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못 23화 - 사람의 손
비사는 성큼 걸어나가 희미한 빛 사이로 몸을 드러냈다. 앞에 선 자들이 비사를 발견하고는 소리쳤다.
"웬 놈이야!"
상아색 드레스의 여자를 들쳐멘 사내와 다른 두 사람이 이야기를 하다말고 급작스레 나타난 비사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괜히 의로운 척 나서지 말고 사라지는 게 좋을 것이다."
"빨리 사라지지 않으면 좋은 꼴로 돌아가지 못한다."
뭔가 와다다하게 쏟아지는 말을 듣던 비사가 입을 열었다.
"그 사람."
"뭐?"
그림자 속 비사의 표정이 미묘했다. 그냥 말을 멈추자 세 명의 사내는 일단 잡고 있던 칼만 고쳐 잡았다.
'무슨 말을 하다가 말아 자꾸!'
어느새 웅크린 채로 기어와 골목 끄트머리에 숨어 비사의 뒤를 바라보던 아이의 마음속 외침이었다.
비사는 막상 말을 하려니 말을 해 봤자 반응이랄 것은 뻔한 것이고, 딱히 적당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언제부터 자신이 일단 이것이 무엇이라 구구절절 설명하고 덤벼들었던가. 비사가 하던 일이라곤 습격자들을 막아내는 것과 숨어 들어가 사람을 죽이는 일이 대부분이었으니 사실 마주 보고 뭐라 지껄일 일이 전혀 없었다. 말을 하는 것은 다른 이의 일이었지 제 영역이 아니었다. 거기다 양쪽 다 누군지도 모르니 뭐라 해줄 말도 없었다. 싸움질 전의 대화가 정해진 예도 아니었으니 결국, 왼쪽 어깨 위로 올라온 쌍익의 위 축을 오른손의 검지로 천 입구를 밀며 칼자루에 걸쳤다. 뭔가 꺼내는 듯한 자세를 취하자 사내가 하나 달려들었다.
쉐엑-
손가락 두 개 끝에서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회전한 익을 돌려 잡아 검신을 팔 뒤로 돌려 들었다. 내리치는 칼날을 팔꿈치에 칼등을 맞대 세운 검 날로 받아냈다. 비틀어 받아낸 칼을 옆으로 쳐내고는 날을 팔과 수직으로 세워 올려 그었다. 뒤이어 뛰어 오는 사내를, 다시 돌린 익을 돌려 정방향으로 잡아 몸을 비틀어 회전시켰다. 팔을 뻗어 뒷목을 깊게 베어 버렸다.
-"뒤쫓지만 못하게 하는 정도로 괜찮을 것으로 생각하지 말거라. 그들의 다리가 잘려 너를 따라 달리지 못한다 하더라도, 입을 여는 순간부터 기억하는 하나하나가 모여 너를 뒤쫓는 길을 만들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은 네가 지키는 것들에 다다를 것이니 결국에는 왕자의 머리를 자르게 될 것이다."-
왕자는 여기에 없으니, 이들을 살려둔다면 자신의 무엇에 다다르게 될 것인가. 잠시 그런 생각을 하기는 했으나 다른 생각은 더 들지 않았다.
'빠르다. 대체 정체가 뭐야. 저 외팔이 여자는...'
아이는 뿜어져 나오는 피를 보며 인상을 썼다. 뜬금없이 나타나 벌인 일들이 순식간이었다. 드레스를 잡고 있던 사내가 여자를 어깨에서 내려 앞에 붙들고 그 목에 칼을 대었다.
"이런 제길, 너 케인레스의 수하인 것이냐!"
모르는 사람이었다. 비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케인레스의 수하라면, 이 계집의 목숨을 함부로 못 할 테지. 칼을 내려라!"
딱히 맞는 답은 아니었으나 그것이 목적이기는 하니 사내를 향한 앞쪽에 칼을 던져 눈 위에 꽂았다. 사내는 뒤로 물러나라는 듯이 손짓했다. 세 걸음을 뒤로 서자 사내는 손목에 달린 작은 피리를 입에 물었다.
삐-하는 소리가 이 조용한 마을의 골목 새로 빠르게 울려 퍼졌다.
'젠장!'
비사는 즉시 달려와 앞에 꽂힌 칼을 차올렸다. 공중에서 회전하는 칼을 오른 손목 턱으로 강하게 아래로 밀어 쳐냈다.
