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길을 걷겠어
“아, 피곤해. 뭐가 이렇게 복잡하냐.”
계속 김 비서에게 시달리다가 도망치듯 로스트 파라다이스에 접속했다.
“설정 끝났으니 이제 필요할 때만 하면 되겠지.”
비서 기능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과정이지만. 권한을 대거 넘겨받은 김 비서는 심지어 게임 중에도 내게 연락이 가능하다.
[주인님, 김 비서입니다. 저녁 식사는 언제 하시겠습니까?]
이렇게.
“어··· 7시?”
[알겠습니다. 메뉴를 지정해 주십시오.]
“귀찮은데 짜장면이나 먹을래.”
[알겠습니다. 최근 주문 내역에서 늘 시키시던 식당에 주문해 놓겠습니다.]
“그···래. 고마워.”
[좋은 시간 되십시오.]
뭐랄까.
고맙긴 한데 너무 피곤하다고 할까?
“기분 탓인가?”
새 캡슐 덕에 컨트롤도 훨씬 좋아진 것 같고, 몸도 더 쾌적한 것 같으니까 넘어가자.
이제 나는 20레벨. 장신구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지난번에 BJ대신맨을 쓰러뜨리고 얻은 반지가 인벤토리에 그냥 처박혀 있었다. 나는 스탯업용 비약을 하나씩 마시면서 감정 스크롤을 찢었다.
[대도의 반지: 반지]
▶전설적인 고대의 도둑이 사용했던 반지.
▶제한 레벨 20
▶장착 효과: 민첩 +10, 지능 +10
▶특수 효과: 스킬 ‘은신’(정지 상태에서만 가능. 쿨타임 3분), 스킬 ‘도약’(최대 5미터, 쿨타임 5분)
“이건 그 인간이 퀘스트 중에 얻은 아이템인가?”
‘대도’라는 이름이 붙은 것을 보아 문제의 그 퀘스트와 관련 있는 것임이 틀림없어 보인다. 상당히 쓸모 있는 스킬이 두 개나 달려 있었다.
‘누가 도둑 아니랄까 봐 아주 전형적인 도둑질용 스킬이네.’
‘도약’으로 담 넘고, ‘은신’해 들어가서 훔치면 딱 되겠다. 어쨌거나 혼자 활동하는 내게는 굉장히 유용한 스킬이 아닐 수 없다.
오늘은 이미 시간이 꽤 지났으므로 수도로 떠나는 것은 내일 하기로 하고 낙원으로 바로 넘어왔다.
휴게실을 지나 산장으로 들어왔더니 식탁에 앉아 공부하던 미영이가 나를 반겼다.
“아빠!”
“그래, 잘 있었어?”
“응!”
마냥 반가운 표정을 하고 있는 미영이를 보자 왠지 좀 궁금했다.
“미영아, 솔직히 말해봐.”
“?”
“너 그 이름 진짜 마음에 드냐?”
우려와는 달리, 미영의 대답은 순식간에 나왔다.
“응!”
“그럼 됐다.”
역시 김 비서가 까탈스러운 거다.
내 작명 센스, 넌 아무 문제 없어.
“책은 볼만해? 어렵지는 않고?”
“조금···.”
미영의 말은 점점 나아지고 있었다. 심리적으로 안정된 덕이라고 생각한다.
“그래. 차차 쉬운 책 더 구해볼게.”
“괜차나.”
“그래. 난 좀 나갔다 올게.”
“응.”
나는 미영을 뒤로하고 다시 도적의 산채로 향했다.
⋮
지난번 공략 때는 너무 신이 나서 가다가 그만 두 명에게 걸려서 고전했다.
이번에는 흥분하지 않고 최대한 차근차근 가는 것이 목표다. 레벨도 그때보다 네 개나 올랐으니까 그렇게 아슬아슬하지는 않을 거다.
게다가, 미영이 스킬북 사다가 내 것도 두 개 사서 배워 버렸으니까.
“멀티플 샷!”
이번엔 무려 화살 세 발이 나간다. 그것도 동시에 여러 목표에.
기존에 사용하던 스킬인 2연사는 동시가 아니라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두 발이 하나의 목표에 발사되는 스킬이다.
아직 숙련도가 낮아서 세 발이지만 숙련도가 오르면 차차 숫자가 늘어나서 최대 다섯 발까지 발사되는데 소모되는 화살은 실제 한 발. 흠이라면 마나 소모가 많다는 거.
날아간 세 발의 화살 중 둘은 좀 더 앞에 있던 도적에게 맞았고, 다른 하나는 뒤에 있던 녀석에게 적중했다.
“으악!”
“큭!”
비명 두 개가 들렸다.
얼른 나무 뒤쪽에 몸을 숨기고 팔만 내밀어 이번엔 스노우볼을 하나 던졌다.
