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못 18화 - 령회(領會)
제닐은 가게를 나가고 세이와 함께 다시 신전의 서고를 향했다. 싸운 뒤 땅이 굳는다고 겉보기에는 전보다 편해진 듯이 다시 평화로운 이들이 하루가 시작되었고 밤과 함께 끝을 맞이했다. 하지만 그 속내들은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무언가를 느껴버렸으니 더는 이전과 완벽히 같아질 수 없었다.
저녁을 먹고 나서 이제는 비사의 자리가 된 낡은 침상 위에 천에 싸여 눕혀진 비사의 쌍익(雙翼)을 물끄러미 보던 제닐은 이제껏 누르고 있던 호기심을 꺼내 보였다. 이리 돌려보고 저리 돌려보더니 한마디 뱉었다.
"이거 빼 봐도 되니?"
제닐이 말을 꺼내자 세이도 슬쩍 다가와 근처에 앉았다.
하도 소중히 메고 다니니 나름의 허락을 구했다. 비사 옆에 눕혀진 그것을 손가락으로 몇 번 콕콕 찔러보았다. 제닐이 이것을 칼이라 처음에 생각하지 못했던 데는 이유가 있었다. 칼자루와 검 날 사이에는 칼을 휘두를 때 손이 미끄러져 내려가 베이지 않도록 막아주는 날밑이 없었던 탓이었다. 비사가 고개를 가볍게 한 번 끄덕이자 제닐이 천을 벗겨 냈다. 이제 생각하면 이런 광택이 도는 푸른색 칼집이라니 색이 참 특이하다 싶어졌다. 처음에 비사와 함께 들고 온 것도 제닐이었으니 사실 들어보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여전히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어깨 안 뻐근하니? 어린 게 좋긴 좋구나."
제닐이 혼잣말을 하더니 조심히 한쪽을 빼어냈다. 살짝 걸리는 듯한 느낌이 있었으나 스르릉하고 빠져나오는 쇳소리가 날카로웠다. 제닐과 세이가 신기하다는 듯이 눈을 반짝였다. 옆에서 이들 하는 냥을 물끄러미 보던 비사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날이 선 살상 검이었다. 잘못 스쳤다 살점이라도 하나 떨어져 나가면 어쩔 것인가.
"나도 검을 제대로 본 적은 없지만, 신기하게 생겼네. 비사네 동네 검인가 봐. 그지? 세이 너도 본 적 없지?"
세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애당초 아비가 그 속부터 하나하나 고안한 것이니 어디를 가든 듣는 소리였다.
-"칼날 닿는 안이야 철로 되어 있으나 이 겉은 참죽나무란다. 우리 가문 현판(懸板)도 이것이고, 동량(棟梁)도 이것이지. 뒤틀리지도 아니하고 단단하니 좋은 나무란다. 이 푸른 빛은 청칠(青)을 한 것이다. 옻나무 수액에 남(藍)을 섞어 색을 낸 것이란다. 그 위에 유칠(油漆)을 하여 광도 내고 흠집 나지 말라 단단함을 더한 것이지. 잘 기억해 두어라. 언젠가는 너에게 줄 것이니."-
대청마루에 걸 터 앉은 아비 진현이 맑게도 웃었다. 다정하기가 그지없어 그 사이를 지나는 바람마저도 보드라웠다.
"형님, 애가 이제 겨우 여섯인데 어찌 벌써 그런 고물 칼 넘겨줄 타령이오? 아가, 저런 시퍼런 검일랑 내버려 두고 어머니한테 화무도(華舞刀) 달라 하여라."
어느새 나타난 운봉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그의 심술로 좀 전까지의 그 운치가 퐁하고 사라져버렸다.
"아, 거참. 내 자식한테 내 칼 물린다는데 운봉이 네놈이 뭐가 그리 참견이냐. 이것아."
사형 앞에서도 팔짱을 턱 하니 끼고선 운봉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아 어디 형님 혼자 키우오? 이 가문에 아직 애가 하난데 다 제 자식 같지. 따지고 보면 내 질녀(姪女) 아니오."
"젊은 놈이 제 자식 볼 생각은 아니 하고 남의 자식 탐내기는. 장가나 가라 이놈아."
피하고 싶은 얘깃거리였는지 운봉은 급히 화제를 앞으로 돌렸다.
"하여간에 글쎄. 형님. 장검이 옛날부터 이날껏 쭉 대세요. 누가 이런 애중간한 길이의 검을 것도 두 개나 쓴답디까."
"팔도 짧은 것이 검만 길면 무엇한다고. 저리 가라. 부녀지간 정 쌓는데 방해 말고 저리 가거라."
진운이 손을 휙휙 저으며 어서 가라 손짓했다.
"이거이거. 내가 형님이 칼 닦다가 손 벨 때 알아보았소. 어느 무가의 가주가 자기 검에 손 벤다 하더이까. 창피해서 원. 내 그러게 날 끝 갖다 붙이랬잖소. 형님도 늙었소. 노친네 다됐어!"
칼을 닦는 와중에 아이가 부르자 뒤를 돌아보다 슬쩍 벤 것을 약점 삼아 운봉은 매번 이렇게 놀려대었다.
