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못 05화 - 죽은 태아(胎兒)
비사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낯설었다.
눈을 떠 본 세이와 제닐도, 숲마저도 낯설었었다. 둘러본 산은 자신이 아는 청금성 주변 산자락이 아니었다. 비록 멀리 나가 내다본 것은 아니었지만, 어쩌면 청금성에서 멀어져 다른 마을이나 청황국의 어딘가 자신이 모르던 곳일지도 모른다. 그 정도만 예측하고 있었다. 세이와 제닐 또 다른 이국인도 그냥 상단을 따라 이주한 서역인 무리일 거라 여겼다. 자신을 태웠던 곳과 멀어진 점만 제한다면 나름 가능한 추측들이 대부분이었다.
남들보다 밝은 눈에 저 멀리 있는 것들이 눈에 들어오고 나자 지금까지의 모든 추측이 깡그리 사라져버렸다. 보이는 것은 기와도, 능선의 처마도 없는 자신이 아는 것과는 전혀 다른 구조의 건물들이었다. 제닐과 세이의 오두막에도 투명한 창이 있었다. 투명한 유리는 비싼 것이라 귀족들이나 쓸 수 있는 빛깔이었다. 자신이 깨어 버리긴 했으나, 이런 오두막에 비싼 창이 있던 것을 보면 여길 만든 것은 서역인들이나 귀족일 거라는 생각을 무심코 하곤 했다. 그런데 그 투명한 창이 허름한 건물이건 새 칠이 발라진 건물이건 할 것 없이 보이고 있었다.
그럼 여기가 청황성국이 아닌 것인가?
변방의 크고 작은 나라에도 이러한 차이는 들은 적이 없었다. 그렇다 한들, 서역까지 이동했을 리도 없지 않은가. 아무리 짧아도 서른 날은 족히 가야 하는 곳이 서역이라 했다. 어떻게 다 죽어가던 그 상태로 가능하다는 것인가. 꿈인가. 전부 꿈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요물에게 홀리기라도 한 것인가. 비사는 혼돈의 구렁텅이에 빠져들고 있었다.
커다란 문을 몇 번 지나, 길게 늘어선 간판들 사이로 들어섰다. 정신이 어딘가로 날아가 버린 듯한 비사는 내버려두고 건물 안으로 들어선 두 사람은 능숙하게 바구니들을 정리했고 비사는 더 이상의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 꿔다놓은 보릿자루마냥 넋을 놓고 서 있었다.
다른 가게 안에 자리를 얻어 물건을 파는 듯 한쪽 구석 좁은 자리에 제닐의 물건들이 올려졌다. 옆의 커다란 좌판에는 과일과 병들이 제자리마냥 편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지나는 이들이 드문드문 인사를 건넸고 제닐도 세이도 웃으며 인사를 했다.
이들이 속한 곳이었다. 그도 그럴게 너무도 자연스럽지 않은가. 이질적인 것은 자신뿐이었다. 순식간에 이방인이라고 생각했던 두 사람과 자신의 위치가 뒤집어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정신없게도 이색을 지닌 자신을 향해 찔러 들어오고 있었다.
툭툭
세이가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높은 천정의 벽도, 바닥도 하얀 건물 안이었다. 팔 것들을 가게 안에 옮겨 놓고서 세이에게 이끌려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혼란에 휩쓸린 비사의 당혹스러운 얼굴 탓에 세이의 눈가에는 걱정이 한가득했다. 비사는 이내 아무 일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어주었다.
텅. 터엉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마치, 거대한 동굴 안에 있는 것 같았다. 울림과 함께 흰 천에 금사로 낯선 문양을 수놓은 너울을 머리에 두르고, 나풀거리는 얇은 흰색 겹겹이 물결 주름으로 가득한 옷 위로 금줄로 허리를 묶어 길게 늘어놓은 복색의, 나이가 들었으나 얼굴에 기품 서려 있는 여인과 주름이 없는 흰 천에 상대적으로 적은 수가 놓인 옷을 입은 젊은 청년이 다가왔다.
비사는 문득 화려한 상복을 입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세이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여인은 다정스레 세이의 보드라운 볼을 몇 번 쓰다듬어 주고는 비사를 쳐다보았다. 길게 비사의 눈 한가운데를 응시하던 여인이 옆의 청년에게 손짓하자, 그가 세이와 비사를 어느 방으로 이끌었다. 울리는 발소리가 잠시간 이어졌다.
세이가 또 언제부터인가 자신의 손을 잡고 있었다. 비사가 먼저 손을 잡는 일은 없었으나 딱히 그것을 거부하지도 않았다.
