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못 01화 - 이향(異鄕)
더할 나위 없이 맑은 햇살이 쏟아지는 하늘 그리고 깨끗한 흙냄새. 한 점 시든 곳 없는 푸릇하니 자란 들풀 새에 빛을 삼킨 듯 이질적이게도 검고 붉은 소녀가 누워 있다.
비릿하고 아릿한 붉은 핏물이 가슴에 고인 채 흘러내리지도 않을 만큼 진득하니 굳어 있었다. 어깨서부터 반대편 허리까지 길게 늘어진 상처는 그 깊이가 뼈에 닿은 듯했으나 소녀는 작은 신음도 내지 않은 채 멍하니 허공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왜 죽지 않은 것인가.'
분명 소녀는 자신의 눈앞에 타오르던 염화(炎火)의 열기를 기억하고 있다. 꿈이었나 라고 하기엔 그 가슴의 상처가 기억을 말해주고 있었다. 지금이 언제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익숙지 않은 풍경만 그녀를 낯설게 뒤덮고 있었다.
움직일 수 없다. 아니, 정확히는 움직일 생각이 없을지도 모른다. 피 흘리는 몸보다 먼저 죽은 마음이다. 어쩌면 이곳은 이승이 아닐 것이다. 그래, 저는 이미 죽어 산 자가 아닐 터이다. 제 손으로 제 몸에 불을 붙이지 않았던가.
'그래. 그 칼을 맞고, 불 속에서 어찌 살아 나왔겠는가. 죽은 것이다. 이젠 정말 그만해도 되는 것이다.'
죽어서도 흐르는 이 피는 그저 제 업(業)일 것이다. 노승이나 할법한 생각을 하는 이 소녀는 채 스물이 안 되어 보이는 여리고 앳된 얼굴이건만, 분명 제 나이껏 소진한 시간보다 긴 시간을 살았음이다. 먼저 왔을 그리운 제 사람들 만나고 싶건만 그들은 극락정토일 것이고 저는 지옥일 것이니 살아서 끊긴 연은 죽어서도 이어지지 못하는구나. 섧은 생각이 스치니 이내 마음이 쓰디썼다.
타오르던 그 불이 이 눈동자를 태우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그 불꽃들도 이 썩은 영혼을 태우지 못한 것일까.
'속이 빈 고목이라 더 잘 타오를 줄 알았거늘.'
지옥 하늘도 이리 따사롭고 옥빛 맑은데 산 자들 세상 저가 고민하여 무엇할 것인가. 남은 이들의 번민은 뒤로하고 나니 어딘가 자유로워진 듯한 그런 기분이 들었다.
'적인은, 바스러졌을까.'
진짜 저를 아는 마지막 가족이자 지켜야 할 사명, 애환 가득한 전우이기도 한 적인에 대한 걱정이 스쳤다. 자신의 품에 있던 적인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저 죽을 때는 함께 해달라 그리 약조했었다.
'네 덕에 혼자는 아니었구나.'
아련하게 들리는 듯한 쇠 울음 들으며 죽어서도 다시 잠들 수 있는 것인지 이내 눈이 감겼다.
찌르는 고통에 찌푸린 눈이 떠졌다. 희미하게 보이는 나무대가 이어진 천장. 분명 하늘이 보였었지 않나. 거기다 느껴지지 않았던 상처의 고통이 격하게 느껴졌다.
'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이 모든 것이 지옥 불에 비치는 허상인가.'
감각이 도는 만큼 움직임도 가능해진 듯했다. 몸의 반을 후벼 팠으니 힘이 들어가자마자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고통이 밀려들어 왔다. 벽을 짚고 겨우 상체를 들어 올려 거친 숨을 내쉬었다. 좁혀지고 잘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주변을 훑었다.
낮은 천장, 허름한 벽, 세간은 얼마 없어도 정돈된 실내였다. 무얼 본들 파악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고개를 돌리던 소녀의 눈이 크게 뜨였다. 자신이 누웠던 자리 구석에 청옥 빛이 도는 검신. 쌍익이 있었다. 급히 왼손을 들어보니, 그녀의 약지에 검붉은 빛이 나는 작은 꽃잎들이 흩날리는 듯 타오르는 듯 문신처럼 새겨진 그것이 있었다.
적인의 수호자 인(印).
'계약이 깨어지지 않은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이것마저 허상인가.'
마치, 발끝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수렁에 빠진 것 같은 그녀의 귀에 아득하게 울리는 다르릉하는 쇠 울음이 들렸다. 귀의 착각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고개를 저었다.
'어쩌면 지옥이라는 것은 이 번민을 일컫는 것인지도 모른다.'
