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못 21화 - 사람의 손
높다란 곳에서 듣는 바람 소리는 언제 들어도 여전히 거칠기만 했다.
북쪽.
적인이 있는 곳. 사람 손도 아니고 숲 속에 있을 것이니 다시 이 손에 쥐는 것에 무리 없을 것이었다. 방향 감각만 믿고 갈 것이나, 적인을 둘러싼 기운으로 느껴질 만큼 우거진 수풀이 있을 법한 산은 지도로 본 북향의 선상에 놓이는 것만 세어도 네 개. 이 중 하나의 산일 것이다. 북으로 갈수록 차가운 기색이 짙어지고 있었다. 벌써 길을 나선 지 열흘이나 지났다. 비사는 지금 두 번째의 산에 올라 있었다.
비사는 스텔라에게 제닐이 주문했던 옷을 입고 있었다. 생각만 해도 귀가 아플성싶은 목소리의 사람이었다. 허나 반듯한 바느질 선을 보니 솜씨가 좋기는 하였다. 소매의 폭이 넓고,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양옆으로 트임이 있는 긴 상의에 달라붙지 않는 바지. 목까지 올라오는 깃. 원래의 비사 옷과 좀 다른 것이 있다면 슬쩍 허리의 선이 드러나는 것이었다. 소매도 이전만큼 펄럭거리지는 않았고, 끈으로 매어 입었던 것과 달리 왼쪽으로 길게 단추가 여러 개 달린 것도 달랐다. 그래도 거추장스러운 치마보다는 움직임이 편하였다. 짙은 푸른색의 옷에 비사의 피부만큼이나 하얀 소매 끝 두른 테가 고왔다.
길을 떠나는 데에 두려움은 없었지만 어쩐지 마음이 든든했다. 그 위로 안에 털이 달린 로브를 더 깊게 눌러썼다. 하나로 묶어 내린 머리카락도 안으로 다 밀어 넣었다. 제닐이 헛으로 말을 할 사람이 아니었으니 그녀의 말을 듣는 것이 좋을 것이라 생각한 비사였다. 가방 안에는 4골드 그리고 잔돈으로 나누어 놓은 1골드가 들어 있었다. 이리 많은 돈을 줄 필요는 없었건만, 이래서는 자신이 그들에게 해준 것이 너무도 없질 않은가. 돈을 다시 돌려놓고 오고 싶은 마음도 있었으나 그리한다면 또 눈치나 보고 있느냐며 제닐에게 한소리 들을 것이 분명하였다. 차가운 금속에 담겨 실려온 것은 온정이었다. 소중히 가방 깊숙이 묻어 두었다.
가방 안에는 돈 이외에도 이것저것 들어 있었다. 먹을 것과 함께 별 탈이 없자 다시 나타난 제닐이 만든 약이 한 움큼 들어 있었다. 공력이 빠져나가고 한쪽 팔밖에 못 쓴다 해도 평범한 인간을 상대로 쉽게 당하진 않을 터였으나 알 리 없는 제닐은 걱정이 태산이었던 모양이었다. 문제랄 것이라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검은 피의 인간들과 혹시나 그 비슷한 것들을 만나는 것이었다. 슬렌스에게 묻기는 하였으나 그는 조금 곤란한 얼굴을 하였다. 아무래도 위로부터 입단속이 내려진 모양이었다. 그저 조심하라는 말을 비사에게 할 뿐이었다. 그리고 세이가 넣은 것인지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종이 한 뭉치가 들어 있었다. 무엇을 위한 것인지 몰라 그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남쪽의 하늘이 보였다. 여전히 어둑하기만 하고 저편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조차 없으나 그 아래에 남겨둔 것이 있었다. 세이의 하늘은 이런 마음으로 차 있는 것인가. 비할 것이야 되지 않겠으나 아주 조금 소년의 등을 이해하게 된 기분이었다.
비사는 주로 새벽녘에 움직였다. 경공을 쓰는 자신을 보이지 않기 위함 이기도 했고 어둠 속을 지나는 것이 편하기도 해서였다. 엿새에서 이레 사이에 이곳에 도착하리라 생각을 했으나 열흘이나 걸린 것을 보니 역시 자신은 이전만 하지 못하였다. 몸에 기운을 돌리면 체온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왼팔은 냉기에 그대로 드러나 차가워지기만 했다. 막힌 혈 탓에 마치 죽은 팔처럼 느껴졌다. 이제껏 편히 지내느라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길 위로 나서니 하나씩 드러나고 있었다. 남은 옷가지 중에 골라 왼팔을 둘러쌌다. 그러고서도 가던 길을 멈추고 몇 번이나 팔을 품어 온기를 나눠줘야만 했다.
