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천재 화가가 그림을 너무 잘 그림

무료웹소설 > 작가연재 > 현대판타지, 판타지

새글

자론상이
그림/삽화
오후 10시 15분 연재
작품등록일 :
2024.08.21 12:12
최근연재일 :
2024.09.17 22:15
연재수 :
29 회
조회수 :
38,824
추천수 :
984
글자수 :
192,880

작성
24.09.04 22:05
조회
1,224
추천
40
글자
20쪽

아득하고 모호한 그림

DUMMY

16화


교장 최상서는 두 눈을 의심했다. 눈 앞에 그려진 [우는 여인] 그림은 일개 학생이 그린 그림이라고 치기에는 너무도 정교하고 섬세했으니까.


그는 그저 두 눈을 커다랗게 뜬 채로 끔뻑거렸다.


“애들 장난 수준이라고 하기엔 애들 수준이 좀 높네요.”


싱긋 웃으며 말하자, 그는 꿀 먹은 듯한 표정으로 그림을 찬찬히 뜯어봤다. 그러더니 침을 꿀꺽 삼킨 후, 박수를 쳤다.


짝짝짝,


“하하하! 아니, 우리 학교에 이런 인재가 있는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말입니다! 이성화 선생, 이런 우수한 학생이 있는데 왜 보고를 안했습니까?”

“네? 보고요? 애초에 미대쪽은 별로 관심도 없으신–”

“어허, 내가 언제 그랬다고.”


이성화의 말을 딱 자른 교장은 싱글벙글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그는 엄지손가락을 척 쳐들더니 연신 흔들어댔다.


“이정도 수준이면 현성고는 무슨 이 지역에서 탑 클래스. 그래 탑 클래스입니다! 이성화 선생. 이렇게 된 거 학교에 걸 그림 둘이 같이 그리면 어떻겠습니까?”

“네? 갑자기······.”

“에헤이. 아까 보니까 포트폴리오인가 뭔가에 넣을 그림 그리고 있었다면서요? 이게 그거 아닙니까? 게다가 그린 그림이 학교에 걸려지는 거, 이거 엄청난 영광인겁니다? 아무나 못해요?”


이어지는 교장의 말에 이성화가 곤란한 듯 미간을 작게 구겼다. 하지만 이내 뭔가를 천천히 곱씹더니 나를 바라봤다.


“성혁아, 할 수 있겠니?”

“제가 먼저 제안한 건데요 뭐.”

“그렇다면 고맙지만······. 분명 너한테 도움이 될 거야.”


도움이라. 이 과정이 내게 어떤 도움이 될 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후로 미술실을 당당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될 건 분명했다. 전생에도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었던 만큼, 차라리 빚을 지울 수 있다면 지워두고 싶었다.


교장은 우리의 대화를 듣고는 입이 귀에 걸린 채로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아주 좋아요, 아주! 이런 태도가 이 21세기 창조적 인재에게 꼭 필요한 자질 아니겠습니까? 주체적이고 자주적인 학생!”

“아······예.”

“오히려 학생이 그렸다는 게 알려지면 제원고 이미지도 더 좋아질겁니다. 이건 내가 확신해요!”


학생이 주인 되는 학교, 학생이 그린 그림이 전시되는 학교 등, 교장은 슬로건으로 걸 말을 골라봐야겠다며 신이 난 발걸음으로 미술실을 빠져나갔다. 나는 그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보다 여길 좀 정리해야 할 것 같은데. 풍경화들을 그려치워댈 때는 몰랐는데 생각보다 많은 종이들이 사방 팔방에 펼쳐져 있었다. 그 중에는 아직 물감을 덜 말라 작업 중인 그림들도 있었다.


나는 말없이 종이들을 집어 들어 정리하기 시작했다. 화방을 깨끗이 안다룬다고 스승님한테 볼기짝이 터져라 맞은 뒤로 깔끔하게 사는 게 습관이 된 터였다.


“성혁아, 진짜 괜찮겠니? 혹시라도 시간을 뺏는거면—”

“괜찮아요. 어차피 그림 그리는 거 말고 할 일도 없어요.”


사실이었다. 이곳에 온 뒤로 내가 하는 거라곤 먹고, 그림 그리고, 자고. 이 세가지의 반복이었으니까.


