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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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향馨香
작품등록일 :
2012.09.25 10:10
최근연재일 :
2014.12.21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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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7.14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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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붉은 못 20화 - 령회(領會)

DUMMY

"크르릉."

사람보다 먼저 앞으로 나선 것은 으르렁거리는 늑대떼였다. 송곳니를 숫돌로 갈아 더욱더 날카로이 세워 그 안광보다도 빛나는 듯하였다.

"수함(獸檻)교의 것들이로군요."

"이젠, 종파 가리지 않고 쫓으라 보내오는구나."

누군가 그 말에 대답도 하기 전에 바스락거리던 소리가 지면을 차는 소리로 바뀌었다. 아민은 등 뒤를 빠져나가는 비사를 느꼈다. 위험하다 여기며 비사의 옷자락을 급히 끌어당기려 했으나 어느새 뒤에 서 있지 않았다. 무사가 칼을 휘두르자 맨 앞에 나서던 한 마리의 턱이 떨어져 나갔다.

"진영아! 뒤를 보거라!"

한 무사가 소리를 질렀다. 진영이라는 무사가 급히 비스듬히 몸을 돌리며 팔꿈치로 한 마리를 쳐냈다. 짐승의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목에 들어가다 만 구멍에서 피가 한 줄기 흘러내렸다.

"태준 형님. 저하나 잘 보십시오!"

"신경 안 쓰이게 잘하기나 해라. 빚진 것이다!"

태준 역시 길게 호선을 그리며 두 마리의 허리를 한칼에 잘라내었다. 이빨을 얼마나 잘 갈았는지 닿기만 해도 칼이 스친 것 마냥 살점을 긁어 나갔다. 태준은 아민을 등 뒤에 두고 있으니 그 앞을 한 마리도 지나쳐 보낼 생각이 없었다. 슬쩍 곁눈으로 아민의 상태를 살폈다. 아민은 손에 칼을 들고서 이 앞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아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민이 시선이 닿는 곳에는 멀뚱히 선 비사가 늑대 한 마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경계심이 가득한 것은 비사가 아니라 늑대였다. 덤벼들지 않는 것이 이상하였다.

'무엇인가. 이 아이 수함교의 아이기라도 했나. 저쪽의 것들과 한패였나.'

비사가 천천히 한 발을 내딛자 늑대가 몸을 움츠렸다. 천천히 앞으로 그 작은 발을 내밀었더니 꼬리 긴 몸뚱이는 점점 아래로 내려앉았고 그 눈빛이 드세어졌다. 아이는 결국 무언가 실망한 표정으로 뒤돌아 다시 아민의 뒤로 돌아왔다. 아민은 그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았던 태준은 더 이해할 수 없었다. 앞에선 죽기 살기로 흉흉한 이빨에 제 피들 묻혀주고 있건만 뒤에서는 뭐 하는 짓들인가.

한참을 힘들게 팔을 휘저어 대던 진영과 태준은 앞에서 달려들던 늑대들을 모두 털어냈다. 진영이 누운 채로도 으르렁거리는 그 머리통을 발로 쳐내었다.

피 흘리며 헐떡이는 숨을 내쉬는 짐승들이며 이미 머리 없는 것들과 반 토막이 난 것들까지 그득하게 지면을 채우니 하늘이 붉더니 땅도 붉게 물들였나 싶었다. 이제 남은 한 마리는 달려들지도 않고 도망가지도 않은 비사가 지켜보던 한 마리였다. 멀리서 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저놈들이! 한 마리라도 다 덤벼들라 이것이냐!"

진영이 소리를 질렀다. 그와 동시에 늑대 역시 아민을 향해 달려들었다. 진영의 칼이 털 수북한 그 목덜미에 닿을 찰나였다. 카앙- 하는 날 리 없는 금속성이 울렸다.

비사가 그 아슬한 틈으로 어느새 뽑아든 칼을 밀어 넣었기 때문이었다.

"뭐 하는 짓이냐!"

"늬 이들과 한패더냐?"

