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승시청 웹소설국 로맨스판타지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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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내리화
작품등록일 :
2024.08.17 21:54
최근연재일 :
2024.09.16 17:20
연재수 :
2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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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13,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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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8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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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11) 청춘

DUMMY

데이지 황녀와 남주가 씨앗을 파는 가판대 앞에서 멈춰 섰다. 서로의 손등이 아슬아슬하게 닿을 만큼 가까이 선 뒷모습을 보니 감탄이 나온다. 야, 좋겠다. 청춘이네.


언제 저렇게 친해졌지? 딱 봐도 몰래 시장 구경하러 변장까지 하고 나온 것 같은데. 이런 일탈을 함께할 정도면 한참 썸 타고 있거나 그 이상일지도.


내가 퇴근한 사이 로판 세계의 해는 이 행성을 몇 바퀴나 돌았을까?


“그런데 저 남주는 역할이 뭐예요?”


내 질문에 설 팀장이 또 잠시 말을 잃었다.


“오기 전에 시놉시스에서 주요 인물 설정 안 읽었어?”


“···그런 게 있나요?”


“과장님이 팀원들 컴퓨터에 저장된 메신저로 시놉시스 보내줬을 텐데. 사무실 컴퓨터 키면 바탕화면에 노란 메신저 아이콘 있지 않아?”


아. 눌러보긴 했지만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던 아이콘이 그제야 생각났다. 얼굴이 후끈거린다. 읽어야 할 기본 자료도 안 읽곤 무턱대고 일 시작한 신입이라니.


아니, 어제도 대뜸 던져진 작명 업무 하자마자 사고치고, 곧장 여기 와서 데이지 감독하느라 바빴고. 오늘 출근하자마자 이곳에 오느라 뭘 살펴볼 시간도 없었고.


난 겨우 일한 지 이틀 차고. 사무실 내 자리를 차분히 둘러볼 시간이 없었어. 그런데 왜 이렇게 변명 같지? 자발적으로 사무실에 남아 살펴보기라도 할 걸. 야근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설 팀장은 내게 뭐라 하지 않았다. 다만 표정을 보기가 무서워 계속 눈을 내리깔았다.


“네 책상 옆에 간이 책꽂이 보면 저승용 컴퓨터 시스템 다루는 설명서 파일 있어. 그거 시간 날 때 한번 훑어.”


목소리 톤으로 그가 화났는지 계속 가늠하다 현타가 와 그만뒀다.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고 애써 얼굴을 들었다.


“아무튼 남주는 제국 기사. 2 황자의 놀이 친구 출신이기도 하고. 아마 지금쯤이면 황녀 전담 기사로 임명됐을걸. 이름이 마티스였나···. 나도 나이를 먹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네.”


그, 나이는 단순히 먹은 수준이 아니잖아. 통일 신라 사람 아닌가? 적어도 천 살은 넘지 않아?


“내일 황녀 데뷔당트 날이라 한가롭게 시장 구경할 시간이 없을 텐데 어떻게 나온 거지? 됐다, 스토리 전개에 문제가 있었으면 키아가 진작에 보고해서 바로잡았겠지.”


“어, 플루토키아 씨도 여기 있는 건가요?”


“아마 이 근처에서 저 둘을 지켜보고 있을걸. 왜, 걔한테 가고 싶어?”


플루토키아가 상냥하게 일을 가르쳐줘서 마음이 편한 것과는 별개로, 과장보다 직급 낮은 사수가 편하지 않나 싶은데···.


“아니요오.”


말끝이 이상하게 꼬였다. 설 팀장이 가당치도 않은 소리를 들은 것 마냥 코웃음을 쳤다.


***


그 시장에서 플루토키아는 끝까지 보지 못했고, 황녀와 남주가 씨앗과 작물 모종 몇 가지를 사 가는 것만 봤다.


군것질거리를 사 먹으며 짧은 자유를 즐기다 갈 줄 알았는데. 뭘 본격적으로 해보려는 심산 같았다.


대체 뭘 하려는 걸까. 정원이라도 가꾸려는 건가?


“아니지, 지금 내가 황녀 걱정을 할 때가 아냐···.”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봤다. 내가··· 내가 살면서 메이드 복을 입을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벗고 싶다. 강렬하게 다 찢어버리고 싶다! 그리고 이 웹소설 인물들이 날 몰라서 정말 다행이다!


내 친구들이 이 꼴을 봤으면 진심으로 혀 깨물고 죽었다! 평생 모에모에큥이라 불릴 바에야 명예로운 죽음이 낫지!


파들파들 떠는 내 꼴을 보던 설 팀장이 어깨를 두드려주며 말했다.


“그래도 김 주무관이 힘들어할까 봐 레이스가 덜 붙은 복장으로 찾아왔어. 이거 찾느라 황녀의 데뷔당트에 조금 늦긴 했지만 계산 내야. 지금이라도 들어가면 괜찮을 거다.”


“와 정말요. 감사합니다.”


그러는 설 팀장도 말쑥한 웨이터 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잘 어울려서 내게 딱히 위로가 되진 않는군.


