조연이나 엑스트라 황녀였다면 그래, 넘어갈 수 있어. 귀여운 아해에게 잘 어울려서 이승에서도 종종 쓰이는 이름이니까. 그렇지만 본인이 이름을 지어주는 황녀는 망자가 직접 빙의해야 할 소설의 주인공이라는 자각을 가져야 하지 않나?”


울면 안 돼, 뜨거워지는 눈두덩이를 어찌할 줄 몰라서 눈을 꾹 감았다. 얼굴로 피가 몰리기 시작했는지 손끝과 발끝이 저려왔다.


출근 한 시간 뒤에 바로 사고 치는 노답 신입이 나라니. 대학생 시절 소설 창작합평 때마다 교수님한테 매번 까였는데도 발전이 없는 졸업생도 나라니. 나 진짜 쓰레기···.


“그만하랬지.”


서늘한 목소리에 괜히 나까지 찔려 퍼득 시선을 들었다. 최단신 낙뢰 과장이 최장신 설이설 팀장의 명치를 팔꿈치로 후려치는 순간이었다.


단번에 급소를 찔려 뒤로 넘어가는 설 팀장을 플루토키아가 잽싸게 잡아 부축했다.


아니··· 이래도 돼? 나는 직장에서 벌어진 폭력 사태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당황해서 잔뜩 조여진 목구멍 사이로 궁금증이 비집고 올라왔다.


“죽은 거 아니에요?”


어느새 뒤로 다가와 내 어깨를 부드럽게 감싼 안립 팀장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이미 죽어서 고려 조선 대한제국 대한민국 다 찍어본 인간인데 세삼. 괜찮을지도.”


낙뢰 과장이 플루토키아의 품에 늘어진 설 팀장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우리가 이 일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충분히 설명하지 않고 바로 투입했잖아. 일을 시작한 지 겨우 한 시간 남짓한 이에게 우리만큼의 진정성을 요구할 순 없어.”


그러고는 내게도 사과하는 걸 잊지 않았는데, 그 표정은 어쩐지 상쾌해 보였다.


“미안합니다. 이 친구가 워낙 고지식한데다 이 일에 진심이라, 본인의 기준에 미치지 않으면 바로 화를 내는 버릇이 있어요.”


“아닙니다, 제가 생각이 짧아서···. 일 시작한 지 하루도 안 됐는데 벌써 사고를 쳐서 죄송합니다. 어떻게든-”


어떻게든 뭐? 내가 이 일을 수습할 수나 있나? 스스로의 한심함에 시선이 절로 바닥을 향했다. 그러자 안립 팀장이 등을 두드려주었다.


“괜찮아요, 애초에 우리가 일이 쌓여서 신입한테 글쓰기 경험이 있다고 무턱대고 실무를 줘버린 탓이 크니까요.”


그건··· 맞나···?


“이 일 수습할 수 있어요! 설 팀장이 순간 머리가 돌아서 겁을 너무 줬나 본데, 계획서에 없던 일이 터지긴 했지만 수습 범위 내거든요.”


“이 일을 하다보면 예상치 못한 일들이 자주 터집니다. 소설을 쓸 때도 미리 틀은 짜두지만 막상 쓰기 시작하면 내 맘대로 쓰이지 않는 것처럼요.”


플루토키아의 말투는 가벼웠다. 정말로 별일 아니라는 투였지만 한번 꺾인 고개는 들기 어려웠다. 안립 팀장이 여전히 내 어깨를 잡은 채로 대안을 던졌다.


“저는 황가의 직계 혈통으로 태어났지만 어머니의 신분이 미천해서, 태어나자마자 궁궐 밖으로 빼돌려진 후 평민들 틈에서 자라났다는 설정을 넣으면 어떨까 싶은데요.”


“아하, 그래서 궁궐로 돌아온 이후에도 평민의 이름이라 트집잡히고? 근데 이러면 실제 이름이 데이지인 사람에게 실례가 되지 않을까.”


“오히려 고귀한 이름으로 떠오른다면요? 작중 데이지란 이름의 평민들도 황녀와 같은 이름이라며 기뻐하는 거죠. 주인공 황녀가 궁궐 내 입지를 다져갈수록 데이지꽃은 귀한 대접을 받게 되고, 왕녀의 상징도 데이지가 되어가고요.”


···어라? 나는 순간적으로 기묘함을 느꼈다. 내 고마운 상사들은 지금 이야기의 후반부까지 논의하고 있었다. 결론까지 얼추 정해놓는 듯했다.


이 말은 즉, 망자들은 이승을 살아갈 때처럼 주체적으로 삶을 주도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저승사자들이 짜둔 과정과 결론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는 것 아닌가?


자신이 스스로 삶을 개척해 나간다는 착각에 빠진 채로?


이건 좀···.


“좋습니다, 안립 팀장 말대로 하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던 중 낙뢰 과장이 손뼉을 치며 대화의 끝을 알렸다. 설정을 추가해야겠다며 컴퓨터 앞으로 돌아가는 안 팀장, 제대로 서지 못하는 설이설을 제 자리로 돌려보내는 플루토키아의 뒷모습을 보니 쓴웃음이 나왔다.


***


몇 시간 동안 내 실수를 커버하려 뛰어다니는 상사를 보는 건 마음과 정신에 좋지 않다. 어느 순간부터 난 아랫입술을 뜯고 있었는데, 한참 본인 일 하느라 바빴던 플루토키아가 내게 다가오고 나서야 멈췄다.


