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천재 화가가 그림을 너무 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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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론상이
그림/삽화
오후 10시 15분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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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21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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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1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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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그림

DUMMY

2화.


"성혁아, 선생님 진짜 걱정된다. 어?”


검은 머리를 정갈하게 묶은 여자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보니 따라가게 된 교실엔 꽤나 얼굴에 주름 진 사람들이 삼삼 오오 모여있었다.


‘저건 뭐지? 왜 다들 판때기들을 보고 있는거지?’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평평한 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중에는 파란색 물감이 씌워진 판도 있었고, 흰색에 검은색 점들이 찍혀있는 판도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분명 평범한 판때기라고 생각했는데 그 안에 있는 그림들이 순식간에 바뀌기 시작했다. 딸깍거리는 소리에 맞춰 판에 그려진 그림들이 자유자재로 바뀌기 시작했다.


이, 이 무슨 마법같은 일이······!


“이성혁. 너 진짜 집중 안 할래?”

“어······.”

“아니, 진짜 얘가 왜 이래? 아까부터 어어 거리고? 진짜 어디 아픈거 아니니?”


나는 입만 뻥끗거리며 여자를 바라봤다. 여자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을 뿐더러 어떤 말을 해야할 지도 몰랐으니까.


결국 눈알만 이리저리 굴리며 상황을 보던 나는 눈앞의 여자가 당황스러워 하는 것 만큼이나 나 역시도 당황하고 있었다.


꿀꺽, 나는 마른 침을 삼켰다. 지금 이 모든 게 어떻게 된 건지 이해가 되진 않지만······


대화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Dove siamo?(여기가 어디죠?)”

“뭐? 도그? 너 지금 개같다고 한거니?”

“Perché sono qui? E cosa sono tutti quei pannelli di vernice?(왜 내가 여기에 있는겁니까? 그리고 저 그림판들은 다 뭐고요?)”

“너, 너 진짜······!”


여자의 얼굴이 당황함으로 일그러졌다.


말은 통하지 않지만 감정은 고스란히 전해졌다.

당황, 혼란, 분노 등. 그 여러가지의 감정들이.


“아니, 성혁아. 너 지금 이탈리아어 한거니?”

“......이탈리아어요?”

“고선생, 지금 성혁이 이탈리아어로 말했어. 내가 이번 방학에 이탈리아를 갔다 왔어서 이게 들리네?”


옆에서 파란색 판때기를 보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둘이 무어라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역시나 나는 그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저 빛을 받아 머리가 군데군데 빛나고 있던 남자가 내게 말을 걸었다.


“성혁아, 그런데 왜 갑자기 이탈리어니?”

“······”

“Dove stai male?(너 어디 아프니?)”

“!”


그 순간 두 눈이 커다래졌다. 여기서 모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있다니! 


드디어 나는 말이 통하는 사람을 발견했다는 생각에 남자의 앞으로 성큼 걸어갔다.


“Dove diavolo siamo? Quando ho aperto gli occhi, era qui. Chi sei tu per indossare questi strani vestiti?(여긴 대체 어디죠? 눈을 떠보니 이곳이었습니다. 당신들은 누구길래 이런 괴상한 옷을 입고 있는겁니까?)”

“야, 야 너 갑자기 왜 이래?!”

“Sono Marco del Pierre. Devo andare a casa. C'è una festa a cui devo partecipare domani. Se non ottengo supporto, non potrò più disegnare······(나는 마르코 델 피에르입니다. 나는 집으로 가야해요. 내일 꼭 참석해야하는 파티가 있단 말입니다. 후원을 받지 못하면 더는 그림을······)”


순간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차마 내 입으로 더는 그림을 그리지 못한다는 말을 내뱉을 수 없었다.


내뱉는 순간 그 말이 사실이 될 것 같았으니까.


......물론 그림을 그릴 수야 있다. 단지 아무도 바라봐주지 않을 뿐이다.


그렇다면 그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주먹을 꽉 쥔 채로 바닥을 바라봤다.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눈 앞이 핑핑 도는 것 같은 상황에 나는 간신히 정신줄을 붙잡았다. 아무말 없이 바닥만 쳐다보고 있자, 앞에서 쑥덕이기 시작했다.


“아, 아니 고선생. 얘 진짜 왜 이래······?”

“저, 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이거 진짜 이탈리아어에요?”

“그, 그럴 걸? 나도 여행때 쓰는 것밖에 몰라. 그냥 아는 척 해본거야.”

“서, 성혁아. 일단 지금 좀 아픈 것 같으니까 보건실에—성혁아!”


띵띵띵– 머릿속에서 종이 울리는 듯한 기분과 함께 눈 앞이 암전되듯 꺼졌다.


그렇게 나는 땅바닥에 쓰러졌다.



*


“우으······.”


미간을 한껏 찡그리며 눈을 떴다. 힘겹게 눈을 뜨자 보이는 건 하얀색 천장이었다.


“일어났니?”

