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승시청 웹소설국 로맨스판타지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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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내리화
작품등록일 :
2024.08.17 21:54
최근연재일 :
2024.09.16 17:20
연재수 :
2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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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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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0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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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5) 알현

DUMMY

오두막 마을 사람들이 당황한 표정으로 서로를 힐끔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고개를 살짝 오른쪽으로 꺾어, 사람들 뒤편에 서 있는 데이지를 찾아냈다.


살짝 떨고 있는 데이지 황녀는 말 그대로 미소녀로 자라나 있었다. 생기로 반짝이다 못해 번뜩이는 금안, 햇살에 닿으니 반쯤 투명해져 더욱 신비로운 분위를 자아내는 고수머리 백발.


그야말로 흰색 유성 물감을 바른 듯한, 선명하고 단단한 플루토키아의 백발과는 사뭇 다르다.


같은 머리색이라도 직접 보니 이렇게나 차이가 있구나. 데이지 황녀가 가진 저 몽환적인 백발을, 어떻게 해야 글로 잘 표현할 수 있을까.


그저 평범하게 ‘백발이었다’ 로 서술되고 끝나기엔 아름다운 빛깔인데.


···3년간 공시 공부를 한다고 글을 단 한 줄도 쓰지 않은 탓인지, 적당한 미사여구가 떠오르지 않는다.


됐다, 난 일 시작하자마자 사고 친 인간인데 벌써부터 미래에 맡을 업무를 고민하고 있지? 당장 맡은 일도 제대로 못하면서···.


사람들이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자, 가운데 선 기사가 돌연 투구를 벗었다. 데이지처럼 반투명한 백색 생머리가 윤기 있게 갑옷 위로 흘러내렸다.


보는 순간 감탄이 나왔다. 피부는 창백했고, 모래색 눈은 약간의 냉기가 서려 있었다. 뭐랄까, 첫인상만 보면 기사가 아니라 성직자 같았다.


그는 마을사람들을 한 명 한 명 찬찬히 응시해가며 입을 열었다.


“나는 이 에르덴틴 제국의 3 황자, 다이앤투스 치넨시스. ‘데이지’란 소녀를 찾으러 왔을 뿐이니 그대들은 염려 마라.”


소스라치게 놀란 사람들이 들판을 향해 머리를 더욱 깊이 박았다.


“제, 제가 데이지입니다.”


유일하게 머리를 숙이지 않은, 온몸이 떨리고 있으나 목소리만은 단단한 데이지가 용감하게 외쳤다. 3 황자는 데이지를 힐끔 바라보더니 툭 물었다.


“성씨는?”


“‘카넨’입니다.”


“부모의 성인가?”


“아뇨, 절 길러주신 고아원 원장님의 성씨를···, 빌려 쓰고 있습니다.”


아까 그늘에서 지은 이름이 나와서 살짝 뿌듯했다. 고아들을 따뜻하게 품어주는 원장이라기에 카네이션에서 따다 붙였는데 나름 어울리는 듯하다.


그러고 보니 데이지의 이름을 지어 입력할 때, ‘황족은 성씨가 없다는 설정’이라고 적혀있었지. 이름만 긴 3 황자가 기사들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폐하께서 찾는 이가 맞는 듯하군. 넌 우리와 함께 황궁으로 가주어야겠다.”


저거 해석하면 ‘우리 안 따라오면 죽음’아닌가?


데이지가 다급히 이유를 물었지만 3 황자는 쿨하게 무시하고 돌아섰다. 뒤에 있던 기사들이 곧 마차를 가져올테니 짐을 챙기라고 통보할 뿐이었다.


드디어 황궁에 가는구나~ 라고 안일하게 생각하다가, 불안한 예감이 꽂혀 플루토키아의 어깨를 부여잡고 다급히 물었다.


“저희 황궁까지 어떻게 따라가요!?”


“같이 마차 타면 됩니다.”


***


황궁이 있는 수도는 그리 멀지 않았다. 마차는 잘 닦인 길 위를 거침없이 나아갔다. 나는 마차 지붕 위에 쭈그려 앉아 저 멀리 보일락말락 하는 성문을 노려보았다.


“엉덩이가 불편하십니까? 조금만 참으십시오.”


플루토키아의 말에 방뎅이의 통증이 강렬해졌지만 참았다. 외투까지 벗어 내 엉덩이 밑에 깔아줬으니 더 따질 마음은 없었다.


아니 난 마차에 같이 탄다길래 안에서 우아하게 앉아서 갈 줄 알았지···.


