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승시청 웹소설국 로맨스판타지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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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내리화
작품등록일 :
2024.08.17 21:54
최근연재일 :
2024.09.16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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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1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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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조작

DUMMY

플루토키아가 급히 내 팔을 잡고 뒤로 이동했다. 황제의 호박색 눈이 방금까지 내가 서있었던 자리를 응시하다, 데이지에게로 천천히 돌아갔다.


와, 살 떨려. 어느새 땀으로 축축해진 손바닥을 대충 닦으며 속닥였다.


“···제가 사람들과 너무 가까이 서 있었나요?”


또 실수했다. 글로만 읽던 로판을 실시간으로 경험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몰입해서 데이지 황녀 옆에 너무 가까이 서있었어···.


“살짝 그랬던 것 같습니다. 바짝 붙어 서있던 건 아니니 흐릿하게 보였을 테고, 황제는 자신이 흥미를 가진 것에만 관심을 두는 극단적인 인물이라는 설정이라···. 설령 봤다 하더라도 금방 잊을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플루토키아의 말대로, 황제는 자신이 본 이상 현상(나)에 대해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14년 만에 돌아온 황녀를 응시할 뿐이라 다행이다.


그렇지만.


야, 김너바나야. 사고 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사고를 칠 뻔하냐? 이름 뜻처럼 죽고 싶어?


아니 업무 첫날에 사고를 얼마나 치는 거야? 사회 초년생이라도 정도가 있어야 할 거 아냐?


내가 웹소설 주인공이었으면 독자들 탈주했어! 답답하다고!


난 소리 없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겉으론 평온해 보이는 플루토키아와 황제를 보고 있으니 더 미칠 것 같다. 차라리 욕먹는 게 편할 것 같아.


자책에 자책을 더하고 있을 때 알현실 문이 열렸다. 로브를 머리끝까지 덮어 쓴 남자였는데, 그 옷차림만으로도 술사임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황제와 3 황자에게 공손히 인사한 그는, 혈당체크기 같은 물건으로 데이지의 검지를 찔러 피를 내더니 흙만 담긴 화분에 떨구기 시작했다.


“!”


한 네 방울 쯤 떨어뜨렸을 즈음, 흙이 들썩들썩 하더니 금색 새싹이 돋아났다.


술사는 들고 있던 화분을 데이지에게 공손히 들려주곤 곧장 무릎을 꿇었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황금 새싹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던 신하들도 우르르 무릎을 꿇고 외쳤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데이지의 얼굴이 삽시간에 불타올랐다. 황제는 그런 데이지를 힐끔 쳐다볼 뿐, 오히려 턱을 괴면서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이름도 ‘데이지’라니, 참으로 기특하지 아니한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3 황자가 감정을 억누르듯 또박또박 발음하며 물었다.


“짐이 다스리는 땅의 백성들은 식물의 이름에서 글자를 일부 가져와 자신의 성이나 이름으로 삼지. 허나 이름의 첫 글자부터 마지막 글자까지 전부 가져다 쓸 수 있는 건 황족뿐이다.”


황제가 데이지 황녀를 뚫어지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고로, 데이지꽃의 이름을 전부 쓰는 황녀 역시 황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겠군.”


나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난 그저 꽃 영문명이 너무 길어서 일부만 가져다 쓴 것 뿐인데, 이 세계관 안에선 저렇게 서술된다고?


···내가 한 사소한 결정들과 그 이유가, 이 세계관에선 중요한 설정이 되어 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손가락 끝이 저려왔다. 난 한 사람의 새로운 삶에 이렇게 마구잡이로 영향을 미칠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 아닌데.


설 팀장이 한 말이 맞았어.


난 이 일에 사력을 다해야만 해···.


“하지만 폐하, 데이지꽃은 너무나도 흔한 꽃이지 않습니까. 데이지는 백성의 꽃입니다. 황족을 대표할 만한 식물이 아니란 말입니다.


적어도 황녀 전하의 이름을 바꾸시지요.”


설이설 팀장에게 들었던 말을 소설 속에서 다시 듣고 있자니 심장이 쿵쿵 뛰었다.


머리로는 아닌 걸 알고 있지만, ‘네가 이름을 잘못 정한 탓이야’라고 외치는 듯 했다.


황제는 황좌의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리기 시작했다. 고민하는 건가?


규칙적인 둔탁음은 알현실을 침묵에 빠뜨렸다. 황실의 예법을 철저히 배운 이들은 황제의 고민을 방해하지 못했지만, 생기 넘치는 들판에서 자라온 황녀만은 달랐다.


“저, 저는— 바꾸고 싶지 않아요. 제 어머니가 지어주신 이름이에요.”