“.......”

“또 약 안 챙겨먹은거지? 에효.”


하얀색 로브같은 것을 둘러입은 여자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지만 아까 봤던 여자와는 다르게 온화한 느낌이었다.


아무말도 없이 여자를 빤히 쳐다봤다. 그러자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내게 무어라 말하기 시작했다.


“정신과 약은 이상한게 아니야. 성혁이 너는 또래에 비해 조금 신경이 예민한 편이어서 세상을 무뎌지게 볼 필요가 있어. 그때 도움을 주는 게 이 약들이고.”

“.......”

“정 먹기 싫으면 일단 복용 기간동안에만 꾸준히 먹자. 그리고 그 이후에 점차 줄여가는거야. 어때?”


나는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몰랐다. 하지만 분위기상 고개를 끄덕여야할 것만 같았기에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여자는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말했다.


“일단 선생님은 잠깐 일 처리 할 게 있어서 밖에 나갔다올게. 그동안 누워서 좀 쉬고 있으렴. 괜찮아지면 반으로 올라가도 되고.”


그 말과 함께 여자는 밖으로 나갔다. 나는 멍한 상태로 고개를 돌렸다.


창문에서 흘러내리듯 들어오는 햇살. 햇살이 내 왼쪽 팔목을 내리쬐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아무 말 없이 바라봤다.


원래 내 팔목보다 한없이 얇다. 색깔도 푸르딩딩하면서도 내 피부색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이번에는 오른손바닥을 펼쳤다. 그리고 다시 쥐었다. 내가 생각하는 것에 따라 근육이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이 몸은 내 몸이었고, 동시에 내 몸이 아니었다.


‘......원래 내 몸은 죽은건가.’


하긴, 마지막 장면이 물 속에 빠져 허우적대는 모습이었으니. 죽었어도 이상할 건 없었다. 하지만 죽음 이후에 천국도, 지옥도 아닌 이런 곳에 오게 된 건 이상했다.


미간을 좁히며 끙, 거리고 있는데 순간 한 장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마르코!!’


그러나 동시에 내 이름을 애타게 부르던 녀석. 그 녀석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지만 마르코. 감정은 인간에게 주어진 축복이야. 예술은 그걸 표현할 의무가 있어.’

‘......그림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걸 재현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 화가의 내면을 표현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

‘사실 로렌초 님께서 내 성인화를 보시고는······’


하, 웃기지도 않는 군.


녀석이 하던 말이 귓가에 웅웅 울리는 듯 했다. 분명 지금쯤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등에 업은 채 떵떵 거리며 잘 살고 있겠지.


평생 자신을 무시하던 내가 죽어버렸으니 오히려 쌤통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을거다.


내면이니, 영혼이니. 헛소리를 하던 멍청이와 이미 죽어버린 성인을 그려달라고 하는 머저리의 조합이라니, 아주 잘 어울릴 터였다. 그래, 아주 잘 어울리는  한쌍일거다.


‘이제 어떻게 되는거지. 이 몸으로 살아가야하는 건가.’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고, 내가 왜 이런 몸에 빙의가 된 건지도 모르겠지만 하나 확실한 건 이전의 나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봄인가.’


나는 왼쪽에 계속 쪼여지는 햇살을 말없이 바라봤다. 창문 밖을 내다보니 녹색 새순이 올라온 나무들이 눈에 들어왔다. 전생에서도 그리고 문득 내 눈에 들어온 꽃.


‘아이리스(iris)라......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전생에도 종종 아이리스를 그리곤 했다. 실제 아이리스와 똑같은 탓에 귀부인들 사이에선 인기 소재 중 하나였다.


‘요즘 마르코님이 그리신 아이리스가 얼마나 인기인지, 다들 하나씩은 다 가지고 있어요.’

‘진짜 꽃은 시들지만 마르코님이 그리신 꽃은 시들지 않아서 좋아요.’

‘가만 보고있으면 향기도 나는 것 같다니까요?’


그 이야기들을 들으며 나는 우쭐대는 마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신이 꽃을 창조했다면, 나는 내 화폭에 그것들을 다시 창조해냈다.


꽃은 시들지만, 나의 꽃은 지지 않았다.


툭, 그때 뭔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소리가 난 쪽을 보니 테이블 위에 종이 한 장이 놓여있었다. 바닥에는 연필 하나가 떨어져있었다.


나는 홀린 듯이 그것을 쥐었다.


사각사각, 종이 위로 지금 보이는 꽃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여러번 겹쳐 선을 덧댔다. 좋은 종이인지 연필이 부드럽게 그어졌다.


‘색이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흑색 연필 하나로 보라빛을 표현한다는 건 불가능했기에, 나는 명암만을 조절하며 꽃을 그려갔다. 전생이었다면 재료가 갖춰지기 전까진 그림을 그리지도 않았겠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그저 손이 가는 대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어딘지 모르는 이 곳. 대화도 안 통하고 인종도 다른 이곳에서,

그림만이 유일한 소통 수단이었니까.


