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못 30화 - 지주사(蜘蛛絲)
파삭 소리를 내며 마른 줄기들이 바스러지더니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이스터의 앞으로 잔 조각이 흩뿌려지며 길이 열리었다. 검기 품은 칼로 내리긋자 질기다 투덜대던 병사가 엄살을 부렸다 할 만큼 깨끗하게 갈라섰다.
이스터가 묻힌 피보다 그 위로 겹 씌워진 피가 더 짙은 단검이 떨어져 있었다. 사람마냥 그 몸을 잘게도 떨었을 것을 생각하니 짧은 날이 너무나 여리고 유약해 보였다.
'약하다.'
제대로 칼을 쥘 줄도 모름이며 있는 힘을 다하여 보았자 뼈도 하나 가르지 못하는 그런 손의 힘이기는 하나, 찌를 결심이나마 한 것이니 이것을 강하다 해야 할 것인가. 비사는 떨어진 칼을 집어들어 근처에 쌓인 눈에 피를 닦아 이스터에게 내밀었다. 이스터는 칼집에 다시 고이 들어간 그것을 품 안에 넣으며 그제야 마음을 다잡았는지 심호흡을 하며 일어섰다. 이스터가 이시스의 손을 잡고 걸으려 했지만 아이는 우뚝 멈춰 서더니 바닥만 내려다보았다.
"이시스? 괜찮니?"
"다 나 때문이야. 언니. 미안해에 으아앙."
이시스는 엉엉 울기 시작했고 뒤이어 눈물 어린 고변이 이어졌다. 비사는 그저 뒤를 돌아 걸어나가려 했다.
"미안하다고! 비사! 엉엉. 왜 대답도 안 해주는 건데! 내가 가게에서 북으로 간다고 말해버렸단 말이야. 다리 아프다고 하지 않을게. 벌레 기어나왔다고 소리 지르지 않을게. 마른 빵이 맛없다고 투정도 안 부릴게. 으허어엉. 그러니까. 버리고 가지마아. 비사아. 버리고 가지 마. 잡혀가서 다리 찢어지면 어떡해에. 으아아아앙."
말이 오락가락하면서도 입도 크게 울며 외치는 꼴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비사에게 괜찮다는 대답을 듣고 싶은 모양이었다. 대체 뭐라 말해줘야 하는 걸까. 아이가 원하는 대로 말을 해주어야 하는 걸까. 역시 아이들은 대하기가 어려웠다. 비사는 다가가 이시스의 등을 탁하고 살짝 쳤다.
"때렸어. 으아아아앙. 말로 하란 말이야. 엉엉."
아프지도 않을 것이거늘 홈세가 심하였다. 이 반응이 그 반응은 아닌 걸 보니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사람은 쉬이 얻어지는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이스터가 이시스에게 계속 무어라 말을 하는 것 같았으나 비사는 그 틈에 먼저 아래로 내려가 버렸다. 비사는 이시스가 울건 말건 시끄럽기만 할 뿐이라 여겼으나, 실상은 누구인가가 문제가 아니라 자신에게 감정 섞인 답을 요구하는 것이 어려운 모양이었다. 그들의 마음에 동조하지 못하니 대답을 만들어 낼 수가 없었다.
비명도 없었는데 비탈길에 피가 스민 흙이 음산함을 내뿜고 있었다. 비사는 산자락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열두 구의 그것을 끌어다 한쪽에 놓았다. 이시스는 멀찍이서 아직도 훌쩍이고 있었고 이스터는 비사를 돕지도 못하고 주저앉아 쉬지도 못한 채로 불편한 마음으로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비사 역시 뭐라 한마디 말이 없었다.
그들이 타고 온 말이 근처를 맴돌고 있었다. 비사는 자신들이 타고 온 말들에서 짐과 안장을 내리고서는 풀어주었다.
"다른 말."
"네?"
비사는 병사들이 타고 온 말들을 향해 고갯짓만 했다. 이스터는 자신들이 타고 온 말이 너무 지쳤을 것이니 바꿔 탈 생각인가 생각했다. 이시스를 근처에 앉혀 두고서 이스터가 말들을 살펴 두 마리를 골라내었다.