"아, 가서 장가갈 처자나 데리고 오라니까. 이놈아! 가!"
진현이 괄괄하게 대꾸하는 운봉을 밀어내자 툴툴거리며 물러났다.
"아가, 우리 아가 커서 저런 운봉이 같은 놈한테 시집간다 하면 아비가 머리 싸매고 드러누울 것이다."
"운봉이 아지는 아니 돼요?"
아이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아비 눈에는 그것이 얼마나 아까운지 목숨 내줄 의형제들 일지언정 아비는 저 하나면 넉넉하다며 안아보자 달려드는 사제들을 타박하고는 했다.
"응, 아니 된다."
이번엔 진현이 팔짱을 끼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지가 크면 시집오라 그랬는데, 아니 된다 해요?"
"뭐? 언제? 저 망할 놈이. 안된다 그래라. 다 크고도 하안참 더 아부지랑 살다가 우리 아부지 똑 닮은 사람한테 시집갈 것이니 아지는 절대로 아니 된다고 꼭 그래라?"
"웅."
예나 지금이나 대답은 잘하는 아이였으니 진현은 만족한 듯이 껄껄 웃었다. 그리고 잠시 웃음을 멈추고는 조막만한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우리 아가는 다른 장검은 필요 없단다."
아이의 발그레한 뺨이 그저 귀엽기만 한데도 진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중에서야 아비가 이따금 섧게 웃으며 내뱉는 한숨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아마도 가장 먼저 그리고 유일이, 적인의 주인이 자신의 딸 아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오른팔에 멍이 들면 왼팔을 쓰고 왼팔이 부러졌거들랑 오른팔을 쓰라 이런 이도(二刀)를 주어 양손을 다 단련하게 하려 한 것이었다. 그렇게 혹시라도 일어날 적인을 둘러싼 싸움에서 하루라도 더 오래, 외팔이가 될지언정 살아남길 바랐을 것이다. 그리 아끼면서도 뭐라 말도 한마디 없이 속에다 쟁여두고서 수련만 엄히 한 아비 속은 얼마나 타들어 갔을 것인가. 언젠가 제 입으로 그것들을 말할 날을 기다렸을지는 모르나 그 기회는 얻지도 못한 채 영영 마음만 묻혀버렸다.
"비사, 이게 뭐라고?"
잠시 딴생각에 빠진 비사를 제닐이 불러냈다.
"이 겉에 발라진 것 뭐냐고, 세이가 물어보래."
세이가 그렇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옻나무에 청칠(青) 이것들을 무어라 말해야 할까.
"모른다."
비사가 앞뒤 없이 그냥 모른다고 대답하자 제닐이 눈을 얄팍하게 만들었다.
"비사, 너 설명하기 귀찮았구나. 딱 걸렸어. 아주 그냥 요새 뭐 묻기만 하면 모른다 일색이구만. 그러다 혼난다."
제닐이 말을 하더니 피식하고 웃었다. 아무래도 이젠 속이 다 읽히나 싶어졌다. 역시 경험 많은 이는 함부로 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검집 하나에 어떻게 두 개를 다 꽂아?]
세이가 종이를 세워 보였다. 이것저것 궁금하기는 한 모양이었다.
"날의 중심이 양쪽이 다르다."
구박을 받더니 이번엔 나름 성실히 대답했다. 제닐이 검 두 자루를 걸쳐 놓고 비교해 보더니 말했다. 확실히 비교해보니 손잡이의 중심이 조금씩 바깥으로 나 있었다.
"그래, 결국 양쪽이 똑같지가 않구나.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르겠네."
고개를 끄덕이며 제닐은 두 자루의 검을 한쪽씩 밀어 넣었다.
"앗!"
제닐이 손에 맞지 않는 것을 어설프게 쥐고 좁은 구멍으로 날을 맞춰 세우다 어긋나며 칼자루를 놓쳤다. 칼은 침상 위로 떨어질 것이니 다치지 않을 것인데도 자기도 모르게 한쪽 눈을 찡그리며 어깨를 세웠다. 칼날 밑에는 어느새 내밀어진 비사의 손이 있었다.
"안 다쳤어?"
제닐이 놀라 물었다.
"안 다쳤다."
그냥 담담한 목소리로 돌아오자 놀란 숨을 내쉬었다.
"얘는, 그냥 침대로 떨어지게 두지. 위험하게 잡고 그러니. 그래도 칼이 제 주인 알아보고 베지는 않나 보다. 품고 다닌 보람이 있네. 다행이다. 그지 세이."
세이는 비사가 고쳐잡고서 반듯하게 밀어 넣는 검의 날을 물끄러미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날 옆을 살짝 밀어내며 비스듬히 받았기에 베이지 않은 것뿐이었지만 알 리 없는 두 사람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리 쓰라 주려 하신 것은 아닐 진데도 제 것이 되기는 하였나 봅니다. 아버지.'
옛 생각에 아련한 마음도 잠시 못내 죄스러운 생각이 한층 더 쌓여갔다.
-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1척 = 약30.333.....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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