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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내리화
작품등록일 :
2024.08.17 21:54
최근연재일 :
2024.09.16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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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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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1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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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화재

DUMMY

황녀궁에서 본격적으로 불을 쓰는 장소는 그리 많지 않다. 기껏해야 부엌쯤 될까. 심지어 부엌은 이 정원과 정반대편에 있다.


어찌됐건, 탄내는 꽃과 약초가 어우러져 자라는 텃밭에서 날 냄새가 아니라는 거지.


복잡해진 머릿속과는 별개로 내 머리통은 탄내를 쫓아 움직였다. 몇 발자국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희미했던 탄내가 점점 진해지고 있었다.


“이 근처에서 불이 났나 본데요? 왜 갑자기···.”


아니, 불은 갑자기 나는 거긴 한데. 결말이 얼마 남지 않은 판에 좀 뜬금없잖아. 나는 플루토키아의 대답을 기다렸지만 주변은 조용했다.


왜 말이 없지? 의아해져 그를 바라보려던 순간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에 실린 명백한 화기가 내 뺨에 아슬아슬하게 닿았다 사라졌다.


···불이 난 곳이 생각보다 가까운 것 같은데.


머릿속에 판단이 떨어지자 온 몸이 시끄러워졌다. 심장이 쿵쾅대고 손과 발끝이 저릿한 느낌. 익숙하지 않은 위기 상황 속에서 애써 마른 침을 삼켰다.


침착해, 불 번짐이 지나치게 빠른 것 같긴 하지만, 아직 여기까지 오진 않았으니 잽싸게 나가면 되잖아.


어느새 서로를 반쯤 안고 있던 황녀와 남주도 불의 냄새를 맡곤 얼굴이 굳어 있었다. 남주가 재빠르게 황녀를 안아 들었다.


“마티스!”


“어디서 불이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쪽으로 번지고 있습니다. 우선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셔야 합니다.”


그래, 저래야 황녀를 수호하는 기사단장이지. 남주가 제 할 일을 착실히 하는 걸 확인하고 플루토키아에게 달려갔다.


“우리도 빨리 여기를 나가요!”


제자리에 오도카니 서 있는 플루토키아의 팔뚝을 잡아 흔들었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당겨도 두꺼운 팔뚝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플루토키아 씨?”


그 묵직한 무반응에 놀라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고 나서야, 무언가 잘못되고 있음을 알았다.


“플루토키아 씨! 정신 차려요!”


그의 안색은 안색이 희다 못해 창백해진 상태였다. 입술이 벌써 푸르스름해진 걸 보고 마음이 급해졌다.


숨도 잘 못 쉬는 것 같은데? 플루토키아의 멱살을 잡다시피 끌어내려 그의 얼굴을 가까이 했다.


“제 말 들려요?! 나가야 한다고요!”


어떡해, 이 사람 숨을 제대로 못 쉬어. 플루토키아의 모습이 2 황자가 쓰러져 있던 장면과 문득 겹쳐 보였다.


나도 덩달아 호흡이 가빠졌다. 왜 이렇게 공기를 마시고 뱉는 게 버겁지? 억지로 공기를 마시다 뒤늦게 깨달았다. 매캐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어 정말 숨쉬기 힘들어졌다는 걸.


나는 휘청이는 플루토키아의 팔을 잡아 부축했다. 너무 무거워! 덩달아 중심을 잃을 뻔하다가, 급한 대로 그를 앉힌 후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여긴 텃밭이잖아, 하다못해 작은 수돗가나 음수대라도 있을 거야.


아름답게 꾸며진 화원에서 다소 거슬리는 존재인 수돗가는 수풀 구석에 숨겨져 있었다.


급한 대로 플루토키아의 주머니 속 손수건을 강탈해, 무릎걸음으로 기어가 물을 적셨다.


“여기 불이 났‒!”


멀리서 누군가 소리치던 소리가 뚝 끊겼다. 비정상적인 신호였지만 내 뇌는 멀티가 되지 않았다. 일단 플루토키아의 입과 코를 손수건으로 덮고, 물 적신 소매로 내 호흡기관도 가렸다.


“일어서요, 빨리요.”


이제 주변 수풀 이파리에도 빨간 불씨가 달라붙는 게 보였다. 나는 플루토키아의 어깨뼈가 빠지든 말든 막무가내로 잡아당겼다.


주변 공기가 슬슬 더워지는데 힘까지 쓰려니 땀이 송골송골 났다. 중간중간 화를 벌컥 내고 싶었지만, 플루토키아가 나보다 땀을 더 흘리고 있어 그러지도 못하겠다.


낯선 발소리들이 우르르 닥쳐온 건 이때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플루토키아 앞을 막아서며 불청객들을 위아래로 뜯어봤다.