제대로 앉지도 못할 지경이었던 지라 힘겹게 몸을 다시 누이고는 멍하니 천정을 올려다보았다. 꿈이라 한들 그 경계가 모호하였다. 뼈까지 타들어 가길 바라며 염까지 실었거늘 치렁치렁한 긴 그 머리카락도 여전하니 그리 뜨거웠음에도 베인 자국 말고 다른 상처가 없었다. 한참을 끝도 없이 빠져들어 가는데 인기척이 났다.
발걸음 소리, 누구인가.
급히 오른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아드득하고 절로 이가 악물렸다. 조용한 문소리가 나더니 낯선 여인 하나가 들어섰다. 소녀가 깬 것을 보고 무엇인가 잔뜩 말을 걸었다. 아니, 거는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낯선 정도가 아니라 아예 생전 본 적 없는 안색(眼色)과 머리 빛깔이었다. 그 생김도 어딘가 이질적이었다.
어릴 적, 저 먼 서역 사람들은 우리네와는 종(種)이 다른 듯 그 낯빛이 다름이 태(胎) 다른 개나 고양이 같으니 사람 역시 짐승은 짐승이로다 하시던 아버지 말씀이 떠올랐다.
'서역인 인가.'
더 깊이 생각할 새도 없이 단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하는 말이건만, 듣는 이의 굳은 얼굴은 보이지도 않는지 계속 떠들어 대며 몸을 세워 버티는 소녀를 거침없이 눌러 도로 눕혔다. 뿌리칠 힘도 없었으나 왠지 움직이고 있다 해도 불가능할 것 같음이라 가만히 누웠다. 여인이 낮은 의자를 가져와 소녀의 앞에 앉았다. 뭐라고 반복적으로 말하던 여인은 아무런 대답이 없자 손가락으로 목을 가리키고는 그 손을 가로로 흔들었다. 소녀는 가만히 고개를 젓고는 자신의 말로 말했다.
"부인께서 뭐라고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뭔가 곰곰이 생각하던 여인은 이내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빗장(鎖骨) 아래를 왼손으로 탁탁 두드리며 뭔가 말했다. 멍하니 있자 다시 반복해 말했다.
"...제..닐"
그녀의 소리를 따라 말하자 이내 만족한 듯이 웃으며 손바닥이 보이게 왼손을 소녀를 향해 내밀었다.
"비사."
본명을 말할까 생각이 스치기도 했지만 이미 불리지 않아진 지 오래인 자신의 이름보다 습관적으로 위명이 튀어나왔다. 몇 번 비사의 이름을 따라 말하던 제닐은 자신이 밖에서 들고 온 작은 그릇을 들고는 가까이 다가왔다. 작은 환처럼 둥글고 짙은 풀색이 도는 그것을 먹으라는 듯 내밀었다. 그리고 비사가 그것을 건네받자 제닐은 뭔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비사는 무표정하지만 애매함이 스치는 얼굴로 그것을 입에 넣고 이내 여인과 같은 얼굴이 되었다.
썼다.
빈속이 다 뒤집어 올라올 것처럼 썼다. 뱉어내지 않고 삼키자 이내 여인이 작게 웃더니 상앗빛 광택이 도는 둥그런 것을 직접 입에 넣어주었다. 달곰하니 능금 향이 났다. 제닐은 쉬라는 듯 어깨를 툭툭 치고는 다시 밖으로 나갔다.
가만히 입안의 든 것을 빠드득 소리를 내며 한 번 씹었다.
'어머니...'
어머니는 다디단 당 가루 풀어 끓인 물에, 얇게 저민 능금을 졸여 바삭 튀겨낸 밀전병 위에 얹어 주셨었다. 그 달콤한 향내가 어딘가 비슷했다. 많이 먹으면 탈 난다 하시면서도 졸라대면 당물 젓는 것은 늬가 하련? 하시었었다.
곁에 없는 것이 이미 익숙해질 만큼 오래되었으나, 비사에게 여전히 과거가 아닌 사람들. 아련한 기억을 떠올리던 그 얼굴에 언제나와 같이 들리지 않는 귀를 찢는 비명과 감은 눈에도 보이는 수많은 것들이 어김없이 찾아들었다. 쓴 약을 먹은 입도 이제 다디달았으나 감은 눈은 쓰디썼다.
자신이 어디 있는지 제닐이라는 여인은 누구인지, 살았든 죽었든 그 무엇도 의미 없는지라 시간도 멈춘 적막함에 빠져들었다.
- 작가의말
어설프고 부족할지도 모르나 나름의 성의를 갖고 준비한 글입니다.
즐겁게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여주인공이기는 하나, 로맨스 소설이 아니며 역하렘물도 아닙니다. 힘을 얻기 위한 여행물도 아닙니다.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경험을 하며 과거와 현재의 것들을 고민하며 생각을 이어가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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