“그래도 모작을 하는게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고, 생각보다 고려해야 할 게 많아. 작가가 사용한 색감이 뭔지부터 파악하는 것도 스스로 해야하고. 게다가 고흐 작품의 경우 색감이 강렬하다보니······.”


그 모습을 본 이성화가 불안한 듯 조심스레 물었다. 그 말을 듣던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내가 그린 [우는 여인] 그림을 가리켰다.


“이것보다는 쉽겠죠.”


애초에 피카소의 그림들은 기존 미학에서 벗어난 그림들이었다. 아름답다고 여겨져야 하는 부분은 조각조각이 나있었고, 부드러운 색을 써야 하는 부분에서는 그 기대를 엎어버렸다.


이런 괴랄맞고 제멋대로인 화가가 또 있을까.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며 그림을 바라봤다.


‘......짧지만 재미있었지.’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그림을 아름답다거나, 의미있다고 스스로 세뇌시킬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나는 여전히 이 그림들이 불쾌하고, 기괴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재미있었다. 그리는 그 순간만큼은 모든 걸 잊어버릴 정도로.


교장이 어떤 그림을 보여줬는지는 모르지만, 이 그림보다는 쉬울거다. 그리고 혹시 또 모르지.


피카소의 그림처럼 재밌는 그림을 그린 화가일지.


나는 살짝 설레는 듯한 마음으로 이성화를 바라봤다.


“아까 보여준 그림, 어떤거에요?”

“어? 어! 잠깐만!”


내 말에 이성화가 서둘러 핸드폰을 꺼냈다. 그녀는 뭔가를 검색하더니 내게 들이밀었다.


그래, 도대체 어떤 작가이길래 이렇게 학교에 걸어둘려고 안달이 난······?


“......?”


나는 미간을 좁혔다. 두 눈을 깜빡거리며 스마트폰 액정을 응시했다.


달, 소용돌이, 검은색 탑.


······이게 뭐지?


“[별이 빛나는 밤] 알지? 빈센트 반 고흐가 그린거 말이야.”


이성화가 아까보다 생기를 되찾은 목소리로 이런 저런 말들을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화면을 넘기며 사진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해바라기]나 [사이프러스 나무가 있는 밀밭]도 이쁜데 쌤은 특히 [밤의 카페 테라스]를 좋아하는데, 아! 그렇다고 그렇게 어려운 걸 그려달라는 말은 아니야. 그래도 [해바라기]가 교무실에 걸려져 있으면 이쁠 것 같다는 생각은 하는데—”

“하······.”


나도 모르게 길게, 그것도 진심을 담아 한숨을 내쉬었다. 내 한숨에 이성화가 긴장한 얼굴로 스마트폰을 살짝 주춤거렸다.


“호, 혹시 반고흐 안 좋아하니······?”

“누군지도 몰라요.”

“농담도. 고흐를 모르는 사람이 어딨어!”


장난이 지나치다는 듯이 웃어보이는 그녀를 무표정으로 대하며 그녀 손에 들려진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손가락으로 화면을 넘길 때마다 나타나는 그림들. 뭉개진 듯, 선명한 물감 자국들과 탁한 색감들이 눈에 들어왔다.


소용돌이가 치고 있거나, 하나의 그림인데도 불구하고 물감들이 서로 싸우고 또 손을 잡는 듯한 말도 안되는 느낌.


마치 꿈속에서 바라본 풍경처럼 아득하고 모호한 그림들이었다.


“대체 오백년동안 무슨 일이 일어난거야······.”

“오, 오백년?”


아, 정말이지.

21세기는 험난하구나.


500년이라는 세월은 길었고, 그 안에 미친놈들은 많았다.



*



“우와, 이성혁이 학교에 오다니.”

“호들갑 떨지마.”

“우와우와우와, 대성혁이 학교에 친히 행차해주시다니!!!”


나는 미간을 팍 구긴 채, 옆에서 재잘재잘 떠들어대고 있는 유지석을 바라봤다. 안그래도 한숨도 못자고 그림만 그리느라 피로가 쌓였는데, 옆에서 알짱대니 짜증이 났다.


책상 위에 그대로 엎드렸다.


‘반 고흐를 처음 듣는다고? 거짓말.’

‘.......’

‘지, 진짜로 처음 듣는다고?!’