진영과 태준이 거의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비사는 자신의 칼 아래로 다른 손을 쑥 들이밀더니 으르릉거리는 늑대를 옆으로 쳐냈다. 여전히 털을 곤두세운 채로 이쪽을 노려보았다. 비사의 눈매가 매섭게 바뀌었다. 왼손에 들었던 칼을 오른손으로 옮겨 바로 잡고서는 허공을 휘둘렀다. 순식간에 바람이 불어 그 이빨 세우던 놈을 작은 털 뭉치 날리듯 한참 뒤로 밀어내 버렸다. 검강의 바람이라니 정체가 뭐건 간에 어린 계집이 위험한 것을 휘둘러대었으니, 급히 태준이 아이의 목덜미를 낚아채려고 팔을 뻗었다.


"물러서거라."

해괴한 명에 당황한 태준이 아민을 쳐다보았다. 아민의 표정을 보아하니 무언가 생각이 있는 듯했으나 태준은 지금 앞도 뒤도 꽉 막혀 있다 여겼기에 여유가 없었다.

"저하!"

"짐승 한 마리 죽이지 말라 한 것일 것이니, 뒤는 말고 저 앞엣것들이나 신경 쓰거라."

아민은 단호하게 말했다. 태준은 눈을 흘기면서도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태준이 물러서는 것을 보고 진영은 중얼거렸다.

"왜 저 한 마리만..."

아민은 생각했다. 비사의 행동으로 보아 수함교의 인간은 아닌 듯했다. 말 그대로 수함(獸 짐승 수 檻 난간 함), 짐승을 우리 안에 가두고 태어날 때부터 말을 듣게 하는 곳이니, 비사가 다가가는데 물러설 이유가 없었다.

'저 한 마리에게만 손을 내민 것은 그저 저놈이 눈에 들었기 때문이다. 부림 당하는 짐승이 덤비지 못할 인간이라. 그 안에 무엇을 감춘 게냐.'

이들의 생각이 무엇이건 여전히 출구를 가로막힌 나무 미궁 속이었다. 활시위가 당겨졌는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헌데, 살을 받아내려 칼을 빼 들고 서 있는 두 무관은 아무런 화살도 받아쳐 내지 않았다. 살들이 허공에 멈추어 서더니 후두두둑 소리와 함께 한 걸음 앞에 가지런히 선을 이루며 떨어져 내렸다.

"이 무슨, 강기(罡氣)입니까? 태준 형님이 하신 것입니까?"

"벽을 칠 정도로 말인가? 나는 아니라네. 그럼 대체?"

"혹시 어르신께서 지원을 보내주신 것이 아닐까요."

"아니 워낙 어렵게 결정한 일이라 서신도 아니 보냈지 않나."

두 사람이 의문의 말만 이어 뱉어냈다. 더 할만한 질문이 다 없어지기도 전에 생각을 잡아끄는 것은 여지껏 비명은커녕, 놀란 기색조차 없는 더러운 몰골을 한 여자아이였다. 진영이 몸을 반만 뒤로 돌려 물었다.

"너더냐? 네가 한 것이냐?"

"엇!"

태준이 놀란 소리를 내지름과 동시에 비사는 대답 대신에 손을 뻗었다. 그 사이에 날아드는 화살 하나를 가볍게 잡아채 작은 손에 쥐었다. 그 순간 아민은 직감했다.

'오늘 운이 좋은 것은 저 늑대 한 마리만이 아니로다.'

자신 역시 그 커다란 눈에 제대로 들어박혔다. 그의 입꼬리가 슬며시 위로 들리었다.

아무것도 제대로 통하지 않자, 사방에서 몸을 숨기던 인영들에게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비사에 대한 것은 뒤로하고 다시 경계 태세로 들어갔다. 두 무관이 달려오는 인영들을 향해 앞으로 뛰어나갔다. 그들과 달리 아민은 자신의 칼을 다시 등 뒤로 꽂아 넣었다.

"아이야. 정말로 네가 한 것이면 좀 도와주지 않겠느냐? 내가 마음에 아니 든다 하여 저들이 이리 해오는 것인데 나는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단다. 나를 기다리는 이도 있고 말이다."

아민은 자신의 무관들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빠른 듯하나 단어 하나하나에 힘을 주어 읊으니 완곡한 설득과 같았다.

