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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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향馨香
작품등록일 :
2012.09.25 10:10
최근연재일 :
2014.12.21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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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6.22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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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못 10화 - 낯선 감각

DUMMY

이날은 평범한 일상과 조금 다르게 세이와 비사는 신전이 아닌 거리에 있었다.

제닐은 오늘 가게 안에서 주인이 뭔가 한다 하니 점심을 둘이서 사 먹는 것이 좋겠다 했다. 신전에 있다가 시간이 되면 제닐에게 가서 집에서 챙겨나온 음식으로 식사하고 돌아오곤 하던 그들이었다. 나가서 사 먹으라 한들 비사가 아는 곳이 있을 리 없었고 세이가 원하는 대로 하라는 듯이 쳐다보았다. 하지만, 세이도 그다지 외출을 자주 하지 않는 터라 달리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어차피 수업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자유시간의 연장이었기 때문에 제닐이 장사하는 방향이 아닌 다른 길로 들어서서는 마을 번화가를 돌아다녔다. 번잡하게도 움직여대는 사람들을 피해 이리저리 걸었다. 비사의 손을 놓칠세라 세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필사적인 작은 손의 아프지도 않은 악력(握力)이 느껴졌다.


아이들이나 좋아할 달달한 반죽을 구워 뭉근한 과일 절임을 얹은 것을 두 사람의 손에 하나씩 들고 있었다. 발견하자마자 세이가 손을 끌어당겼던 것이었다. 원하는 것을 골라 넣으라고 뭔가 잔뜩 말해주는 상인을 멀뚱히 쳐다보기만 하자, 세이가 잡은 손을 놓고는 목에 걸었던 종이 꾸러미에 이것저것 적어서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걸 비사가 떠듬떠듬 읽어 주문했다. 이런 작은 일에도 능숙한 이는 말하지 못하고, 더듬는 이만 입을 열어야 하는 모순을 가지고 있었다. 주문한 것을 손에 받아 들고 세이에게 넘겨주는 그 사이에 비사는 이 작은 모순을 느꼈다. 안다고 해도 내색하지 않을 것이고 변할 것 하나 없으나, 옆에선 아이의 마음이 자꾸 건너오고 있었다.


손에 든 것을 우물거리며 계속 길을 걸어가는데 한 곳에 사람들이 잔뜩 몰려 길이 막혀 있었다. 이런 일은 대개가 싸움판이라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했지만, 세이는 이미 사람들 속에 휩쓸려 아등바등하고 있었다. 자신이 힘껏 당기면 세이의 팔이 빠져버릴지도 모른단 생각에 무심코 망설이는 동안 잡은 손을 놓쳐 버렸다. 세밀하게 힘 조절을 잘하면서도 비사는 항상 손에 칼이 아닌 무언가를 쥐는 것을 망설였다. 결국, 비사도 사람들 틈을 헤치며 세이를 쫓았다.

다행히 바깥으로 파고들었는지 반대편 건물 벽 쪽에 다다라서야 세이를 잡을 수 있었다. 머리고 옷이고 엉망진창이었다. 세이는 자신의 어깨를 툭툭 치는 것이 비사인 걸 보고는 멋쩍게 배시시 웃었다. 비사도 살폿 따라 웃었다.

이 무리를 지나쳐 나가려니 다시 그 북적거리는 사이를 파고들어야 했기에 잠시 건물에 맞닿은 빈틈에 비스듬히 들어섰다. 사람들이 몰린 반대편으로 온 탓에 오히려 구경이 잘되는 명당자리를 골라온 셈이었다.

싸우는 소리가 들렸지만, 너무 빠른데다 신전에서 배운 말이 아닌 속어가 많은 것인지 몇 마디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 이미 한 번 맞붙었다 떨어졌는지 성인 남자 둘은 여기저기 긁히고 멍든 상처 자국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세이와 얼마 나이 차가 보이지 않는 아이들이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이 자식이!!! 내가 ......라고 저 ...전쟁... 해야겠어!?"

"말은 잘한다! 너 같은 ... 가 ..하니까.. 이 모양 이....이거야!"

단어가 드문드문 잘리긴 해도 계속 듣다 보니, 반복되는 대화가 좀 들리는 듯도 했다. 대화를 듣는 비사의 미간이 점점 좁아 들자 세이가 글을 적어 보였다.

[아이들의 아버지가 전쟁에 징병 되면서, 어쩔 수 없이 친구...]

종이가 모자란 지 보여주고는 부스럭거리며 뒷장으로 넘겨 부지런히 계속 글을 써 보여주었다.

[저 앞에 회색 바지를 입은 사람에게 아이를 부탁했더니,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노예로 팔아버렸대. 전쟁이 끝나고 저 다른 남자가 형이 죽은 걸 알고 아이들을 수소문해서 찾았더니 여기저기 팔려 다녀서 이제야 겨우 찾아서 따지러 온 것 같아.]

종이를 내미는 세이의 얼굴이 웃고는 있었으나 찡그린 이마를 보니 좋지 않아 보였다. 그런 세이의 얼굴에 비사 역시 조금 인상을 찌푸렸다. 두 사람이 표정이 자꾸 반복되었다.