복도를 걷는 동안 비사의 혼란은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돌아갈 곳, 기다릴 이 없다. 잿가루도 다 날렸을 것이니 미련 남긴 것도 아니다. 적인과 단 둘뿐인 것은 똑같으니 어디든 상관 없으련가.'
여전히 많은 의문은 남아 머리를 복잡하게 했지만, 불안도 초조도 열망조차 없으니 그저 필요치는 않으나 모르면 답답한 수수께끼. 그것뿐이었다. 애당초 여기서 깨어나는 순간부터가 의문이었으니 새삼 놀랄 것이 무엇인가 싶었다. 낯선 환경과 예상 못 한 난처함도 잠시, 비사는 그저 긴 복도를 걸었다.
끼익-
문을 열고 들어서니 아이들이 한가득했다. 아마도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곳인 듯했다. 급작스럽게 소란은 침묵으로 바뀌었고 시선이 모두 비사를 향해 꽂혔다.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청년은 빈자리로 안내했다. 세이와 나란히 앉았다.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한 조용함 속에 사제는 말을 시작했다. 세이는 수군거리는 아이들의 소리를 듣고 미간을 조프렸지만, 비사에게 내색하지는 않았다.
세이가 고민 끝에 자신 대신 말을 가르쳐 줄 장소를 찾은 것이었다. 보통 귀족들은 대부분 가정교사가 있으나 그것이 마땅치 않은 가난한 평민 아이들과 주인이 허락하면 노예 계층인 아이들도 글을 배우러 다닐 수 있었다. 글을 모르는 어른들을 위한 방도 있었지만, 말 자체를 모르니 결국 아이들 방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었다.
어찌 되었건 선택의 여지가 없는 비사로서는 이 아이들이 바글바글한 곳에 앉아 있는 수밖에 없었다.
시간은 빈틈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하루하루가 짧았다. 아침에는 수레를 끌고 마을로 내려오고 해가 지면 다시 산길을 올랐다. 한 시간을 앉아 있기도 지겨워하는 아이들과 달리, 해질 때까지 자리에 앉아 있는 비사는 집중하는 시간도 시간이었지만 이미 어떤 식으로든 세상에 대한 지식이 있었기에 더 빠르게 배워 나갔다. 아이들 교실에 다 큰 소녀가 앉아 있으면 모여들 법도 한데 비사 옆에는 세이와 글을 가르치는 사제뿐이었다.
비사의 어린 시절 어른들 틈바구니에서 자란 터라 또래의 아이들과 어울린 적이 별로 없었다. 칼과 서책이 유일한 놀이라면 놀이었다. 그것은 나이를 먹어서도 변하지 않았다. 사람을 대하는 것이 어려움 그 자체였으나 특히 어른이 아닌 어린아이를 대하는 것이 어려웠다. 어르고 달래며 놀아줄 성격도 아니 되었거니와 '엄히'라는 것의 정도도 제대로 알지 못했으니 나이가 어린 상대를 그저 불편한 타인으로서 인식하는 비사였다.
조금이나마 단어를 익히고 나서야 아이들이 자신을 피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짹짹거리는 얇고도 높은 목소리로 뱉어지는 꼬마들의 외침이 이제는 이해할 수 있는 말이 되었다.
"악마야!"
세이가 염려하던 부분이었으나, 비사는 딱히 상처받지 않았다. 시답잖은 놀림이 와 닿지도 않을뿐더러 분명 자신이 어린 시절에 이런 색목인들을 봤다면 요물에 마귀, 도깨비 있는 데로 다 뱉어냈을 것이다. 푸른 눈(碧眼)이라니 국경을 아우르는 상인도 아니고서야 평생 살면서 구경할 일이나 있을 것이던가. 신성하다고 입은 흰색 옷이 자신에게는 상복처럼 보이는 것처럼 이들에게 새카만 검은 머리는 마와 공포의 상징이었다. 오히려 그런 식으로 자신에게 거리를 둬주니 고맙다 착하다 당과라도 사줘야 할 판이었다.
비사는 자신이 이방인이라는 존재임을 아주 확실하게 스스로 구분 짓고 있었다.
글을 가르치는 이는 이십 대의 청년 슬렌스 평사제(平司祭)였다.