근데 안에 같이 타면 데이지 황녀와 너무 가까워져서 들킬 수 있다고 지붕 위에 타야 한단다.


“···괜찮아요. 오히려 안에 같이 타고 갔으면 숨 막혀 죽었을 것 같아요.”


마차 안에는 데이지와 3 황자 둘뿐이다. 영문을 모르는 데이지는 말 그대로 쫄아있고, 3 황자는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듯했다.


나 같아도, 갑자기 아빠가 배다른 여동생이 있으니 찾아오라고 시키면 열 받을 것 같긴 하지만···.


“여동생···.”


잘 지내고 있을까. 나는 손톱 밑 거스러미를 건드리기 시작했다. 너무 힘을 줘서 피를 볼 정도로 뜯어내 버린 순간, 갑자기 바람이 확 불어왔다.


머리칼을 넘기며 주변을 둘러봤다. 파스텔 톤으로 칠해진 건물 가게들엔 손님이 활발히 오갔으며, 중세 유럽 복장을 한 행인들이 복작복작한 거리를 이리저리 쏘다녔다.


아기자기한 건물들을 보다보니 어디 웹소설 안으로 온 게 아니라 에X랜드에 놀러온 기분이 들었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다. 마차의 속도가 느려지자, 비로소 마차의 존재를 알아챈 행인들이 길을 피했다.


문득 옆자리가 허전해 고개를 틀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군인처럼 각 잡고 앉아있던 플루토키아가 난데없이 지붕 위에 어설프게 엎드려 귀를 바짝 붙이고 있었다.


“!? 뭐 하세요?”


“등장인물들의 대화를 듣고 있습니다. 혹시 몰라 애로사항이 생겨 팀장님께 보고해야 할 수도 있으니까요.”


이··· 이렇게까지 해야 해? 식은땀이 났지만 대화가 궁금했으므로 나도 엎드렸다. 마차 방음이 엉망인지 생각보다 잘 들렸다.


-제발 말씀해 주세요, 황자님께서 왜 절 황궁으로 데려가시는지···


-난 폐하께서 명령하신 대로 움직일 뿐이다.


말투 봐라. 대꾸하기 싫다는 티가 팍팍 나는군.


3 황자는 모든 질문에 ‘폐하의 명령을 따를 뿐’이라는 답을 내놓았고, 데이지는 점점 겁을 잃고 당돌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참으로 소득 없는 대화였다.


비록 예법은 모조리 틀렸으나 황자에게 기죽지 않는 데이지를 속으로 칭찬하다 보니, 마차가 성문을 통과했다.


방뎅이가 정말 두 쪽 나기 전에 도착해서 다행이야···. 나는 마차가 멈추자마자 플루토키아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내려섰다.


성안에는 몇 안 되는 기사들과 시녀 한 명, 하녀 여러 명이 대기 중이었다.


“황자님 오셨습니까. 황제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 아이는 알아서 준비시키세요. 시간이 남으면 황족을 대하는 예법도 가르치고.”


제3 황자 다이앤투스 치넨시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따르는 기사들을 불안한 눈으로 올려다보며, 데이지가 손을 뻗었지만 아무도 잡아주지 않았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시녀와 하녀들이 사방을 힐끔대던 데이지를 둘러싸고 어디론가 이동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따라나서려는데, 플루토키아가 나만 따라갔다 오라며 3 황자 쪽으로 사라졌다. 당황했지만 이내 그 이유를 깨달았다.


데이지는 생전 처음 목욕 시중과 옷시중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


“저 혼자 할 수 있어요! 제발 혼자 하게 해주세요.”


“안 됩니다. 폐하가 기다리고 계시니 단장을 서둘러 마치셔야 합니다. 조금만 참으시지요.”


데이지는 온몸이 시뻘겋게 물든 채로 애원했지만, 어린 소녀의 온몸을 부드러운 천으로 닦아주는 손길들은 거침이 없었다.


드레스 입기도 별 차이는 없었다. 이거야 원, 애한테 드레스를 입히는 게 아니라 드레스에 맞게 애 몸을 구겨 넣는 거 아냐?


데이지는 붉어진 눈가를 꾹 감고 있었고, 나 역시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이건 아동 학대야.


···하지만 여긴 중세를 바탕으로 하는 로맨스 판타지 세계관이다.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어.


공시생 시절 늘 들이키던 무기력감이 느닷없이 쓰다. 나는 크림색 드레스로 완벽하게 포장된 데이지를 따라 황제에게로 향했다.


