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줄
형벌 부대원들은 이번 전투에서 승리하고 나서는 당장 노획할 것이 있는지 소련군들의 보급 창고부터 뒤지기 시작했다. 한 형벌 부대원이 보급 창고 내부에 커다란 주머니를 뒤엎자 그 안에서 소련군의 흑빵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형벌 부대원들은 이를 재빨리 빵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좋았어!!'
형벌 부대는 보급 상황이 좋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음식을 알아서 챙겨야 했다. 형벌 부대원들은 슐레프 전차 중대 보급에서 콜라와 슈납스를 긴빠이쳤다. 이 당시 코카콜라는 상당한 인기 품목이었다.
그렇게 형벌 부대원들은 마구간에서 흑빵과 슈납스, 콜라를 즐기며 오스카 바르크만에게 물었다.
"그 쪽은 나이로 보건데 20년 전에도 참전했겠군?"
"그렇지."
"어디 쪽에서 싸웠소?"
"동부 전선 서부 전선 양쪽에서 싸웠지."
"거 참 대단하군."
"나 같은 녀석은 중대마다 하나씩은 있다네. 대단한건 내가 아니라 한스 파이퍼 그 양반이지."
"한스 파이퍼! 육군 참모 총장 말인가?"
"그 양반을 알고 있다고?"
형벌 부대원들은 물론이고 근처에 있던 공병, 보병들마저 바르크만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바르크만이 전차 부대 보급품에서 훔친 슈납스를 마시며 말했다.
"그 양반 전차 부대를 엄호했었네!"
"대..대단해!!"
"그 작자가 지금 쓰는 보전 협동전술의 틀을 모조리 만들어낸걸세! 천재란 그런 자를 두고 일컫는 말이지! 전투를 잘하는 병사야 소모품이네! 하지만 전쟁터에선 새로운 전술을 착안해내는 천재가 전쟁을 이끄는 법이지! 그 자 덕분에 우리가 파리까지 땄었지!"
이 소문은 전차 부대에도 퍼졌다. 오토는 한스에 대한 소문을 듣고는 생각했다.
'난 여태까지 뭘 한거지...'
스테판 또한 여태까지 많은 전차들을 격파했지만 1차대전 당시 한스가 세웠던 전공에 비해선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토가 생각했다.
'군사 학교에서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는데...'
이제 좀 있으면 도시로 들어가서 시가전을 벌여야 했다. 저격수 뿐 아니라 대전차 지뢰도 주의해야 했기에 오토는 공병 소대장 노이어에게 가서 이런 저런 지뢰에 대해 더 물어보았다. 오토는 독일의 뛰어난 기술력이 들어간 유리로 된 지뢰, Glasmine 40을 바라보았다. 이걸 밟으면 유리 파편이 사방으로 튕겨져 나갈 것 이었다. 그 때 옆에서 도살자 녀석이 얼굴을 들이밀고 이 유리 지뢰를 살펴보며 말했다.
"이게 몸 속으로 들어가면 빼기도 어렵겠군."
오토는 도살자를 보고는 고함을 쳤다.
"우아악!!"
도살자는 오토를 신경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금속 파편은 엑스레이를 찍어서라도 빼낼 수 있네. 하지만 유리 파편은 빼낼 수도 없고 계속해서 혈관 속을 돌아다니지! 난 그 어떤 부상자건 반드시 구해야 한다는 의사로서의 사명감을 갖고 있네! 하지만 이 유리 지뢰를 밟은 녀석이 차라리 죽여달라면 그 청을 들어줘야 할지도 모르겠군!"
"유리 파편은 못 빼낸다고?"
"당연하지! 혈관이나 몸 속에 들어가면 절대 못 빼내!"
도살자는 흥미로운듯이 이 유리 지뢰를 쳐다보았다.
"이게 펑! 하고 터지면 아마 불알에 파편이 박힐 확률이 높지! 으...내가 생각해도 너무 잔인하군!"
노이어 공병 소대장이 말했다.
"군부에서 유리 지뢰에도 X선으로 감지 가능할 정도로 약간의 금속을 넣어서 제작하라고 했네. 그렇기에 X선으로는 파편을 빼낼 수 있을걸세."
"그것 다행이군!"
노이어가 유리 지뢰를 쳐다보다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난 이 지뢰를 설치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모르겠네."
오토가 말했다.
"전쟁터에선 최선을 다해 상대를 죽여야 하는 법일세. 화염 방사기도 있는데 고작 지뢰 따위에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네."
