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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내리화
작품등록일 :
2024.08.17 21:54
최근연재일 :
2024.09.16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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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9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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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친우

DUMMY

신기하게도 내 몸은 비에 젖지 않았다. 나는 손바닥 3cm가량 위의 공중에서 빗방울들이 튕겨 나가는 걸 잠시 지켜보다 걸음을 옮겼다.


다만 물에 푹 젖은 풀밭을 걷는 감각은 그리 좋지 않았다. 축축한 풀잎들이 내 발목에 휘감기는 느낌에, 몇 번씩이나 발을 털며 황녀에게 다가갔다.


막상 와보니 화원이 아닌데. 나는 화려한 꽃이 아닌 수수한 약초들이 심어진 텃밭을 둘러봤다. 잡초 하나 없는 게 세심하게 관리한 듯싶다.


비에 쫄딱 젖어가는 황녀는 우두커니 서서 꽃 한 송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연보라빛 꽃잎이 크게 벌어지고 새빨간 암술이 얇게 솟아있는 예쁜 꽃이었다.


주변이 글리터를 잔뜩 뿌려놓은 것처럼 반짝반짝한데, 로판 세계 효과인가. 어쩐지 저 꽃, 좀 익숙하다.


턱을 매만지며 기억을 더듬다보니 사라도령이 보여줬던 기괴한 꽃이 생각났다. 그 암술이 혀처럼 오동통해서 구역질이 났던···.


···아니, 그 악마의 꽃이 저렇게 예쁘게 재탄생했다고? 직장인으로서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사라도령, 도대체 얼마나 갈린 거지.


설 팀장이 얼마나 굴린 거야? 나는 채찍을 든 설 팀장 앞에서 쭈그려 우는 사라도령을 상상하곤 눈살을 찌푸렸다.


저 꽃이 치료제인가 본데 한 송이밖에 안 피었나. 데이지 황녀 주변을 서성이고 있자, 주먹을 꽉 쥐고 눈을 감은 황녀가 갑작스럽게 꽃을 잡아채었다.


“!”


곧게 뻗어있던 꽃줄기가 물 먹은 한지처럼 힘없이 찢겨나간다.


“전하!”


그 순간 맞은편에서 남주와 서브남주가 뛰어나왔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그날 밤 화원처럼, 황녀와 남주의 시선이 맞부닥친다.


주변을 둘러보며 상황을 확인하던 섭남의 눈동자 황녀에 손에 들린 죽은 꽃을 보고 크게 흔들렸다.


“···그 꽃을 꺾으셨습니까?!”


“별 수 있나요, 둘째 오라버니가 쓰러졌다는데.”


아···. 무슨 상황인지 알겠다. 그러니까, 황녀는, 2 황자가 쓰러졌단 소식을 들은 직후 바로 텃밭에 뛰쳐나온 것 같은데.


쏴아아―


빗줄기가 더 강해진다. 어찌나 심한지 물안개가 스멀스멀 피어오를 정도였다.


나는 쉴 새 없이 때려 박히는 빗소리 사이로 서브남주의 짧은 음성을 들었다.


“전하,”


“사이프, 내가 이 꽃을 처음 발견했을 때 당신이 말했었죠? 이 꽃은 만병통치약이나 다름없어 매우 귀하다고요. 이걸로 오라버니의 심장 발작을 치료할 수 있을 거예요.”


“···그 꽃은 재배가 까다로워 황궁에는 현재 한 송이밖에 남아있지 않습니까. 분명 전염병 치료제를 만들기 위해 정성껏 키워 오신 것을···.”


“맞아요. 전 백성을 져버리고 피붙이를 선택했죠.”


황녀는 덤덤하게, 제삼자에게 판결을 내리듯 스스로에게 선고했다.


“황녀는 지옥에 떨어질 거예요.”


“전하!”


목소리를 높이며 황녀에게 다가가려던 섭남을 남주가 팔 하나로 가로막았다. 그리고 아주 침착하게, 그리고 비통하게 말했다.


“제2 황자이신 디기탈리스 라나타 전하는 조금 전 영면하셨습니다.”


발견된 직후 바로 응급처치하며 의원에게 이송되었지만 너무 늦었다고. 난 그 말을 듣자마자 이마를 부여잡았다.


어제부터 시작된 두통의 강도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황녀의 몸이 의식을 놓고 쓰러진 것도 이때였다.


“전하!”


남주들이 바로 튀어나와 황녀를 안아 들었다. 정확히는 남주가 빨랐지만. 한발 늦은 서브남주는 자신의 로브를 벗어 남주의 품속에 있는 데이지를 감쌌다.