황녀의 팔다리가 볼품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황제에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려는 행동에서 곧은 의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황궁에서 이 이름을 계, 계속 쓸 수 없다면···, 원래 제가 살던 고향으로 돌아가 죽은 듯 조용히 살겠습니다. 제가 ‘데이지’로 계속 살 수 있도록 해주세요.”


황제와 내가 웃었다. 어찌 거절할 수 있을까?


***


플루토키아가 보여준 프린트에는 황가의 가계도가 적혀있었다.


“황녀의 오빠가 셋인데 전부 어머니가 다르네요? 황후가 4명이라니.”


“황후의 자리는 저주받았다며 온 나라에 소문이 자자하더군요. 부인이 네 명이나 그리 되었으니···. 그래서 현재 황후의 자리도 14년 동안 공석인 상태라고 합니다.”


첫 번째 황후는 전쟁 중 황태자를 낳은 뒤 산후 후유증으로 사망.


두 번째 황후는 독살로 피살.


세 번째 황후는 바람을 피워 사생아까지 낳아 폐위.


마지막, 데이지의 어머니인 네 번째 황후는 심장이 뛰지 않는 황녀를 낳은 뒤 황궁의 인근 숲에서 변사체로 발견.


나는 종이를 팔락팔락 넘겨 네 번째 황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읽었다.


수도 외곽 농부의 딸로 태어나, 비상한 머리를 지녀 8세 때 수도권에 찾아온 가뭄을 해결. 이 일로 선황제의 눈에 띄어 현 황제의 어릴 적 놀이 친구로 발탁되어 황궁을 드나들었음.


황제의 소꿉친구였던 셈이군. 그럼에도 신분은 여전히 평민이었기 때문에 시기질투도 많이 샀던 듯하다.


강제로 네 번째 황후 자리에 오른 뒤, 딸만큼은 자신처럼 모욕을 받게 하고 싶지 않다며 빼돌리고 죽은 아기의 시신을 구해 황제를 속였을 정도면···.


“왜 데이지 황녀와 함께 사라지지 않고 황궁에 남아 있다가 근처 숲속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거죠?”


“그게 황제에 대한 복수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사연 참 기구하군. 나는 데이지가 깜깜한 방 한가운데 오도카니 선 뒷모습을 바라봤다.


이곳을 안내했던 시녀가 말하길, 14년 전 황제가 네 번째 황후의 임신 소식을 듣고 미리 준비해놨던 아기방이라 했다.


어둠이 눈에 익숙해지자 방 풍경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기존에 있던 아기 침대가 퀸사이즈 침대로 급하게 바뀐 것 말고는 모든 게 14년 전 그대로인 듯하다.


천장에 달린 모빌도, 파스텔 톤의 동물 인형들도, 폭신해서 걷기 힘든 카펫도 그대로 놓여져 있었다. 나는 앓는 소리를 내며 투덜댔다.


“아무튼 황제도 제정신은 아닌 것 같아요. 본인이 준비했던 아기방을 그대로 유지시켰다가, 14살이 된 딸을 찾자마자 냅다 여기서 지내게 한다니.”


“뭐, 다른 가구들은 황녀가 원하는 대로 차차 바꿔주신다 하셨으니까요.”


아기방은 무척 넓었다. 그곳에 홀로 서 있는 데이지 황녀는 마치 길을 잃은 것 같았다.


슬슬 걱정이 되려던 찰나, 황녀가 머리를 감싸 쥐며 돌고래 소리를 내질렀다.


“–이게 뭐야!!”


뭐지, 갑작스런 두통인가!? 당황해서 다가가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는데, 플루토키아가 황녀를 유심히 관찰하더니 말했다.


“전생의 기억을 되찾은 것 같군요.”


“전생의 기억이요? 갑자기? 아니 뭐 기억은 원래 갑자기 찾아지긴 하는 건데···, 설마 죽기 전 이승에서의 삶을 말하는 거예요?”


“예. 이승에서 살아있을 때, 우연히 지나가듯 읽었던 웹소설에 빙의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잠깐만,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지식과의 모순을 느끼고 손을 올렸다.


“질문해도 될까요? 분명 망자가 로판에서 빙의자로서의 삶을 살아 결말을 내야, 저희가 그걸 웹소설로 써서 이승에 퍼트린다고 했잖아요.”


“예.”


“그런데 어떻게 지금 빙의자가 이 웹소설을 읽었다고 생각하는 거죠? 저희가 아직 쓰지도 않았는데?”


플루토키아가 또 내 시선을 피했다.


“빙의자가 그렇게 생각하도록 저희가 조작하기 때문입니다.”


“···.”


순간 아득해졌다. 이승에서 읽어본 적도 없는 웹소설을 읽었다고 기억을 조작당하고, 또 그 소설에 빙의됐다며 생각하며 제2의 삶을 살아간다니.


