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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내리화
작품등록일 :
2024.08.17 21:54
최근연재일 :
2024.09.16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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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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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2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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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중립

DUMMY

플루토키아도 창밖을 올려다보는 남자를 발견하더니 아, 하고 담백한 소리를 냈다.


“서브 남주가 나타났군요.”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내 목소리가 잠든 황녀에게 들리지 않음을 순간 까먹어, 최대한 볼륨을 죽여 속삭였다.


“아니 저 얼굴이 어떻게 서브 남주로 그치죠?! 뭔가 잘못되었어요. 저 얼굴은 그 어디냐···, 국가가 세운 시립미술관에 보전되어야 한다고요.”


서양인이니 루브르 박물관이 적절하지 않나 싶지만, 프랑스에 가서 돌아오지 못하는 유물은 직지만으로 벅차다···.


하하하, 입꼬리를 꾹 누르고 있던 플루토키아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쉽게 되었군요. 남주는 태양처럼 강렬한 금발인 설정이라고 들었습니다.”


꿈과 희망이 무너지는 소리를 저리 상큼하게 웃으면서 하다니.


내 절망과는 별개로, 서브 남주는 황녀의 창가에서 시선을 거두고 본인이 가던 길을 마저 걸어갔다.


중간에 서 있는 보초병들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창문에 달라붙은 내가 점점 멀어져가는 서브 남주의 뒤통수를 열렬히 쳐다보자, 마저 커튼을 닫은 플루토키아가 손가락을 허공에 튕겨 주의를 집중시켰다.


“과몰입 금지.”


“네?”


커튼이 닫혀 완전히 어두워진 방 안에선 그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말해주고 있었다. 이건 웃을 일이 아니라는 걸.


“기억하세요. 저희는 특정 인물이 마음에 든다고 밀어주면 안 됩니다. 특히 서브병은 저희 로맨스판타지과 소속팀이 걸릴 수 있는 치명적인 병입니다.”


서브병이라니. 이 무슨 전혀 생각지도 못한 단어들의 조합이람? 당황스러웠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 경고가 무슨 의미인지 빠르게 이해할 수 있었다.


“메인 남주로 설정되었으면 메인 남주에 맞게, 서브 남주로 설정되었으면 서브 남주에 맞게 대해줘야 한다는 거죠?”


“예. 서브 남주가 마음에 드니 메인 남주로 바꾸겠다며 간섭하는 행위는 엄격히 금지되어 있습니다.


저희는 중립을 지켜야 함을 명심하세요.”


나는 조그맣게 네, 라고 대답했다.


***


태어난 곳이 황궁일 뿐, 시골 들판을 뛰놀며 살아온 데이지 황녀는 시중받는 삶에 도통 익숙해지지 못했다.


적응한 건 오히려 그녀를 지켜보는 나였다.


오전에 일어나자마자 몸단장 후 밀크티를 곁들인 아침 식사.


점심까지 예법 수업. 바로 황제와 두근두근 점심 식사.


이후 그간 받지 못한 교양 수업들이 몰아치고, 잊을 만하면 데뷔당트를 위한 춤 연습이 시작되었다.


그 뒤 저녁 식사를 하고 주어진 숙제들을 처리한 뒤에야 잠들 수 있는 하루.


황녀의 스케줄이 고정되어 있으니, 이 세계관을 감독해야 하는 우리 입장에서는 솔직히 편했다.


정작 당사자인 데이지 황녀의 얼굴엔 줄곧 그늘이 져 있었다. 허나 시녀들은 아랑곳 않고 화려한 핑크빛 드레스를 입힌 후 치장시키기 바빴다.


황녀는 다 필요 없고 쉬었으면 좋겠다는 표정인데. 그 얼굴을 지켜보던 플루토키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어린 소녀에겐 너무 무리인 스케줄인 듯합니다. 조금 쉬는 시간을 주어도 괜찮을 텐데요.”


···그런가? 나는 괜히 뜨끔해서 입만 벙긋거렸다.


중고등 시절을 빽빽한 학원과 과외 스케줄로 살아서 크게 무리라는 생각은 못 했는데···!


다들 이렇게 사는 게 아니었어? 내 공감 능력을 얼마나 망친 거지 대한민국?


남 탓을 하며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 그것도 그렇고 저는, 몇 주가 지나도 오빠들이나 남주들이 안 나오는 게 의아해요. 특히 서브남주는 창문으로 본 후로는 아예 사라진 것 같고.”


“황제의 자식들마다 거주하는 궁궐이 각기 다른데다 서로 거리까지 있으니까요. 오늘이 황태자의 생일이라 다같이 식사를 할 예정이니 오빠들은 곧 보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플루토키아가 제 볼을 검지로 살살 긁었다.


