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승시청 웹소설국 로맨스판타지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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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내리화
작품등록일 :
2024.08.17 21:54
최근연재일 :
2024.09.16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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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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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30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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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간호

DUMMY

데이지 황녀의 가슴팍 위로 갈색 얼룩이 번지고 있었다. 달려온 시녀들이 황급히 흰 천으로 쏟아진 차를 수습하기 시작했다.


황녀의 손에 부러진 찻잔 손잡이가 쥐어져 있었다. 시선을 살짝 내리자 황녀의 무릎에 찻잔이 나뒹구는 게 보였다.


공작 영애가 울상을 지으며 황녀의 팔을 부축해 일으켰다.


“전하, 괜찮으세요? 맙소사, 차가 뜨거울 텐데···, 일단 옷을 갈아입으셔야‒”


“다 식은 차라 괜찮아요.”


데이지 황녀가 손을 들어 올려 저지했다. 애써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입술 끝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차가 담긴 찻잔의 손잡이가 부러져 일어난 사고다. 딱히 누구의 잘못은 아니지만, 산골 출신 황녀의 첫 티파티가 실패로 끝난 건 분명했다.


황녀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다들 해산하는 분위기가 됐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인 공작 영애에게 동정의 눈길을 던지곤 사람들을 따라 유리 온실을 나갔다.


물을 마시며 휴식을 취하고 있던 말이 도로 끌려 나와 마차에 묶였다. 투레질 하는 말의 머리를 쓰다듬은 플루토키아도 마차 지붕에 가볍게 올랐다.


마차 지붕은 승차감이 너무 나쁘던데. 나는 끼고 있던 팔짱을 풀고 말을 건넸다.


“다시 황궁으로 가시는 거예요?”


“예. 황제가 황녀를 과잉보호하는지라 줄곧 황성에 갇혀 지내다시피 했는데, 사고 때문에 바로 돌아가야 해서 마음이 좋진 않군요. 황녀도 첫 티파티를 무척 기대했거든요.”


“다들 고생이네요.”


“네가 남 걱정할 때가 아니다.”


등 뒤에서 들린 설 팀장의 목소리에 몸이 굳었다. 뭐지, 이 불길한 느낌? 팀장이 저렇게 말해서 좋았던 꼴을 못 봤는데?


살짝 뒤를 돌아보니 웬 낡은 짐마차에 설 팀장이 올라타 있었다. 팀장이 저기 타 있으면. 나도 타야 하는 거 아닌가?


“공작가에 잠시 들렀던 상인의 수레라는데, 수도를 벗어나 다른 도시로 갈 거래. 너도 빨리 올라타.”


나는 내밀어진 팀장의 손을 얼결에 붙잡았다.


“수도를 벗어나요? 이야기는 수도에서 진행되는데 왜 밖으로 나가죠?”


“내가 누누이 말했지, 너랑 나는 이야기 진행을 보는 게 아니라 세계관을 살피는 게 일이라고.”


얇은 팔 하나로 나를 쉽게 마차로 끌어 올린 설 팀장이 말했다.


“너도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진 알아야지.”


***


우리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포대 더미에 쌓여 비포장도로를 달렸다.


깜빡 선잠이 들었다 깰 때마다 낮과 밤이 확확 바뀌어 있었다. 이 세계에서 지내면서 시간이 제일 빨리 흘러가는 것 같은데.


체감 상 낮밤이 7번은 바뀐 것 같다. 남들이 보기엔 일주일 간 이 어색한 상사와 할 일도 없이 단둘이서 있는 시간을 견딜 수 있을까 걱정하겠지만. 의외로 그렇지 않았다.


설 팀장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려 속을 게워 낼까 말까를 반복했기 때문이다. 짜릿함도 이런 짜릿함이 없다. 이건 뭐 구토 러시아 룰렛도 아니고.


우리 둘은 각기 다른 이유로 식은땀을 흘렸다. 이 정도 흔들림으로 멀미를 심하게 할 거면 황궁 마차 지붕에선 어떻게 버틴 거지? 아, 그때도 안색은 별로긴 했구나···.


봉투, 토할 봉투라도 없나? 짐마차를 무단으로 뒤적이던 나는 자포자기로 아무 말이나 뱉어냈다.


“저 타X레놀 있는데 그거라도 드셔보실래요? 멀미약은 아니긴 한데 플라시보 효과를 노려보면···.”


“나 같은··· 차사들은, 이승 음식을 바로 섭취할 수 없어. 제사상에··· 바쳐야 먹지. 약도 마찬가지야···.”


“일단 누우세요. 이러다 진짜 죽겠어요.”


“이미 죽었어, 천 년 전쯤에···.”


미치겠다, 뭔 말을 못 하겠네. 나는 포대를 어찌저찌 밀어 마련한 공간에 연약한 팀장을 뉘었다.