아민 왕자를 만나고 그만둔 떠돌이 생활이었지만 마치 평생을 그랬던 것처럼 몸에 배 있었다. 어느샌가 청금성조차도 기억에 희미해졌다고 느꼈으나 다시 혼자가 되어 나와보니 제닐과 세이와 함께한 반년의 시간이 오히려 꿈을 꾼 것 같았다.
지나쳐야 할 마을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 안으로 들어서는 것이 달갑지 않았으나 외곽만을 돌며 다니려니 길을 벗어나 가는 것 같았기에 결국 이름도 모르는 마을 안으로 들어섰다. 눈이 꽤 내렸는지 발자국이 깊게 패며 지나는 사람의 수만큼이나 지저분한 거리였다. 마을이 얼마나 더 나올지 모르니 먹을 것을 파는 곳에 들어가 말려진 감자와 과일 그리고 연기에 잘 말린 고기를 몇 가지 샀다. 푹 눌러쓴 로브에 가게 주인이 이상하게 쳐다보기는 했으나 돈을 내어놓자 달리 더 신경을 쓰지는 않는 것 같았다. 그러고도 한참을 더 걸어 어둑어둑한 구석에 허름해 보이는, 그나마 마음 편할 것처럼 생긴 여관으로 들어섰다. 또다시 나무 위에서 선잠을 잘 생각도 했었으나 왼팔이 이미 한계 상황이었다.
'동상까지 더해지면 다음 산에 가기도 전에 썩기 시작할지도 모른다.'
이미 두 개의 산을 지나왔으나 아직 갈 길이 멀었다.
하룻밤에 5브로, 식사는 필요 없고 뜨거운 물만 쓰겠다 했다. 몸을 씻고도 뜨거운 물 속에 왼팔을 담근 채로 한참을 있었다.
따뜻한가 싶더니 바로 겨울이 시작되는 듯한 이런 계절 변화를 알았더라면 좀 더 빨리 길을 나섰을지도 몰랐다. 어디를 얼마 동안이나 가느냐며 제닐과 세이가 수선을 떨었지만, 어차피 그리 오래 걸릴 여정은 아니라 생각했다. 만약 자신이 돌아가기로 했더라면 한두 달 남짓이나 할까 한 길이었다. 한 달이든 하루든 같은 반응을 했을 테지만 비사는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짧은 길이건 긴 길이건 적인을 쥐고서도 돌아가지는 못할 길이었다.
'언젠가'까지 머문다는 말미를 남겨둔 것은 적인 때문에 했던 말은 아니었다. 그것이 정확히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계속, 영원히, 평생을 함께한다는 것이 자신에게 가능한 것일까. 헤어짐 없는 인생이라는 말이 있기나 한 것일까.
'돌아간다. 어디로...'
물에서 손을 빼고 다시 천으로 둘러싸고서 쌍익을 등에 멘 채로 새우잠을 청했다.
타닥. 탁. 희미한 울림이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여러 개가 뒤섞이는 발걸음 소리에 옆으로 몸을 뉘인 채로 눈을 떴다. 빠른 박자로 반복되고 있었다. 건물 안은 아니었다. 날카로워진 오감을 곤두세웠다.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듯한 저들끼리의 소란이었지만, 찢어지는 듯한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린 듯해 결국 몸을 일으켜 창가를 내다보기로 했다.
슬쩍 걷은 천 틈 사이로 얇은 유리장 너머가 보였다. 어둠에 더 익숙하여 그 속에서도 꽤 멀리 내다보는 비사의 눈에 짙은 주황의 머리 색의 세이보다 어릴까, 그 또래일까 싶은 소녀가 여관의 몇 골목은 앞에서 달리고 있었다.
'인간 사냥.'
무심한 눈동자로 응시하는 비사였다. 어떤 때에는 개미 한 마리 못 잡을까 싶을 정도로 한없이 다정한 구석도 있는 비사였지만, 어느 순간 사람에 관해서라면 벽을 세웠다. 관계도 없는 일에 끼어들어 무엇하랴. 그것은 과거가 만들어 준 냉정함이기도 했다. 얼마 가지도 못하고서 작은 아이의 도망이 끝이 났다. 거칠게 낚아채지는 모습이 보였다. 또다시 악을 쓰는 비명이 들려왔다. 귀가 아픈 것인지 머리가 아픈 것인지 모르나 그 짤막한 소리에 눈을 감고 싶어졌다. 그 소리와 함께 여기저기의 건물들에서 불이 꺼지며 창이 닫히자, 비명 말고 다른 소리는 사라진 듯이 조용해졌다.