타고 온 말의 안장과 짐을 바꿔 메고서 다른 병사들의 짐을 뒤적였다. 지도와 깨끗한 천을 꺼내서는 이스터에게 넘겨 주었다. 마다치 않고 받아 들었다.
이스터는 병사의 짐가방을 옮기다 자침(磁針)을 발견하였다. 그러고 보니 비사가 북으로 간다 하며 여길 온 것이 대체 어찌 온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간 지도 한 번 펴보지 않던 비사였다. 그저 적인이 있는 쪽으로 지도를 처음 펴 보았을 때 북쪽이었기에 적인이 있는 곳이 '북'이라는 단순한 감만으로 이동을 하고 있었던 셈이었다. 이스터는 혹시 이곳의 지리를 비사가 아는 것인가 하는 생각만 어렴풋이 하고 있었다.
남은 짐들을 쌓고서 작은 통의 기름을 부어 불을 붙였다. 연기를 쫓아 온 그들이 산을 뒤져 시신을 찾고 자신들의 흔적을 뒤질 것이다. 이 근방의 숲길로 들어서다간 이들의 일행을 마주칠 수 있으니 이 연기를 미끼 삼아 비사는 근처의 마을을 지날 생각이었다. 자신들이 계속해서 숲길만 지난 것을 이들이 안다면 바로 마을로 쫓지는 않을지도 몰랐다. 사람들 사이에 섞여드는 것이 차라리 눈에 덜 띄게 될 것이라 여겨졌다. 이스터가 고른 두 마리와 다른 두 마리를 남기고서 다른 말은 모두 풀어 보냈다.
"비사님. 다치셨어요?"
이스터가 비사의 발목 위에 얇게 베인 상처를 보더니 물었다. 깊지도 않고 스친 상처였으나 붉은 피가 옷에 스며들고 있었다. 목이 없는 자들이 있는 판국에 이런 베인 상처가 대단한 것도 아닐 것이건만 유독 그 상처가 아파 보였다.
'왜, 저런 표정을...'
대답도 없이 내려다보는 그림자 진 얼굴이 그저 무표정하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이스터가 땅에 떨어진 것을 하나 집어들더니 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손안에 든 그것을 어찌할 것인지 고민하는 듯했다. 비사가 쳐다보자 이스터의 조용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제 비사가 빤히 쳐다보면 뭔가 물으려 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아이가 태어날 때에 아비 될 자가 만드는 것이지요. 이것을 신전에 가져가면 축복을 내려준답니다. 워낙 어린 나이에 죽는 아이들이 많으니 아이 대신 인형이 병을 맞으라 하는 것이지요. 저들 중 누군가가 아이를 위해 만든 것이겠군요."
아비의 엄지손가락만 한 그저 둥근 머리와 몸만이 있는 엉성한 목각 인형이었다. 이 인형을 깎던 손이 자신이 망설이던 그 순간에 칼을 휘두르지 않았더라면 살려두었을까. 칼이 들어오니 본능적으로 손이 움직여 가슴을 찔러버렸다. 이 자는 자신에게 고민할 시간을 주지도 않았다.
'아니, 결국에야 죽였을 것이다.'
아래로 늘어진 그 손에 힘이 없어 보였다.
이스터는 그것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그저 손에 꼭 쥐고서 망설이다 이마에 잠시 대어 눈을 감았다. 불 속에서 타들어 갈 것이 그 운명일 것이었다. 비사가 망설인 그 짧은 순간에 칼을 내민 병사를 비난할 생각은 없었다. 그것이 사람이었다. 이쪽도 살기 위해 칼을 휘두르니, 그들이 살고자 하는 칼에 어찌 트집을 달 것인가.
비사의 입가에 맴돌던 말이 밖으로 새어나왔다.
"옳고 그름은 무엇인가. 그것이 의미가 있는 것인가."
여전히 그때와 변한 것이 하나 없다 여겨졌다. 그 허탈한 중얼거림이 어디의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 이스터만이 고개 숙인 비사를 바라볼 뿐이었다.
서슴없이 적의 목을 베는 사람. 자신들을 구해 준 사람. 그리고 무표정함에 많은 것을 담는 사람. 냉혹한 것인지 상냥한 것인지 모를, 그것이 비사에 대한 인상이었다.
- 작가의말
... 다 같이 힘내서 더위를 이겨냅시다!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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