"내 수족이나 마찬가지인 자들이다. 저들 역시 약하지 않으나 상대가 너무 많지 않으냐. 누구 하나 여기에 묻고 간다면 마음이 너무 아플 것이다. 살을 쏘는 자들이야 그들이 나쁜 것이니 죽는다 하면 우리가 아닌 그들이 되어야 옳은 것 아니더냐. 아까 그 늑대 한 마리도 명을 거스르고 살아 돌아갔으니, 저들은 용서치 않고 죽여버릴지도 모른단다. 어쩌느냐. 늬 기껏 손을 써 살려주었는데. 다 죽으면 어찌한다."

아민은 조금 전의 상황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나 일종의 도박을 벌이는 셈이었다. 지금 자신의 패가 들어맞는다면 앞으로 무슨 패를 내든지 이길 수 있을지도 몰랐다.

두 사람은 필사적으로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와 함께 멀리서 아민을 향해 화살까지 날아들었다. 비사는 휙 하고 돌아서며 화살을 잘라냈다. 양손에 칼이 한 자루씩 들려 있었다.

"발도(拔刀)술에 이도(二刀)라, 자그마한 것이 제법이구나. 저리 휘두를 수도 있다면 무거울 리가 없겠지."

비사는 날아드는 살보다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두 손이 어찌나 빠르게 움직이는지 단련된 눈이 아니라면 쫓기도 버거울 정도였다. 유연함과 파괴력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비사가 저 앞으로 달려나가자 아민이 외쳤다.

"진영, 태준 물러서거라."

"네?"

"어느 정도나 하는지 봐두어야 제대로 써먹을 것이 아니더냐."

두 무관은 물러서면서도 혹시라도 아민의 생각과 달리 저 아이가 다치면 어쩔 것인가를 생각했다. 하지만 걱정과는 다르게도 바람이, 피바람이 부는 듯했다.

"회전이 굉장하군요. 저런 빠르기로 돈다면 팔에 힘을 덜 들이고도 베어내겠습니다."

"공방일체(攻防一體)의 검이라, 수련이 너무 고되어 많이 줄어든 것인데 흔하지 않은 것을 보는군요."

"저 나이에 가진 것이 많구나. 어디서 저리 배웠을꼬."

"어째 싸우는 방식이 빈틈이 없기는 하나, 여러 문파의 것이 뒤섞여 있지 않습니까?"

어느새 이들은 칼을 내리고서 눈으로 비사를 쫓기가 바빴다.

"배운 검술이 문제가 아니라, 벽을 정확한 자리에 세울 만큼의 내공을 가진데다 그 짧은 시간에 발경하여 운용을 할 줄 안다는 것이 더 신기합니다."

비사는 어느새 저 멀리서 나무 위의 적을 베어냈다. 아민은 크게 기뻐하였다.

"것 보아라. 당과 하나로 어린 투견을 얻지 않았느냐. 내가 오늘 저 아이를 만난 것은 천운이 나에게 있다는 것이다. 이 나라를 짊어져야 할 천운이 말이다. 이 정도라면 정통성이나 주장하며 형님 곁에 선 그 고강한 무인들 근처는 가지겠구나. 어린 계집에게 방심하여 골로 갈 무인들이라. 생각만 해도 재미있구나."

"저하, 저 아이가 강하다 하나 문파의 당주들이 섞인 정통파 세력을 어찌 맞설 것입니까."

태준이 물었다.

"희생이 꼭 없으라는 법은 없지 않더냐. 대의를 위해 죽는다면 헛되지는 않을 것이지. 근처를 가야 길이라도 열릴 것이 아니냐. 큰길을 가려면 그 길을 닦는 사람 또한 많아야 할 것이 이치다. 어찌 저 아이에게 다 시킬 생각이냐. 늬들이 뒤를 받쳐줘야 할 것이지. 궁으로 돌아가면 당장 권안을 불러들이거라."

권안, 아민의 그림자 무사 중 가장 암살에 능한 자의 이름이었다. 아무래도 아민의 뜻이 확고한 듯했다. 비사가 칼의 피를 털어내며 이들을 향해 걸어왔다.


"사..살려 줘. 살려 주십시오 저하. 다시는 칼을... 들이대지 않을 것입..니다.."

아직 살아 있는 자가 있었다. 숨이 끊어질 듯이 애원하고 있었다. 지금 찌르지 않아도 곧 죽을 것 같았다. 비사의 얼굴이 슬며시 일그러졌다. 조용히 칼을 검집에 밀어 넣었다. 아민이 다가와 비사 옆으로 몸을 숙였다.