제3 황자 일행이 알현실 문 앞에서 미리 대기하고 있었다. 그 무리에서 살짝 떨어진 플루토키아를 발견해, 나는 빠르게 그에게 뛰어가 물었다.


“이거 혹시 피폐물이에요? 로판도 카테고리가 여러 개로 갈리는 걸로 알고 있는데.”


“일단 안립 팀장님이 성장물을 초점으로 컨셉을 잡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별일이 없으면 그대로 진행될 테지만, 빙의자가 어떠한 행보를 보이냐에 따라 카테고리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승사자들이 기본 기승전결은 잡아두지만 빙의자 행동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이거군.


그래도 다행이었다. 두 번째 삶을 사는 망자에게 선택권이 아예 없는 건 아니어서.


알현실 문 앞에 선 데이지는 드레스를 입으면서 급하게 들은, 황제를 알현할 시 외쳐야 할 인사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드레스 자락을 움켜쥔 주먹에서 의지가 느껴지는걸. 마차에서도 3 황자에게 떨면서 묻고 싶은 건 다 물어봤던 걸 보면, 황녀도 연약한 성격은 아닌 듯하다.


궁궐에서 마냥 당하고 있진 않을 것 같지 않아.


“제3 황자 드십니다!”


데이지는 3 황자 뒤에서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걸어갔다. 폐하가 허락할 때까진 절대 먼저 얼굴을 들지 말라는 시녀의 말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아니 근데. 저 사람이 황제라고? 데이지보다 나이 많은 아들이 넷이나 있다는 설정 아니었나? 나이가 나랑 차이 얼마 안 날 것 같은데?


미친 동안인데 잘생기기까지 한 황제···. 그는 3 황자와 데이지가 그러하듯 반투명한 백발을 포마드 머리로 넘기고, 호박색 눈으로 데이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제국의 광명을 뵙습니다.”


나는 3 황자가 데이지를 데려왔다는 사실을 고상하게 보고하는 틈을 타 플루토키아에게 속삭였다.


“딸은 아빠 닮는다더니 정말 닮았네요.”


“정말입니까? 모든 딸이 그런가요?”


주체할 새도 없이 내 표정이 구겨졌다.


“모든 딸이 그런 건 아니죠. 근데 전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요.”


설득력 없는 말을 하고 있을 때 황제가 입을 열었다. 커다란 제국을 다스리는 인물치고는 굉장히 미성이었다.


“저 아이의 머리카락과 눈의 색을 보아하니, 짐의 핏줄임을 부정할 수 없겠군.”


누군가 헉, 하고 크게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알현실에 퍼졌다. 데이지의 등이 들썩이는 걸 보니 범인이군.


황좌 근처에 서 있던 신하들이 급히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었다.


“허나 폐하, 14년 전에 분명 갓 태어난 황녀 전하의 시신을 직접 확인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술사를 불러 진정 황녀 전하가 맞는지 확인하셔야 합니다.”


이번엔 데이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황당해했다. 표정에 생각하는 게 다 보이는데? 갑자기 자기들 맘대로 불러와 놓곤 정체를 의심한다며 어이없어하는군.


이러니저러니 해도 데이지 황녀에겐 어린 티가 났다. 그 모습이 귀여워 피식 웃었는데, 한순간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저 황제, 왜 날 보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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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19) 친우 24.09.09 8 0 11쪽
19 18) 황자 24.09.06 9 0 11쪽
18 17) 간섭 24.09.05 7 0 12쪽
17 16) 서천 24.09.04 11 0 12쪽
16 15) 꽃밭 24.09.03 8 0 11쪽
15 14) 마석 24.09.02 7 1 11쪽
14 13) 간호 24.08.30 11 1 11쪽
13 12) 업무 +1 24.08.29 9 1 10쪽
12 11) 청춘 24.08.28 10 1 11쪽
11 10) 사진 24.08.27 10 1 11쪽
10 9) 사과 24.08.26 10 1 10쪽
9 8) 면담 +1 24.08.23 10 1 11쪽
8 7) 중립 24.08.22 11 1 11쪽
7 6) 조작 24.08.21 9 1 11쪽
» 5) 알현 24.08.20 10 1 11쪽
5 4) 조연 24.08.19 11 1 10쪽
4 3) 최악 24.08.18 12 1 11쪽
3 2) 작명 +1 24.08.18 14 1 10쪽
2 1) 면접 24.08.17 14 1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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