이거 좀, 비인간적이지 않나? 이게 맞나? 망자에게 주어진 자유의 범위가 알면 알수록 좁아진다.


“전부 이런 건 아닙니다. 전생의 기억을 되찾지 않고 로판 세계관을 살다가는 이들도 많으니까요.”


플루토키아가 덧붙인 말에도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순간 얼어붙은 분위기를 깬 건 또 소리를 지른 망자 데이지였다.


“황제는 소설에서 황후 집착남이라 엄마 닮은 데이지한테도 집착하는데, 대체 어떻게 살아남으라고! 황제면 다야!?”


“!??”


나도 동의하지만 그렇게 큰 소리로 말해도 되나!? 황실 모욕죄로 잡혀가면 어쩌려고? 황녀라 성립이 안 되나?


데이지는 씩씩대다가 제 분에 못이며 침대 위로 쓰러졌다. 뒤이어 이불을 찢을 듯이 움켜쥐고 얼굴을 가리더니 속삭였다. 오두막집에 돌아가고 싶어···.


잠시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이불이 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 하는 걸 보니 잠에 든 모양이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어색해졌다. 안절부절못하던 플루토키아가 창가로 걸어갔다.


“이리 와서 창밖을 보시겠습니까?”


그가 걸어간 궤적을 따라 창가에 섰다. 밖에 뭐가 있나? 살짝 의심하며 창밖을 내다봤다가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아니, 밤하늘이 왜 이래요?”


별은커녕 달도 뜨지 않았다. 일말의 반짝임도 없이, 그저 검은색뿐. 이걸 밤하늘이라 부를 수 있을까?


내가 밤바다 위에 거꾸로 매달려 심해를 올려다보는 기분이다. 묘한 불쾌감이 느껴져 괜히 팔뚝만 매만졌다.


“생성된 지 얼마 안 된 세계관에서는 달과 별이 뜨지 않습니다. 아직 세상에 설정되지 않은 부분이 많아 불안정하거든요.”


플루토키아가 커튼을 잡으며 말했다.


“저흰 별과 달이 얼마나 뜨는지 매일 밤 확인하면서 세계관의 완성도가 어느 정도 올라갔는지 체크해야 합니다.”


까다롭구만. 플루토키아 성이 폴라리스(북극성)인데 북극성 하나는 떴다고 쳐두면 안되나?


“저도 이런 밤하늘은 불쾌합니다. ···내일이면 달이 뜨겠지요. 항상 제일 먼저 떠오르거든요.”


음? 언제나 친절했던 플루토키아의 목소리가 방금은 불퉁하게 들렸다. 의아하게 쳐다보는 내 시선에도 불구하고, 그는 태연하게 커튼을 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궁전 앞으로 걸어오는 한 남자가 눈에 띈 건.


“잠시만요! 커튼 치지 말아봐요. 밖에 누군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어요.”


수수깨끼의 남자는 등불을 들고 황녀궁 앞을 지나가는 중이었다. 여름날 이파리처럼 진한 남자의 녹안이 주황색 불빛에 반사되어 일렁이는 게 보였다.


우리는 등장인물들에게 보이지 않으니, 남자가 우리의 시선을 느꼈을 리 없다.


그러나 남자는 돌연 걸음을 멈추고 우리가 있는 황녀의 방 창문을 올려다봤다.


세상에, 저 적재적소에 잘 배치된 이목구비를 봐라. 녹안과 잘 어우러지는 베이지색 머리는 또 어떠한가.


저런 남자를 만난다면 50년 동안 술자리에서 자랑을 해댔을 것이다.


완벽한 외모가 그의 정체를 말해주고 있었다.


틀림없어, 저 사람은 남주야!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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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18) 황자 24.09.06 9 0 11쪽
18 17) 간섭 24.09.05 8 0 12쪽
17 16) 서천 24.09.04 11 0 12쪽
16 15) 꽃밭 24.09.03 8 0 11쪽
15 14) 마석 24.09.02 7 1 11쪽
14 13) 간호 24.08.30 11 1 11쪽
13 12) 업무 +1 24.08.29 9 1 10쪽
12 11) 청춘 24.08.28 10 1 11쪽
11 10) 사진 24.08.27 10 1 11쪽
10 9) 사과 24.08.26 10 1 10쪽
9 8) 면담 +1 24.08.23 10 1 11쪽
8 7) 중립 24.08.22 11 1 11쪽
» 6) 조작 24.08.21 10 1 11쪽
6 5) 알현 24.08.20 10 1 11쪽
5 4) 조연 24.08.19 11 1 10쪽
4 3) 최악 24.08.18 12 1 11쪽
3 2) 작명 +1 24.08.18 14 1 10쪽
2 1) 면접 24.08.17 15 1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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