"유리 지뢰가 잔인하게 인명을 살상해서가 아닐세. 이렇게 유리나 목함으로 만든 지뢰는 지뢰탐지기에 걸리지 않기 때문에 제거가 어렵네."
"그...그렇다면?"
"목함 지뢰는 부식되기 때문에 오랜 시간이 흐르면 작동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네. 하지만 이런 유리 지뢰는 백년 가까이 땅 속에서 자신을 밟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겠지."
"유리 지뢰가 묻힌 땅은 더 이상 쓸 수 없겠군."
"그렇네. 죽음의 땅이 되겠지. 20년 전에 묻은 지뢰를 어느 날 갑자기 노파가 밟을 수도 있는걸세."
공병 소대장 노이어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오토가 말했다.
"그래도 조금이나마 금속을 넣었으니 공을 들이면 모두 제거가 가능하지 않겠나?"
"그거야 그렇지."
그 때 누가 외쳤다.
"엔진, 오일, 냉각수 점검 완료!!"
이제 오토의 부대는 다시 이동해야 했다. 마침 이번 전투로 BT-7 전차를 하나 노획한 상태였고, 오토는 BT-7 전차에도 탑승해보았다.
'정찰용으로 쓰기 좋겠군...'
퀴벨바겐보단 이 BT-7 전차가 정찰용으로 든든할 것 이었다. 전차병들도 부대 이동을 위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대기하는데 마티아스가 외쳤다.
"저것 좀 봐! 멋진 손수레야!"
마을에 한 할머니는 손수레를 이용해서 빨래를 옮기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 손수레에 쓰이는 바퀴는 소련군의 트럭에서 쓰는 바퀴였다. 알프레트가 수군거렸다.
"러시아는 농민들이 쓰는 바퀴도 범상치 않군!"
"저런 바퀴는 어떻게 구하는 거야?"
"격파된 차량에서 긴빠이쳤나봐!"
그렇게 슐레프 중대는 다시 고원을 가로지르며 앞으로 전진했다. 이제 좀 있으면 내리막길이 있을 터였고, 오토는 덜컹거리는 티거 위에 상체를 내밀고 쌍안경으로 멀리 보이는 저지대 쪽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적 전차는 보이지 않았다. 티거 뒤쪽에 걸터앉은 공병 소대장 노이어가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며 궁시렁댔다.
"먼지가 너무 심하군!! 엔진 열기 때문에 궁둥이가 타들어가겠어!"
오토가 외쳤다.
"그러면 내리던지!!"
저 멀리서 우르릉 쿠릉거리며 대구경 포가 발사되는 소리가 났다. 이미 도시는 지옥으로 변했을 것 이었다. 오토와 소대원들의 표정도 어두웠다.
마티아스가 속으로 생각했다.
'그냥 탈영할걸!!'
도시에 도착하고 슐레프 중대장이 펜치를 들어올리고는 외쳤다.
"로스케들이 도심 곳곳에 피아노줄을 설치했다! 피아노줄은 얇아서 잘 보이지 않지만 궤도를 휘감기 때문에 전차를 기동불가로 만든다! 그럴때는 무전수나 장전수가 이 펜치를 이용해서 피아노줄을 제거한다!"
오토가 외쳤다.
"피아노줄을 제거하러 전차병이 나갔을때 저격의 위험이 있지 않습니까?"
"물론이다! 이 곳에 로스케 저격수들은 모두 특등 사수다! 무전수가 저격당하면 장전수가 나가서 펜치로 피아노줄을 제거한다!!"
중대의 모든 무전수와 장전수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말도 안돼!!'
오토는 식은 땀을 흘리며 손을 들고 외쳤다.
"아마 놈들은 피아노줄을 설치해둔 곳에 저격수를 배치해두고 있을 것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보병의 엄호가 필요합니다!"
슐레프 중대장이 외쳤다.
"아군도 특등 사수들을 배치하여 로스케 저격수들을 저격할 것 이다! 그러니 너무 저격수에 쫄지 말게나! 특히 오토 자네!!"
하늘은 시커멓게 변하더니 이 엿 같은 회색 도시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소련군이 여기저기 설치해놓은 피아노줄에도 빗물이 내렸다. 그리고 소련군 특증 저격수 류드밀라는 포격에 무너진 건물에 숨어서 스코프를 바라보고 있었다.
'거미줄은 쳐놨다...이제 걸리기만 기다리면 된다...'