그는 요새 매우 즐겁다 못해 불타오르고 있었다. 이 상태는 바로 소녀 비사에 의한 것이다. 머리 색에 깜짝 놀라고 눈 색에 또 깜짝 놀란 슬렌스는 사제일지언정 청춘 아니던가. 사제 생활을 하며 여사제들이 있다 하더라도 그는 숙맥 같은 구석이 많았다. 그런 그에게 비사는 이질적이라 느끼면서도 여성이 곁에 있으니 또 괜히 수줍어지고 있었다. 자신이 배속된 방에서 공부하게 하라는 여 사제님의 말씀이 있었으니 얼떨떨한 상태로 시작했으나 생각 이상으로 소녀는 머리가 좋았다. 천방지축 아이들 상대로 선생 노릇을 하고 있었으니 일단 배우겠다는 자세로 앉아, 내밀면 내미는 대로 모두 들이마셔 흡수하는 영민한 제자가 너무 기특하고 더 다양한 지식을 전해 주고 싶었다. 가르치는 것에 새삼 보람이 느껴졌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한계가 드러나는 듯한 기분이 들어 이젠 무서워졌다. 비사는 자꾸 '왜'라는 질문을 던져왔다. 귀족과 평민이 있는데 같은 계층 안에서도 격차가 왜 있는가. 왜 신교의 문장은 저런 모양인가. 나라 안에 공국이라는 또 다른 나라가 있는 것은 왜 인가. 사회적 계층과 지위에 비사는 의문이 많은 모양이었다.
슬렌스 자신도 생각이야 해 본 부분이었으나 그것을 제대로 설명해줄 만치 고려해 본 적은 없었다. 자신의 부족함을 드러내는 것은 곧 이 신교의 수치가 아닌가! 말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 대한 지식을 전하고자 피 끓는 청년 슬렌스는 신전을 위해서인지 자신이 불긋한 얼굴을 위해서인지 모르나 오늘도 열심히 예습 복습에 과제까지 하고 있었다. 알게 모르게 작은 파동을 일으키는 돌멩이 비사는 목전(目前)에서 뭐가 붉어지고 파래지든 상관도 없이 저의 호기심을 채워 나갔다.
잉크와 펜촉이나 종이 같은 것이 그녀에겐 굉장히 특이한 것이었다. 이곳의 종이라는 것은 질감도 자신이 아는 종이인 화선지와는 달랐다. 묵향과 비슷하면서도 어딘가 다른 잉크의 냄새. 한 글자의 음 자체에 수많은 뜻을 갖는 한자와는 다른 소리 말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 같은 이곳의 글도 나름 배우는 재미가 있었다. 굳이 대화 중심이 아닌 문자를 함께 배우기 시작한 것은 세이를 생각해서였다. 그리고 몇 마디의 말을 배우자 꺼낸 비사의 말은 어쩌면 당연하였다.
"지도... 찾습니다."
한자로 청황성국, 청금성을 적고도 그것을 다시 이곳의 말로 고쳐 발음대로 적어 몇 가지의 글자를 더 적어 보여주었지만, 슬렌스 역시 처음 보는 것이었다. 슬렌스가 탁자 한가득 펼쳐놓은 대륙의 지도에는 자신이 살던 나라의 한 조각 닮은 것도 없었다. 청황성국의 동서남북을 통틀어 알던 나라의 이름을 모두 뒤져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하다못해 서역의 나라 이름이라도 제대로 알면 좋으련만 청황성에서 부르는 서역과 서역인들 자신이 부르는 이름이 다르다 했으니, 그저 분명한 것은 이곳은 낯선 땅이라는 것뿐이었다.
과연 서쪽의 땅이기는 한 것일까. 비사는 그런 의문을 갖게 되었다. 지금 자신이 서 있는 이 땅에서 동쪽으로 모든 땅을 뒤진다 해도 청황성국은 없을지도 모른다. 알 수 없는 의문만이 쌓이고 있었다.
어떤 아이도 부모에게 부탁하여 태어나지는 않는다 했다. 하지만, 비사는 뱃속의 갓난아이가 아니었으니 분명 자신이 선택한 결과물을 맞이해야 했다. 무엇이 자신의 선택을 뒤집어 놓은 것일까. 아니면 정말로 이 모든 것이 자신을 벌하기 위한 지옥의 허상인가 하는 번민이 번져나갈 뿐이었다. 새로운 세상에 태어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 갓난아기의 시작이라면 비사는 죽음이 그 시작이 된 셈이었다.
죽기를 각오하였더니, 바라지도 않았는데 떠밀려져 다시 세상에 나와 버리지 않았는가.
'떠나온 것인지, 내쳐진 것인지.'
비사는 뜻 모를 비웃음만 마음에 품었다.
-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알랍!
좋은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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