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못 19화 - 령회(領會)
어둠이 깊게도 내린 새벽녘 비사는 행여 곤히 자는 이들을 깨우지나 않을까 조심스러운 움직임으로 밖으로 나왔다. 운기를 위한 것이라고 하기는 하나 사실 비사는 잠을 거의 자지 않았다. 이들이 일어나 이른 아침의 생기를 내보일 때까지 짐짝마냥 늘어져 움직이지 않을 뿐이었다.
얄팍한 달이 뜬 탓이런가. 사방이 깜깜한 것이 그림자 하나 제대로 보이지 않았으나, 비사는 조근조근한 발소리로 어디 하나 부딪히지도 않고 숲을 향해 걸었다. 자신은 기억이 희미하여도 이 숲에서 제닐과 세이를 만났다. 산세도, 돋아난 풀의 모양새마저도 낯설더니 어느샌가 익숙해져 있었다.
돌이켜 보자면 아민 역시 숲길에서 만났으나 이들은 매우 다른 사람들이었다. 이미 지난 일이니 쓸데도 없는 생각이나 이들을 만난 그 순서가 달랐더라면 조금은 편한 밤을 맞이할 수 있었을까.
아민을 만난 날의 색은 분명 핏빛이었다. 처음이 그러하였으니 뒤 역시 그리되리라는 것을 어쩌면 알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저 외면하였을 뿐이었다. 무엇이 어찌 되든 상관이 없다 여겼다.
-"비사, 나는 말이다. 저자가 없어야 살 것 같구나."-
앳된 얼굴의 어린 치에게 아민이 싱긋이 웃었다. 그의 웃음 만큼이나 겹겹이 들어찬 야심이 비죽이 튀어나와 눈에 보일 듯하였다. 그의 손끝이 향하는 곳은 관복 자락이 펄럭이고 모래 섞인 바람이 불어 눈이 따가웁기도 하련만 굳건히 서서 아민을 노려보는 대신과 그의 무리가 서 있었다. 아민과 달리 한일자로 다물린 입들이었다.
"또 나를, 은세를 죽이려 사람을 보낼지도 모른다는구나. 도와줄 수 있겠느냐. 나는 비사가 도와준다면 평안한 마음으로 궁에서 살 수 있을 것 같구나. 우리를 향해 칼을 겨누기 전에 먼저 쳐야 다치지 않을 것 아니더냐."
상냥하기만 했던 아민의 목소리가 지금 떠올리니 왜 자신이 그리 느꼈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보다도 더 어렸던 비사는 그런 아민이 죽임이라도 당할까 무서웠다. 아민은 비사의 속이 여린 것을 꿰뚫어 보았다. 그리고 그 여린 속내가 두려움으로 가득 차면 적을 향한 잔혹함으로 바뀌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확실히 남의 머리 위에 서서 호령할 만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다.
아민을 만나기 전의 비사는 그저 길짐승이었다. 가공할 내공이 있었다고는 하나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검에 깃든 적인 또한 인간사를 제대로 알지 못했으니 세상 사는 이치 하나 모르는 아이가 하는 것이라고는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는 것이 다였다. 나물 캐는 아낙들이 아이 꼴이 불쌍타 하며 던져주는 밥을 얻어먹거나, 말 거는 채삼(採蔘)꾼의 뒤를 쫓아다니기도 했다. 제 자식 먹일 밥도 모자란 사람들의 얼마 되지도 않던 친절은 몇 푼 들지 않은 주머니 속마냥 길지 않은 것이었다. 없는 이들 사정이야 그리도 퍽퍽하였다. 그러니 가장 먼저 배운 것이 그것이었다. 어디에서도 오래 머물지 못했다. 눈대중으로 배운 채삼꾼 흉내나 내며 약초나 몇 가지 뜯어다 어느 늙은 약방에 헐값에 팔며 그렇게 거지꼴을 하고 하루하루를 연명했다.
그저 그런 무의미한 날 중 하루일 뿐이었을지 모른다. 길을 잘못 들어서게 될 예감이라는 것도 없었는지 비사는 그날도 길 위를 맴돌고 있었다. 가고자 한 곳이 없었으니 발 내디딜 길이 없던 탓이었다.
"늬 이런 산중에서 무얼 하느냐. 아이야."
낮은 나무에 걸 터 앉아 지나는 자신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비사를 발견한 아민이 싱긋이 웃으며 말을 걸었다. 다 큰 사내 셋이 죄다 칼을 들고 있으니 아이가 경계심이 가득한 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품 안에서 주머니를 하나 꺼냈다.
"이 줄 테니 이리 내려 오거라."
색이 고운 비단 주머니에서 향이 도는 아롱다롱한 색의 단 것을 손바닥에 털어내 몇 알을 꺼내었다. 시장에서 아무렇게나 뭉친 것과 달리 색도 들고 둥그러니 곱게 모양도 낸 것이었다.
"단것 먹지도 않는다 해도 이리 싸서 보내었구나. 다 늬 줄 테니 이리 오거라."
비사는 한참을 망설였다. 예전에는 사제 아지들이 어머니께 혼이 나면서도 자신에게 부족지 않게 사주었었다. 먹고자 하면 그것이 거기에 있었다. 하지만, 이제 주머니에 든 것 없는 자신이 사기엔 비싼 것이라 입에 대본지도 오래였다. 멀리서 보아도 그 광택이 어찌나 탐스러운지 비사는 쭈뼛거리며 가지에서 뛰어내렸다.
