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승시청 웹소설국 로맨스판타지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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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내리화
작품등록일 :
2024.08.17 21:54
최근연재일 :
2024.09.16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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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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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6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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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18) 황자

DUMMY

빙의자에, 빙의자에 의한, 빙의자만을 위한.


우리 사무실이 있는 저승시청 웹소설국 건물. 그곳 엘리베이터에 적힌 이 문구를 처음 봤을 때 든 생각은, 미국 대통령의 유명 연설 문구를 한국의 저승시청이 가져다 써도 괜찮나 하는 것이었다.


저승에도 사대주의가 있나, 외국 명언을 인테리어 문구로 가져다 쓰네. 속으로 어이없어하며 지나갔는데 철회한다. 설마 진심이었을 줄이야.


나는 석상처럼 표정이 굳어버린 플루토키아에게 쏘아붙였다.


“어제 엑스트라 백성들의 죽음을 막겠다고 간호도 했잖아요. 그런데 엑스트라도 아닌 조연인 황자의 죽음은 왜 방치하겠다는 거죠?”


2 황자의 숨소리가 점차 작아지고 있었다. 나는 떨리는 시선으로 황자와 플루토키아를 번갈아 바라봤다.


“백성들은 전염병으로 단기간에 많은 인원이 사망하기 때문에 간호를 도운 겁니다. 조연인 황자 한 명 죽었다 해서 이 세계의 재생력이 과하게 소비되진 않습니다.”


무슨 말을 해도 먹히지 않음을 깨달았을 때의 이 무력감이란. 나는 눈가가 서서히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울고 싶지 않아, 우는 걸로 해결하고 싶지도 않아. 나는 연거푸 침을 삼켜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는 이 순간이, 공기가 너무 버거웠다. 설령 눈앞의 황자가 실제 사람이 아닌 인공적 존재라 해도.


“···황실의 고귀한 황자로 태어났잖아요, 그런데 아무도 없는 황궁 복도에서 맞이하는 죽음이라뇨. 너무 비참하잖아요.”


플루토키아의 말이 까마득하게 들렸다.


“자신이 죽는 시간과 장소···, 그 이유를 정할 수 있는 이는 흔치 않습니다.”


나는 코 훌쩍이는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소매로 얼굴을 문질렀다. 그렇지만 간신히 짜낸 목소리에 묻은 물기는 숨길 수 없었다.


“슬프지 않으세요?”


“저희는 독자가 아닙니다. 감상에 젖어있을 여유가 없으니 이만 진정하시길 바랍니다.”


이런 사람이었나? 나는 지난 이틀간 보아온 플루토키아의 모습을 떠올리며 주먹을 쥐었다. 말이 이틀이지, 그간 웹소설 세계관에서 함께 보낸 시간은 더 많은데.


황녀의 데뷔당트날 밤, 묘하게 풀어졌던 그는 환상이었나. 잠시 플루토키아의 눈을 마주하다, 문득 거북해져 시선을 바닥에 내던졌다.


“저도 안 슬퍼요.”


“···.”


“딱 한 번 봤던 캐릭터의 죽음으론 슬프지 않아요. 무서울 뿐이죠. 이 상황도 그렇고, 제 무능력함도 그렇고, 로맨스판타지과의 규율도 그렇고.”


더 말했다간 잘리는 거 아닌가. 뭐 어때. 철밥통에 스크래치 좀 날 수 있지.


플루토키아는 제법 긴 시간 동안 그 자리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덕분에 거의 사그라든 2 황자의 숨소리를 절찬리에 확인할 수 있었다. 빌어먹게도.


저 멀리서 문득 인기척이 났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든 난, 플루토키아 뒷편에서 주황색 불빛이 나타나 점차 커지고 있는 걸 발견했다.


“!!”


나도 모르게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190cm는 족히 넘어 보이는 남자의 몸이 힘없이 이끌려왔다.


웬 도깨비불이 공중에 둥둥 떠 다가오는 줄 알고 식겁했는데, 뒤를 돌아본 플루토키아가 내 허리를 붙잡고 바로 옆 창문에 쳐진 커튼 뒤로 뛰어들었다.


“!! 무슨–”


플루토키아가 급하게 검지를 제 입술 위에 올렸다. 나는 그와 커튼의 품에 안긴 채로 머릿속에 시스템 에러를 띄웠다.


날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리고 있는 커튼 틈 사이로 두 사람의 발소리가 들리더니, 한발 늦게 고함이 울려 퍼졌다.


“디기탈리스 황자님!!!”


뒤이어 주황색 도깨비불로 보였던 등불이 황자 머리맡에 놓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와 달라 빌었던 시종들이 이제야 왔군.


황자의 가슴팍에 귀를 댄 시종의 안색이 순식간에 질리더니, 곧장 소매를 걷으며 소리쳤다.


“뭐 해, 당장 가서 사람들과 의원을 불러!”