이성화는 내 침묵을 보고는 거의 경악에 찬 수준으로 나를 바라봤다. 하지만 이성혁의 기억이 온전하게 돌아온 게 아닌 상황 속, 내가 아는 반 고흐라는 사람은 없었다.


반 고흐에 대해 더 말하려던 그녀는 학교에 울려퍼지는 종소리에 ‘오, 오늘 동아리 시간 때 말해줄게! 꼭!’ 이라고 말했고, 그렇게 나는 반으로 왔다.


반 고흐. 처음 듣는 이름인데. 내가 있던 피렌체에서도 저런 이름을 쓰는 사람은 없었다. 필시 다른 나라 사람이거나 혹은 가명일 터.


“야, 오자마자 자는 게 어딨냐. 그래도 1교시 과학인데 일어나.”

“말 걸지마.”

“아니, 안그래도 너 조례때 없어서 담임 개빡쳤는데, 1교시부터 자고 있으면—”

“성혁아.”


그 말과 동시에 앞문이 열렸다. 나는 엎드려있던 몸을 일으켰다.


담임 김석철이 나를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학교엔 몇시에 왔니?”

“......9시요.”

“지금 시계를 봐라. 아직 9시가 안됐는데 어떻게 9시에 왔다는거냐?”

“밤 9시에 왔다는 말인데요.”


뭐? 내 말에 김석철이 미간을 좁혔다.


어제 서한미가 학교에 데려다줬을 때가 그쯤이었으니까······대충 틀린 시간은 아닐거다. 그 이후로 미술실에서 쭉 그림만 그렸으니까.


진지하게 말하는 내 모습에 김석철이 당황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밤 9시부터 학교에 있었다고?”

“네.”

“아니, 대체 어디에서?”


심문과도 같은 말에 나는 몸을 뒤로 뺐다. 하지만 김석철은 끈질기게 이것 저것 물어볼 표정이었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미술실이요.”

“그럼 설마 아침에 불이 켜져있던게······됐고. 어제는 수위 아저씨가 못 보고 가신 것 같은데, 원래 원칙상 학교에는 남아있으면 안된다. 게다가 어제 집으로 갔는데 학교에는 왜 또 온거고.”


김석철은 수업 시간이라는 걸 잊은 듯, 잔소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든 이야기들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는데,


“그래서 자퇴는?”


자퇴. 그 단어가 나오자 나도 모르게 김석철을 바라봤다. 갑자기 태도가 돌변한 듯한 내 모습에 김석철 역시 당황한 듯 주춤거렸다.


자퇴라. 원래는 자퇴할 생각이었다. 이곳에서 더 배울게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차라리 하루종일 그림만 그리는게 훨씬 더 값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안 하려고요.”

“그래, 잘 생각했다. 요즘은 미술을 하려고 하면 대학 정도는 나와줘야—”

“재미가 없어서요.”

“......뭐?”

“재밌는 그림을 그리고 싶거든요.”


아리송한 말에 김석철이 미간을 찌푸렸다.


여전히 나는 내 그림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세상에서 나보다 더 정교하게 그리는 사람은 없고, 내 그림은 여전히 완벽하다.


피카소의 그림에 아무리 매료되었다고 한들, 내 그림보다 사랑하는 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그의 기괴하고 제멋대로인 작화가 신경쓰였을 뿐이지.


“잠깐동안은 재밌는 그림 좀 그리려고요.”


이곳에 있으면서 깨달은 게 있었다. 우선 피렌체에 살던 시대와 다르게 지금의 나는 아무런 명성도, 지위도 없는 애송이에 불과하다는 것.


그 말인 즉슨, 내가 그림을 그려도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게다가 아까 봤던 그 그림······


‘반 고흐 작품은 전세계적으로 유명해. 그림 뿐만 아니라 그림에 얽힌 이야기들도 유명한 편인데, 특히 스스로 귀를 잘랐던······아니다, 좀 있다가 동아리 시간때 더 자세히 설명해줄게.’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 세상에 제멋대로인 그림을 그리는 미친 놈은 피카소 한 명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한 명 더 발견한 기분이었다.


스스로 귀를 잘랐다고? 대체 500년동안 예술의 정의가 어떻게 변한거지?


나는 간과하고 있었다. 시간이 제아무리 흘렀어도 본질은 변하지 않았을거라고.


사람들은 여전히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고, 따뜻하고 포근한 그림들을 사랑할것이라고.


