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못 28화 - 동행(同行)
닷새가 걸려 세 번째의 산에 이르렀다.
그 산자락에서도 여전히 적인의 기운은 멀리 있는 듯 거리감이 있었다. 지금 턱없이 부족해진 공력으로는 기운을 뻗어 적인을 끌어당길 수도 없으니 계속 이렇게 가야만 했다. 짐까지 늘어난데다 왼손에 남은 마지막 힘을 사용하면 약인은 더 쓰지 못할 것이었다.
'약인이 없어도 다른 줄이 이어져 있기는 하나.'
적인의 수호자임과 동시에 검혼(劍魂)이 선택한 주인 비사. 약인은 적인을 봉하고 수호하던 가문 적명의 것이니 잠시 쓰지 못하는 것도 죄스러운 기분이 드는 비사였다. 그저 서로 이어진 혼을 가닥가닥 더듬고 있었다. 맑고 아련한 쇠 울음만 귓전에 울렸다. 두 사람을 아래에 남겨두고 홀로 산 위로 올라 있었다. 이시스가 산을 도저히 지쳐 못 오르겠다 한 탓이었다. 비사가 혼자 위로 뛰어올라서며 두 사람을 마른 넝쿨이 수북이 쌓인 흙벽 앞으로 들어가게 했다. 뭐라고 딱히 말하지는 않았으나, 마치 비사의 두 눈에서 움직이면 버린다. 라고 말하는 것 같이 느껴진 이시스였다.
"나보다 두 살이나 아래인데 그 나이에 어찌 저리 많은 경험의 태가 나는 것일까."
제닐이 보았더라면 요령도 없는 비사에게 무슨 말이냐 할 법하지만, 이스터가 보는 비사는 빈틈이 없어 보였다.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측면을 보는 셈이었다.
"나보다 고작 네 살 많으면서 그렇게 노땅 티를 내다니, 이름도 비사가 뭐야 비사가. 어느 동네 이름이야."
"그래도 발음은 괜찮은 것 같은데. 이시스, 비사님이 싫으니?"
"언니, 저번부터 매번 님 자는 왜 붙여? 햇볕에 타지는 않아서 곱상하긴 해도 행색이 귀족 같지는 않던데? 알고 보면 어디의 하인이나 천민일 거야. 분명해. 그래서 날 괴롭히는 거라구!"
"신분은 모르지만, 은인이시니 괴롭힌다고 생각하지 말고 잘 생각해봐. 이시스, 비사님은 상관도 없는 우리를 구해 주신 거야. 지금 우리를 두고 간다고 해도 우린 어쩔 수 없어. 그런 사람이 먼저 택한 것이면 아마 중요한 일이겠지. 우리가 중요한 것은 우리 가족들과 가문의 힘이 필요한 사람들뿐이야. 세력 있는 가문을 등에 업지 않으면 누군가 당연히 무언가 해줘야 할 만큼 우리가 가진 것이 많지 않아."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제 손만 가지고 살아날 능력도 없었다. 이스터는 이번 일로 다시금 그것을 통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린 귀족이잖아."
"귀족이 저택 밖으로 나서서 돈도 한 푼 없고, 비싼 옷을 입지 않아도 귀족으로 보일 수 있는 건 햇빛을 맞지 않아 주근깨 없는 피부와 곱다란 손뿐일 것이야. 귀족들끼리 한 방안에 있더라도 세력이 작아 이용가치가 없다 하면 같은 귀족이라 해도 홀대당하기에 십상이야. 이시스 잘 기억해두렴. 가문이 없어도 가치 있는 인간이 되어야 해."
이시스는 귀족을 귀족으로 판단하여 대우하는 것이 뭐가 문제라는 것인지 이스터의 말을 반도 이해하지 못하였다. 이스터 역시 그저 해두는 말일 뿐이지 지금 당장 이시스가 무언가를 느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언젠가 이 말이 떠오를 시기가 있을 것을 바라며 기대하며 긴말들을 들려줄 뿐이었다. 어른이 되고 늙어 죽는 날까지도 귀한 종족이라는 허명에 붙들려 사는 것이 대부분 귀족의 일생이었기 때문이었다.
다정하기만 하던 이스터가 이시스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하고 있었다. 한소리 듣고 나자 이시스가 조금 시무룩해졌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저 이스터의 얼굴만 올려다봤다. 안쓰러움이 묻어나던 이스터의 표정은 갑자기 울려대는 땅 울림과 함께 어그러졌다.