“젠장, 병상에 누워계셔야 할 분이 왜 혼자 쓰러져 계시는 거야! 황자님 전담 시종은 어디 갔어!?”


시종이 황자의 가슴팍에 두 손을 모아 힘껏 CPR을 시도한다. 헐떡이는 숨소리를 들으며 내가 쓰러지고 싶어질 즈음 사람들이 달려왔다.


늦지 않은 건가? 나는 이마 위로 땀 한 방울이 흐르는 걸 느끼며 커튼 틈을 열심히 엿보았다.


들것에 실린 황자가 부리나케 어디론가 이동된다. 들것 모서리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졌던 황자의 팔이 공중에 툭 떨어지는 걸 보자 살짝 현기증이 일었다.


황자가 실려 가자 소란도 어느 정도 정리되는 듯했다. 여전히 복도에 남아있던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이래서 궁궐에 상주하는 인원을 줄여선 아니됬건만!”


“전염병이 황궁에도 침투해 어쩔 수 없이 내린 선택이지 않았는가. 황자께선 운이 나빴을 뿐이야.”


“근데 황자님은 어딜 가시려고 혼자 몰래 나오신 거지?”


“글쎄, 이쪽 복도로 가면 황녀 전하 궁으로 가는 길이 나오긴 하는데···.”


음? 나는 엑스트라들의 대화 속에서 익숙한 목소리를 듣고 눈을 깜빡였다. 내가 부스럭대며 움직이자, 내 허리를 감싼 플루토키아의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이제 그만하고 각자 본인 자리로 돌아가죠. 황자 전하께서 쓰러지셨으니 오늘 밤도 푹 자기엔 글렀군요.”


시종들을 단숨에 해산시키는, 이런 일이 익숙하다는 듯 고저 없는 목소리. 나는 그 친숙한 목소리에 낮게 숨을 뱉었다.


살다 살다 상사 목소리가 반가운 날이 올 줄이야.


사람들이 떠나가는 발자국 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내가 미련 없이 커튼을 걷자, 약 오를 정도로 태평한 목소리가 고막에 날아든다.


“하하, 너희 사이 좋아 보인다.”


어린 시종 차림을 하고 있는 낙뢰 과장이 사람 좋게 웃고 있었다. 플루토키아가 소년의 얼굴을 한 최고참 차사에게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과장님이 왜 여기 계십니까? 사무실에서 한창 글 쓰고 계실 줄 알았는데.”


낙뢰 과장이 볼을 긁적이며 민망한 듯 내 시선을 회피한다.


“아···, 이제 슬슬 데이지 황녀네 이야기 제목을 지어야 하는데, 도저히 아이디어가 안 떠올라서 말이지. 사무실에만 앉아 있어서 막히나? 싶은 거야. 소설 안을 돌아다니면 좀 떠오르지 않을까 해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설 제목 짓기의 고통은 정말 끔찍하니까.


어디 신내림을 기다리듯, 영 떠오르지 않으면 주변 환경을 바꿔가며 여유롭게 산책하는 척 속으로는 전전긍긍하는 게 작가다.


“그래, 너바나 씨도 문창과니까 글 제목 많이 지어보지 않았나요? 좋은 아이디어 있으면 말해줘요.”


“제목 못 짓는다고 교수님께 4년 내내 까였지만 이런 저라도 도움이 된다면야···.”


말꼬리를 흐린 나는 커튼에서 나오는 플루토키아를 피해 조금 떨어져 섰다. 이를 본 낙뢰 과장의 웃는 얼굴이 살짝 굳었다.


“···너희 싸웠니?”


뭐? 아니 우리가 멀찍이 떨어져 선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세 걸음 간격으로 섰을 뿐인데 어떻게 알았,


아니지. 싸우긴 뭘 싸워. 주먹을 날린 것도 아니고.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대꾸했다.


“방금은 사이 좋아 보인다고 하셨잖아요. 바로 태세 전환을 하시네요.”


“빠른 태세 전환을 갖춰야 오랫동안 권력을 쥐고 상석에 앉아 있을 수 있지요. 기억해 두세요.”


여상하게 말한 낙뢰 과장은 눈썹을 몇 번 까딱이더니, 더 이상 묻지 않고 손목시계를 확인한다. 잡담할 시간이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나도 이제 슬슬 사무실로 돌아가 봐야겠는걸. 너바나 씨는 여기 남아서 황녀를 지켜보는 건 어때요? 곧 결말이 머지않았거든.”


“네? 설 팀장님은요?”


금쪽같은 내 상사의 행방을 묻자, 낙뢰 과장이 말했다.


“설 팀장은 다음 빙의자를 위한 로맨스판타지 세계관 건설에 착수하러 넘어갔어요.