하지만 시대는 너무 변했고, 사람들은 더이상 아름답고 따뜻한 것만 사랑하지 않았다.


피카소의 그림처럼 제대로 해석하기 어려울정도로 난해한 그림이나,

반 고흐의 그림처럼 따뜻한 것을 넘어서 강렬한 색채를 사용한 그림처럼.


나는 이 시대에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재밌으려고 학교 다닌다니······너처럼 천하태평한 놈도 드물거다.”

“칭찬 감사합니다.”

“대체 어느 부분이 칭찬인거냐······.”


일부러 배배 꼬아서 답했다. 애초에 성격 자체가 모난 사람으로 유명했던 나다. 아무리 다른 사람의 몸에 빙의가 되었다고 한들, 본성은 어디 안 간다.


결국 김석철은 길게 한숨을 쉬고, 교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가지고 온 책을 펼치며 수업을 시작했다.


“자, 오늘부터 천체 파트다. 다들 행성이랑 항성 구분하는 건 중학교때 해봤을 텐데—”


나는 지루한 수업을 한 귀로 듣고 한귀로 흘리며 창밖을 바라봤다. 여전히 눈 앞에 아른거리는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을 빨리 보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



“얘들아! 일주일에 한번밖에 없는 동아리 시간이네!”

“예에에······.”


왜 다 죽어가고 있는거니······이성화가 어이없다는 목소리로 동아리 부원들을 바라봤다.


동아리 시간. 사실 이성화가 동아리때 보자, 라고 했어도 동아리가 뭐하는 건지. 그리고 동아리때 어딜 가야하는건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냥 동아리 시간이고 다들 어디론가 가길래 나도 그냥 미술실로 갔을 뿐이다. 내가 갈 곳이라곤 여기밖에 없으니까.


미술실 문을 열자, 여학생 한 명이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인사를 건넬 생각조차 없었기에 가뿐히 무시한 채 맨 뒷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학생들이 들어왔다. 수학 문제집을 옆구리에 끼고 온 학생,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로 들어오는 학생, 친구와 수다를 떨며 요란스럽게 들어오는 학생······.


그림을 그리러 온 것 같은 학생은 없었다. 끽해야 내 대각선에서 노트를 끄적이고 있는 녀석 정도일까.


“오늘 할 활동은 바로······유명 화가 그림 모작하기!”


이성화가 한껏 기대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반응은 뜨뜻미지근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이성화는 나를 바라보며 ‘모작’이라는 말을 강조했다.


“쌤 모작이 뭐에요?”

“모작은 다른 사람이 그린 작품을 따라 그리는 거야. 예를 들어, 유명한 화가의 그림을 보고 똑같이 그려 보는 거지.”

“베끼라는거네요?”

“표절 아니에요?”


이성화의 말에 학생들이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모습을 본 이성화가 통통 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맞아. 똑같이 베끼는 거야. 그런데 베낀 그림 자체에 의미가 있다기 보단 그 과정을 통해 그 화가가 어떤 기법을 썼는지, 어떤 색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같은 걸 배우려는 거야.”

“굳이요?”

“물론, 그냥 따라만 그리는 게 아니라, 그 과정에서 배운 걸 나중에 자기 작품에 어떻게 적용할지도 생각해 봐야 해. 그래야 모작을 통해 실력도 키우고, 더 나은 작가가 될 수 있지.”


이성화의 긴 설명이 이어지고, 한동안 미술실엔 적막이 흘렀다. 열정 넘치는 강의에 모두가 감동을 받은 것인가—하고 생각하려는 찰나.


“쌤 자습해도 되죠?”

“난 잔다. 끝나면 깨워주셈.”

“쌤 핸드폰 해도 돼요? 자료 조사 하려고요.”


학생들 몇몇이 가지고 왔던 문제집을 책상 위로 꺼냈다. 그 모습에 이성화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얘들아, 그래도 동아리 시간인데 너무 의욕 없는거 아니야?”

“애초에 화가가 될 생각이 없는걸요.”

“그럼 미술 동아리는 왜 왔는데?”

“가위 바위 보 져서요.”


아. 너무도 명료한 대답에 이성화가 할말을 잃었다. 결국 어깨를 으쓱인 그녀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알겠어. 그대신 진지하게 그리는 친구들 방해하지 않기야.”

