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못 22화 - 사람의 손
뛰어내렸어도 비사의 발이 땅에 닿는 소리가 없었다. 다리에 기운 대부분을 불어넣고서 아이를 향해 달렸다. 눈 위에 비사의 발자국은 보이지 않았다. 추격자들을 스쳐 아이를 낚아채 오른팔 안에 감싸들었다. 달리 나서는 이가 없기에 방심한 것인지 그저 들어 올리기만 하면 되었기에 어렵지 않았다. 아이를 안고서는 발자국을 일부러 내리찍으며 달렸다. 어느 정도 간격이 벌어지자 어두운 골목 안에 멈춰 섰다. 중간부터 악을 내지르며 발버둥치는 아이를 한 손으로는 어찌할 수가 없어 멈추기로 한 것이었다.
"악! 내려놓거라! 이 무례한 것! 내가 누군지 알기나 하더냐!"
내려놓아도 시끄럽게 소리를 질렀다.
"나에게 손을 대면 응당한 댓..!"
비사는 악을 쓰는 입을 틀어막았다.
"버린다."
뭐라고 외치는 것인지 듣고 싶지도 않고, 그저 닥치길 바라며 비사가 말을 싹둑 잘랐다.
소란스럽게 굴면 버리고 간다라고 말을 해야 하는데 다짜고짜 버린다. 라고만 하니, 아이는 이게 뭔 소린가 생각했다. 그래도 뒤를 신경 쓰는 것을 보니 쫓던 이들과 한패는 아닌 듯했다. 그렇다고 한들 여전히 이 천을 뒤집어쓴 얼굴도 보이지 않는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기는 하나 일단 비명은 멈추었다.
"혼자인가."
억양도 없는 낮게 울리는 목소리였다. 저음이지만 분명 여자의 단정한 음이었다. 아이는 고개를 가로로 내저었다. 비사는 아이 옷에 튄 피를 보니 이미 누군가 죽었음을 짐작했다.
"나, 나와 일행을 구해주면 사례를 할 것이오."
떠는 목소리 주제에 기죽지 않은 도도함으로 위장하려 하는 아이의 목소리였다. 화려한 레이스가 장식된 옷에 피칠을 하고는 버르장머리 없는 귀족의 말을 구사하고 있었다. 어차피 구할 것이었다면 세이 같은 얌전하고 참한 아이였다면 좋을 것을, 이 상황이 어찌 됐건 비사는 피곤하게 굴 것 같은 저 눈동자와 말투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몇 명."
아이는 손가락 다섯을 펼쳤다. 비사가 파악하기에 쫓는 자는 열이 넘었어도 쫓기는 자는 이리 많지 않은 것 같았다.
"죽은 자."
셋을 구부렸다.
"너."
하나를 더 구부렸다. 일행이 많은 척 쓸데없는 허세를 부리다니 이래서야 질문이 헛수고였다.
타탁-
몇 명이 뛰어다니는 건지 지척(咫尺)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아이가 놀라 문득 비사의 늘어진 왼팔을 잡았다가 화들짝 놀라 손을 뗐다. 옷 위로도 팔에 스민 냉기가 전해졌다.
'못쓰는 팔 아니야?'
외 팔의 여자라니, 기껏 나서준 자가 이런 자 하나라니 실망감이 가득한 아이 얼굴은 더더욱 파래졌다. 더 고민할 새도 없이 무례하게 공중으로 들어 올려졌다.
"헉-"
"시끄러우면 버린다."
말도 채 끝내기도 전에 벽을 차고 뛰어올랐다. 들쳐 메진 채로 비사의 옷을 필사적으로 쥐며 다른 한 손으로는 입을 막았다. 점점 멀어지는 바닥을 보며 비명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딸꾹!"
어거지로 숨구를 틀어막고 있어서인지 이번엔 갑작스러운 딸꾹질이 나오기 시작했다. 비사는 사람을 하나 더 들었으니 묵직해진 몸을 튕겨 3층 정도 되는 건물 옥상에 멈춰 내려다보았다. 어떻게 이런 여자가 여기를 올라왔는지만을 생각하는 아직 정신이 알딸딸한 아이를 난간 안에 내려놓았다. 다리가 풀리었는지 그저 로브 자락만 꼭 쥔 채로 놓지 않았다.
"어느 사람."
딸꾹거리며 난간을 슬며시 내려다보았다.
"저기..딸국. 저기 저 상아색 드레..딸꾹..스..."