"그래, 그 나무에 올랐으니 내려올 방책도 있었던 거구나. 어찌 그리 가볍게 뛰느냐."
아민은 손을 길게 뻗어 비사에게 내밀었다. 비사는 한참 얼굴을 올려다보더니 한 손을 내밀어 손바닥 위의 그것을 집었다. 그리고 먹지 않고 다시 비단 주머니 안에 넣어 손에 꼬옥 쥐었다. 아민의 뒤에는 칼을 멘 무사가 말을 꺼냈다.
"저하, 어서 가셔야 합니다. 어찌 그런 아이에게 관심을 두십니까."
"이런 산중에 아이 홀로 있는데 버려두고 갈 셈이냐. 굽어살펴야 좋은 왕이 된다 하지 않더냐. 비단 걸친 아이만 돌보라 할 것이냐. 매정한 소리도 하는구나."
"그것이 아니오라, 한시가 바쁘옵니다."
"안다, 뭘 걱정하는지. 그래도 봐 버린 것을 어찌할 것이냐. 내려다보는 눈이 어미 기다리는 새끼마냥 서글프지 않더냐. 길이라도 잃은 모양이니 가는 길에 데려다 주는 정도는 해주어야 할 것이지."
아민은 아주 조심스럽게 다가가 헝클어져 얼굴을 가린 머리카락을 걷어주었다. 비사는 몸을 조금 움츠렸으나 도망가지 않았다. 그것이 기특한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동자(瞳子)가 참 특이하구나. 커다란 것이 흑사탕 같지 않으냐. 아이야 길 잃은 것이거든 내 밑에까지는 데려다 주마. 알았지?"
아민이 웃으며 말했으나 편한 길 가려 하는 것도 아니었으니 걸음이 느려질까 뒤에 선 무사는 못내 못마땅한 눈치였다. 그렇게 딱히 길을 잃은 것도 아닌 비사를 데리고 험한 산길을 걸었다.
"그 나무 막대기까지. 무얼 그리 등에 메고 다니느냐. 무겁지도 않은 모양이다. 대신 들어주랴?"
비사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 남의 손 타는 것이 싫은가 보구나."
아까 받은 당과를 먹지도 않고 주머니 끈을 빙글빙글 돌리며 힘들지도 않은지 숨소리 곱게도 잘도 따라 걸었다. 아민은 그래도 어른들 보폭에 맞추려면 힘들 것인가 싶어 물었다.
"힘들면 저 아지들한테 업어주라 할까?"
또 고개만 저었다. 대답이 없어도 아민은 이렇게 길을 걸으며 비사에게 몇 마디 말을 건넸다.
"하긴 그리 잘 걸으니 늬가 저 치들보다 빠를 법하구나. 외려 네 걸음을 우리가 잡는 것인지도 모르지. 집은 어디더냐. 이 산 근처더냐."
느리기는 해도 고갯짓이나마 표현을 하던 아이는 그 물음에는 고개를 젓지도 않고 말도 하지 않았다. 빽빽한 나무 숲을 지나자 나무가 듬성듬성 한 곳으로 들어섰다. 비사가 멈추어 서자 아민도 따라 멈추었다. 그러자 따르던 두 사람도 멈추어 섰다. 비사가 고개를 들어 어딘가를 쳐다보며 움직이지 않자 결국 잠자코 따르던 자가 말을 뱉었다.
"아이야. 우린 급하단다."
그의 목소리엔 초조함과 짜증이 뒤섞여 있었다.
"왜 그러느냐."
아민이 물러서라며 손짓하고서는 비사에게 물었다. 비사가 답도 하기 전에 두 사내가 동시에 칼자루에 손을 올렸다. 아민의 앞을 두 사람이 감싸듯이 섰다. 그들의 긴장이 몸 밖으로 빠져나와 눈에 보일 정도였다.
"역시, 왔는가."
아민은 비사를 끌어당겨 자신의 뒤에 두었다.
"괜히 데려온 셈이구나. 미안하다. 아이야. 일이 잘못되어도 아마 상관도 없는 너를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아민이 작게 속삭이듯 등 뒤의 비사에게 말했다. 급한 목소리들이 이어졌다.
"나무가 성긴 곳으로 나오길 기다린 것을 보니 활이 날아올지 모릅니다."
"대체 몇 놈이나 나온 것인지..."
다수로 느껴지는 살기가 사방에서 느껴졌다.
"스물."
짧은 한 마디를 내뱉는 목소리는 낮고 단조로우나 소녀의 목소리였다.
"뭐?"
아민이 되물었다.
"북의 나무 위로 다섯, 북동에 열, 서에 다섯."
여전히 담담한 목소리였다.
"어린 것이 바쁜 때에 헛소리하지 말거라."
앞에 선 자가 조금 짜증이 섞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사방에서 빠른 움직임소리가 들려왔다. 아민까지 자신의 칼을 빼내어 들었다. 이 날이 선 긴장들이 겁도 나지 않는지 멍하기만 한 눈의 아이는 잘게도 흔들리는 나뭇가지 사이의 하늘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구름이 차 흐린 하늘임에도 저물어가는 해의 색이 진하게 물들어 있었다.
- 작가의말
폭우와 함께 오늘 하루 참 생각도 못한 여러가지 일이 있어, 이리 늦게 되었습니다. 부족한 것이 많이 보이지만,
그래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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