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못 26화 - 동행(同行)
자신의 볼 일을 해결하고도 괜찮다면, 이라는 비사의 말에 두 사람은 응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이들을 구한 것만으로도 많이 물러선 비사였기에 더 이상은 받아들일 생각 자체가 없었으니 흥정의 여지가 없었다. 그렇게 얼결에 셋이 된 비사의 일행은 아침 일찍 여관을 나섰다. 저런 객을 받았든가 하는 생각에 두 사람이 더 들어가는 것은 본 적이 없는 주인은 아리송하기만 했다. 사람이 늘면 추가 금액을 더 내야 한다는 말을 생각해냈을 때에는 이미 이들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다.
비사의 무표정이 점점 멍해지고 있었다. 귀찮음이 그득그득 차오르건만 처리할 수가 없으니 정신을 어딘가로 날려버리기 직전이었다.
"더 못 걸어! 말 사자 말! 내가 도착하면 돈 두 배로 줄게! 응? 사자. 말. 어차피 먼 길 가야 하잖아요. 말 살 돈 없어요? 설마 그 정도도 없는 건 아니지?"
어쩌면 수색하는 자들이 있을지도 몰라 좁은 길을 걷고 있던 차에 반실성이나 했는지 어른스러운 척 평상심을 가장하던 것은 벗어버리고 악을 써대는 꼬맹이 놈 때문이었다. 존댓말을 쓸 생각인지 반말을 할 생각인지도 분간이 안 되게 시끄러웠다. 세 시간은 걸었을까. 경공은커녕 터벅터벅 걷고 있던 비사는 짜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짐짓 무표정했으나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되돌아오는 얼굴에 이스터는 자꾸 몸 둘 바를 몰라 이시스를 달래고 있었다. 하지만 이스터 자신도 귀족 집 영애(令愛) 아니던가. 한계에 다다른 것은 이시스와 비슷했다. 차이라면 참을성의 차이 정도였다.
비사의 눈에 이스터가 붙잡은 치맛자락 사이로 엉망진창인 구두와 벌겋게 붓고 상처 많은 발이 보였다. 저런 구두를 신고 이 눈 속을 계속 갈 수는 없을 것이었다. 걸친 옷들도 가히 편한 옷도 아닌 듯 보였고 쓸데없이 눈에 띄는 듯했다. 여분의 로브를 이스터에게 씌우고 이시스도 옷 위로 비사의 겉옷을 하나 더 걸치기야 했으나, 이것으로 가는 길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었으니 결국 마을 외곽에 다다라서는 말과 필요한 물품을 사기로 했다.
그다지 장사가 되진 않는 듯 허름한 가게 안에서 이스터와 이시스는 적당히 솜이 들어간 상의와 하의를 골랐다. 이스터는 말을 타야 할 것이고 걷기도 해야 할 것이니 하인들이나 일 할 때 입을 법한 바지와 값싼 가죽신을 골랐다. 모양이 정교하지 않다며 입을 삐죽 내민 이시스에게 이스터가 옷을 골라주고 짐짓 말없이 고개를 저으며 참으라는 눈치를 보냈다. 이시스가 철부지인 줄은 알았으나 이렇게까지 말을 듣지 않으니 이스터 역시 비사의 눈치를 보랴 이시스를 다독이랴 정신이 없었다. 어리광만 부리는 꼬마 계집이 비사는 우스웠다.
'혼자가 아니니 아직 저리 사리 분별 못하는 것.'
자신이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철이 들었을까 싶기도 했으나 철이 들기도 전에 누구 하나 더 죽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이러나저러나 저 꼴을 일단 봐주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두 사람은 돈 한 푼 없으니 계산은 모두 비사의 몫이었다. 달리 돈을 잘 쓰지 않던 비사인지라 제닐이 넣어준 여비는 아직도 넉넉했다. 비사는 벽 한편에 달린 기다란 원통 같은 천을 들어 올렸다. 이전에 사용하던 것과 모양은 좀 다르나 토시였다. 왼팔에 끼워 넣으니 탄력 있는 두툼한 천이 빈틈없이 손등부터 팔목에 이르렀다. 이스터의 눈에 비사 손가락의 약인이 눈에 들어왔다.
'반지라고 생각했는데 새겨 넣은 걸까.'
가만히 내려다보던 비사는 손가락만 까딱거려 보고는 다시 로브 속으로 팔을 늘어뜨렸다. 두 사람이 옷을 다 갈아입고 나오자 비사는 그들이 입었던 옷을 뭉쳐 하나로 묶었다.
이제 필요한 것은 말이었다. 두 사람에게 자신과 같이 달리라 할 수도 없고, 자신이 언제까지고 이들의 걸음에 맞추어 밍기적거릴 수도 없었다.
온기를 유지하려는지 마구간 가운데에 커다란 무쇠솥 안에 타는 장작이 가득했다. 비사는 묶어두었던 두 사람의 옷을 장작 속에 던져 넣었다. 피 묻은 옷을 어디 남길 수도 없었던 탓이었다.
"어이구 어서 옵쇼. 짐말이며 뜀박질 잘하는 놈도 있지요. 어디 뭔 길가십니까? 직접 골라보시지요."
생각해보니 비사는 말을 골라 본 적이 없었다. 몇 번 타본 일이야 있으나 직접 사거나 고를 일이 없었다. 여물을 주며 돌 본 적도 없었으니 대강 튼튼해 보이는 놈들을 손으로 가리켰다.
