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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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향馨香
작품등록일 :
2012.09.25 10:10
최근연재일 :
2014.12.21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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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7.03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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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못 14화 - 이면(裏面)

DUMMY

비사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검은 피의 괴한을 만난 일 이후로 며칠째 집 밖을 나가지 않았다.

'무서운 것 없어 보이더니 괴인을 만나 겁을 집어먹었나, 놀라기도 했겠지. 가여운 것...'

그 속내 알 리 없는 제닐은 주눅이 들어 뵈는 비사가 그저 안쓰럽기만 했다. 비사는 처음 눈을 떴을 때처럼 멍하니 앉아 있기만 했다. 세이까지 책도 보지 않고 넋을 놓고서 앉아 있었다. 이 작은 지붕 아래에 전에 없던 우중충한 기운이 먹구름 끼듯 끼어 있었다. 그 상태가 지속하여 사흘째가 되자 제닐이 먼저 참지 못하게 되었다. 이전처럼 비사를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안돼. 이래서는 나아질 것이 없어. 다 일어나. 얼른! 나가기 싫어도 가서 가게에 앉아서 인사라도 해! 이게 무슨 죽을 날 받아 놓은 노부부도 아니고, 뭐 하는 것들이야 이게."

제닐은 늘어진 두 아이를 재촉했다. 시키면 또 시키는 대로 일어나 씻고 입고를 하더니, 정신은 저 멀리 바람 따라 날려버리고서는 함께 길을 따라 걸었다.


"제닐, 애들 어디 아픈 거야? 어이구. 비사 얼굴은 왜 저래."

가게 여주인이 구석에 쪼그리고 앉은 두 아이를 보더니 제닐에게 말을 건넸다. 제닐은 묻지 말라는 듯이 고개만 저었다. 차라리 떼라도 쓰고 뭔가 해달라 조르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지켜보는 수밖에 없으니 답답하기만 한 제닐이었다.

비사와 세이, 제닐까지 의자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손님이 들어오면 제닐이 일어나 이야기를 하고 물건을 팔았지만 두 사람은 멍하니 움직이지 않았다. 해질 무렵에 두 사내가 들어서서 여주인에게서 병에 든 과실주를 내어달라 하고 있었다.


"소문의 그 이방인이네. 드디어 보게 되는군."

그 중 한 사내가 비사를 힐끗힐끗 쳐다보며 내뱉은 말이었다. 비사의 시선이 슬며시 이들을 향했다.

"진짜네 주인장. 여기 가게엔 왜 자꾸 이방인만 늘어나. 어디서 뒷장사라도 하는 것 아니야? 쏠쏠하면 나도 좀 알려 줘. 저런 특이한 애는 수요는 적어도 대신 비싸게 팔린단 말이야."

다른 한 사내도 고개를 돌려 쳐다보더니 말을 이었다. 가끔 오던 손님이었는지 아는 척을 하는 이들에게 여주인이 애써 웃으며 답했다.

"아이고, 무슨 말을 전혀 아닙니다요. 손님. 그냥 제닐이 갈 곳 없는 애를 받아준 것이지요. 거기다 착실하게 가게 세도 잘 내고 일도 도와주고 벌써 제닐이 여기 온 지 근 3년이 다 되어가는데 이젠 이방인도 아니지요. 애들도 그냥 착하기만 하지, 소란 한 번 피운 적도 없는걸요."

사내는 코웃음을 쳤다.

"지나치게 착한 것들은 어디선가 죄를 지었기 마련이야."

볼 것도 없다는 듯이 단정을 짓는 어투였다.

"이방인이 이런 데 쑤셔박혀서 착한 척하고 조심스럽게 사는 것들은 어디서 죄라도 지었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도망친 노예라던가 둘 중 하나야. 하루 이틀 이 동네 있는 것도 아니면서 왜 그래. 주인장."

"아요. 정말 아니라니까요. 글쎄. 자자, 어여 가슈들."