순간 비사의 눈이 날카롭게 위로 올라갔다.

잠깐 스치는 바람을 느낀 세이가 뒤돌아 보았지만, 비사가 그저 서 있을 뿐이었다. 회색 바지의 사내가 위협하듯 내두르던 칼이 세이 앞쪽에 떨어질 것 같자 비사는 쌍익을 천 집에 넣어진 채로 돌려 쳐냈다. 퉁겨진 칼은 회색 바지 사내를 지나 그 조금 뒤쪽의 바닥에 꽂혔다. 정면도 아닌 어중간한 옆쪽에 서 있던 그들이라 아무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단지 앞으로 던진 칼이 되돌아와 뒤에 꽂혀 있는 것이 어딘가 부자연스러울 뿐이었다.

칼집을 그냥 잡아당긴 탓에 한쪽 매듭이 끊어져 있었다. 잠깐 그것을 내려다보던 비사는 이내 고개를 들었다. 비사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누가 다친 것도 아닌데 비사는 달려나가 저 사내의 팔을 비틀어버리고 싶은 자신을 느끼고 있었다. 마치 지금 손에 뜯긴 팔이라도 쥐어진 듯해 천을 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순간이나마 이유도 없이 끓어오르는 분노가 조금 사그라지자, 아무렇지도 않게 잔인한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자신을 눈치채고서는 이곳을 벗어나고 싶어졌다. 건물 반대편의 좁은 틈의 벽을 더듬으며 거미줄과 먼지를 뒤집어쓰고서야 길을 빠져나갔다.


비사는 길을 걷자니 점점 피곤해지고 있었다. 체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여기저기 귀찮은 것들이 자꾸 보여서였다. 낮부터 취한 자들과 여인을 희롱하는 자들이 자꾸 눈에 띄었다. 마침 내야 뛰어가던 꼬마가 넘어지고서는 비사의 얼굴을 보고 놀랐는지 부여잡은 채 우느라 놓아주질 않았다. 근처 아이들까지 몰려들기 시작했고 그 와중에 굳은 비사 대신에 세이가 어설프게 웃으며 아이를 달래 떼어 놓고는 황급히 길을 걸었다.

생각보다도 길은 꽤 길고 복잡하게 이어졌다. 어느새 상점가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굳게 닫힌 창들과 조금 요란한 화장의 여인들이 서 있는 건물들이 드문드문 이어졌다. 비사의 외향을 보면서 조금씩 놀라거나 하던 상가 사람들과 달리 이들은 어딘가 눈빛이 무겁기만 했다. 그저 희한한 것을 본다는 듯이 비사의 걸음 뒤로 무심한 눈길이 따라올 뿐이었다.


[전에는 그냥 주택가였는데 전쟁 이후로 변했다나 봐.]

세이가 낯선 분위기의 거리를 걷다 전에 들은 말을 떠올렸는지 비사에게 말해주었다.

"작은 마을이라 생각했다."

비사가 조용하게 중얼거리자, 세이가 무언가를 더 적어 보여 주었다.

[여긴 아렌스 마을이 아니야.]

"다른가."

[공국 안에서는 반대편에만 마을 경계가 있고 이쪽은 경계가 없어서 헷갈리지만, 여기는 체센 마을이야. 이 더 안쪽은 공국 중심가의 입구가 있어.]

마을이라는 것이 비사가 생각하듯 한 지역을 통틀어 묶은 것이 아니라 구분하기 편하게 나눠 부르는 것 같았다.

"맞닿아 있는 이 거리 자체가 경계인 것인가."

세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삶에 찌들어 내려앉은 이 거리의 느낌을 비사도 알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이 이렇게 살아가고 있고 이 안에서 사는 아이들도 있을 것이었다. 비사 역시 평탄한 삶을 살지는 않았으나 그들의 사정이야 어떻든 적어도 자신의 손을 붙든 아이에게는 잠시라도 눈을 가려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걸으니 다시 풍경이 바뀌었다. 긴 길의 끝에 다다른 듯했다. 되돌아가자니 탐탁지가 않아 결국 다른 길로 돌아가기로 했다. 허름한 건물들을 지나니 넓은 길 위로 마차가 지나다니고 비사가 보기에는 거추장스럽기만 한 부풀리고 복잡한 옷차림의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비사는 세이에게 걸어온 길을 제하고 어느 쪽으로 가야 아렌스로 가는 길인지를 물었다. 세이는 알았다는 듯이 손을 잡고 방향을 이끌었다.


큰 길가에는 울타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얼핏 철창 사이로 기사단의 복장을 한 자들과 관복을 입은 자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공국의 관리청인 것 같았다.

'왠지, 기가 흐트러진 곳이다.'

문득 그런 생각을 하던 비사였다. 무엇이 문제인지는 모르겠으나 벗어나고 싶은 곳이었다. 은연중에 세이에게 잡힌 손에 힘이 들어갔다. 고개를 들어 올린 세이가 무슨 일이냐는 듯이 비사를 불렀다.