“불편해도 조금만 참아. 우리가 어디 귀족 가문 자식으로 위장하면 황녀와 직접적으로 얽혀 이야기를 망가뜨릴 확률이 커서 그래.”


나는 억지로 고개를 끄덕이며 연회장으로 들어갔다. 쟁쟁하게 빛나는 샹들리에의 유리 장식들에 순간 눈살이 찌푸려졌다.


“넌 오른쪽으로 돌아, 난 왼쪽으로 간다.”


설 팀장의 칼 같은 지시를 따라 즉각 몸을 오른쪽으로 틀고 걸었다. 형형색색의 드레스들과 잘 닦인 가죽 구두를 밟지 않는 일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나는 한 손에 폰을, 한 손에 빈 쟁반을 들고 다 떨어진 음식 접시를 치우는 척했다. 그러면서 엑스트라 영애와 영식 사이를 오가며 그들의 의상과 악세서리를 훑어봤다.


“아까 황녀 전하가 손가락에 낸 핏방울로 싹을 틔우는 것 보셨나요? 그 새싹을 보고 얼마나 통쾌하던지. 그간 황녀 전하가 가짜라고 수군대던 이들이 얼마나 부끄러웠을까요.”


“맞아요. 피로 씨앗을 틔우는 권능은 오로지 황제 폐하의 핏줄들만 가질 수 있는걸요.”


자신을 음해하는 소문 때문에 결국 황녀 손가락이 또 피를 봤구나. 이래서 인간들이란···.


나는 한 영애가 입을 가리느라 펼친 부채에 붓글씨가 쓰여 있는 걸 보고 반사적으로 폰을 들었다. 저거 한자 아니냐?


동양의 서예 부채를 들고 있는 영애, 의외로 힙할지도. 재빠르게 사진을 찍고 아무 일도 없었던 양 가던 길을 갔다.


“황녀 전하를 티 파티에 초대하고 싶은데 와주실까요? 제가 먼저 초대장을 드리고 싶은 건 처음이라 너무 떨리는데···.”


“어머, 공작 영애의 티 파티 초대라면 전하께서도 기쁘게 받아주실 거예요.”


“맞아요, 영애가 여는 티파티가 노잼일리도 없고요.”


응? 빈 그릇들을 지나가던 서버에게 떠맡기다 들은 말에 순간 접시 하나를 떨어뜨릴 뻔했다.


난 사진 담당이라 대사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내 관할 구역에서 대사 오류가 일어났으니 잡아야 할 것 같은데.


진작에 마이크 앱 켜두고 있을걸, 후회하다가 어느새 영애들 뒤로 서 있는 설 팀장을 봤다.


불지옥 마이크 앱이 켜진 화면을 한번 흔들어 보인 설 팀장은 본인 자리로 쿨하게 돌아갔다. 저 사람 청력이 얼마나 좋은 거야?


나는 어느새 내 구역 한 바퀴를 돌고, 한 바퀴를 더 돌지 고민했다. 그때 연회장을 살며시 나가는 데이지 황녀의 뒷모습을 봤다.


뭐지? 더 생각하기 전에 반사적으로 그 뒤를 쫓았다. 연회장 밖 복도 저편으로 서브 남주의 뒷모습이 보였다.


“사이프!”


흰 드레스 자락을 양손에 쥔 데이지 황녀가 어두운 복도를 팔랑팔랑 뛰었다.


얇은 천들이 덧대어 있던 드레스 천이 휘날리며 정말 커다란 나비가 날아가는 듯한 광경에, 서브남주인 사이프와 나는 순간 넋을 잃었다.


순식간에 사이프의 앞에 선 데이지는 그에게 무언가 내밀었다. 보아하니 어제 시장에서 산 팔찌 같은데.


가판대 앞에서 한참을 열심히 고르더니 서브 남주한테 주려고 그렇게 시간을 썼나 보다.


“이거, 선물이에요.”


두 손으로 팔찌를 공손히 받아 든 섭남이 흔들리는 눈으로 간신히 대답했다.


“황녀 전하, 어찌 이런 귀한 것을 제게···.”


“아잇, 귀하지 않아요. 어제 몰래 시장에 나갔다가 산 걸요. 직접 만들어주고 싶었지만 제가 손재주는 없어서요.”


나는 세삼 데이지 황녀의 키가 자랐음을 깨달았다. 황제며 오빠들도 다 장신이더니 유전자의 힘인가 보군.


데이지 황녀도 이젠 어린애라기보다 아가씨라는 호칭이 더 어울려 보였다.


“사이프는 황궁에서 사귄 제 첫 번째 친구잖아요. 짧았지만 데뷔당트 때까지 제 놀이 친구를 해주면서 황궁에서 적응도 도와주고, 여러모로 고마웠어요. 본래 약초학 공부하던 일만으로도 벅찼을텐데.”


“···그렇지 않습니다. 전하와 함께하는 시간은 저도 무척 즐거웠는걸요. 선물은 감사합니다. 소중히 간직하지요.”