“네~”


자유 선언이나 다름없는 말에 아이들이 제각기 할 일들을 시작했다. 사각, 사각 소리가 나는 미술실은 오히려 교실과 다를바 없었다.


“성혁아. 아까 반 고흐 그림이 궁금하다고 했지?”

“네.”

“일단 이거 보고 있을래? 쌤 지금 미술 재료 주문한 게 왔다고 해서 택배만 가지고 올게.”


이성화는 내게 ‘Van Gogh’ 라고 적힌 도록 하나를 건넸다.


“선생님이 전에 네덜란드에 갔을 때 가져온거야.”


나는 이성화에게 받은 도록의 표지를 손 끝으로 쓸어내렸다. 코팅이 되었는지 매끄러운 질감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그리고 그 앞장을 장식하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카페의 모습이었다.


“이게 쌤이 가장 좋아하는 [밤의 카페 테라스]야.”

“.......”

“도록 보기 그러면 핸드폰으로 검색하고 있어도 돼. 일단 오늘은 여러 그림을 눈에 담는 시간이니까.”


그러나 나는 말없이 도록 표지만을 빤히 쳐다봤다. 그 모습을 본 이성화는 멋쩍은 듯이 웃어보이더니 밖으로 나갔다.


또다. 또 이유없는 불안함이 치밀어오르는게.


피카소의 그림을 볼 때도 그랬다. 이 뒤에 어떤 그림들이 있을지 몰라 심장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넘기고 싶다, 아니 넘기고 싶지 않다.


이 두 감정이 서로 대립되어 싸우고 있었다.


결국 나는 뒷장으로 넘기는 걸 잠시 미뤄두고 종이를 꺼냈다. 핸드폰 진동이 울렸지만 고개를 저었다. 괜히 다른 것에 주의를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그림 그리는 시간이었으니까.


그렇게 도록을 옆에 놓고 종이 위에 [밤의 카페 테라스]를 그리기 시작했다.


슥, 소리와 함께 선이 그어졌다가

벅벅 소리와 함께 지우개로 지워졌다.


긋고, 지우고. 긋고, 또 지우고.


“.......”


어느순간 가지고 있던 지우개가 반토막이 난 걸 보며, 깎은지 얼마 안 된 연필이 다시 또 깎아야하는 지경에 이른 것을 보고 나는 깨달았다.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고.


‘뭐가 문제인거지?’


피카소의 그림을 그릴때와 비슷했지만 이번에는 그 정도가 달랐다. 피카소의 그림에 비해 고흐의 그림은 알기 쉬웠지만 이 특유의 화풍을 표현해내기엔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 상태로 지우개로 종이를 문질렀다.


찌이익—소리와 함께 찢어진 종이. 그 모습을 보며 참담한 심정이 고개를 쳐들었다. 대체, 뭐가 문제인데 밑그림 조차 그릴 수 없는—


“야. 조용히 좀 해.”

“?”

“문제 푸는 데 방해되잖아.”


그때 옆자리에 앉아있던 남학생이 미간을 찌푸린 채로 나를 바라봤다.


“아무 말도 안했는데?”

“말은 안해도 연필! 연필 긋는 소리 거슬린다고.”

“그럼 나가든가.”


말도 안되는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길래 뭐라 했더니, 남학생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내 책상을 가리켰다.


“지우개로 지울 때도 살살 좀 지우라고. 안보여? 지금 네 주위에 지우개 가루 쌓인 거?”

“내가 왜 네 눈치를 봐야하지?”

“하, 진짜. 그깟 그림 그려서 뭐한다고······.”


? 나도 모르게 고개가 기울어졌다. 지금 눈 앞의 이 녀석이 뭐라고 지껄이는지 바로 이해가 안되었기에.


하지만 녀석도 물러설 생각은 없는 듯 했다. 오히려 몸을 튼 채, 내 책상을 혐오가 담긴 눈으로 바라봤다.


“어차피 그림으로 밥 벌어 먹고 살거 아니면, 너도 빨리 정신차리는 게 좋아. 미술 해서 성공하는 사람은 로또 당첨 되는 확률이나 마찬가지니까.”

“걱정해줘서 고맙다.”

“고맙기는 지랄. 방해하지 말라는 말이야. 짜증나니까.”


남학생은 신경질적으로 내 책상을 내쪽을 향해 밀어붙였다. 자신과 거리를 두려는 행동인 듯 했지만, 꽤나 불쾌했다.