역시 두 명의 목표 중 하나는 근접 유닛이고, 하나는 원거리 유닛이다. 앞장서 달려오던 근접 유닛은 스노우볼을 맞아 속도가 느려졌다.
나는 그 틈에 새로 배운 마법을 시전했다.
“파이어 볼!”
-펑!
이름은 스노우볼과 비슷하지만, 효과는 완전히 다르다.
스노우볼은 공격력이 조금 부족한 대신 빙결효과로 적의 이속, 공속을 동시에 늦춰주지만, 파이어볼은 부가 효과는 없는 대신 화끈한 공격력을 자랑한다.
‘실제로 한등급 위의 마법이고.’
20레벨이 되어서야 배울 수 있는 마법답게 마나 소모가 만만치 않지만 공격력은 확실하다.
마나를 아끼기 위해 단발로 화살을 두 번 더 당겼더니 근접 유닛은 내게 도달하기 전에 쓰러졌다.
“화끈하네!”
그 사이 크로스보우를 든 녀석은 내가 숨은 나무 옆쪽으로 돌아 시야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푹!
“윽. 따가워.”
볼트가 날아와 내 갑옷 위에 박혔다. 나는 잽싸게 방패를 꺼내 앞에 세우고 도적 궁수를 향해 달려가며 스노우볼을 한 번 더 던졌다.
고블린 대전사의 양손검으로 무기를 전환하고 평타 공격. 평타였지만 칭호가 적용되어 공격력과 속도가 크게 증진된 터라 세 번의 칼질 만에 궁수가 도망가기 시작했다.
-퓻퓻! 퓻!
등에 뼈화살이 연달아 꽂히고, 궁수는 제 자리에 쓰러졌다. 내 HP가 절반 이상 남은 상태로 두 명의 도적을 순식간에 잡았다.
“이 정도면 셋은 아슬아슬하고 둘은 여유로운 정도겠군.”
오늘은 산채 주변까지만 딱 정리하고 돌아가자. 늦으면 김 비서가 무슨 소리를 할지 모르니까.
산채 동편의 도적을 막 정리했을 때였다.
낙원 온라인 시절에는 없었던 풍경을 마주쳤다.
“이 자식들 여기 아주 자리 제대로 깔고 앉았구나.”
도적질만으로 부족한지 넓은 텃밭도 있고, 대체 무슨 동물을 키우는지 큰 울타리도 있었다.
“타조 키우나? 알 한번 크기도 하다.“
울타리 안에는 사람 머리만 한 알이 두 개 있었다. 타조 말고 다른 동물을 떠 올리기는 어려운 크기였다.
“하긴. 용사도 없고 돌아다니는 주민도 거의 없는데 도둑질로만 먹고살긴 부족하겠지.”
나는 텃밭의 작물과 타조알을 싹 쓸어다가 인벤토리에 넣었다.
“미영이 가져다줘야지.”
도둑놈들이 먹게 두느니 미영이가 먹는 것이 정의 구현이다.
⋮
산채 주변만 싹 정리하고 미영이네 집으로 돌아왔을 때, 미영이는 한창 산장 앞에서 호신술을 연습 중이었다.
“얍! 얍얍!“
책을 가져다준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주먹질이 아주 제법이었다.
그래봐야 아직 꼬맹이의 정권 지르기지만.
꼭 어린 시절에 배운 태극 1장 같다.
‘그래, 건강하게 커라. 그래야 구해준 보람이 있지.’
미영이는 돌아서며 주먹을 날리다가 나를 발견하고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아빠!”
“그래, 나 왔다.”
“헤헤.”
“이거 지하실에 가져다 놓을 테니까 먹고 싶으면 먹어.”
“응.”
이제 내가 지하실에 들어가도 미영이는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 늦어봐야 며칠 내에 돌아올 걸 아니까.
작물을 지하실에 두고 로스트 파라다이스로 건너왔다.
[3골드 11실버 전자지갑으로 전송.]
* * *
굳이 타조알을 두 개 다 로스트 파라다이스로 가져온 것은, 과연 먹어도 되는 것인지 알기 위해서다.
‘뭔지도 모르는 걸 미영이 먹으라고 둘 수는 없잖아?’
일단 여기서 감정 스크롤로 확인부터 할 생각이다. 그러나 스크롤을 찢었어도, 많은 것을 알 수는 없었다.
[???의 알: 가축]
▶부화까지 남은 시간 23:56:47
‘가축? 알을 먹는 건 아닌가? 요리 재료라고는 안 쓰여있네.’
조금 실망했다.
무엇의 알인지도 알 수 없었지만, 행여 타조 새끼 같은 거 튀어나와 봐야 어디다 쓸까.
그래도 부화까지 얼마 안 남았으니까 일단 태어나는 것까지만 보고 어떻게 할지 정해야겠다.