“제 생각엔, 아마 오빠들을 만나고 나면 남주들도 만나게 될 겁니다.”


이야, 드디어! 소화제를 먹은 것처럼 가슴에 손을 올리고 시원하다는 표정을 짓는 내게, 눈웃음을 지은 플루토키아가 냅다 팩트를 때렸다.


“솔직히 비슷비슷한 일상을 지켜보기만 하니 지루하죠?”


“아! 니요?”


애써 태연하게 대답했지만 저 눈웃음은 떠날 줄을 모른다.


“하하, 소설로 쓸 때 생략되거나 축약될 부분은 재미없긴 하죠.”


지금 내가 대답을 안 하면 이 침묵을 긍정으로 해석할 것이다. 긍정하면 쓰레기가 될 테니 어떤 식으로 부정할지 고민하던 중 깨달았다.


고민하는 이 침묵이 이미 긍정의 신호로 받아들여졌다는 걸···.


풀이 죽은 나는 식사 자리로 떠나는 황녀 일행을 쫓아갔다. 저 멀리서 미리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우릴 보고 외쳤다.


“데이지 황녀 전하 드십니다.”


황녀가 먼저 입장한 후, 나도 몇 발짝 뒤에서 쫓아 들어갔다가 뒤늦게 감탄을 터뜨렸다.


고딕 양식의 인테리어 안에 거대한 식탁이 놓여있었다. 제법 고풍스러운걸. 꼭 어디 유럽 고대 건축물 안으로 들어온 것 같아.


데이지를 따라 황궁에 머물며 유럽풍 인테리어를 계속 보니, 위시리스트에 적어둔 유럽 여행은 안 가도 될 듯하다.


다만 내가 지금 공무원 업무를 하는 건지 <걸어서 세계 안으로>를 찍고 있는 건지 가끔 헷갈린단 말이지···.


식탁 상석에는 황제가, 양옆으로는 황자들 앉아 데이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렵게 모셔 왔다는 공작부인에게 엄격한 예법 교육을 받는 데이지가 우아하게 인사를 건넸다.


“인사드리겠습니다, 폐하. ···그리고 황태자 전하. 2 황자 전하. 3황자 전하.”


황태자는 황제의 아들 중 가장 부드러운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풍채는 가장 우람했기에 만만하다는 인상은 들지 않았다.


데이지와 눈이 마주치자, 그의 순한 눈매가 곡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네가 데이지구나. 반가워. 편히 오라버니라고 불러주렴.”


플루토키아가 날 향해 살짝 고개를 기울여왔다.


“황태자의 이름은 ‘아네모네 코로나리아’입니다.”


음? 중간에 역병 이름이 들어가 있는데 괜찮은 건가?


“2 황자는 ‘디기탈리스 라나타’고요.”


2 황자는 황태자와 반대로 가장 날카로운 인상이었다. 몸도 가장 왜소했고. 병약한 인상을 보니 심장과 관련된 선천적 질환을 가졌다는 설정이 생각났다.


언뜻 보면 데이지를 탐탁지 않은 눈으로 응시하는 듯 했지만, 3 황자가 뚱한 기분을 어떻게든 숨기려는 기색이 역력해서 2 황자가 선녀처럼 보였다.


안타깝게도 비어있는 자리는 3 황자 옆이 유일했다. 데이지는 꿋꿋이 걸어가 모두의 주목을 받으며 착석했다.


이어 식사가 식탁에 놓이고, 나이프와 그릇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자 문득 배고파졌다.


난 식당 구석에 서서 플루토키아가 나눠준 육포를 우물우물 씹기 시작했다.


맛있어, 근데 짜. 목이 타서 황제가 들이키는 포도주를 노려봤다. 업무 중 음주는 안 되겠지? 나는 포기하고 귀를 기울였다.


가족이 전부 모였건만, 식사하면서 대화는 전혀 나누지 않았다. 식사 중 가족 간 대화 단절 문제는 현대만의 문제가 아닌가 보군, 하고 포기할 때쯤 황태자가 말문을 열었다.


“저녁에 열리는 생일 축하 연회에 데이지 너도 오면 좋을 텐데. 아직 황궁에 온 지도 얼마 안 되기도 했고, 데뷔당트도 치르기 전이라 아쉽구나.”


“데뷔당트를 치르고 나면 꼭 참석할게요. 미리 생일 축하드려요.”


말꼬가 트이자, 황태자는 기다렸다는 듯 데이지의 호구조사를 시작했다. 황궁에 대한 인상은 어떠한지,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무슨 색을 제일 선호하는지···.


너무 집요해서 황녀가 황태자 자리를 노릴까봐 경계하나 순간 의심될 정도였다.


하지만 그건 아니었던 것 같다.


