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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내리화
작품등록일 :
2024.08.17 21:54
최근연재일 :
2024.09.16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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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3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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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꽃밭

DUMMY

소란은 금방 수그러들었다. 한바탕 쏟아낸 황녀는 아무 일도 없었던 양 막자사발이 준비된 들판 구석으로 걸어갔고, 고개를 들지 못하는 남주가 그 뒤를 졸졸 따라갔다.


황녀는 사람들이 모아온 민들레 송이들을 막자사발 안에 넣고 마석가루와 물을 일정 비율로 넣었다. 어림짐작으로 휙휙 넣는 게 딱 보아도 여러 번 해본 솜씨였다.


레시피 자체는 단순하지만 행동에서 전문성이 느껴진달까, 무언가 망설이는 움직임 없이 신속하게 해열제가 제작되었다.


문제는 아가씨의 정체가 소문이 나쁜 황녀란 걸 깨달은 사람들이 그와 눈을 마주치거나 말을 섞으려 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딱히 적대하려는 건 아니고. 평생을 지방 소도시에서 살아온 일반 백성들이라, 갑자기 나타난 황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하는 듯했다. 일단 높은 사람이니 최대한 접촉하지 말아야 한다고 여길 뿐.


황녀, 시무룩해하지 마라. 네 등장 소식은 이미 이곳 도시 영주의 성 깊숙이 들어갔을 테니까.


그 영주가 제정신이라면 지금쯤 맨발로 나와서 널 환영하러 오고 있겠지··· 아니 나랑 눈은 마주치지 말고! 아냐! 나한테 왜 오는데! 오지 마!


“저, 자꾸 부탁드려서 죄송하지만···.”


플루토키아가 황녀의 손에서 약병들을 냉큼 받아 들고 대답했다.


“해열제들은 저희가 간호 인원에게 배분하겠습니다.”


황녀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사이 남주가 처음 보는 병사들과 나누는 짧은 대화가 들렸다.


“영주님이 이곳으로 오고 계십니다. 천막을 따로 마련했으니 그곳에서 전하와 기다리고 계시지요.”


“그러지.”


그래, 영주가 오는 동안 황제의 딸을 병자가 가득한 이곳에 방치하고 있을 순 없을 거다.


황녀가 뜬금없이 나한테 말을 왜 거나 했더니, 본인도 상황이 이렇게 될 것을 예상했던 건가.


아니 근데 왜 말을 걸어도 하필 나한테···. 난감해 죽겠네. 안 그래도 상사의 눈치를 또 살피는 내게 설 팀장이 툭 던지듯 말한다.


“로맨스판타지과가 창설된 후로 빙의자와 이렇게까지 접촉을 많이 하는 신규는 네가 처음이다.”


“저 이제 큰일 나요?”


“아니. 빙의자와의 접촉 자체는 문제가 안 돼. 접촉 후 행동이 어떠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빙의자가 하는 말에 대답해 주는 엑스트라 수준은 오케이. 그렇지만 지나치게 대화를 이끌어가며 엑스트라가 아닌 주연 이상의 역할을 하게 되면···.”


설 팀장은 손으로 목을 긋는 척을 했다. 나는 진지하게 물었다.


“죽어요?”


“아니, 해고당할 수 있다고···. 우리 저승은 그렇게 과격하지 않아요. 이승에 있는 시청들처럼 징계위원회 거쳐서 견책(경고)이나 감봉으로 끝날 수도 있고. 중징계를 받을 수도 있고. 최악이면 파면당하는 거지 뭐.”


흠, 철밥통 공무원도 잘릴 수 있군. 내가 고개를 대충 주억거리자 설 팀장이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애초에 저승은 원래 죽어야 오는 곳이라 저승 측 공무원들은 생자를 일부러 죽일 일도 없고, 죽일 수도 없어. 그렇다고 맘 놓고 저승을 돌아다니면 안 되는 거 알지?”


“왜요?”


설 팀장이 철없는 어린애처럼 이유를 되묻는 내 이마에 딱밤 한 대만 때리고 싶다는 듯 호두턱을 만들더니 대꾸했다.


“왜긴 왜야, 망자-그러니까 죽은 영혼들이 저승에서 너 같은 생자 발견하고 눈깔 뒤집어져서 달려들 수 있으니까 하는 말이지.


안 그래도 죽기 싫어서 난리 치다가 어거지로 저승에 끌려오는 영혼이 대부분인데 산 사람을 봤다? 나만 죽을 수 없다고 달려드는 거야.”


줄곧 얌전히 듣고 있던 플루토키아도 한마디 거들었다.