맑은 녹안이 부드럽게 웃는다. 와···, 진짜 잘생겼다. 사람이 저렇게 미소를 짓는데 남주가 아니라니 말이 안···


···되지 않지. 나는 플루토키아가 당부했던 ‘서브병’을 상기하며 입속의 여린 살을 깨물었다.


“아참, 사이프가 추천한 대로 시장에서 씨앗과 모종을 조금 사 왔답니다. 내일부터 텃밭에 심어보려고요.”


“그렇군요. 제가 말씀드린 대로 그 아이들을 약초로 활용하기 위해선‒”


무언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 이어졌다. 갑자기 튀어나오는 약초와 의학 지식들에 난 멍해졌고, 황녀는 생기가 점점 살아났다.


황녀는··· 약초학을 배우고 싶은 건가?


“아하, 여기 계셨군요. 메이드복이 잘 어울리시네요.”


내 왼쪽 귓가에 웬 남자의 속삭임이 따뜻한 숨결과 함께 느껴졌다. 뭐야! 화들짝 놀라 그 자리에서 반쯤 뛰었는데, 작은 소란에 황녀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려는 게 보였다.


이런, 하고 낮은 탄식이 들리면서 내 몸이 삽시간에 옆에 있던 테라스 밖으로 끌려갔다.


테라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난간에 몸을 기대며 납치범의 얼굴을 쏘아보려다, 익숙한 안면임을 깨닫고 입만 벌렸다.


당신이 왜 여기서 나와?


“‑하루 만에 보는 거긴 하지만 굉장히 오랜만에 뵙는 기분이네요. 설 팀장님 밑으로 들어가셨다고 들었는데 좀 어떤가요?”


“어떻냐고요? 그걸 무슨 사람을 납치하고 물어요?”


“죄송합니다, 놀라게 해드리고 싶었는데 자칫하면 황녀에게 들킬 것 같아서요.”


설이설 팀장과 똑같은 웨이터 차림을 한 플루토키아가 어설프게 웃었다.


“설 팀장님이 일을 빠르게 가르쳐주시죠?”


“그렇더라고요.”


볼멘소리로 대꾸하자 플루토키아가 생수병을 따서 건네줬다. 라벨 디자인도 그렇고 생수 발원지가 진천이라고 쓰여있는 걸 보아 이승 생수인 듯한데.


어쨌든 거절 안 하고 들이켰다.


“그런데 저희 같은 사용인들이 이렇게 테라스에서 딴짓 해도 되나요? 이런 데는 보통 귀족들이 나와서 밀회, 같은 거 하지 않나?”


내가 말해놓고 머쓱하군. 내가 입가를 소매로 벅벅 닦자 손수건이 내밀어졌다. 귀퉁이에 P라고 수놓아져 있군.


“당연히 안 되죠. 저희는 이 황실의 사용인으로서나, 로맨스판타지과의 근무자로서나 딴짓을 하고 있는 겁니다.”


“당당하시네요···. 이 물만 다 마시고 가죠.”


나는 생수병을 움켜쥐고 다시 물을 들이켜기 시작했다. 어느새 옆으로 다가와 난간을 두 손으로 잡고 선 플루토키아가 눈을 감았다.


그제서야 연회장에서 곡이 흘러나오고 있음을 자각했다. 언제 춤추는 시간이 된 거지? 테라스 문 너머로 황녀에게 다시 입장하라는 권유가 들렸다.


바람은 선선히 불어왔고, 이름 모를 클래식 선율은 부드러웠다. 게다가 옆엔 미남도 있지. 지금이 일하는 중만 아니었다면 꿈속에서나 그릴 법한 풍경인데.


흐트러진 머리를 손으로 쓸던 플루토키아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쏟아지는 달빛을 자신의 영롱한 적안으로 오로지 받아내며, 내게 물어왔다.


“한 곡 추시겠습니까?”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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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20) 영웅 24.09.10 7 0 12쪽
20 19) 친우 24.09.09 7 0 11쪽
19 18) 황자 24.09.06 8 0 11쪽
18 17) 간섭 24.09.05 7 0 12쪽
17 16) 서천 24.09.04 10 0 12쪽
16 15) 꽃밭 24.09.03 7 0 11쪽
15 14) 마석 24.09.02 7 1 11쪽
14 13) 간호 24.08.30 10 1 11쪽
13 12) 업무 +1 24.08.29 8 1 10쪽
» 11) 청춘 24.08.28 10 1 11쪽
11 10) 사진 24.08.27 9 1 11쪽
10 9) 사과 24.08.26 9 1 10쪽
9 8) 면담 +1 24.08.23 9 1 11쪽
8 7) 중립 24.08.22 10 1 11쪽
7 6) 조작 24.08.21 9 1 11쪽
6 5) 알현 24.08.20 9 1 11쪽
5 4) 조연 24.08.19 11 1 10쪽
4 3) 최악 24.08.18 11 1 11쪽
3 2) 작명 +1 24.08.18 13 1 10쪽
2 1) 면접 24.08.17 14 1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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