데이지 황녀의 세계는 어느 정도 완성도를 갖춰 스스로 굴러가는 중이거든요. 설 팀장과 너바나 씨가 잡을 오류는 이제 거의 나오지 않아요. 설 팀장 팀이 이 세계관에서 할 일은 끝났다는 거죠.”


“···전 설 팀장님 팀인데, 팀장님과 같이 이동해야 하지 않을까요?”


“원래는 그렇게 해야 맞아요. 하지만 이번이 너바나 씨가 처음으로 경험하는 웹소설 빙의 사례잖아요.


이왕이면 플루토키아와 남아서 데이지 황녀가 어떤 결말을 맻는지 끝까지 지켜보는 게 더 공부가 되지 않을까요?”


나는 떨리는 동공을 들키지 않으려고 눈에 힘을 줬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플루토키아와 단둘이 있을 생각을 하니 마음 한구석이 싸해진다.


어쩐지 껄끄러워. 옆에 선 그를 바라보지도 못하고 우물쭈물하는데, 평소보다 더 낮아진 목소리가 들렸다.


“저는 2 황자가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러 가야겠습니다.”


“그래, 그럼 황녀는 너바나 씨가 지켜보도록 해요.”


플루토키아가 나를 지나쳐 복도를 걸어간다. 자신이 죽음을 방치한 캐릭터의 생사를 확인하러 가는 건가.


아까 그의 얼굴을 잠시 스쳐 지나갔던 고통은 허상이었나? 나는 점차 멀어지는 그의 넓은 등짝을 보며 무의식적으로 팔뚝을 더듬었다.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결말에 가까워졌으니 이야기에 큰 변수는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혼자서도 충분히 지켜볼 수 있을 겁니다. 혹시 모르니 위험하면 이동문으로 서천 꽃밭에 갈 것. 안 팀장 말 기억하죠?”


“네에···. 그, 황녀는 지금 어디에 있죠?”


“아까 본인 방에 있긴 하던데. 한 번 가보세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벽에 음악실 이동문이 나타났다. 손 한번 흔들어 보이고 자동으로 열리는 문을 넘어 돌아가는 그를 보며 내심 부러움을 느꼈다.


퇴근이 미친 듯이 하고 싶다. 나는 힘 빠진 몸을 어찌저찌 이끌어 복도를 나아가다, 어디선가 둔탁한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린다는 걸 깨달았다.


뭐야? 순간 겁에 질려 우뚝 멈춰서고 소음에 집중했다. 탁, 탁, 타닥, 탁, 하는 소리의 근원지를 찾기 위해 온 신경을 기울이다, 어쩐지 거슬리는 창문의 커튼을 확 걷었다.


“!”


유리창에 빗방울들이 끊임없이 부딪힌다. 비가 오고 있었구나. 나는 빗방울들의 떼죽음을 지켜보며 뜨거워진 이마를 창에 갖다 댔다.


그러다 시야가 불현듯 새하얗게 질린 순간,


—쾅!


천둥이 쳤다. 나는 무거워진 눈꺼풀을 끔뻑이며 느리게 반응하다, 유리창 너머 익숙한 실루엣이 보이는 걸 보고 멈칫했다.


우산이나 외투도 입지 않고, 잠옷 드레스 차림 그대로 폭우 속에 서 있는 황녀. 비에 젖어 더 곱슬거리는 백발이 유독 처량해 보였다.


왜 정원 한가운데 미친 사람처럼 서 있지? 오빠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못 들었나?


나는 양손을 유리창에 대고 자세히 들여다보다, 코가 짓눌리고 나서야 급히 뒤돌아섰다.


정원으로 나가는 출입문은 허무할 정도로 가까웠다. 나는 무턱대고 문을 열어 풀내음이 짙게 나는 화원에 뛰어들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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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21) 화재 24.09.11 8 0 11쪽
21 20) 영웅 24.09.10 8 0 12쪽
20 19) 친우 24.09.09 7 0 11쪽
» 18) 황자 24.09.06 9 0 11쪽
18 17) 간섭 24.09.05 7 0 12쪽
17 16) 서천 24.09.04 11 0 12쪽
16 15) 꽃밭 24.09.03 8 0 11쪽
15 14) 마석 24.09.02 7 1 11쪽
14 13) 간호 24.08.30 10 1 11쪽
13 12) 업무 +1 24.08.29 8 1 10쪽
12 11) 청춘 24.08.28 10 1 11쪽
11 10) 사진 24.08.27 9 1 11쪽
10 9) 사과 24.08.26 10 1 10쪽
9 8) 면담 +1 24.08.23 9 1 11쪽
8 7) 중립 24.08.22 10 1 11쪽
7 6) 조작 24.08.21 9 1 11쪽
6 5) 알현 24.08.20 9 1 11쪽
5 4) 조연 24.08.19 11 1 10쪽
4 3) 최악 24.08.18 11 1 11쪽
3 2) 작명 +1 24.08.18 14 1 10쪽
2 1) 면접 24.08.17 14 1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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