그도 그럴게, 마치 내가 벌레인 양 대하고 있지 않은가?


한마디 쏘아붙이려고 하는 그때, 다시 한번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결국 나는 핸드폰을 꺼냈다. 뭔진 몰라도 이미 집중력은 다 흐트려져버린 상황이었으니.


그리고 핸드폰 내용을 확인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실소가 터져나왔다.


“......나도 걱정 하나 해줘도 될까.”


아까보다 한껏 여유로워진 내 말투에 녀석이 신경질적으로 돌아봤다.


나는 책상을 다시 녀석쪽으로 쭉 민 후, 녀석을 바라봤다.


“너도 빨리 정신차리는 게 좋을거야.”

“뭐?”


녀석이 뭔 개소리냐는 듯이 인상을 팍 구겼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왜냐면 지금부터 네가 무슨 공부를 하든, 뭘 하든, 그래서 얼마나 많은 돈을 벌던간에······”


나는 싱긋 웃으며 녀석의 얼굴 앞으로 찢어진 종이를 들이밀었다.


“네가 평생 벌 돈 보다 내 그림이 더 비쌀거거든.”

“그게 무슨 소리······.”


그림 그려서 성공하는 사람은 로또에 맞을 확률보다 적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나한테는 해당되지 않는다.


왜냐고?


전제 자체가 틀렸으니까.


[성혁 학생, 리움 갤러리 서한미에요. 지금 잠깐 연락 돼요?]

[지금 성혁 학생 그림 사고 싶다는 사람이 나타나서요.]

[아직 전시 시작도 안했긴 한데, 어떻게 알고 왔는지······어쨌든 연락 줘요.]


[1억. 1억 불렀어요.]


이미 나는 ‘재능’ 이라는 로또에 맞은 상태로 태어났다.


작가의말

추천과 선작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르네상스 천재 화가가 그림을 너무 잘 그림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제목 변경] 일반고 미술 천재가 되었다 → 르네상스 천재 화가가 그림을 너무 잘 그림 24.09.13 24 0 -
공지 연재시간 안내: 오후 10시 15분 24.09.03 790 0 -
29 후회하지 않는 그림 NEW +1 7시간 전 165 9 13쪽
28 완벽한 그림과 강렬한 그림 +4 24.09.16 402 17 14쪽
27 마음을 살리는 그림 +3 24.09.15 509 22 15쪽
26 그림 잘 그린다는 소리 +1 24.09.14 569 20 14쪽
25 안 팔리는 그림 +1 24.09.13 604 22 14쪽
24 텅 빈 그림 +1 24.09.12 691 20 13쪽
23 인정하기 싫은 그림 +2 24.09.11 749 21 17쪽
22 이딴게......그림? +1 24.09.10 794 28 12쪽
21 어긋난 그림 +1 24.09.09 850 27 16쪽
20 잊혀진 그림 +3 24.09.08 939 34 16쪽
19 모두를 감동시키는 그림 +1 24.09.07 1,002 38 14쪽
18 이딴 그림 +1 24.09.06 1,032 31 15쪽
17 전세계로 퍼진 그림 +5 24.09.05 1,124 37 15쪽
» 아득하고 모호한 그림 +1 24.09.04 1,225 40 20쪽
15 애들 장난 수준 그림 +3 24.09.03 1,288 38 15쪽
14 낙서도 그림 +4 24.09.02 1,466 42 18쪽
13 더 비싼 그림 +3 24.09.01 1,510 35 13쪽
12 보이는 게 전부인 그림 +4 24.08.31 1,524 39 13쪽
11 괴물같은 그림 +2 24.08.30 1,557 36 15쪽
10 수채화 그림 +1 24.08.29 1,588 47 14쪽
9 비싸질 그림 +4 24.08.28 1,620 43 16쪽
8 천재의 그림 +2 24.08.27 1,621 40 13쪽
7 옳은 그림 +4 24.08.26 1,666 45 13쪽
6 비싼 그림 +2 24.08.25 1,874 38 16쪽
5 개쩌는 그림 +5 24.08.24 1,921 41 13쪽
4 비슷한 그림 +1 24.08.23 2,122 39 13쪽
3 이상한 그림 +4 24.08.22 2,314 45 14쪽
2 첫번째 그림 +2 24.08.21 2,585 46 13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