"괜찮으시면 제가 골라도 될까요?"
비사가 대강 훑어보고서 고르는 것을 보던 이스터가 나섰다. 비사는 그러라는 듯이 뒤로 물러섰다. 이스터가 말을 쓰다듬으며 들여다보더니 다시 두 마리를 골랐다.
"이 두 마리로 주세요."
"아가씨 말 좀 볼 줄 아는구먼."
말 장사꾼이 안장을 가지러 들어간 사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비사에게 이스터가 말했다.
"체폭이 좁고 다리가 긴 것이 빠르고 강한 말입니다. 반대로 빠른 것보다 짐을 우선시한다면 다리가 짧고 가슴팍이 넓은 것을 골라야 하지요. 그다음은 귀의 모양이나 뼈대와 힘줄 같은 세부적인 것을 보아야 합니다. 사실, 저 구석에 매인 만들이 가장 좋은 말이나, 저 정도의 준마(駿馬)는 값이 차가 아주 클 것입니다."
비사가 가만히 듣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저가 입을 놀린 것도 아닌데 이시스만이 그 콧대가 좀 높아진 기분이었다. 값비싼 준마까지는 아니었으나 말 두 마리에 4골드를 내주어야 했다. 꽤 큰 지출이었다.
'말이라는 것은 어느 나라에서나 유용한 것인가.'
생각보다 가격이 나가는 것 같기에 비사는 소나 말, 돼지 같은 가축에 대해 잠시 떠올렸다. 어영부영하다 보니 벌써 해는 하늘 가운데 떠있었다. 이 두 여자는 쫓기는 와중일 텐데도 왜 이렇게 여유로울까. 비사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쫓겨 다니는 것도 경험이라고 이 짓도 해 본 놈이 더 잘 도망가는 것이련가 싶어졌다.
여분의 음식까지 더 사서 말에 짐을 매달고 나서야 출발할 준비가 끝난 듯했다. 겨우 두 사람이 늘었는데 짐이 세 배는 는듯하였다.
성문을 빠져나가기 전까지는 일단 달리지는 않을 작정이었다. 눈에 띄는 것은 피하고 싶은 비사였다. 두 사람을 태운 말 옆을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성문 근처에 다다르자 작은 기름통이며 물통, 단도 같은 여행용품을 파는 행인이 있었다. 얼핏 스치던 비사가 멈춰 섰다.
"기름통 하나, 칼 두 자루."
"1린 3브로 입니다. 어느 쪽으로 가십니까? 동북은 아예 눈으로 산길이 막혔다 하던데,"
"서로 갑니다. 감사합니다."
이스터가 급히 대답했다. 서쪽으로 간다는 말에 잠깐 눈을 깜박거리던 이시스는 이내 생각난 것이 있었지만, 곧 잊어버렸다. 비사는 2린을 내밀어 잔돈을 받아 들고는 두 사람에게 단도 하나씩을 내밀었다. 왜 이런 칼을 주는 것일까 생각하면서도 이스터와 이시스는 그것을 받아들었다.
성문을 어느 정도 벗어나자 달리기 시작했다. 먼저 달리라는 듯 비사가 눈짓하자, 이스터가 앞에 앉힌 이시스를 끌어안고 능숙하게 말을 몰았다.
'말이라도 제대로 탈 줄 알아 다행이다.'
지난밤 꽤 많은 공력을 소진해버린 터라 비사 역시 말을 타기로 하였다. 비사가 조금 떨어지자 이시스가 속삭이며 대화를 잇고 있었다.
"이스터 언니, 저 여자는 사람이 맞는 걸까?"
"신세 지는 분께 또 그런 실례되는 소릴 하면 안 돼. 외향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 여러 번 말했지 않니."
'생각해보니, 이름도 나이도 아는 것은 없는데...'
믿는 것은 좋지 않다는, 낮고 감정도 느껴지지 않던 그 목소리가 이스터를 문득 불안하게 했다.
'오라버니...'
그저 지금의 선택이 틀리지 않기만 바라며 고삐를 세게 움켜잡았다.
해가 질 때까지 쉬임없이 달렸다. 두 사람은 이런 장시간 말을 타는 일은 별로 없었는지 체력이 얼마 가지 않아 바닥나고 말았다. 쉽게 멈출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저 참고 달려야 했다. 어둠이 내리고서야 말을 세우고 노숙을 하기로 하였다. 비탈길 안쪽으로 들어서서는 말을 묶어 놓고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만하면 그만 들어가도 될 성싶은데 비사는 눈에 젖은 풀을 해치고 안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아얏."
나뭇가지가 튕기며 이시스의 보얀 얼굴에 붉은 자국을 남겼다. 손에도 손등에도 긁힌 상처가 하나둘 늘고 있었다. 벌써 몇 번째인지 울컥 짜증이 솟구쳤다. 슬쩍슬쩍 비사의 눈치를 보아도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냥 여기서 쉬면 안 돼?"
이시스가 던진 말을 아무도 받지 않았다. 이스터가 비사를 따라 어서 더 들어가라며 슬며시 등을 밀었다. 앞서 가는 저 무뚝뚝한 여자는 나뭇가지를 잘도 밀어내며 들어가고 있었다.
- 작가의말
밉상 이시스를 어찌해야할지...앞으로도 밉상들이 나올텐데요.ㅠㅠ
감사합니다! 이제 슬슬 저의 감사인사가 지겨워지시는 분이 생길지도 모르나 역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주말 잘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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