각자 손에 무기를 들고 있는데, 개중 한 명은 피 묻은 칼을 들고 있다. 오는 길에 누구 죽였나? 설마 방금 그 불났다고 소리 지르려던 사람?


나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이런 내가 눈에 안 보이는 불청객들은 저들끼리 속닥이기 시작했다.


“그 마녀는 어디 있지?”


“벌써 대피했나 본데.”


“멀리는 못 갔을 거다, 찾아봐! 마녀는 발견한 즉시 죽인다!”


뭔데, 저 누가 봐도 우리가 방화범이오 하는 대화는. 심지어 복장도 누구 죽이러 가는 자객마냥 복면을···


···으어? 잠깐, 잠깐. 나는 저들의 대화에서 키워드를 뽑아 잠시 곱씹었다.


내 생각엔, 저들이 무슨 마녀를 죽이러 왔고, 그 마녀가 황녀 같은데.


대피해야 한다는 생각을 잠시 잊은 내 팔이 콱 잡혔다. 나는 반사적으로 비명을 질렀다.


“아깜짝아!!”


내 팔이 동아줄이라도 된다는 듯이, 손에 힘을 꽉 준 플루토키아의 동공은 초점이 약간 돌아와 있었다.


입만 몇 번 뻥긋거리던 그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간신히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전염, 병을 황녀가, 퍼뜨렸다고, 믿는, 과격분자들입니다.”


“갑자기요? ···일단 몸부터 피하시죠. 당신 상태가 너무 나빠요.”


나는 플루토키아 뒤로 나타난 이동문을 보고 말했다. 퇴근 시간이 아닌데도 나타난 거면, 안립 팀장이 말했던 대로 서천 꽃밭에 가라는 거겠지.


전염병 때문에 가뜩이나 황궁 상주 인원도 줄어든 마당에, 남아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3 황자를 배웅하러 간 상황이다.


기사단장과 함께 있는 황녀는 사실 크게 걱정 안 된다. 설마 주인공이 죽겠어? 문제는 이 불이 빨리 꺼지지 않을 것 같다는 거지.


플루토키아가 물수건을 붙잡고 숨을 깊게 몰아쉬었다.


“저는, 여기 남아있어야 합니다. 먼저 대피하십시오.”


“지금 당신 환자예요, 저보다 먼저 대피해야 할 판에 무슨!”


머리가 다시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진심으로 딱밤 한 대만 때리고 싶다. 말 좀 들으면 덧나냐.


“당신은, 산 사람이니까 대피하는 게 맞습니다, 전 남아서 감독 일을 해야 한단 말입니다!”


헐떡이는 플루토키아의 언성이 높아졌다. 정신 좀 돌아온 줄 알았는데, 차라리 기절한 게 더 나았겠군.


불 앞에서 패닉에 빠지고, 업무에 기묘한 강박증을 보이는 눈앞의 남자는 평소의 모습과 너무나도 딴판이었다. 이 정도면 캐붕 아닌가.


나는 그의 앞에 쭈그리고 앉아, 절대 하고 싶지 않았던 협박을 어색하게 펼쳤다.


“저희가 같이 대피하는 게 맞아요. 당신이 다치면 혼자 홀랑 도망가 버린 제 책임으로 몰리지 않을까요.”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거 달콤한 말이긴 한데 나중에 제가 사고 칠 때나 다시 말씀해 주시죠···.”

나는 암울한 한숨을 쉬었다. 주변공기가 더 뜨거워지고, 목덜미에 맺힌 땀이 셔츠 안으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야, 니들 대피 안 하고 뭐 해!!”


벼락같은 고함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자, 팀장 둘이 이동문을 열어젖히고 뛰어오고 있었다.


“설 팀장님! 악!”


직속 상사가 반가워 손을 흔들다가 귓불을 잡혔다.


“김 주무관,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 유독가스가 얼마나 위험한지 몰라!?”


“플루토키아 씨가 대피 안 한다고 고집부렸단 말이에요! 전 빨리 피하자고 설득하고 있었다고요!”


설 팀장이 눈을 희번덕 뜨더니 플루토키아의 머리통에 주먹을 내리꽂았다. 졸지에 꿀밤을 얻어맞은 플루토키아가 어벙한 표정으로 팀장을 올려다본다.


“난리다 난리, 이게 무슨 일이야? 세상에, 키아야!”


뒤늦게 쫓아온 안 팀장이 플루토키아의 목덜미를 잡고 순식간에 일으켰다. 힘이 장산가?


“두 분이 여긴 어떻게,”


“10분마다 올라오던 네 보고가 갑자기 뜸해져서, 뭔 일 생겼나 해서 왔지!”


안 팀장은 플루토키아의 땀이 물처럼 흐르는 걸 보고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었다.


“둘 다 당장 돌아가!!”