"잘 생각하거라. 죽이지 않는다면 죽는단다. 그 늑대는 괜찮다. 인간이 아니니까. 하지만, 사람은 절대로 뒤를 쫓게 되어 있단다. 아무리 백기를 들고 물러섰다 하더라도 다음엔 또 누구를 데리고 와서 죽이려 들지 모르거든. 그러니, 살려달라 애원하는 치가 있더라도 절대 살려 보내서는 아니 된단다. 그렇지 아니한다면, 다음에는 집 안으로 쫓아와 모두를 죽일 것이란다. 잔인해지지 않으면 더 잔인한 누군가에게 죽게 되어 있단다. 새겨두거라."

아민은 앞에 떨어진 칼을 주어 손에 들었다. 애원하는 자의 목 한가운데를 너무도 쉽게 찔러 넣었다. 두 무관은 바로 저 냉혈함이 그를 위의 자리와 더 가깝게 만드는 것으로 생각했다. 아민은 칼을 뽑으면 옷에 피가 튈 것이니 그냥 꽂힌 칼을 그렇게 놔두었다. 칼이 떨림이 약해지며 숨이 빠르게 꺼져가는 것이 보였다.

이 순간부터 아민은 비사를 돌보아야 할 어린아이로 생각지 않았다. 허나, 비사는 아민을 지켜야 할 위험에 내몰리는 이로 생각하고 말았다. 그것이 마침내야 잘못된 길로 휩쓸려 들어간 것을 깨닫고서도 쉬이 놓지 못할 만큼 어리석고도 외로웠다.

아민이 비사를 어여삐 여긴 것이 자신에게 매어두기 위함인지 어느 한구석이나마 정이 있던 것인지는 지금에 와서도 판단할 수 없었다.


"하륜성의 바선 종주가 아민 왕자의 편에 손을 보탤 것이라 합니다."

아진에게 고해 올리는 균허의 얼굴에 그림자가 가득했다.

"그 깐깐한 노인네를 잘도 끌어들였구나. 근 이십 년이 넘도록 정치에는 관여하지 않겠다 하던 인물을 말이다. 이로써 사병까지 등에 업어 그 세력을 잘도 넓혀가는구나."

아진 태자는 조금 시큰둥한 듯이 말을 이었다.

"어마마마께서 보낸 자객을 다 피해 갔나 보군. 내 아우이기는 하나 가진 것이 많기도 하지."

"가진 것이 무어가 많습니까. 남의 자리를 탐내는 것이 제대로 된 자입니까. 그것도 친형제이신 태자 전하를 쳐내려 하고 있질 않습니까."

"그것이 단 하나 없는 것 아니더냐. 능력과 인망, 한 인간으로서는 차고 넘칠 정도로 무엇하나 부족한 것이 없지. 허나, 왕의 피를 가지고 태어난 이상 내가 왕이 된다 하면 그 아이는 세상에 관해 입 한 번 열수도 없는 대문 안에 갇혀야 할 것이다. 아무리 뜻을 품고, 세상에 대한 지식을 쌓아도 내가 있는 이상 절대로 위로 갈 수도 없고, 세상과는 단절돼야 하는 비참한 자리라는 것이 바로 아민을 저리 몰아가는 것이지."

아진이 말을 있자 균허는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물론, 지난해에 아민 왕자 저하가 내놓으신 세법 변경의 안은 저도 놀라기는 했습니다. 지금껏 황실의 법도가 그리하였다고는 하나, 전하께서 보위에 오르시면 아민 왕자의 그 힘을 정사에 보태도록 하심은 어떠십니까."

"그것이 그리 쉽게 된다 하는 것이면, 어느 나라의 왕조가 형제간 피를 흘리며 왕권 다툼을 할 것이냐. 왕가 자손의 입을 막는 것에는 그만한 역사의 되풀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민이 거기서 만족을 할 것이란 확신도 없거니와, 그가 가만히 있다 하더라도 공신이 되고자 원하는 자들은 그리로 몰려들어 갈 것이다."

균허의 얼굴이 실망에 잠겼다.

"이 싸움을 계속할 수밖에 없는 것이로군요."