“저와 함께 가시죠.”


어디로? 진실의 방으로? 나는 찍소리도 못하고 그의 뒤를 따라갔다.


“이제 로판 세계관으로 가서 데이지 황녀로 빙의한 망자를 지켜보러 갈 겁니다. 지금은 한 9세쯤 되겠네요.”


그는 사무실 구석에 있는 거대한 문 앞에 섰다. 안 그래도 출근했을 때부터 신경 쓰이던 문이었다. 와인색 벨벳 천으로 꾸며진 듯한데, 생긴 게 꼭 초중고 시절에 본 음악실 문짝 같았다.


사무실과 영 어울리지 않는데. 플루토키아는 괘념치 않고 두 팔로 문을 힘차게 열었다. 그 순간 시원한 바람이 달려들어 내 앞머리를 까뒤집곤 무책임하게 달아났으나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문 건너편에는 알프스와 유사한, 화창한 하늘과 싱그러운 들판이 드넓게 펼쳐져 있던 탓이다. 플루토키아가 어떠냐는 듯 당당하게 웃으며 날 돌아봤다. 이 문··· 옆나라 고양이 로봇이 쓰는 마법 도구 같은데.


“겁먹지 말고 들어오세요.”


나는 어깨를 움츠리고 주변을 확인하며 조심스럽게 문지방을 넘었다. 비현실적인 순간이었으나, 이마에 닿는 햇살이 따갑고 풀잎 냄새도 맹랑해서 지금 내가 초원 한 구석에 서 있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들판 곳곳엔 데이지꽃이 무리 지어 조금씩 피어있었다. 긴 다리로 꽃무리를 이리저리 피해 가던 플루토키아가 완만한 구렁 위에 홀로 서 있는 나무를, 정확히는 그 아래 그늘을 가리켰다.


그곳에 빠르게 걸어가 앉은 플루토키아는 제 옆자리를 오른손으로 두드렸다. 세 발짝 뒤에서 쫓아가던 난, 로판 세계관에도 쯔쯔가무시가 있을지 내심 걱정하며 그가 시키는 대로 앉았다.


“저희는 그냥 여기서 계속 지켜보면 되는 건가요?”


“지켜보면서 특이 사항이 생기면 보고해야 합니다. 가령 데뷔당트가 필요한 16세 이상으로 자랐음에도 황궁에 돌아가지 않고 계속 서민들과 섞여 평범하게 산다면, 설정에 문제가 생겼다는 의미이니 안 팀장님께 보고하는 식이지요.”


“저 꼬꼬마가 아가씨 될 때까지 7년은 족히 기다려야 할 텐데요. 저희 7년 동안 여기 갇혀있어야 하나요?”


“빙의 세계관에서의 1년은 현실에서 1시간 정도입니다. 거기에 소설에서 생략되는 과거 시절은 더 빨리 흘러가죠. 아마 데뷔당트까지 지켜보면 퇴근하실 시간일 겁니다.”


사고 거하게 치고 시원하게 퇴근이 될까? 더는 참을 수 없어 한숨을 얕게 뱉어내자, 저 멀리 오두막집 쪽에서 한 아이가 달려왔다. 하얀 단발머리와 태양을 닮은 눈동자를 보자마자 알았다. 망자 데이지.


데이지는 들판의 데이지를 한 아름 따고 시작했다. 나와 플루토키아는 대화를 멈추고 여린 여자아이를 수상할 정도로 빤히 처다봤다.


황금빛 햇살 아래 살짝 달아오른 볼살을 실룩이며 웃는 데이지는 사랑스러웠다. 무척이나. 그래서 나도 모르게 묻고 말았다.


“빙의된 망자가 자유롭게 살도록 내버려두면 안되나요? 저희가 참견해서 이야기를 재밌는 방향으로 유도하지 않더라도, 이 프로젝트는 새 삶을 살아간다는 것에 의의가 있는 거잖아요.”


나와 눈을 마주하던 플루토키아의 적안이 허공을 향했다.


“···이승의 독자가 망자들의 이야기를 읽어야 망자들의 세계가 유지됩니다. 읽는 이들이 재미없다고 외면한다면 최악의 경우 이 세계는 붕괴되고 망자들의 새 삶도 실패로 끝나죠.”


뭐? 그런 말 없었잖아? 소리 내어 묻진 않았지만 표정으로 드러났나 보다. 플루토키아는 아예 내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저희는 적어도 최악이 나오지 않게 노력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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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18) 황자 24.09.06 9 0 11쪽
18 17) 간섭 24.09.05 7 0 12쪽
17 16) 서천 24.09.04 11 0 12쪽
16 15) 꽃밭 24.09.03 8 0 11쪽
15 14) 마석 24.09.02 7 1 11쪽
14 13) 간호 24.08.30 11 1 11쪽
13 12) 업무 +1 24.08.29 9 1 10쪽
12 11) 청춘 24.08.28 10 1 11쪽
11 10) 사진 24.08.27 9 1 11쪽
10 9) 사과 24.08.26 10 1 10쪽
9 8) 면담 +1 24.08.23 10 1 11쪽
8 7) 중립 24.08.22 11 1 11쪽
7 6) 조작 24.08.21 9 1 11쪽
6 5) 알현 24.08.20 9 1 11쪽
5 4) 조연 24.08.19 11 1 10쪽
» 3) 최악 24.08.18 12 1 11쪽
3 2) 작명 +1 24.08.18 14 1 10쪽
2 1) 면접 24.08.17 14 1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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