사각, 사각. 빈 공간 안에서 연필이 그어지는 소리만 이어졌다. 종이 위로 보이지 않는 색들이 겹쳐져갔다.


이마 위로 식은 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손바닥에 땀이 흥건해지는 걸 느꼈다.


그렇게 선이 그어지고, 그어지던 찰나.


“......Ho finito(완성이다).”


그림이 완성됐다. 그림이라고 하기엔 볼품없고, 사용한 도구는 연필 하나지만······.


이 몸으로 그린 첫번째 그림이었다.


“으윽!”


그 순간, 갑자기 머리가 깨질듯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기억들이 자동으로 재생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건 내 것이 아니었다.


‘성혁아. 미대를 가고 싶다는 말이니?’

‘왜 하필 미대인거냐? 다른 전공이 그렇게 많은데도?’

‘......포기해라.’


웅웅웅, 머릿속이 헤집어지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는 언어들이 자동으로 이해가 된다. 분명 아까까지는 처음 들어보던 목소리인데, 나를 걱정스레 바라보고 있는 남자와 여자. 두 눈에는 걱정이 깃들어있었다.


‘......이게 대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또다른 기억이 멋대로 재생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아까 봤던 여자와 남자의 얼굴이 자동으로 떠올랐다.


‘성혁아, 선생님들 사이에서 너 수업 태도 안좋다고 매번 말 나오는 거 알고 있니? 미대도 미대지만 수업도 잘 들어야지.’

‘맨날 뭐 적고 있길래 공부하는 줄 알았건만, 계속 이렇게 낙서하고 있던거냐? 나원 참, 이럴거면 예고로 편입하든가! 더 이상은 못봐준다!’


그리고 ‘이성혁'의 목소리까지.


‘그림 그리고 싶다. 하루종일 그림만 그리고 싶다.’

‘성공하고 싶다. 유명해지고 싶어. 내 그림으로 인정받고 싶다.’

‘......나 재능이 없는 건가?’

.......

.......

‘나 평범하구나.’


“제발, 그만—!”


그렇게 머리채를 붙잡고 힘겹게 신음하려는 찰나,


“성혁아! 괜찮니?!”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아까 하얀 로브, 아니 하얀 가운을 입고 있는 여자였다.


“······보건 선생님”


내 입에서 낯선 언어가 흘러나왔다. 나는 이 여자를 알고 있다.

게다가 아까까지는 들리지 않던 언어들도 자동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아이고, 이 식은땀 좀 봐. 무슨 악몽이라도 꾼 거야? 안되겠다, 일단 조퇴하고 병원으로 바로—.”

“......괜찮아요.”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등 뒤로 서늘한 공기가 지나갔다. 머리털이 쭈뼛 서는 가운데, 나는 마른 침을 삼켰다.


‘이성혁, 17살. 제원고등학교 재학 중이고······화가가 꿈이라.’


이 몸의 주인인 이성혁에 대한 정보가 머릿속에 물밀듯이 밀려들어왔다.


이곳이 한국이라는 나라라는 것.

그리고 내가 있던 시대로부터 500년이 훌쩍 지났다는 것.


‘......말도 안돼. 500년이 지났다고?’


그렇게 당황한 표정으로 두 눈만 끔뻑이고 있는 가운데, 보건 선생님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성혁아, 근데 저건······.”


놀란 눈으로 뭔가를 가리키는 모습.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시선을 따라갔다.


“설마 네가······그린거니?”


그리고 그곳엔 방금 내가 그린 ‘아이리스’가 있었다.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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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이딴게......그림? +1 24.09.10 794 28 12쪽
21 어긋난 그림 +1 24.09.09 850 27 16쪽
20 잊혀진 그림 +3 24.09.08 939 34 16쪽
19 모두를 감동시키는 그림 +1 24.09.07 1,002 38 14쪽
18 이딴 그림 +1 24.09.06 1,032 31 15쪽
17 전세계로 퍼진 그림 +5 24.09.05 1,125 37 15쪽
16 아득하고 모호한 그림 +1 24.09.04 1,226 40 20쪽
15 애들 장난 수준 그림 +3 24.09.03 1,289 38 15쪽
14 낙서도 그림 +4 24.09.02 1,468 42 18쪽
13 더 비싼 그림 +3 24.09.01 1,510 35 13쪽
12 보이는 게 전부인 그림 +4 24.08.31 1,524 39 13쪽
11 괴물같은 그림 +2 24.08.30 1,558 36 15쪽
10 수채화 그림 +1 24.08.29 1,588 47 14쪽
9 비싸질 그림 +4 24.08.28 1,621 43 16쪽
8 천재의 그림 +2 24.08.27 1,622 40 13쪽
7 옳은 그림 +4 24.08.26 1,666 45 13쪽
6 비싼 그림 +2 24.08.25 1,875 38 16쪽
5 개쩌는 그림 +5 24.08.24 1,922 4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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