짐마차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어디까지 왔는지 가늠해 보던 나는, 마차 바퀴가 점차 평지를 달리고 있는 걸 보고 속으로 환호했다.


저 멀리 도시를 둘러싼 성벽도 보였다. 거의 다 도착했나 봐. 나는 주변을 더 둘러보다가 성벽 밖에 우후죽순 세워진 천막들을 발견했다. 저건 뭐지?


내가 의문을 품는 동시에 마차가 덜컥 세워졌다. 깜짝 놀란 말들의 울음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낯선 이의 목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졌다.


“잠깐, 거기! 어디서 오는 마차요?”


“수도에서 오는 길입니다만, 뉘신데 길을 막습니까?”


“우린 이곳 리시안 영주님 소속 기사단이오. 이 도시는 현재 폐쇄된 상태이니 돌아가시오.”


“아니, 어쩌서 폐쇄됐단 말입니까!? 그런 소식은 전혀 듣지 못했는데!”


뭐야,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나는 마차에 내리지도 못하고 입만 벙긋대다, 힘겹게 상체를 들어 올린 설 팀장과 눈이 마주쳤다.


“슬슬 시작인가 본데.”


뭐가요? 내 눈이 크게 뜨이는 걸 본 설 팀장이 친절하게 얘기해주었다.


“전염병 말이야.”


“공작저 부엌에서 국경 쪽은 벌써 감염됐다는 말은 들었지만, 여긴 비교적 수도 근처잖아요. 전염이 이렇게 빠르다고요?”


“그러니까 전염병이지.”


길게 하품을 한 설 팀장이 마차가 멈춰서 이제 살 것 같다는 둥, 역시 가마가 제일 낫다는 둥 종알대더니, 날 지나치고 마차에서 훌쩍 내렸다.


그러고는 성벽 밖에 세워져 있는 천막 쪽으로 거침없이 걸어갔다. 몇 분 전까지 멀미로 고생하는 사람으로는 도저히 안 보이는데, 회복력이 얼마나 좋은 거야?


나도 허둥지둥 마차에서 내려 그의 뒤를 쫓아갔다. 천막은 의외로 멀지 않아서 금방 도착했는데, 분위기가 여간 심상치 않았다.


흰 천으로 코와 입을 막은 이들이 천막 사이를 돌아다니고, 천막 안에서 얕은 신음이 들려왔다.


“아하, 천막을 왜 성벽 밖에 쳐놨나 했더니. 도시 내 감염자들을 이곳에 격리해 둔 거였군.”


설 팀장이 주머니에서 흰 천을 꺼내 내게 쥐여 주었다.


“마차 타기 전에 미리 엑스트라 백성 복장을 입어놔서 다행이야. 우리도 이거나 쓰자.”


“이건 왜···. 간호하는 일을 돕자고요?”


뭘 당연한 걸 묻느냐는 눈빛이 돌아왔다.


“저희가 캐릭터들에게 직접적으로 간섭해도 되는 거예요? 엑스트라긴 하지만.”


“엑스트라들이 전염병으로 우르르 사망할 시 이 세계는 사라진 캐릭터들을 자동으로 보충하려 드는데, 그 과정에서 세계의 재생력이 과하게 소비돼. 그럼 주요 스토리에도 영향이 간다.”


설 팀장은 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엑스트라도 최대한 살려야 하는 게 우리 일이야. 전쟁 나면 이 정돈 아무것도 아니다. 그땐 시체가 산더미일 텐데 뭐.”


“하지만 여긴 로맨스판타지 이야기잖아요. 전염병이 왜 나와요?”


“로판은 전쟁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세계야. 전염병이라고 없을까.”


그건 그렇긴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내가 이 일을 하기 전 로맨스판타지는 그저 즐겁고 밝은 이야기를 하는 이미지였다.


예쁜 드레스를 입고, 반짝이는 보석 장신구를 하고, 잘생긴 남자 주인공과 행복하게 사는 이야기.


어느 천막에서 고통에 찬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간호를 위해 돌아다니던 사람들이 황급히 하던 일을 멈추고 천막으로 들어갔다.


누군가 흐느끼는 목소리는 이곳의 배경음악이었다. 꺼질 기세도 없이 이어지는 울음소리에 간간이 신음이 끼얹어져 내 멘탈을 흔들었다.


설 팀장이 내 얼굴에서 자꾸만 흘러내리는 천을 잡아 단단히 묶어주며 말했다.


“로맨스판타지 유형이 얼마나 다양한데. 그저 밝은 이야기도 있지만 시리어스물도 있고, 피폐물도 있고. 이 정도로 놀라면 안 된다, 너.”