“공무원증 받으셨죠? 꼭 목에 걸고 다니셔야 합니다. 거기에 팥을 넣었다던데···. 악귀를 쫓는 데 효험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어쩐지 공무원증이 좀 불그스름하더라. 어제 낙뢰 과장이 신신당부하던 나폴리탄 퇴근길 괴담도 단순 괴담이 아니라 진짜였나···?


나 김너바나, 김씨 가문에 3대째 내려오는 쫄보 DNA 보유. 나는 침착하게 의원면직(사직) 신청하는 법을 머릿속으로 복기했다.


내 얼굴빛을 살피던 플루토키아가 겁먹은 강아지 달래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애초에 저희 사무실이 있는 건물과 다리만 오가실 테니, 망자의 영혼을 마주할 일은 거의 없습니다. 혹시 모를 사고에 방지하자는 거죠.”


“맞아, 애초에 공무원증은 망자들 쫓아낼 용도보다는 다른 부서 차사들이 네 신원 확인할 때 쓰는 용도니까 겁먹지 마.”


속으로 바들바들 떨던 난 설 팀장을 가자미눈으로 쏘아봤다. 당신이 겁이란 겁은 다 줬잖아! 필요한 말이긴 했지만!


나는 목에 걸린 공무원증 줄을 만지작거리며 천막 안으로 돌아갔다. 간호 인원들에게 해열제를 나누어준 뒤, 플루토키아는 우리에겐 수고하란 말을 남기곤 황녀와 남주가 있는 천막으로 떠났다.


해열제의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치솟는 열로 눈과 고막, 목의 고통을 호소하던 이들의 신음이 약을 몇 모금 삼키자마자 반쯤 줄었다.


환자의 이마를 짚어보던 치료원 한 명이 정상까진 아니지만 열이 한결 내렸다며 좋아했다. 마법 요소인 마석 가루가 섞여 있다 보니, 확실히 현대 의약품과 비교하면 특별한 효과가 있군.


다만 임시방편인지라 이 이상의 효과를 기대하긴 어려웠다. 전염력도 여전했고. 온 들판을 뒤져 민들레를 꺾어오는 것도 한계가 있겠지.


“우린 엑스트라들의 죽음을 최대한 줄여야 한다 하셨잖아요. 다른 도시들도 난리가 났을 텐데 그쪽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요?”


“현실적으로 우리가 모든 도시를 도는 건 불가능하니까, 황녀의 약으로 사망률이 잠시 정체된 이 도시에 맞춰 다른 도시들의 사망률도 인위적으로 조정될 거야.


대신 이 도시 사람들은 약 덕분에 덜 아픈 거고, 다른 곳들은 열을 낮추지 못해서 고통스러운 상태로 죽지 않겠지···.”


말꼬리를 흐리던 설 팀장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런 거 일일이 신경 쓰면 이 일 못 한다.”


마지막 말은 어쩐지 설 팀장 본인에게 하는 듯싶었다. 씁쓸해진 분위기에 나도 할 말이 없어져 발끝만 내려다보는데, 어디서 삑삑, 하는 짤막한 기계음이 규칙적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뭐지, 이 세계에서 들릴 수가 없는 기계 소리? 이것도 세계관 오류인가? 마이크 어플을 켜 녹음해 신고해야 하나 짤막하게 고민할 때, 설 팀장이 손등까지 덮고 있던 옷소매를 걷었다.


창백한 피부 위로 삑삑 울고 있는 스마트워치가 보였다. 이야···, 통일신라 사람이 나보다 신식인데. 이것도 편견인가.


설 팀장은 동그란 스마트워치 화면에 뜬 초록색 수화기 그림을 터치하곤 까칠하게 말했다.


“왜.”


-설 팀장! 아직 황녀 황궁으로 안 돌아갔지?


카랑카랑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립 팀장이군. 어제 봤는데 엄청 오랜만에 목소리 듣는 것 같다.


“어.”


-이제 슬슬 꽃밭 다녀와야겠네?


웬 꽃밭? 영문을 알 수 없어 눈만 끔뻑였다. 설 팀장의 표정이 와락 구겨지는 걸 보니 뭐··· 좋은 꽃밭은 아닌가?


“아 꼭 내가 가야돼? 네가 가도 되잖아, 내 짬이 얼만데! 너 할 일 어차피 플루토키아가 하는 보고 실시간으로 받는 거밖에 없지 않나? 그거 내가 할 테니까 너가 가라.”


-아하하하!! 그러니까 옛날에 성깔 좀 줄이고 살지 그랬어? 네 업보지 뭐 어떡해. 나 지금 A/S과랑 오류 복구 규모 논의도 하는 중인데 이것도 너가 할래?? 그럼 내가 대신 해주고.


“꽃밭 갈게.”