말 발걸음 소리 같은 땅 울림이 뒤섞여 들려왔다. 설마 이런 곳으로 따라온 자들이 있을까. 그저 길 지나는 자들이라 생각하면서도 두 사람은 숨을 죽였다. 이시스의 어깨를 감싼 이스터의 손가락이 뼈를 드러낼 듯이 힘이 들어갔다. 이시스는 아픔도 느껴지지 않는지 몸을 웅크린 채 멈출 것 같은 숨을 작게 내쉬었다. 다행히 일부러 말은 조금 떨어진 아래쪽에 묶어둔 채였다.
"랄프님! 여기입니다!"
멈춰선 듯한 여러 사내의 목소리가 울리어 멀리서부터 섞여 들렸다. 그 와중에 외쳐지는 이름이 들려왔다. 아는 자였다.
'랄프경. 숙부님 관할 하 기사단 부단장의 이름이라 들었다. 정말로 숙부님께서...'
이스터의 다문 입에도 힘이 들어갔다. 의심하던 자신이 나쁘지 않았음이 확인됨과 동시에 배신감이 스몄다. 오히려 예상대로 바로 들어맞아 허탈한 기분이 들 지경이었다. 지금 부를 이름이라고는 비사밖에 없었다.
'비사님...제발.'
"갈색 몸에 검은 깃, 이마에 검은 얼룩이 두 개. 이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랄프님"
서 있는 사람 열둘 모두가 제각각 허리춤에 칼을 차고 있었다. 모두 말에서 내려 산을 길게 둘러보았다.
"정말 북으로 온 것인가. 이 눈 산을 계집 둘을 데리고 지나고 있다니 대체 누가 함께 나와 있는 것이야. 이리로 가면 도와줄 사람이 또 있기라도 한 것인가."
"그 옷 상인이 왼팔을 못 쓰는 듯한 망토를 뒤집어쓴 자와 함께 있었다 하지 않았습니까. 얼굴도 보지 못하였다 하니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다른 동료가 더 있을지도 모릅니다."
"체구가 작다 했으니 누군가와 합류하기 전이라면 충분히 잡을만하다. 이번이 기회야. 동생 년을 잡아서 카일러스의 목을 졸라야 해. 저택 밖으로 나오지 않는 것들이니, 이번에 들어가면 숨어 버릴 게 뻔해. 목숨만 붙어 있으면 된다. 팔다리를 잘라도 숨만 쉬고 있으면 된다. 어떻게 해서든 찾아내서 끌고 와!"
병사들이 각 방향으로 흩어지며 비탈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어떻게 여기로 온 것이지. 당연히 서로 가야만 한다 여겼을 텐데."
이스터가 속삭였다. 이시스의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나 때문이다. 내가 거기서 북으로 간다고 말을 해버린 바람에...'
옷을 고르며 심통이 난 자신이 뭣 하러 북쪽은 가느냐며 중얼거린 것이었다. 워낙 작게 혼잣말을 내뱉은 것이라 아무도 듣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내가 잡히면 오라버니를... 이스터 언니까지...비사를 따라가야 했는데.'
비사의 냉담한 그 말이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이렇게 금세 그 말에 수긍하는 순간이 오게 될 줄은 몰랐다. 쉬고 싶은 마음이, 이 공포에 비하면 그깟 다리아픔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언니.., 내가 잡히면... 언니는 그냥 보내줄지도 몰라."
"쉿, 쉬잇,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들키지 않을지도 몰라. 가만히 있어."
소리가 울려 대체 어디서 들려오는 건지 가까워지는 건지 멀어지는 건지 너무 긴장한 탓에 아무것도 분간되지 않았다. 이시스는 북쪽은 추울 텐데. 라고 투덜거리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내 탓이다.'
마음속에는 그 말만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가까운, 울림소리가 아닌 바로 앞에서 자신들을 가린 넝쿨들의 마른 잎사귀가 흔들리고 있었다. 누군가 있었다.
'나만 잡히면!'
파삭.
이시스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엇!"
병사 한 명이 칼로 여기저기 들추어 보다가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이시스를 발견하고 입을 크게 열었다.
"여깁니다.!! 출발지점에서 동북 경사면입니다!"
소리를 내지르고는 이시스를 향해 걸어왔다. 이스터는 손에 잡힌 이시스의 옷깃을 통해 덜덜거리는 떨림이 손을 통해 느껴졌다. 갑작스러운 이시스의 행동에 당황할 때가 아니었다.
'안돼. 넘겨줄 수 없어. 비사님이 오실 때까지만이라도.'
품 안에서 비사가 준 단도를 꺼냈다. 그 손도 떨리는 것은 다를 것 없었다.
- 작가의말
이찡찡 귀족초딩 민폐자매 밉상등극 이시스터스
뭔가 한없이 이름이 늘어나는 이시스입니다. ㅋㅋㅋ
이걸 쓰는 사람은 기뻐해야할지 슬퍼해야할지 참 거시기합니다만, 구박도 관심이라 일단 기뻐합니다. 으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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