“사이프. 데이지 전하를 빨리 황궁 안으로 모시도록.”


남주가 황녀를 바로 섭남의 품에 넘겨주며 말했다.


얼떨결에 황녀의 목을 안정적으로 받친 섭남은 한쪽 눈썹을 까딱이며 미심쩍은 눈으로 상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무얼 하시려는 겁니까?”


“이미 꺾인 꽃이니 바로 써야 하지 않겠는가. 황녀 전하께서 그간 준비하신 전염병 치료제 구상안에 곧장 투입해 봐야겠어.”


뭐? 이미 꺾인 꽃이니 시들기 전에 써야겠다 이거야? 나는 터질 것 같은 머리를 이기지 못해 풀밭 위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엉덩이가 젖어 드는 게 느껴졌지만 일어서지 않았다. 거대한 피로감이 내 어깨를 억누르고 있었다.


“마티스 경! 경까지 왜 그러십니까, 잠깐이라도 슬퍼하실 순 없습니까? 죽은 사람은 죽은 거고 산 사람만 살면 된다는 겁니까!? 어찌 그리 냉정하십니까!”


남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심해처럼 어둑해진 눈으로 황녀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경께선 2 황자님의 친우지 않습니까! ···황자님에 대한 예우를 잊으신 겁니까!?”


“친우이기에!”


버럭 내리꽂히는 고함에 나와 섭남이 움찔했다. 손등에 퍼런 핏줄이 솟은 남주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친우이기에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해야 한다는 걸 모르겠는가? 디기탈리스 전하는 진작 눈치 채고 계셨어, 데이지 전하께서 이 하나뿐인 꽃으로 자신의 치료제와 전염병 치료제 중 무얼 만들어야 할지 갈등하시는걸!


그래서 자신을 포기하고 백성을 위한 선택을 하라는 뜻을, 오늘 밤 직접 전하겠다고 하셨는데.”


남주의 마지막 말이 미세하게 떨린다. ···그래, 2 황자 본인도 여동생에게 진심을 전하러 가는 중 복도 한가운데서 발작이 일어날 줄은 몰랐겠지.


중간에 마주친 공무원이, 별로 중요한 인물도 아니라면서 제 죽음을 방관할 줄도 몰랐겠고···.


남주 마티스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제 아랫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송골송골 맺혀 나오는 핏방울이 비에 섞여 턱으로 흘렀다.


“황자 전하께선 이 꽃이 전염병 치료제로 쓰이길 원했다. 그가 원하는 일은 이 제국의 기사로서 마땅히 달성시켜야 해.”


“마티스 경···.”


“이 일은 사이프, 당신만 아는 걸로 하지. 지금부터 일어나는 일은 황녀 전하의 뜻이 아닌 내 독단이다.”


냉정하게 돌아선 남주가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의 수중에 들린 꽃이 벌써 시들기 시작한 게 보였다.


나는 황녀를 안고 비통하게 돌아서는 섭남의 뒤통수를 멍하니 보다 불현듯 생각했다. 난 어디로 가야 하나.


남주를 따라 전염병 치료제 제작을 구경하러 갈까. 그런데 내가 볼 자격이 있나? 나는 남주에게 원수나 다름없을 텐데.


낙뢰 과장은 내게 데이지 황녀를 지켜보라 했지. 그런데 저들을 따라 황궁으로 돌아가면 그 껄끄러운 사람과 마주칠지도 몰라.


잔인하고 아름다운 플루토키아는 몇 명의 죽음을 지켜봤을까?


정말 알 수 없는 사람이다. 나는 물안개 속에서 주머니를 뒤져 타X레놀을 찾았다.


어릴 적부터 나와 함께 자라온 두통. 툭하면 날 물고 늘어지는 게, 꼭 우리네 가족사 같았다.


***


2 황자 디기탈리스 라나타의 장례는 제국의 황자치곤 굉장히 소박하게 진행되었다. 그놈의 전염병 때문에 많은 인력을 동원할 수 없는 탓이리라.


구슬프게 연주되는 오르간 소리는 어찌나 낮은지, 소리가 눈에 보인다면 발목 근처에서 빌빌대며 기어다닐 것만 같다.


나는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높이 치솟은 성당 천장을 올려다보다, 코와 잎을 천으로 가린 귀족들이 황자의 관 옆에 백합을 바치러 띄엄띄엄 줄 서는 걸 보고 비켜섰다.


···황자의 죽음을 방치한 나는 살인자가 아닐까? 살인자가 뻔뻔하게 장례식장에 서 있어도 되는 걸까.