단칼에 자른 설 팀장이 빨간 수화기 버튼을 신경질적으로 누르면서 정적이 찾아왔다. 나는 눈동자를 양옆으로 굴리다 물었다.


“화훼업도 하시나요?”


“나 말고, 어떤 영감님이.”


설 팀장은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고 허공 한 번, 내 얼굴 한 번 바라보며 무거운 한숨을 쉬었다.


···왜 날 그런 눈으로 보십니까? 괜히 찔려서 뒤로 한 발자국 떨어졌다.


“너는 여기서 플루토키아랑··· 아니다 차라리 나랑··· 아니 그래도 산 사람인데 아니··· 그래도 저승 공무원인데 한 번쯤 가 둬서 얼굴도장은 찍어두는 게···.”


혼자서 중얼중얼대던 내 상관은 결심했다는 듯 발을 한번 굴렀다.


“황녀가 황궁으로 돌아갈 사이에, 넌 나랑 꽃밭에 좀 다녀오자.”


“꽃밭엔 왜요? 황녀한테 줄 약초라도 뜯으러 가나요?”


“비슷해.”


? 그냥 던져본 말이었는데. 순간 말문이 막혀 먼저 걸음을 옮기는 팀장의 뒷모습만 빤히 바라봤다.


내 상관은 수풀 우거진 곳으로 자진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나는 그 주변을 훑어보다, 수풀 너머 나무들 사이에 음악실 문이 다시 나타난 걸 발견했다.


“뭐해, 빨리 따라와. 공무원증은 눈에 보이도록 옷 밖으로 빼서 걸고. 내 뒤로 바짝 붙어서 걸어.”


“아···, 네. 근데 어느 꽃밭에 가는 거예요? 이 문은 저승으로 돌아가는 문이잖아요.”


쪼르르 쫓아온 날 확인한 설 팀장이 문으로 다가섰다. 무거운 음악실 문이 활짝 열림과 동시에 팀장의 대답이 들렸다.


“당연히 저승에 있는 꽃밭이지. 유명한 설화일 텐데. 모르나?”


저승? 꽃밭? 저승에서 화훼업을 한다는 것도 신기해 죽겠는데 무슨 설화···


잠깐, 기억이 날락 말락 한다. 어릴 때 동화책에서 본 것 같은데?


열린 문 너머로는 드넓은 꽃밭이 펼쳐져 있었다. 새빨간 사무실 하늘과는 달리, 파스텔톤의 은은한 붉은 빛이 감도는 하늘이 한결 차분해 보였다.


저 멀리서 어린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자세히 보니 각기 다른 옷을 입은 아이들이 꽃밭 사이에 난 작은 흙길을 뛰며 놀고 있는 중이었다.


그야 아이들이 각자 별개의 옷을 입는 건 당연하지만, 옷의 시대상이 전혀 달랐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고 싶은데.


어떤 아이는 고구려 벽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한복을, 다른 아이는 피X츄 티셔츠에 캡모자를 착용하고 서로 어울려 뛰고 있있다. 흰 소복을 입고 있는 애도 있고. 이 통일되지 못한 코디 뭐지?


꽃들도 생긴 게 좀 이상하다. 암술, 수술, 꽃잎들이 배치가 좀 남다르다고 해야 할까. 색도 기묘하고.


평소 꽃을 들여다보는 편이 아니라 이승에도 없다고 확신할 순 없지만, 적어도 정상은 아니라는 데에 내 공무원증을 걸 수 있다.


나는 문 안으로 들어가 꽃밭 흙 위에 발을 내디뎠다.


-바삭!


내 발 밑으로 단단한 줄기가 짓밟히는 소리가 나자, 뛰어놀던 아이들이 전부 표정을 지우고 날 향해 돌아보았다.


순식간에 내게 몰린 검은 눈동자들과 정적에 놀라 온몸이 얼어붙은 순간, 등 뒤로 낮은 목소리가 기습했다.


“오~, 이게 누구야. 설이설이 아냐~?”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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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17) 간섭 24.09.05 7 0 12쪽
17 16) 서천 24.09.04 10 0 12쪽
» 15) 꽃밭 24.09.03 8 0 11쪽
15 14) 마석 24.09.02 7 1 11쪽
14 13) 간호 24.08.30 10 1 11쪽
13 12) 업무 +1 24.08.29 8 1 10쪽
12 11) 청춘 24.08.28 10 1 11쪽
11 10) 사진 24.08.27 9 1 11쪽
10 9) 사과 24.08.26 10 1 10쪽
9 8) 면담 +1 24.08.23 9 1 11쪽
8 7) 중립 24.08.22 10 1 11쪽
7 6) 조작 24.08.21 9 1 11쪽
6 5) 알현 24.08.20 9 1 11쪽
5 4) 조연 24.08.19 11 1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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