텅 빈, 사람이 살지 않는 듯한 마을이 되었다. 사람의 마음이란 똑같은 것이었다. 어느 나라이건, 어떤 말로 이야기를 나누건 불에 타는 것이 자신의 집이 아니기를 바란다. 대책도 없이 돕겠다 나선다면 그것이 더 어리석은 짓이었다. 누구도 나무랄 수 없는 당연함이었다. 자신도 자신의 부모만이 아닌, 다른 어떤 누군가가 대신 죽길 바랐으니 굽어살피지도 않는 자애롭기만 한 그 눈을 감은 부처가 원망스러웠었다. 이제는 그 신의 존재 자체마저 마음에서 지워버린 비사였다. 이제 다시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신에게 빌지 않게 되었다. 일어날 불행은 아무리 울고 빌어도 일어나지 않던가. 구원이라는 것은 없었다.
다시 높게 찢어지는 짧은 비명이 들려왔다.
'두려운가.'
두려웠다. 아무도 도와줄 수 없던 모든 것이 다 끝나버리던 그 순간이 두려웠다. 누군가 나타나 저를 구해주길 간절히 바랐다. 어디선가 나타난 귀인이 자신을, 그 죽어간 모든 이들을 살려주는 그런 꿈을 꾼 날이 있었다. 꿈이라 할지언정 과거를 되돌리고 그 다정한 품들에 안겨 온기를 느끼고 싶던 비사의 마음이었다. 저 앞에서 발버둥치는 아이의 마음을 생각하는 것인지 자신의 마음을 생각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지금 자신은 외팔이나 마찬가지인데다 미미한 내공만을 지니고 있었다. 거기다 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새로 얻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검은 피를 지녔던 자들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들이마신 숨을 길게 내뱉었다. 그리고 또 잠시 벽에 기대 내려다보더니 결국 비사는 등 뒤의 묵직한 것의 끈을 고쳐 매었다.
로브를 펄럭이며 몸에 두르는 순간 스친 얼굴은 아민 왕자였다. 무공이 아무리 고강했어도 길에서 떠도는 이였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던 자신에게 그저 당과 하나 웃으며 내밀던, 먼지 뒤덮인 더러운 머리를 아랑곳하지 않고 쓰다듬던 아민 왕자였다. 그 얼굴에서 이미 없는 사람들을 스쳐 본 자신이었다. 더는 그렇지 아니함에도 공교롭게 지금 생각난 것은 그였다. 원하는 바를 이루고자 냉혈한 구석이 있었으나 분명 자신을 포함하여 버려진 자들을 외면하지 않는 상냥함도 있었다. 착각이었을지언정 쉴 자리를 찾은 기분이었다. 그의 덕에 냉정함을 얻었으나, 그의 덕에 온정을 받은 자의 기분도 알게 되었다.
신을 부른들 신은 오지 않을 것이다. 사람을 구한다면 결국 그것도 사람일 것이다.
눈과 귀를 막고 사람을 죽였다. 그러고도 이제 와 깨달은 것은 눈 귀를 막지 않으면 결국엔 다시, 칼을 들어야 하는 순간을 보고 듣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 창밖으로 나선다면 또 누군가를 죽여야 할 상황이 올지 몰랐다. 세상사는 참으로 잇속도 잘 챙기어 무엇을 원한다면, 무엇을 잃게 하였다. 어떠한 진리도 영원히 모든 것에 적용될 수 없으니 말 한마디로 세상이 설명되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그리 가고자 하는 것인지 그곳이 나를 부르는 것인지.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낡은 창문이 삐걱거리며 열리었다. 드는 바람인지 나는 바람인지 닫힌 문 중 하나가 열리니 제멋대로 몰려들어 넘나드는 바람이 비어 버린 방 안의 공기를 차갑게 물들여갔다.
- 작가의말
오늘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연참이 어찌될지는 모르나, 일단 오늘도 글을 올려 봅니다. 배경전환을 맞이하였습니다. 비사의 번뇌는 오늘도 끊이질 않는 군요. 그럼 부디 좋은시간 되셨길 바라며...
감사 한 번 더 드립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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