세이가 자신의 동생이 있는 곳이 먼 곳이라 말할 때에 이곳이 그들의 고향이 아닌 것은 알고 있었지만 비사는 자신이 아닌 제닐과 세이가 이방인이라는 말을 듣는 것이 너무도 이상하게 들려왔다. 이들이 이방인이라면 자신은 무엇이란 말인가.

말을 받아쳐 욕이라도 하고 싶은 제닐이었지만 꾹 눌러 참고 있었다. 장사하며 몇 번이나 마주친 적이 있는 이런 인종들은 무시하는 게 상책이었다.

한 명은 팔 안에 커다란 유리 술통을 끼고 다른 한 명은 돈을 거슬러 받더니 제닐의 좌판 앞으로 걸어왔다. 제닐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비사와 세이의 앞을 가리듯이 섰다.

"제닐, 어이."

사내의 무례한 부름이었으나 내색하지 않고 제닐이 말을 받았다.

"뭐 사시게요."

사내가 비긋하게 올려 웃었다. 그의 시선은 제닐의 치맛자락의 뒤로 향하고 있었다.

"딴소리하기는. 그 애 팔 생각 없나?"

"딴소리고 헛소리고 하지 마시고 물건 안 사실 거면 나가주셨으면 합니다."

"튕긴다 이거야? 니들, 평민도 아니지? 더 하층민 아니야? 자알 생각해 보라고, 이상한 거 좋아하는 귀족들한테 저런 거 하나 가져다 팔면 평생 놀고먹을지도 몰라. 이런 부스러기 주어서 팔아봤자 평생 허리도 못 펼걸?"

"그래, 착한 척하지 말라고. 속으로 혹하지 않았어?"

"뭐 파는 게 좀 그러면 가서 하루나 이틀 밤 정도 있다가 오라고 해도 되고. 소개비는 반반씩 어때."

제닐의 표정이 구겨지는데도 이들은 둘이서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를 나눴다. 제닐은 물러서지 않았다. 여기서 자세를 낮추면 이들은 바로 만만히 보이는 그 틈을 노려올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 하여 윽박지른다면 더 험하게 밀고 들어올 것이니 그저 참고 덤덤한 척 받아치는 수밖에 없었다.

"자경단을 부르기 전에 가주시지요."

"왓하. 멍청한 소리 하긴, 자경단을 부르면 뭐 어찌할 건데. 여기서 고작 몇 년 산 너랑 저 꼬마 놈하고 여기서 평생 산 나랑 누가 더 아는 사람이 많을 것 같아. 니들 어디서 온 건지 뒤를 캐는 게 무섭진 않나 보지? 그냥 반 떼 준다고 할 때 손잡고 하자고."

"여기 자경단은 나름 일 잘하기로 소문이 나 있어요. 저희는 천민도 아닐뿐더러 켕길 것 하나 없습니다. 거기다 장사하며 매일 지나는 사람들 안면 트고 지내는데 저라고 모르는 사람이 없겠어요? 허세 부리지 마시고 그냥 가세요."

표정에 더 힘을 주며, 험악한 분위기를 일부러 뿜어내는 사내들이었다.

"아이고, 손님들 이상한 소리 자꾸 하지 마시고 내 덤을 더 드릴 테니 그냥 가십시다. 네?"

여주인이 사내들 근처로 와서 억지웃음을 노련하게 지으며 달래듯 말했다. 사내는 여주인이 짜증 난다는 듯이 흘겨 보고서는 말했다.

"아, 진짜 저건 돈 좀 되게 생겼단 말이야. 왜 저런 걸 이제야 봤지. 소문나기 시작할 때 와볼 걸 말이야. 좀 비켜 봐. 다시 좀 보게."

제닐은 여주인에게 눈치를 보냈고, 여주인은 슬며시 뒤로 물러나더니 급한 걸음으로 가게를 빠져나갔다.

"그냥 가주세요."

제닐은 또 한 번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

"아 좀 비켜 보라고!"

사내가 팔 언저리를 거칠게 휙 하고 밀어내자 제닐이 비틀거리며 옆으로 밀려났다. 비켜난 그 자리에서 비스듬히 자신을 올려다보는 눈에 사내가 순간 침을 꿀꺽 삼켰다.