톡톡

비사가 놀란 듯 손을 빼자, 세이가 다시 힘을 주며 손을 바로 잡았다. 조금 빨라진 걸음으로 길을 걸었다. 부유한 주택가인 듯 날씨가 쌀쌀한데도 군데군데 조경수를 다듬었던 사람 손의 흔적이며 건물들도 어딘가 단정하고 고급스러웠다.


멈칫.

세이와 속도를 맞추어 걷던 비사가 갈림길 앞에서 갑자기 멈춰 섰다. 희미한 피 냄새가 비사의 신경을 긁어댔다. 급히 집중하고 주변의 기척을 빠르게 읽어 들였다. 가장 거슬리는 두 개의 존재가 바로 근처에 있었다.

'인간?'

어딘가 알 수 없는 것이 섞여 있었다. 분명 사람인 듯하나, 어딘가 묘하게 뒤틀린 느낌이었다. 자신이 지쳐서 그런 것은 아닐까 다시 정신을 가다듬으려 하고 있었다. 세이는 비사가 갑자기 멈춰 서서는 움직이려 하지 않자, 물끄러미 비사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비사가 마침내 고개를 들어 올리며 힘껏, 급작스레 세이를 던지듯이 밀어 길 저편의 키 작은 나무들 사이로 밀쳐내고는 바로 오른팔을 들어 올렸다. 그와 동시에 터엉하는 굉음이 사방을 울렸다.

무언가 비사의 몸을 강하게 쳐냈고, 세이를 던지느라 제대로 막아서지도 못한 비사의 왼쪽 몸이 파묻힌 벽이 돌조각을 뱉어냈다.


작가의말

아이고. 날씨가 더워요.
좋은 하루 되세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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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붉은 못 40화 - 도과(倒戈) +10 12.09.04 1,985 47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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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붉은 못 38화 - 흑백논리(黑白論理) +12 12.08.25 1,853 53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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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붉은 못 36화 - 결련(結連) +2 12.08.08 1,899 56 10쪽
35 붉은 못 35화 - 결련(結連) +13 12.08.06 1,768 51 13쪽
34 붉은 못 34화 - 결련(結連) +6 12.07.31 1,974 64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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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붉은 못 30화 - 지주사(蜘蛛絲) +8 12.07.26 1,705 43 7쪽
29 붉은 못 29화 - 지주사(蜘蛛絲) +10 12.07.25 1,738 37 9쪽
28 붉은 못 28화 - 동행(同行) +12 12.07.24 1,835 39 8쪽
27 붉은 못 27화 - 동행(同行) +14 12.07.23 1,738 43 9쪽
26 붉은 못 26화 - 동행(同行) +11 12.07.21 1,832 47 9쪽
25 붉은 못 25화 - 동행(同行) +10 12.07.20 1,876 45 14쪽
24 붉은 못 24화 - 사람의 손 +9 12.07.19 1,640 56 11쪽
23 붉은 못 23화 - 사람의 손 +16 12.07.18 1,963 46 8쪽
22 붉은 못 22화 - 사람의 손 +12 12.07.17 1,819 44 8쪽
21 붉은 못 21화 - 사람의 손 +12 12.07.16 1,952 50 11쪽
20 붉은 못 20화 - 령회(領會) +12 12.07.14 1,966 43 20쪽
19 붉은 못 19화 - 령회(領會) +12 12.07.13 1,902 38 9쪽
18 붉은 못 18화 - 령회(領會) +15 12.07.12 1,961 47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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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붉은 못 16화 - 이면(裏面) +13 12.07.10 2,122 46 17쪽
15 붉은 못 15화 - 이면(裏面) +11 12.07.05 2,696 92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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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붉은 못 13화 - 낯선 감각 +10 12.06.30 2,351 56 14쪽
12 붉은 못 12화 - 낯선 감각 +11 12.06.27 2,681 53 12쪽
11 붉은 못 11화 - 낯선 감각 +11 12.06.24 2,148 35 12쪽
» 붉은 못 10화 - 낯선 감각 +9 12.06.22 2,368 36 10쪽
9 붉은 못 09화 - 동형(同形)의 하늘 +9 12.06.20 2,312 42 7쪽
8 붉은 못 08화 - 동형(同形)의 하늘 +15 12.06.17 2,478 54 17쪽
7 붉은 못 07화 - 동형(同形)의 하늘 +11 12.06.16 2,312 35 13쪽
6 붉은 못 06화 - 동형(同形)의 하늘 +8 12.06.14 2,640 46 9쪽
5 붉은 못 05화 - 죽은 태아(胎兒) +10 12.06.14 2,997 68 12쪽
4 붉은 못 04화 - 죽은 태아(胎兒) +14 12.06.13 2,917 46 8쪽
3 붉은 못 03화 - 죽은 태아(胎兒) +11 12.06.12 3,269 48 12쪽
2 붉은 못 02화 - 죽은 태아(胎兒) +17 12.06.10 5,691 85 26쪽
1 붉은 못 01화 - 이향(異鄕) +22 12.06.10 10,105 60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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