나도 로맨스판타지에 카테고리가 여럿 갈리는 건 진작 알고 있었다. 저번에 플루토키아에게 이 소설 장르가 피폐물이냐 묻기도 했고.


그렇지만 안일하게 생각했지. 그다지 심각하게 다룰 거라 생각은 안 했어. 어쨌든 결론은 해피엔딩일 거라 생각해서···.


로맨스판타지 세계관에서 사람들이 죽어가는 한복판에 서 있으려니 숨이 떨렸다.


언제부턴가 갖고 있던, 로맨스판타지라는 장르의 편견을 처음 발견한 순간이었다.


내 안색을 살피던 설 팀장이 내 어깨를 손등으로 툭 두드렸다.


“이 정도면 심각한 수준도 아냐. 가자.”


우리는 간호 일을 도우러 왔다고 둘러대며 치료 무리에 은근슬쩍 끼어들었다. 일손이 어지간히 부족했는지 신원 체크도 하지 않고 바로 통과되었다.


침대가 부족해 바닥에 깔린 천에 누워있는 엑스트라들-그러니까 백성들은 전부 얼굴이 붉어져 고열 증상을 보이고 있었다.


기침은 하는 이들도 있고, 아예 목을 못 쓰는 경우도 있고. 일단 공통 증상은 갑작스러운 고열과 오한으로 보였다.


···이거 인플루엔자 증상 아냐? 아니다, 난 의사가 아냐, 판단하지 마! 섣부른 진단이 제일 위험해!


나는 제일 어려 보이는 환자의 이마 위로 깨끗한 물수건을 올려주었다. 어린아이일수록 고열이 위험한데 말이지.


문득 동생 생각이 났다. 그 애도 어릴 적에 이렇게 고열에 자주 시달리곤 했는데.


“···.”


나 진짜 보건직 공무원이라도 된 것 같다. 얼굴에 반쯤 걸쳐 묶은 천 안으로 습기가 차 불쾌감이 일렁였다.


그때 누군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순간 설 팀장인가 싶어 고개를 획 돌렸다.


“안녕하세요, 일손이 부족하다고 들어서 도우러 왔는데요.”


후드를 깊게 눌러쓴, 그 와중에 코와 입을 가리는 천은 야무지게 착용한 사람이 내 뒤에 서 있었다.


뭘 이렇게까지 꽁꽁 가린 거지? 병이 옮을까 봐 겁났나? 나는 떨떠름한 목소리로 구비된 간호 물품들을 가리켰다.


“아, 그럼요. 이쪽으로‒”


근데 어째 목소리가 익숙하다? 난 눈을 가늘게 뜨고 후드 안을 노려봤다. 그러면 마치 그 안이 보이기라도 할 것처럼.


내 표정에 상대도 당황했는지 어쩔 줄 몰라 하며 주변을 둘러보는 척하기 시작했다. 그 작은 움직임에 후두 안에 숨어있던 흰 머리카락이 튀어나왔다.


천막 안의 미약한 등불로도 비치는 반투명한 백발은 무심천 윤슬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이런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은 살면서 딱 한 명 봤지, 데이지 황녀라고···


···데이지 황녀!? 왜 여기 있어!? 황궁에 있어야 할 아가씨가?


잠깐만, 그 전에! 팀장님! 팀장님! 저 황녀랑 이렇게 직접적으로 접촉해도 돼요!? 안 되지 않아요!?


나는 보이지 않는 팀장을 찾아 눈동자를 미친 듯이 굴리다, 저 뒤편에 서 있는 플루토키아와 눈이 마주쳤다.


난감한 표정으로 눈썹을 우그러뜨리고 있던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손짓으로 내게 신호를 주기 시작했다.


···뭔 소리야? 손이 목을 좌우로 왔다 갔다 하고 있는데 뭐 말 더 하면 죽이겠다는 뜻인가?


“저기, 방해가 되면 갈게요. 그렇지만 조금이라도 돕고 싶어서···. 물수건 빨래라도 하면 안 될까요?”


황녀의 목소리에 문득 정신이 들었다. 뭐 씹고 지나갈 수도 없고, 어쩔 수 없다, 엑스트라 연기를 시작할 수밖에.


“···아니에요, 저기 물수건들이 준비되어 있으니 하나 챙겨서 절 따라오세요.”


내 말을 들은 플루토키아가 이마를 부여잡았다. 어쨌든 수신호는 불발된 것 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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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17) 간섭 24.09.05 7 0 12쪽
17 16) 서천 24.09.04 11 0 12쪽
16 15) 꽃밭 24.09.03 8 0 11쪽
15 14) 마석 24.09.02 7 1 11쪽
» 13) 간호 24.08.30 11 1 11쪽
13 12) 업무 +1 24.08.29 9 1 10쪽
12 11) 청춘 24.08.28 10 1 11쪽
11 10) 사진 24.08.27 9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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