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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내리화
작품등록일 :
2024.08.17 21:54
최근연재일 :
2024.09.16 17:20
연재수 :
2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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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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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2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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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14) 마석

DUMMY

“감사합니다!”


냉큼 대답한 황녀가 물수건을 들었다. 나도 가서 차가운 물이 담긴 양동이를 챙겨주었다.


내가 가르쳐줄 일은 사실상 없다. 환자들의 상태를 체크하고, 가장 심한 사람의 물수건을 먼저 갈아주는 게 다였으니까.


내 시범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던 황녀도 기묘한 점을 느꼈는지, 내게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저, 이렇게 물수건만 갈아주고 따로 치료는 안 하는 건가요? 해열제가 있을 텐데요.”


어음, 간호하는 법만 알려주고 튀려 했는데 마음대로 안 되네. 어디까지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단 말이지···. 나는 플루토키아의 눈치를 슬쩍 봤다.


“어···, 원래 구비해둔 건 이미 동났고, 다른 지역도 비슷한 상황이라 들었어요. 수도 쪽에만 좀 남아있다고 하던데.”


침착했던 황녀의 표정이 살짝 붉어졌다. 왜 얼굴이 빨개지는 거지?


“···수도에서 배급해 주면 좋을 텐데요.”


고개를 푹 수그린 황녀가 중얼거렸다. 이 사람, 지금 황녀이면서도 물자 배급도 맘대로 못 해주는 상황에 스스로 부끄러워하고 있는 건가?


나는 어림짐작을 접어두고 등을 돌려 다른 환자에게로 갔다. 여기서 더 황녀와 접촉했다가는 내 무지함이 무슨 사고를 칠 지 몰랐다.


“잠시만요! 여기 주변에 민들레 없나요? 계절에 안 맞긴 하지만 모란, 수국, 개나리라도 있으면 좋아요. 해열에 효과가 있는 꽃들을 써보면 어떨까요?”


음? 황녀의 말에 간호하던 이들이 모두 이쪽을 쳐다봤다. 뭐라 대답해야 할지 망설이던 때, 반대편에서 양동이 안으로 수건을 넣던 중년 여성이 조심스럽게 걱정을 비쳤다.


“그렇지만 아가씨, 꽃을 약으로 먹으려면 마석 가루를 섞어야 할 텐데. 그건 너무 귀해서 구할 수가 없어.”


마석 가루가 뭐야? 나 혼자 벙 찐 사이 황녀가 제 품에서 묵직한 모레 주머니 같은 걸 주섬주섬 꺼냈다.


딱 봐도 무거워 보이는데 저걸 여태 품에 달고 다녔단 말이야? 코어근육이 얼마나 갖춰진 거야··· 굉장히 부럽다.


“제가 가지고 있어요. 제작법도 알고 있고요.”


그 한마디에 모두가 술렁였다. 비싼 마석 가루를 어찌 구했냐는 의심의 눈길이 날아들었지만, 황녀는 얼굴을 치켜든 채 당당히 서 있었다.


그래서 마석 가루가 대체 뭔데···!? 콩가루랑 비슷한 거야!?


간호를 총괄하는 여성이 걸어와 황녀와 몇 마디 나누더니, 간호 인원을 반으로 갈라 천막 근처 들판에 핀 민들레를 꺾어 오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냥 서 있었을 뿐인데 민들레 꺾기 팀에 배속된 나는 간호팀에 잔류한 설 팀장과 눈이 마주쳤다.


내가 입을 삐죽이니 파이팅 하라며 손을 흔드는 게 아주··· 앙큼해서 한 대 치고 싶은걸.


한숨을 삼키며 천막 밖으로 나왔다. 불어오는 바람이 제법 서늘해서 갑갑했던 천을 살쩍 벗었다. 훨씬 낫네.


주변 들판에는 적당히 농익은 민들레 꽃망울이 군데군데 피어있었다. 달빛이 밝은 탓인지 노란 심지가 유독 선명하다.


꼭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풀밭 위로 감상하는 것 같군.


“적어도 1인당 10송이는 꺾어 오십시오! 줄기는 필요 없으니 꽃송이만 따시면 됩니다!”


지시에 따라 민들레 근처에 몸을 쭈그렸다. 나··· 정말 별일을 다 하는구나. 이게 공무원? 짧은 현타가 머리를 스쳤다.


“별이 꽤 많이 떴죠?”


누군가 말을 걸며 내 옆에 움츠리고 앉았다. 그 기척에 돌아보니 엑스트라 백성 복장으로 갈아입은 플루토키아가 씩 웃어보였다.


음, 역시 잘생겼군. 나는 속으로 감탄하며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마석 가루가 뭐예요?”


“말 그대로 마석을 갈은 가루입니다. 마석은 마법의 힘이 담긴 돌이고요. 로맨스판타지 세계관에서는 이렇게 마법 관련 판타지 요소들이 종종 나옵니다.