"나 역시 물러설 생각이 하냥 없으니, 아무래도 형제임에는 틀림이 없는 모양이로다. 재밌지 않으냐."

저 웃는 입꼬리를 보아하니 형제가 맞기는 한 모양이었다. 두 왕자 중 하나가 모자라기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이들은 너무도 닮아 권력으로 향하는 지름길 같은 줄을 두 개나 내려버리고 말았다. 그렇다 해도 균허는 생각했다.

'가진 것에 만족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재능이니, 그는 역시 가진 것이 없는 자입니다. 전하.'

아진 태자도, 균허도 이날 아민이 가진 것을 더 늘려 비사라는 무기를 손에 쥐고 올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종국에야 아민을 무너트리는 열쇠가 될 것도 알지 못했다. 이날의 비사 역시 궁이라는 것이 아무리 누굴 죽여도 계속 사람이 들어차 비워지질 않으니, 절대 편해질 수 없는 곳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 이름만 푸른 청금성이 보이지도 않는 레이피아의 하늘 아래에서 비사는 흙바닥에 드러누워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 수많은 번민의 단어가 뒤죽박죽 튀어나오기 시작하니, 정리되는 것이 하나 없었다.

'지쳤다 했거늘.'

이제는 자신을 살려다 놓은 운인지 무엇인지 대상이 무엇이건 간에 분노가 치밀었다. 누군가의 죽음을 두려워하고 다시 이 손에 피를 묻히고, 또다시 그것에 고통받고 번민해야 하는 세계로 돌려놓은 것에 화가 났다. 그저 바란 것이라곤 아끼던 딸자식이 살길 바라던 부모에게 고개도 못 들 것이기는 하나 그런 것들이 생각도 나지 않은 만큼 지쳐버린 자신이 적인과 함께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뿐이었다. 그저 저지른 죄와 더 저질러야 할 죄들로부터 도망가고 싶었다.

'나쁜 일은 살아 있는 한 계속해서 만나야 할 것이다.'

제닐의 말이 떠올랐다. 그러니 누군가의 죽음 역시 자신이 살아있는 한 계속해서 지켜봐야 할 것이었다.

누군가 고의적으로 자신을 이곳에 데려다 놓은 것이라면 그 뜻이 무엇인지 알 수도 없는 이 상황에 원하는 대로 해줄 수는 없었다. 그자가 누구이든 어쩌면 제닐과 세이가 자신을 절대로 못 본 척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의 과거까지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대로 여기 머물 수는 없었다.

더불어 왼손의 약인(約印)에 묶어 놓은 기운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인을 움직이지 않아도 적인의 기를 느끼고 소리는 들을 수 있지만 이렇게 멀리 떨어져서는 약인을 움직일 수 없는 수준까지 적인을 떼어 둘 생각은 없었다. 떠나야만 하는 이유가 겹겹이 생기고 말았다.

다르르릉.

여전히 멀리서 들려오는 적인의 울림은 맑기만 했다. 적인을 원한 것이라면 왜 저리 사람 손도 타지 않는 곳에 가져다 놓은 것일까. 어째서 지금껏 자신에게 다가오지 않은 것인가. 이래도 저래도 문제는 늘기만 했고 그것이 자신의 사명과 직결되는 것이니 이제는 움직일 시간이었다. 당장 죽어 나자빠지는 것이 아니라면 살아있으니 당장 내일을 생각해야만 했다.



비사는 아침나절 갑자기 가야 할 곳이 있다고 했다. 거의 나은 듯하지만 잘 움직이지 않는 왼팔이, 제닐이 보기엔 칼을 쓸 줄 알건 모르건 그저 불안해 보이는 비사가 어딜 가겠다는 건지 당혹해하고 있었다. 고작 반년 남짓에 아주 익숙해진 세 사람이었다. 어디에 무엇하러 가느냐 물어도 데리러 가야 한다는 말 외에는 한마디 이상 붙이지 않았다. 비사의 고집을 아는 제닐과 세이였다. 막아도 떠날 것이었다.