"뭐야, 이상하게 생긴 눈에 겁이라도 먹은 거야?"

뒤에 섰던 사내가 피식 웃으며 말하자 사내가 발끈했는지 아무렇지도 않은 척 큰소리를 쳤다.

"이게 어디서 건방지게 눈을 부라려!"

크게 울리는 고함에도 비사는 손가락 하나는커녕 그 시선도 움직이지 않았다. 가뜩이나 지난번 일로 세이를 놀라게 한 것이 마음에 걸려 있던 비사였다. 이들에게 자신은 정말로 불운을 불러오는 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 앞의 욕심 많은 사내처럼 자신을 화나게 했다.

"헛, 젠장 기분 나쁘게 생기긴 했네. 정말."

이 사내가 정말로 겁을 먹었다는 사실을 비사만이 눈치채고 있었다. 자신이 쏟아내는 살기를 느끼는 그의 동요가 보였다.

"말 함부로 하지 마시고 그냥 좀 가세요. 네?"

제닐이 다시 그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야, 검은 머리 너 이리 일어나서 나와 봐."

사내는 다시 제닐을 밀쳐 내려 팔을 올렸다. 하지만, 제닐은 밀려나지 않았다. 어느샌가 일어선 비사가 사내의 손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뭐, 뭐야."

"비사. 그러지 마. 내가 알아서 할게 그냥 앉아 있어. 빨리, 물러서. 어서."

제닐은 어서 여주인이 사람을 불러오기만을 기다렸다. 이러다간 큰일이라도 날 것 같았다. 제닐이 걱정하는 것은 아직도 얼굴의 붉은 기가 가시지도 않은 비사가 당할 봉변이었지만 지금 비사의 속내를 알았더라면 그런 걱정은 일도 아닐 것이었다.

비사는 이 사내가 들어와 말을 꺼내는 순간부터 이 자가 누구인지를 기억해냈다. 길거리에서 친구의 아이들을 노예로 팔아치우고서도 반성 하나 없이 칼을 휘두르던 바로 그 자였다. 아마, 지금도 그 칼을 품에 지니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치자 비사의 생각은 주변을 보지 못하게 잠식당해 버렸다. 팔을 비틀어버리고 싶었던 그 충동이 다시금 몰려왔다. 바닥에 저 사내를 처박고서 가슴팍을 발로 짓밟는다면 이 팔을 쉬이 뜯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엔 팔을 손에 쥔 것 같은 감촉이 아니라 지금 그 팔이 자신의 손안에 있었다. 생각대로 자신이 움직인다면 이 팔로 헛된 곳에 칼을 휘두르지도 못할 것이며 제닐을 밀쳐내지도 못할 것이니 없는 게 차라리 나을 것 아닌가.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움직인다면 바로 그 상상이 이루어질 상황이었다.

그 충동을 억누르게 하는 것은 제닐과 세이가 그런 자신을 보고 말 것이라는 또 다른 무의식의 두려움이었다. 짐승처럼 피 묻은 이빨을 드러내어 선 자신을 보고 말 것이지 않나. 누군가를 죽이라는 명을 내려받지 않는다면 바뀔 것이라 생각했었으나 이상하게도 더 잔인해지는 마음이었다. 자신의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는 것은 절대로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비사는 결국 이쪽도, 저쪽도 망설이고 있었다. 이 정도의 일로 이리 쉽게도 살기로 휩싸이는 자신이 정말 변할 수나 있을까. 제대로 된 선택을 할 수나 있을 것인가. 지금 자신이 택해야 하는 것의 옳고 그름 따위의 판단은 누구를 위해 해야 하는가.