설 팀장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나는 이때다 싶어 플루토키아의 소매를 붙잡고 문을 향해 내달렸다.


“잠깐만요, 김 씨···!”


뒤통수 쪽으로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지만 신경 껐다. 나는 아직 닫히지 않은 문 너머로 잽싸게 발을 디뎠다.


주변을 둘러싼 풍경이 삽시간에 사무실 안으로 바뀌었다. 뭐야, 서천 꽃밭으로 가는 게 아니었나.


이제 메케한 공기는 사라지고 향냄새만 가득하다. 나는 그 친숙한 향을 힘차게 들이키다가 낙뢰 과장과 눈이 마주쳤다.


“너희 사이 좋아 보인다.”


과장의 말에 뭔소리야, 하고 눈썹을 꿈틀대다 황급히 손을 놓았다. 갑자기 소매가 자유로워진 플루토키아가 휘청이다 벽에 어깨를 박았다.


“글 쓰느라 지칠 때쯤 너희가 사고를 쳐주는구나. 일단 앉아.”


나는 사무실 구석에 있는 테이블에 의자를 빼서 앉았다. 스읍, 하고 신음을 삼킨 플루토키아도 내 옆에 따라 앉았다.


두 사람 몫의 차를 찻주전자에 넣는 과장은 조금 피곤해 보였다. 침묵을 유지하던 그는 자신의 눈치를 보는 우리에게 천천히 물었다.


“일단, 불이 났는데도 안 피한 이유를 좀 물어볼까. 왜 데이지 황녀를 따라가지 않고?”


“일부러 안 피한 게 아니라, 플루토키아 씨랑 같이 피하려고 하다 보니···.”


설 팀장에게 그랬던 것처럼 고자질하려다, 뜨거운 물을 붓는 낙뢰 과장과 시선이 부딪히곤 말을 얼버무렸다.


“플루토키아, 너는···.”


플루토키아에게 눈길을 준 낙뢰 과장이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2 황자가 죽은 이후로 네 상태가 영 이상하구나.”


갑작스러운 2 황자의 죽음 거론에 살짝 움찔했다. ···나랑 약간의 마찰이 있던 걸로 사람 상태가 이 모양이 됐다는 건 아니겠지, 설마.


“···.”


플루토키아는 자신의 앞에 놓인 잔에 초록빛 차가 채워지는 걸 묵묵히 바라봤다. 입을 열 생각은 딱히 없어 보였다.


자신의 찻잔에도 차를 따른 낙뢰 과장이 먼저 한 모금 들이켰다. 차를 더 우려내야 하는 거 아닌가, 지금은 찻잎에 닿은 뜨거운 물을 마시는 수준일 텐데.


혼자서 딴생각을 시작하니 끝이 없다. 다행히 낙뢰 과장이 주제를 원점으로 되돌려놓았다.


“우리 업무가 빙의자를 위해 돌아가는 건 맞아. 그렇지만 이 일이 자신의 안전보다 우위여선 안 돼.”


“네.”


나 혼자 착실하게 대답했다.


“난 너희들과는 빙의자와 공무원 사이로 만나고 싶지 않구나.”


플루토키아는 여전히 찻잔만 내려다보고, 머쓱해진 내가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내 몫의 차도 무심결에 들이키니 제법 쌉쌀한 게 맛있었다.


따뜻한 차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니 온몸에 긴장이 풀리고 피로가 몰려왔다. 갑작스럽게 몰려오는 졸음에 입을 가리고 하품하자, 낙뢰 과장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우리 업무는 안 그래도 정신적 피로가 많이 쌓이는데, 방금까지 화재 현장에서 고생했으니 몸도 많이 피곤할거예요. 오늘은 이만 퇴근하세요.”


···정말로? 나는 약간 미소 지은 그대로 굳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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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18) 황자 24.09.06 9 0 11쪽
18 17) 간섭 24.09.05 7 0 12쪽
17 16) 서천 24.09.04 11 0 12쪽
16 15) 꽃밭 24.09.03 8 0 11쪽
15 14) 마석 24.09.02 7 1 11쪽
14 13) 간호 24.08.30 10 1 11쪽
13 12) 업무 +1 24.08.29 8 1 10쪽
12 11) 청춘 24.08.28 10 1 11쪽
11 10) 사진 24.08.27 9 1 11쪽
10 9) 사과 24.08.26 10 1 10쪽
9 8) 면담 +1 24.08.23 10 1 11쪽
8 7) 중립 24.08.22 10 1 11쪽
7 6) 조작 24.08.21 9 1 11쪽
6 5) 알현 24.08.20 9 1 11쪽
5 4) 조연 24.08.19 11 1 10쪽
4 3) 최악 24.08.18 11 1 11쪽
3 2) 작명 +1 24.08.18 14 1 10쪽
2 1) 면접 24.08.17 14 1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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