세이는 여전히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지 알 수 없는 자신은 비사에게 더는 무엇도 요구할 수 없었다. 비사를 가족처럼 생각하고 아끼는 세이였지만 씁쓸하게도 자신 앞에 그어진 선을 너무 어린 나이에 알아버리고 말았다. 세이는 떠난다 하는 비사를 곤란하게 하지 않았다. 평소보다도 더 조용하고 무거운 하루가 마침내 밤을 맞이했다.


어둑한 새벽, 비사는 천에 둘둘 말린 쌍익을 고쳐맸다. 조용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이 안락한 어둠은 뒤로해야 했다. 우두커니 서서 잠시나마 자신을 붙드는 미련을 느꼈다. 진심으로 자신을 대하는 사람들이고 비사 역시 이들을 아끼는 것이 분명하나, 이상하게도 비사는 불안과 고독을 완전히 떨치지 못했다.

"식탁 위의 가방 가져가. 돈이랑 옷 넣어 뒀어."

문을 나서는 비사에게 언제 일어난 것인지 모를 제닐이 말했다.

"이럴 줄 알았어. 인사도 없이 가니. 또, 세이한테 붙들릴까 봐 그러지? 머리는 묶어서 로브 안에 감추고 다녀. 그 머리가 죄는 아니지만, 워낙 안 좋은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칼도 남들한테 보이지 말고. 알았지. 여자애니까 더 조심하고, 돈 잃어버리지 않게 조심하고."

제닐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날이 추워지기 시작했으니 곧 겨울이 시작될 것이다. 찬 바람이 비사의 떠나는 길을 고되게 만들지나 않을까 걱정이었다.

"잠, 잘 안자는 것 알지만 그래도 안전한 곳 찾아서 쉬면서 다니고."

제닐은 자신이 자는 척만 하고 있던 것을 언제부터 알고 있었을까. 긴 밤을 숨죽여 보내던 것은 아무래도 자신만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비사는 제닐이야말로 정말 강한 사람이라 생각되었다.


"비사, 돌아오고 싶으면 돌아와."

비사는 제닐을 바라보았지만 희미한 달그림자가 방 안까지 비춰주진 않는지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달을 등진 비사의 얼굴도 제닐에게 보이지 않았다. 말없이 돌아서는 듯하더니 그림자에 삼켜지듯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조용히 닫히는 문소리만이 잠시 들려오더니 적막만이 남았다.

"갈 곳이 없어도 돌아와."

제닐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한참을 앉아 있더니 세이의 곁에 누워 작은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작게 속삭였다.

"울지마 세이. 이럴 때는 울지마. 언젠가는... 돌아올지도 모르니까."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지난 회에 오폴님께서 주신 아민이 그리 악인 만은 아닌 것 같다라고 하신 댓글에 답을 달다, 이번 회의 내용을 내포하는 것 같아; 지우고서 여기에 포함시켜 봅니다. 관심을 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
조선시대에도 왕의 형제들은 나가서 다수의 사람을 만나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거나 젊은 선비들과 대담을 나누며 다수와 친분을 나누는 것이 거의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공주의 부마로 들어오게 되면 왕의 친인척이라는 자리를 얻으며 그 대신에 실제 정치에는 어떠한 간섭 혹은 발언도 할 수 없게 되어 있었지요. 자칫하면 모반의 혐의를 얻어 죽임당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조선시대 전이나 후나, 사실 제가 다 아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왕조의 역사가 그러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 시대상을 반영한 청황성국의 아민 역시 현재 왕의 자식이자 그것도 아들이니 엄청난 경계대상에 포함이 될 것입니다. 본문에 표현 된 '아무리 뜻을 품고, 세상에 대한 지식을 쌓아도 형이 있는 이상 절대로 위로 갈 수 없는 존재.' 하지만 야망을 가진 자. 그것이 아민이라는 인물상입니다. 이도 뜻을 펼치고 싶은 만큼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변해 가는 인물이 될 것입니다. 아민이라는 사람의 에피소드는 비사를 이루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기 때문에 회상으로서 종종 등장하게 될 것 같습니다. 부디 공감이 가는 인물이 되길 바라며 쓰고 있습니다.