자신에게 생각하라고 외쳐대던 목소리가 떠올랐으나 이젠 균허 그가 뭘 말하고자 했는지 알고 싶어도 물을 수 없게 되었다. 이미 잃은 사람들만이 옆자리를 채울 수 있는 것일까. 여전히 홀로 헤매이며 떠도는 아가 새일 뿐인 비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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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붉은 못 40화 - 도과(倒戈) +10 12.09.04 1,985 47 16쪽
39 붉은 못 39화 - 도과(倒戈) +9 12.08.27 1,821 80 11쪽
38 붉은 못 38화 - 흑백논리(黑白論理) +12 12.08.25 1,853 53 13쪽
37 붉은 못 37화 - 흑백논리(黑白論理) +13 12.08.08 1,827 35 12쪽
36 붉은 못 36화 - 결련(結連) +2 12.08.08 1,899 56 10쪽
35 붉은 못 35화 - 결련(結連) +13 12.08.06 1,768 51 13쪽
34 붉은 못 34화 - 결련(結連) +6 12.07.31 1,974 64 17쪽
33 붉은 못 33화 - 결련(結連) +14 12.07.30 2,231 47 13쪽
32 붉은 못 32화 - 지주사(蜘蛛絲) +13 12.07.28 1,981 66 10쪽
31 붉은 못 31화 - 지주사(蜘蛛絲) +12 12.07.27 1,812 43 10쪽
30 붉은 못 30화 - 지주사(蜘蛛絲) +8 12.07.26 1,705 43 7쪽
29 붉은 못 29화 - 지주사(蜘蛛絲) +10 12.07.25 1,739 37 9쪽
28 붉은 못 28화 - 동행(同行) +12 12.07.24 1,835 39 8쪽
27 붉은 못 27화 - 동행(同行) +14 12.07.23 1,738 43 9쪽
26 붉은 못 26화 - 동행(同行) +11 12.07.21 1,832 47 9쪽
25 붉은 못 25화 - 동행(同行) +10 12.07.20 1,876 45 14쪽
24 붉은 못 24화 - 사람의 손 +9 12.07.19 1,640 56 11쪽
23 붉은 못 23화 - 사람의 손 +16 12.07.18 1,963 46 8쪽
22 붉은 못 22화 - 사람의 손 +12 12.07.17 1,819 44 8쪽
21 붉은 못 21화 - 사람의 손 +12 12.07.16 1,952 50 11쪽
20 붉은 못 20화 - 령회(領會) +12 12.07.14 1,966 43 20쪽
19 붉은 못 19화 - 령회(領會) +12 12.07.13 1,902 38 9쪽
18 붉은 못 18화 - 령회(領會) +15 12.07.12 1,961 47 9쪽
17 붉은 못 17화 - 이면(裏面) +18 12.07.11 2,064 46 11쪽
16 붉은 못 16화 - 이면(裏面) +13 12.07.10 2,122 46 17쪽
15 붉은 못 15화 - 이면(裏面) +11 12.07.05 2,696 92 8쪽
» 붉은 못 14화 - 이면(裏面) +13 12.07.03 2,014 37 10쪽
13 붉은 못 13화 - 낯선 감각 +10 12.06.30 2,351 56 14쪽
12 붉은 못 12화 - 낯선 감각 +11 12.06.27 2,681 53 12쪽
11 붉은 못 11화 - 낯선 감각 +11 12.06.24 2,148 35 12쪽
10 붉은 못 10화 - 낯선 감각 +9 12.06.22 2,368 36 10쪽
9 붉은 못 09화 - 동형(同形)의 하늘 +9 12.06.20 2,312 42 7쪽
8 붉은 못 08화 - 동형(同形)의 하늘 +15 12.06.17 2,478 54 17쪽
7 붉은 못 07화 - 동형(同形)의 하늘 +11 12.06.16 2,313 35 13쪽
6 붉은 못 06화 - 동형(同形)의 하늘 +8 12.06.14 2,640 46 9쪽
5 붉은 못 05화 - 죽은 태아(胎兒) +10 12.06.14 2,998 68 12쪽
4 붉은 못 04화 - 죽은 태아(胎兒) +14 12.06.13 2,917 46 8쪽
3 붉은 못 03화 - 죽은 태아(胎兒) +11 12.06.12 3,269 48 12쪽
2 붉은 못 02화 - 죽은 태아(胎兒) +17 12.06.10 5,691 85 26쪽
1 붉은 못 01화 - 이향(異鄕) +22 12.06.10 10,106 60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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