그날 이후 플루토키아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데, 어쩌면 그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오지 않은 걸 수도 있다.


나는 귀족들이 빠지기를 한참 기다리다, 몰래 훔쳐 온 백합 한 송이를 꽃 무더기 위에 올렸다.


그 순간 내 뒤로 바쁘게 뛰어오는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성당 자체가 면적은 좁고 위로 드높은 구조였기에, 그 경박한 소리가 벽 여기저기에 튀어 천장 끝까지 울리기 시작했다.


동생의 관 옆에서 객들의 인사를 받던 황태자가 소음의 원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중년의 사제가 숨을 몰아쉬며 이쪽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장례식을 주관하던 추기경이 앞으로 나선 건 그때였다.


“이게 무슨 경거망동한 행동이냐. 감히 황제 폐하 앞에서‒”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무척 급한 일인지라, 잠시 귀를···.”


중년 사제가 추기경의 귓가에 무언가 소곤거린다. 침착하게 이야기를 듣던 추기경의 이마 주름이 점점 깊어지더니, 사제의 말이 끝나자 확 펴진다.


“황제 폐하.”


여전히 냉철한, 그러나 수심이 아주 조금 엿보이는 황제가 추기경의 말에 고개를 까딱한다.


이번엔 추기경이 황제의 귓가에 무어라 속삭이기 시작한다. 검지로 무릎을 톡, 톡 두드리던 그는 표정 변화 없이 제 딸을 불렀다.


“데이지.”


검은 베일을 쓰고 쉴 새 없이 기도를 올리던 황녀가 천천히 고개를 든다.


“요 며칠 꼬빼기도 보이지 않던 네 약혼자가 전염병의 치료제를 들고 황궁에 나타났다는데. 아는 바가 있나?”


뭐야, 황녀랑 남주 언제 약혼했어? 나 혼자 진도를 못 따라잡은 학생처럼 어리둥절해져 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마티스 경이 말입니까?”


데이지 옆에 앉아 있던 3 황자가 놀라 대화에 끼어들었다. 새까만 베일 때문에 황녀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손이 저리 떨리고 있으니 심히 당황한 모양이다.


“그 꽃···.”


황녀의 중얼거림에 황태자도 감을 잡았는지 곧장 얼굴을 굳혔다.


“아바마마. 다이앤투스가 원하던 일이 일어난 듯 하온데,”


황제가 됐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 의미를 나 빼고 다 아는지, 다른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3 황자가 형의 부름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장례의 상주를 맡은 자기 대신 황궁에 돌아가 사태를 파악해 달라는 말에, 각 잡힌 군인처럼 절도 있게 고개를 끄덕인다.


이어 수하들을 이끌고 성당을 떠나려던 그는 여동생 앞에서 잠시 멈칫했다.


“···너도 갈 텐가?”


낮은 목소리가 어쩐지 조심스럽게 느껴진다. 여태 데이지 황녀에게 싹퉁바가지처럼 굴었던 지난날이 살짝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나와 황태자는 순간 ‘저놈이 웬일’하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는데, 멍하니 셋째 오빠를 올려다보던 황녀는 조용히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천천히 내려오던 황녀의 시선이 2 황자의 관에 고정되었다. 3 황자는 묵묵히 그 모습을 지켜보다 이내 성당을 나섰다.


따라가야 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황녀와 멀찍이 떨어진 의자에 앉았다. 나는 이 자리가 맞다.


소설 속 전염병을 치료할 약이 등장하는 짜릿한 장면이 아니라, 등장인물의 죽음에 애도해야 하는‒어쩌면 소설에 길게 서술되지 않을 슬픈 장면.


난 자진해서 응달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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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20) 영웅 24.09.10 8 0 12쪽
» 19) 친우 24.09.09 8 0 11쪽
19 18) 황자 24.09.06 9 0 11쪽
18 17) 간섭 24.09.05 7 0 12쪽
17 16) 서천 24.09.04 11 0 12쪽
16 15) 꽃밭 24.09.03 8 0 11쪽
15 14) 마석 24.09.02 7 1 11쪽
14 13) 간호 24.08.30 10 1 11쪽
13 12) 업무 +1 24.08.29 9 1 10쪽
12 11) 청춘 24.08.28 10 1 11쪽
11 10) 사진 24.08.27 9 1 11쪽
10 9) 사과 24.08.26 10 1 10쪽
9 8) 면담 +1 24.08.23 10 1 11쪽
8 7) 중립 24.08.22 11 1 11쪽
7 6) 조작 24.08.21 9 1 11쪽
6 5) 알현 24.08.20 9 1 11쪽
5 4) 조연 24.08.19 11 1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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