령회(領會) [북한어] - 사전 상의 의미는 이러합니다. 아시는 분들도 많이 계시겠지만 혹시나 하여 궁금하신 분들이 계실까 적어봅니다.
옷깃이 서로 만났다 헤어졌다 한다는 뜻에서, ‘운명1’(運命)을 이르는 말.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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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12

  • 작성자
    Lv.26 하아악
    작성일
    12.07.14 22:39
    No. 1

    오호 떠나는 구나 ㅠ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5 녀르미
    작성일
    12.07.14 22:53
    No. 2

    앞에 비사와 아민의 이야기가 정말 재미있네요.
    전투 장면을 그리신 것도 잘 배웠습니다. ^^*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4 DragonLo..
    작성일
    12.07.15 00:24
    No. 3

    저언혀 지루하지 않습니다. 좀더 자신감을 가지셔도 될듯해요~
    비사가 나중에 마음의 짐을 놓고 다시 돌아올 수 있기를 희망하며...
    잘 보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4 DragonLo..
    작성일
    12.07.15 00:28
    No. 4

    아진이 나오는 초반부에 아진태자가 아민태자로 잘못나온 부분이 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지옥
    작성일
    12.07.15 00:31
    No. 5

    아아, 중간에 끊기가 쉽지 않죠;; 그래도 재밌습니다. 잘 보고가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 설광
    작성일
    12.07.15 13:25
    No. 6

    오호~~기대없이 들어왔는데 올라온 글 아주 재미있게 보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 [탈퇴계정]
    작성일
    12.07.30 14:28
    No. 7

    소제목의 의미가 이런 것이었군요. 제닐과 세이를 만나고이렇게 헤어지고... 앞으론 또 어떤 사람을 만나고 어떤 이야기를 펼쳐나갈지...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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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8 형향馨香
    작성일
    12.08.01 21:58
    No. 8

    하아악님// 넵! ㅠㅠ 떠나는 날이 오고야 말았습니다.
    녀르미님// .....아, 녀르미님은 저를 채찍질하러 오시는 거구나 ㅠㅠ 왜 이러세요 ㅠㅠ 그래도 감사합니다. 제게 깨달음을 주시러 오셨다가시는거군요! ㅠㅠ오늘 아주 여러모로 ㅠㅠ 감사인사를 드립니다.
    DragonLord님//정말 눈이 밝으십니다. 감사히 고쳤습니다! 으하하하 ㅠㅠ 저는 시계를 잘못 보았지만 정말 감사하게 고쳤습니다! 혹시라도 한담란 보시고 움? 하실지는 모르지만, 제가 제대로 시계 확인 안하고 다른 것 건드리다 이리 된 것이니 혹시라도 호옥시라도 오해하지 마셔요. 다음에도 오자가 보이시면 또 지적해 주세요 ^^ 오늘도 감사합니다.
    지옥님// 으하하, 저는 절단신공이 부족한가 봅니다. 어디서 끊어야 할지 참;; ㅠㅠ 저도 잘(?) 감사합니다!
    설광님// 으아. 아주 감사합니다. 으하핫. ^^
    아킨토스님// ㅎㅎ 만나고 헤어지는 사람들이지요. 이것이 인생!? ㅎㅎ 감사합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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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80 이아겐즈
    작성일
    12.08.10 20:33
    No. 9

    제닐과 같은 성격이 (소설보다도 현실에서 더더욱) 매력적이고 굳건한 타입이죵.
    비사가 사내였다면 바람이 떠돌다가도 어딘가 쉴 대지가 필요하듯.
    대지처럼 단단하면서도 현실을 사는 제닐에게 마지막에 정착했을 지도 모른단 생각이 드네요.
    건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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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8 형향馨香
    작성일
    12.08.11 07:11
    No. 10

    이아겐즈님//ㅎㅎ 제닐은 털털하고 굳센게 매력이랄까! 으하하 하지만 비사는 소녀라는 것. 근데 가끔 보면 사람들은 안전한 것에는 매력을 별로 못느끼는 순간이 있는 것 같아요. ㅎㅎ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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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59 sfartar
    작성일
    12.09.10 21:41
    No. 11

    새로운 인연을 만나려나요
    남자 주인공은 누군지..ㅡ0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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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8 형향馨香
    작성일
    12.09.11 12:42
    No. 12