이미 저쪽도 만만치 않은 상황인 듯했다. 아이는 색깔만 겨우 구분하고 있었지만, 비사의 눈에는 어느 정도 인영의 얽힘이 눈에 보였다. 하얀 눈 위로 퍼진 핏자국과 움직이는 사람들을 되짚으며 이들이 지나온 길을 훑었다.
'뭉쳐 선 것이 셋이라. 그 옆의 하나는 죽은 것을 보니 아이의 사람일 것이고, 저기 위쪽서부터 도망친 건가.'
숨을 고르고는 다시 아이를 잡아맸다. 건물 반대쪽을 향해 뛰어내렸다. 펄럭이는 천과 함께 아이는 몸이 부웅 위로 뜨는 듯한 느낌에 정신을 놓을 것 같았다. 아이 하나기는 해도, 사람 하나 짊어진 것이 생각보다 버거웠는지 비사는 떨어지는 속도를 줄이고자 몇 번 벽을 발로 딛어야 했다.
'히익. 죽을 거야 이러다 죽을 거야. 잡히기도 전에 이 망토 여자 때문에 죽을 거야!'
놀라서 시작한 것이 다시 또 놀라자 딸꾹질은 멈췄다. 어찌 보면 조용해질 것이니 다행이었다. 그런데 정작 땅 위에 내려선 비사는 움직이지 않았다. 사방의 기척을 읽어 들였다. 어둠에 몸을 숨겼다가 인기척이 지나간 듯하면 길을 빠르게 건넜다. 땅에 내려와서야 겨우 정신을 차린 아이는 재촉하는 말을 걸고 싶었으나 참을 수밖에 없었다. 자꾸 멈춰 서니 느리게 움직이는 것 같음이라 아이는 그저 정의감 넘치는 미남자는 고사하고 외팔이에 무뚝뚝하고 말도 잘라먹는데다 힘든지 자꾸 멈추어서는 느린 여자를 만난 것이니, 아 이제 짧은 생이 끝나는가 생각했다. 이상한 것 하나라면 돌아서는 골목마다 마주치는 사람이 하나 없어 쫓는 이들이 보이지 않는 것 정도였다.
비사는 상아색 드레스가 있는 맞은편의 비스듬히 꺾인 골목까지 다다랐다. 아이를 구석에 내려놓자 풀썩 주저앉았다. 비사는 눈길도 주지 않고 바깥을 향한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이 뒤편엔 아무도 없다."
어딜 보며 말하는지 알 수도 없지만 아이는 웅크린 채로 자신을 쳐다도 안보는 비사를 향해 고개만 끄덕였다.
비사는 어느새 골목의 끝에 서 있었다. 이미 상아색 드레스는 정신을 잃은 듯 늘어져 있었다. 차라리 잘됐다 생각했다.
'노리는 건 저 상아색과 이 아이 둘인가.'
옆에 늘어진 남자의 시체를 보고 비사는 생각했다. 아마도 다른 이들은 아이를 잡으려 돌아다니는 듯했다.
'죽여야 하나.'
알지도 못하는 이들을 구하고자, 또 저 알지도 못하는 이들은 죽여도 되는 것일까. 아주 짧은 고민이었다. 상대적 약자인 여자아이를 이미 선택해 버렸고, 끼어들어 버렸다. 습격을 받은 것은 이쪽일 터이니 어쩔 수 없다 여겼다. 이런 상황의 대처방안이라면 이미 지겹게 배운 것이 있었다.
-"죽여야 한다."-
비사는 움직였다.
-"그전에는 무얼 생각하든지 괜찮다. 살기가 도는 싸움이 시작되면 싸우기 전에 무얼 고민했든 다 집어치우고 무조건 베어라. 살아남는 것, 이기는 것만을 생각해야 한다."-
머릿속에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아도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이미 뇌리에, 몸에 박힌 그 긴장감들이었다.
-"똑똑히 기억하거라 쓸데없는 온정을 베풀었다 하여 그 온정이 돌아올 것이라 기대도 하지 마라."-
아민의 그림자 무사였던 권안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려왔다. 매번 비사에게 밀어 넣어지던 생존을 위한 말살(抹殺), 그의 법칙이었다. 이것은 그냥 위협으로 넘어갈 수 있는 얼간이들의 시비가 아니었다. 어차피 제닐과 세이, 그들과 이들은 첫 만남부터가 달랐다. 그들에게 괴물인 자신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 두려웠으나 이들에겐 자신이 괴물일수록 안심이 되는 순간일 것이다. 이미 죽은 자들이 묏자리 봐둔 것도 아닐 것인데 바닥에 한 자리씩 차지하고 누워 있었다. 그러니 망설이며 나약해질 시간이 허락되지 않았다.
-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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