[주인님? 주인? 어디 있니? 아, 짜증 나네 첫날부터. 야, 박서준!]
그때 김 비서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 비서?”
[으앗!]
김 비서의 비명을 끝으로 잠시 정적이 흘렀다.
다시 김 비서가 말을 한 것은 어색한 정적이 수십 초 흐른 뒤였다.
[주인님 거기 계셨군요. 연락이 되지 않아 무척 걱정했습니다.]
“내가 지금 이상한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말이야···.”
[네? 무슨 말씀인지?]
“분명 반말 같았는데? 야··· 라던지 박서준이라든지.”
[그럴 리가요. 제게는 완벽하게 학습된 예의범절 통합 말뭉치가 구비되어 있습니다.]
“그래? 거 이상하네. 들은 것 같은데?”
[잘. 못. 들으신 겁니다.]
“뭐, 일단 그렇다 치고. 왜 불렀어?”
[짜장면이 도착했습니다. 이미 11분 52초 전에. 그래서 알려 드리려고 했는데 안 계셔서. 서버에 확인 요청을 직접 보내봤는데 미접속으로 나오지 뭡니까? 로그아웃된 적이 없는데.]
낙원에 가 있었으니 그 서버에서 내가 조회될 리가 있나.
조금 미묘한 부분이기도 하니, 초장에 확실히 할 필요를 느낀다. 강경하게 나가겠다는 뜻이다.
“반말이야 나도 회사 다닐 때 뒤에서는 부장, 차장한테 온갖 소리 다 했으니까 이해한다 친다. 나 그 정도로 속 좁은 상사 아냐. 하지만, 차세대 캡슐이라고 자랑하더니 주인이 어디 있는지도 잃어버리고. 아주 자알 한다.”
[아, 아니 확실히 미접속이었는데···.]
“단순 게임 내 오류 아냐?”
[로스트 파라다이스에 그런 것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뭐야, 게임이 무결점인데 내 미접속도 분명하다면···.”
[······.]
“김 비서 너, 불량 아니냐?”
김 비서의 표정이 크게 일그러졌다.
[그, 그런!]
“메테오에 전화해서 교환 요청해야 하나···. 어떻게 첫날부터 이러냐. 나 화상 최대 공모전 우승자라고. 혹시 공짜로 주는 거라고 불량으로 준 거 아냐?”
굳이 따지자면 나도 로파의 인플루언서 영역에 들어선 셈인데.
[다시!]
“다시 뭐?”
[다시 생각해 보니 단순 오류인 것 같습니다.]
“갑자기?”
[분명합니다.]
“그래?”
[그렇습니다.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짜장면이 시시각각 불고 있습니다. 어서 나오시죠.]
그 길로 로그아웃하고 나와 저녁 식사를 마쳤다.
짜장면이 떡이 되어 한 덩어리가 되어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저 김 비서의 까탈스럽던 눈빛이 조금 고분고분해졌으니.
“맛있으신지요?“
”음. 좀 퍽퍽해졌지만.“
“그럼, 앞으로는 주문하는 곳을 바꿀까요?”
게다가 자신의 유능함을 어필하기 위해서인지 시키지도 않은 일을 자꾸 시도하고 있었다.
자신은 불량이 아니라는 것을 온몸으로 항변하듯이.
“내가 늦게 나와서 그런 거니까 그럴 필요 없어.”
“알겠습니다.”
나는 짜장면을 훌훌 입에 털어 넣고 젓가락을 탁 내려놓았다.
“김 비서. 이렇게 하기로 하자.”
“네? 무엇을 말씀인가요?”
“앞으로 게임 중에는 가급적 연락하지 말기로 해. 필요하면 내가 말을 걸도록 하지.”
“음···. 가급적이라는 게 어느 정도인지 정의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만.”
“불이 났다거나, 긴급한 연락이 와서 내가 당장 답을 해야 한다거나, 내가 중요한 일정을 잊고 있다거나. 그리고, 서버에 내 접속 여부 조회하지 말고. 나, 그런 여자 딱 질색이거든?”
왠지 김 비서의 얼굴이 좀 붉게 물들었다는 느낌이 든다.
“그런 뜻으로 연락드린 건 아니었습니다만··· 알겠습니다.”
어, 시원하다.
“여쭤볼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음. 말해봐.”
“주인님이 게임에 접속 중이던 시간에 핸드폰 메시지가 하나 도착했습니다. 이것이 말씀하신 긴급한 연락에 속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판단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무슨 메시지인데?”
“읽어드리겠습니다. 작성자, 엄마.”
“응? 엄마?”
“아들, 너 퇴사했니? 지역 의료보험으로 편입된다고 우편이 날아왔던데?”
아차, 이런 식으로 알려질 줄은 몰랐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