    계룡산님// ㅎㅎ 남주를 제가 딱 정해서 보여드리는 것이 지금 중요한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ㅎㅎ 저번 댓글에도 드렸다시피 일단 비사가 원탑을 달리는 중이라 지금 상황에 누가 남주입니다 해도.. 두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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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못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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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붉은 못 40화 - 도과(倒戈) +10 12.09.04 1,985 47 16쪽
39 붉은 못 39화 - 도과(倒戈) +9 12.08.27 1,821 80 11쪽
38 붉은 못 38화 - 흑백논리(黑白論理) +12 12.08.25 1,854 53 13쪽
37 붉은 못 37화 - 흑백논리(黑白論理) +13 12.08.08 1,827 35 12쪽
36 붉은 못 36화 - 결련(結連) +2 12.08.08 1,899 56 10쪽
35 붉은 못 35화 - 결련(結連) +13 12.08.06 1,768 51 13쪽
34 붉은 못 34화 - 결련(結連) +6 12.07.31 1,974 64 17쪽
33 붉은 못 33화 - 결련(結連) +14 12.07.30 2,231 47 13쪽
32 붉은 못 32화 - 지주사(蜘蛛絲) +13 12.07.28 1,981 66 10쪽
31 붉은 못 31화 - 지주사(蜘蛛絲) +12 12.07.27 1,812 43 10쪽
30 붉은 못 30화 - 지주사(蜘蛛絲) +8 12.07.26 1,706 43 7쪽
29 붉은 못 29화 - 지주사(蜘蛛絲) +10 12.07.25 1,739 37 9쪽
28 붉은 못 28화 - 동행(同行) +12 12.07.24 1,835 39 8쪽
27 붉은 못 27화 - 동행(同行) +14 12.07.23 1,738 43 9쪽
26 붉은 못 26화 - 동행(同行) +11 12.07.21 1,832 47 9쪽
25 붉은 못 25화 - 동행(同行) +10 12.07.20 1,876 45 14쪽
24 붉은 못 24화 - 사람의 손 +9 12.07.19 1,641 56 11쪽
23 붉은 못 23화 - 사람의 손 +16 12.07.18 1,963 46 8쪽
22 붉은 못 22화 - 사람의 손 +12 12.07.17 1,819 44 8쪽
21 붉은 못 21화 - 사람의 손 +12 12.07.16 1,952 50 11쪽
» 붉은 못 20화 - 령회(領會) +12 12.07.14 1,967 43 20쪽
19 붉은 못 19화 - 령회(領會) +12 12.07.13 1,902 38 9쪽
18 붉은 못 18화 - 령회(領會) +15 12.07.12 1,961 47 9쪽
17 붉은 못 17화 - 이면(裏面) +18 12.07.11 2,064 46 11쪽
16 붉은 못 16화 - 이면(裏面) +13 12.07.10 2,122 46 17쪽
15 붉은 못 15화 - 이면(裏面) +11 12.07.05 2,696 92 8쪽
14 붉은 못 14화 - 이면(裏面) +13 12.07.03 2,014 37 10쪽
13 붉은 못 13화 - 낯선 감각 +10 12.06.30 2,352 56 14쪽
12 붉은 못 12화 - 낯선 감각 +11 12.06.27 2,681 53 12쪽
11 붉은 못 11화 - 낯선 감각 +11 12.06.24 2,149 35 12쪽
10 붉은 못 10화 - 낯선 감각 +9 12.06.22 2,368 36 10쪽
9 붉은 못 09화 - 동형(同形)의 하늘 +9 12.06.20 2,312 42 7쪽
8 붉은 못 08화 - 동형(同形)의 하늘 +15 12.06.17 2,478 54 17쪽
7 붉은 못 07화 - 동형(同形)의 하늘 +11 12.06.16 2,313 35 13쪽
6 붉은 못 06화 - 동형(同形)의 하늘 +8 12.06.14 2,640 46 9쪽
5 붉은 못 05화 - 죽은 태아(胎兒) +10 12.06.14 2,998 68 12쪽
4 붉은 못 04화 - 죽은 태아(胎兒) +14 12.06.13 2,917 46 8쪽
3 붉은 못 03화 - 죽은 태아(胎兒) +11 12.06.12 3,269 48 12쪽
2 붉은 못 02화 - 죽은 태아(胎兒) +17 12.06.10 5,691 85 26쪽
1 붉은 못 01화 - 이향(異鄕) +22 12.06.10 10,106 60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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