위로 선 날의 칼은 공중에서 도는듯하더니 남자의 턱을 서억-하는 소리와 함께 가르고 올라 머리뼈에 박혀 멈추었다. 사방에서 짧은 피리 소리가 들렸다. 두 번 끊어 부는 것과 세 번 끊어 부는 것. 위치를 정한 것인지 각 방향에서 올라오는 소리가 달랐다. 남자의 턱 사이에 박힌 칼을 뽑아내어 급히 집어넣고는 드레스의 여인을 왼쪽 어깨에 걸쳤다. 힘없는 왼팔을 오른손으로 끌어당겨 드레스 허리끈 사이에 대충 쑤셔 넣어 손목에 끈을 한 번 꼬아 감고는 아이가 있는 골목으로 달렸다. 달려오는 비사를 보며 긴장한 티가 역력한 아이를 오른손으로 허리 옆으로 들쳐 맸다. 모든 공력을 다리로 밀었다. 이마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지금 이 상태에서 마주치면 버틸 수 있을 것인가.'
되는 대로 모아놓은 공력으로 발자국을 몇 개 남기며 빠르게 건물 새를 지났다. 인기척을 재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숨이 거칠어지면 기척을 읽는 것에 힘이 들었다. 주변을 더 멀리 읽도록 나눌 만한 공력도 없으니 벽에 잠시 몸을 기대어 섰다. 들쳐 맨 여자가 정신을 차린 듯 신음을 내더니 이내 또 소리를 질렀다. 피곤과 짜증이 반복이었다.
"악! 내려놔! 내려놓으란 말이다! 아악!"
숨소리조차 정신이 사나운데 등 뒤에서 발광을 해대니 저도 모르게 인상이 구겨졌다. 생각이 바로 소리가 되어 나왔다.
"시끄러워."
비사의 신경이 곤두서 있었는지 이가 물린 목소리였다.
"언니! 조용히 해! 언니!"
주황빛 머리의 아이가 다급한 목소리를 낮추며 여자에게 소리치자 이내 속삭이듯 말이 이어졌다.
"이시스? 이시스니?"
"이스터 언니 조용히 해. 시끄러우면 버리고 간댔단 말이야."
들쳐 매진 두 여자는 비사의 등을 사이에 두고 위아래에서 얼굴을 맞댔다. 분명 왼손이 자유로이 움직였다면 미간을 짚었을 것이다.
"시끄럽다."
비사의 한마디에 둘은 입을 다물었다.
'오른쪽과 왼쪽, 왼쪽의 움직임이 더 빠르다.'
오른쪽으로 눈이 돌기도 전에 몸을 틀어 틈을 지났다. 지나온 듯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더 가면 여관이었다. 이제 다시 발자국을 남기지 않으려면 더 힘을 들여야 했다. 이스터는 비사가 움직이자 깜짝 놀라며 비사의 옷을 급히 잡았다. 그리고 곧 왼쪽 어깨 아래로 팔을 넣어 잡았다. 그래도 머리가 너무 아래쪽으로 있어서인지 꽤나 정신없고 품위 없는 모양새인 것은 분명했다. 비사가 또다시 어둠 속에서 멈춰 섰다.
"저기, 힘드시면 저희가 직접 걷는 것이..."
이스터가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비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스터 역시 눈치를 보며 더 말하지 않았다. 비사의 얼굴에 차가운 공기가 닿음에도 땀이 줄줄 흘렀다.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잠시 서서 주변을 확인하며 건물 틈 네 개를 더 지났다. 달리고 멈출 때마다 등에 메진 두 사람은 숨을 참았다. 이시스는 공중에서 흔들리는 채로 바닥을 내려 보다 입을 가린 채로 눈만 크게 떴다.
'눈 위에 발자국이 남질 않잖아!'
비사는 일부러 이 두 사람을 들쳐 안고 달리고 있었다. 세 사람이 아닌 한 사람의 발자국이라 구별이 쉽지 아니할 것이며, 자신의 발자국을 구분해 내더라도 발자국이 남는 것이라면 여관과 떨어진 골목들뿐이었으니 여관으로 이어진 끈은 없었다.
사람을 덜 죽이자 한다면 덜 마주치는 것이 최선이었다. 다 죽여야 하는 것이 맞을지는 모르나, 어차피 그들을 다 죽일만한 기운도 남아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지금은 오로지 두 사람의 무게까지 위로 올리는 것만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 마주치지 않는 것이 다행인 것은 어느 쪽이라 딱히 말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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