예전에 황궁 안에서 술사를 보신 적 있죠? 주로 술사들이 마석을 이용해 도구를 만들거나 무기를 개발하거나 합니다.


데이지 황녀가 빙의한 이 세계관은 마술이 그리 범용화지 않아 간단한 약만 만드는 수준이지만요.”


아하. 나는 검지와 중지 사이에 민들레의 모가지를 끼워 당기며 물었다.


“황녀가 약초학을 공부하는 것 같던데, 일맥상통하는 얘긴가요?”


“예. 데이지 황녀의 황궁 적응을 위한 놀이 친구로 서브 남주가 등장했는데, 그가 약초학 전공 술사거든요. 섭남을 통해 약초학 마법을 접하고 꾸준히 배우는 중입니다.


재능도 꽤 있어서 유학도 가고 싶어 했지만 황제의 반대도 있고, 전염병도 도는 바람에 무산됐지만요.”


아하, 그 존잘 서브남과는 그렇게 만났구나. 나는 갈발과 녹안을 가진 미소년의 얼굴을 떠올렸다.


설 팀장이랑 제국을 돌아다니느라 로맨스 서사를 못 본 게 내심 아쉽다. 나도 경력이 쌓이면 볼 기회가 있으려나?


나는 스리슬쩍 플루토키아 쪽으로 고개를 기울이곤 속삭이며 물었다.


“근데 황녀는 왜 여기로 온 거예요? 황제가 꽤 집착, 아니 엄한 모양인데, 딸을 이런 환자 천지인 곳에 보낼 것 같진 않은데요.”


“아, 그건‒”


산뜻하게 대답하려던 플루토키아의 입술이 돌연 다물렸다. 뭐지? 하는 순간, 저 멀리서 잡초를 밟던 소리가 내게 점점 다가오고 있음을 자각했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곧장 시선을 던졌다. 달빛 아래 백발이 반투명하게 빛나고 금안이 반짝이는 게 누가 봐도 황녀다.


“저, 안녕하세요. 아까 안내해 주셔서 감사했어요. 진작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었는데 타이밍을 놓쳤네요.”


이 황녀, 적당히 모른 척 하고 지나갈 수도 있을 텐데 인사성이 너무 좋다! 나는 꽃송이가 들린 손을 무심코 움켜쥐었다.


“어··· 별로 알려드린 것도 없는데요 뭘···. 민들레는 금방 따다 드릴게요.”


“네에. 혹시 괜찮으시다면 나중에 저에 대한 이야기는 함구해 주실 수 있을까요? 제가 가족들에게 말없이 나와 있는 상태라. 괜히 걱정 끼치기 싫거든요.”


아하, 이게 본론이었군. 그리고 가출 상태였냐. 그럴 만하다. 속으로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는데 플루토키아가 정중히 대화에 끼어들었다.


“가족분들이 걱정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약을 만들어주시면 뒷일은 저희가 할 테니, 그때 돌아가시는 게 어떠할지요.”


“···제가 불필요하다는 말씀인가요?”


황녀의 눈매가 순간 날카로워졌다.


“그럴 리가요. 오히려 너무 귀한 일손이라 이 이상의 감염 가능성을 막고 싶어 드리는 말씀입니다. 아가씨처럼 약초에 해박하고 마석을 다룰 수 있는 이들은 치료약을 개발할 중요한 인재지 않습니까.”


네가 약초를 공부하고 귀한 마석을 다룰 정도로 고귀한 신분인 거 알고 있으니, 더 큰일 나기 전에 이만 돌아가라는 말을 우아하게 하는군.


나는 살짝 시무룩해진 데이지 황녀가 양손 가득 민들레를 들고 천막 쪽으로 멀어지는 모습을 보며 속닥였다.


“빙의자에게 직접 접촉해서 황궁으로 가란 말을 해도 괜찮나요?”


“빙의자가 병에 걸려서 사망 확률이 올라가면 이야기 진행에 차질이 생기니까요.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그리고 어차피 황궁 측에게 곧 들킬 테고요.”


플루토키아의 말이 끝나자마자 저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황궁도 바보가 아니지. 가출이 오래 가진 못하는군.


“황녀 전하!”


남자의 단단한 목소리가 민들레 들판에 울려 퍼졌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장소를 향해서 저렇게 크게 외치면 황녀 신분이 다 드러날 텐데 괜찮나?


들판 곳곳에서 꽃을 꺾던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 변하는 걸 보니 탄식이 나왔다. 역시 괜찮지 않잖아.


“‒마티스!?”


마티스가 누구여? 순간 터져 나온 사투리에 내 입을 고이 붙잡는 사이 백마 탄 왕자, 아니 기사단장 남주가 등장했다. 은유가 아니라 진짜로 흰 말을 타고 나타났다고.


“전하, 어째서 여기 계신 겁니까? 제가 황궁을 비운 사이 황녀궁에서 사라졌다는 말을 전해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아십니까!?”