“···네 어머니께선 날 무척 아껴주셨지. 나뿐만이 아냐, 디기탈리스와 다이앤투스도 친자식처럼 돌보아주셨어.”


죽은 황후에 대한 언급이 갑작스럽게 튀어나오자, 황태자의 동생들이 전부 눈을 동그랗게 떴다.


2 황자와 3 황자가 순간 황제의 눈치를 보는 게 느껴져, 나도 덩달아 황제를 살폈다.


황제가 칼질을 멈추고 황태자를 응시했지만, 황태자의 평온한 얼굴엔 파동도 일지 않았다.


“받은 사랑이 많아 보답해 드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지. 그래서 네가 살아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단다.”


황태자가 다정하게 웃었다.


“다소 늦었지만 황궁에 온 걸 환영한다.”


데이지도 황궁에 온 이래 가장 편안한 웃음을 지었다.


“···네.”


분위기가 한결 누그러진 후로는 모든 게 원만했다. 주로 붙임성 좋은 황태자과 데이지가 대화했고, 2 황자는 끼어들진 않아도 경청했다.


3 황자도 못마땅한 기색이었지만 대놓고 티내지는 않았다. 황제는 그저 관망할 뿐.


나는 어느새 어두워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플루토키아의 말대로 제일 먼저 떠오른 초승달 하나가 구석에 박혀있었다.


저리 조그맣게 떠 있으니 원, 발톱 깎다가 신문지 밖으로 튕겨 나간 새끼발톱 조각 같군.


어쨌든, 밤하늘은 저번보다 밝았다. 달이 떠서가 아니라, 저 멀리 연회가 열리는 황태자궁에서 빛이 새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황녀가 소외감을 느끼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황녀궁 정원 구석을 샅샅이 뒤지고 있는 데이지를 보며 걱정을 접었다.


“지금 뭐 하고 있는 겁니까?”


황태자궁에 다녀온 플루토키아가 당황한 표정으로 묻기에 솔직하게 답했다.


“아까 황태자가 밤에 몰래 놀러 다닐 수 있는 개구멍 위치를 알려주더라고요. 그거 찾는 것 같은데요.”


폐하가 좀 엄하셔서 바깥출입을 금하고 계시니, 필요할 때 적당히 이용하라며 알려주더라.


대체 황제 집착이 어느 정도길래? 아니다, 알고 싶지 않다. 어차피 일하다 보면 알게 될 것 같다.


다리가 아파 정원 구석에 쭈그려 앉았다. 황녀는 언제 데뷔당트 치르고 나는 언제 퇴근한다냐? 속으로 투덜거릴 때쯤 내 옆에 있던 수풀이 흔들렸다.


“!!!”


나와 플루토키아, 데이지 황녀가 전부 놀라 수풀을 쳐다봤다.


나 뭐 또 사고 친 거야? 나 뭐 건들지도 않았는데? 심장이 쿵쿵 뛰어 반사적으로 플루토키아의 옷깃을 잡자, 그가 날 능숙히 일으켜 세워주었다.


그때 풀숲에서 누군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전형적인 왕자님 같은 외형. 파티에서 막 나온 것 같은 연회복. 다소 수수했지만 기가 막히게 어울렸다.


틀림없어. 저 사람이 남주야!


난 빠르게 데이지 황녀를 살펴봤다.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볼에 홍조를 띄고 있는 것 같았다.


첫눈에 반했나?


두 사람의 만남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있었다. 남주가 입을 열어 뭐라고 말하려 할 때쯤, 덜컥 그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얼굴이 살짝 달아올라 있던 데이지도, 바람 때문에 조금씩 흔들리던 나뭇가지들도 멈췄다.


어렴풋이 들려오던 황태자궁의 소음도 뚝 끊겨 들리지 않았다.


“뭐야, 갑자기 왜 이러죠? 꼭 시간이 멈춘 것처럼···.”


플루토키아가 품에서 회중시계를 잽싸게 빼들어 응시하더니, 고개를 까딱하며 말했다.


“퇴근 시간이군요. 이제 돌아가셔야 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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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18) 황자 24.09.06 9 0 11쪽
18 17) 간섭 24.09.05 7 0 12쪽
17 16) 서천 24.09.04 11 0 12쪽
16 15) 꽃밭 24.09.03 8 0 11쪽
15 14) 마석 24.09.02 7 1 11쪽
14 13) 간호 24.08.30 10 1 11쪽
13 12) 업무 +1 24.08.29 8 1 10쪽
12 11) 청춘 24.08.28 10 1 11쪽
11 10) 사진 24.08.27 9 1 11쪽
10 9) 사과 24.08.26 10 1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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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중립 24.08.22 11 1 11쪽
7 6) 조작 24.08.21 9 1 11쪽
6 5) 알현 24.08.20 9 1 11쪽
5 4) 조연 24.08.19 11 1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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