황녀는 자신에게 달려오는 마티스-남주를 보고 멍한 표정을 짓다가, 그의 말을 듣고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다이앤투스 오라버니가··· 제게 뭘 해도 쓸모없으니 가만히 있으라고 했어요.”


뭐? 누구? 다이앤투스? 미치겠다, 등장인물들 이름이 기억이 안 나!


데이지 말고 모든 황족들 이름이 죄다 길어서 황자 셋 중에 누군지 헷갈려! 내 기억력이 이렇게 거지같다니. 늘 새롭고 짜릿하다. 공무원 필기시험은 어떻게 통과했냐?


일단 저렇게 막말을 할 오라버니는 역시, 3 황자밖에 없지.


“속이 상하셔서 이렇게 가출했다는 말씀입니까? 세상에 이런···, 전하! 지금 황궁이 얼마나 뒤집어졌는지 모르십니까!?”


열렬히 야단을 치는 남주의 푸른 동공은 황녀의 겉모습을 미친 듯이 훑고 있었다. 어디 다친 곳이 없는지 확인하는 듯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황녀가 그의 말에 어디 버튼이라도 눌렸는지, 자신의 연인을 매섭게 쏘아보며 성큼성큼 다가갔다.


“당연히 모르죠, 황궁을 나왔는데 제가 어떻게 알아요!?”


그··· 그건 맞지.


“당신도 제가 단순히 속이 상해서 가출했다고 생각해요? 천만에, 전 그 정도로 어리숙하지 않거든요.”


“···그렇다면 왜 나오신 겁니까?”


“전염병으로 제국이 고통 받는 상황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려고요. 아무도 제게 나라가 돌아가는 상황을 알려주려 하지 않더군요.


그래서 직접 나왔어요. 전염병이 어떤 증상을 갖고 있는지,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 해결방안은 무엇이 의논되고 있는지 제 눈으로 봐두려고요.”


“그렇다면 전하, 제게 물어보시면 되지 않습니까. 저는 전하가 원하는 걸 다 해드릴 겁니다.”


황녀가 작게 코웃음을 쳤다.


“황녀인 저도 못하는데 기사단장인 당신이 어떻게요? 황궁에선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그동안 약초학 공부를 하는 게 유일한 낙이었는데, 황제 폐하께서는 제가 약초학을 배우는 것도 슬슬 금지하려 하시죠.


전 계속 공부하고 싶어요. 멍청한 황녀라는 소문이 더 퍼질지언정 제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할 거라고요. 누군가 제 배움을 막으려 든다면 전 얼마든지 도망칠 거예요, 그게 혈육일지라도!”


어깨를 들썩이며 씩씩대던 데이지 황녀가 한풀 꺾인 목소리로 말했다.


“약초학을 가르쳐준 스승이자 친구였던 자도 제가 공부를 그만하라 하더군요. 사실 황녀는 예쁘게 앉아만 있어도 그만이라고.


그렇지만 제가 어릴 적에 백성으로 산 경험이 있어서 아는데, 병으로 죽어가는 백성 위에서 그저 웃고만 있는 황녀는 재수가 좀 많이 없거든요.”


남주는 뒤통수라도 맞은 것처럼 놀란 표정 그대로 굳어버렸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플루토키아의 옆구리를 약하게 찔렀다,


“인상적인 장면이긴 한데···. 구경꾼들이 너무 많네요. 나무판자에 여기 황녀 있다고 써서 목에 걸고 다니는 수준인데요. 괜찮은 건가?”


“뭐 어때.”


설 팀장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소란을 듣고 천막에서 나온 상사가 우리를 향해 걸어오며 말했다.


“그간 황녀에 대한 소문이 뒤숭숭했으니까 외려 전환점이 될지도 모르지.”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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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19) 친우 24.09.09 8 0 11쪽
19 18) 황자 24.09.06 9 0 11쪽
18 17) 간섭 24.09.05 8 0 12쪽
17 16) 서천 24.09.04 11 0 12쪽
16 15) 꽃밭 24.09.03 8 0 11쪽
» 14) 마석 24.09.02 8 1 11쪽
14 13) 간호 24.08.30 11 1 11쪽
13 12) 업무 +1 24.08.29 9 1 10쪽
12 11) 청춘 24.08.28 10 1 11쪽
11 10) 사진 24.08.27 10 1 11쪽
10 9) 사과 24.08.26 10 1 10쪽
9 8) 면담 +1 24.08.23 10 1 11쪽
8 7) 중립 24.08.22 11 1 11쪽
7 6) 조작 24.08.21 10 1 11쪽
6 5) 알현 24.08.20 10 1 11쪽
5 4) 조연 24.08.19 11 1 10쪽
4 3) 최악 24.08.18 12 1 11쪽
3 2) 작명 +1 24.08.18 14 1 10쪽
2 1) 면접 24.08.17 15 1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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