섬세하게 설치된 피아노줄은 육중한 57톤 티거 전차의 궤도를 상당히 성가시게 할 것이다. 그걸 해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차병이 펜치를 들고 전차 밖으로 나와야 할 것 이었다. 류드밀라는 그 틈을 타 전차병의 대가리를 날릴 예정이었다.
'아마 전차장은 안 나오고 무전수나 장전수가 나오겠지..'
무전수나 장전수라도 일단 사살하면 전차 부대에 유효한 피해를 입히는 것 이었다. 그렇게 류드밀라는 사냥감이 거미줄에 걸리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티거의 기동음과 엔진 소리가 들렸다.
'티거...'
트으으응 트으으으응 트으으으응
그 티거는 류드밀라가 있는 쪽이 아니라 다른 쪽으로 진입해오고 있었다. 하지만 어차피 그 쪽 길목에도 저격수와 피아노줄이 설치되어 있었다. 류드밀라는 자신의 구역에 집중했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소총, 기관총 소리는 아군의 소리인지 적군의 소리인지 쉽게 구분이 가능했다. 그렇게 류드밀라는 머리 속으로 독일 보병이 어디까지 진입했는지, 다른 구역이 있는 아군 저격수는 무사한지 등을 알 수 있었다.
탕! 타앙!
류드밀라의 속옷과 머리에는 이가 기어다녀서 엄청나게 가려웠지만 류드밀라는 스코프에서 눈을 때지 않았다.
'파시스트 전차는 절대 혼자 기동하지 않는다..조만간 이 쪽 길로도 전차가 올 거야!'
다른 저격수가 감시하는 구역에서 들리던 티거의 기동음이 멈췄다.
'걸렸군..'
이제 티거에서 독일군 전차병이 나와서 피아노줄을 자르려고 할 것 이었다. 그 쪽 길목을 주시하고 있는 저격수 구빈 또한 특등사수였고 류드밀라는 구빈을 믿었다. 비가 와서 사계가 제한되고 있었지만 류드밀라는 계속해서 스코프만을 주시했다. 그 때
타앙!!
'???'
이건 모신나강 발사음이 아니었다. Kar98의 발사음이었다.
'4시 방향!! 근처 건물이다!!'
그리고 잠시 뒤, 티거의 기동음이 다시 들렸다.
트으응 트드등 트드드등
아마 누군가가 피아노줄 제거를 완료한 것이 분명했다. 류드밀라가 식은 땀을 흘리며 속으로 생각했다.
'어떻게 된거야!! 구빈!!'
이 순간, 구빈은 저격총을 맞아 턱뼈가 완전히 나간 채로 건물 방에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맞은편 건물에서 40대 초반의 독일군 저격수, 맥스가 Kar98k를 들고는 재빨리 자리를 이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토의 티거는 이 시커먼 도시 속에서 무사히 기동하고 있었다. 장전수 알프레트는 아까 전에 피아노줄을 펜치로 자르러 나갔다가 무사히 돌아와서는 똥오줌을 지린 상태로 완전히 정신이 나가 있었다.
"으허억...허어억..."
무전수 요하네스가 생각했다.
'다...다음에 피아노줄 걸리면 내가 나가야겠지?'
무전기에서는 대전차포와 소련군 전차에 대한 위치 정보가 계속해서 전달되었다.
"좌측 11구역 잔해 속에 적 대전차포!"
오토가 외쳤다.
"포탑 9시 방향으로! 속도 줄이고 천천히 전진한다!"
이런 시가지에서는 어디서 적 전차가 튀어나올지 알 수 없었다. 그렇기에 적 전차와 대전차포가 있는 쪽으로 포탑을 미리 돌려놓고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가야했다.
트응 트드등 트드드등
그 날 오토의 전차 부대는 전투를 마치고 대피소로 돌아왔다.
"물 있냐?"
전차병들은 서로 수통을 건네주며 소련군에게서 노획한 흑빵을 먹었다. 이제 하늘은 어둑해졌고, 거대한 중포탄이 폭발할 때마다 천둥이 쳤고 검은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그 때, 조종수 마티아스가 무언가를 보고 구역질을 했다.
"우웩!!!"
"왜 그래? 으악!!"
오스카 바르크만이 한 손에 참수한 소련군 장교의 머리를 하나 들고 대피소 안으로 들어온 것 이었다. 오스카 바르크만은 그 머리와 훈장을 형벌 부대 소대장에게 내밀며 씨익 웃으며 말했다.
"증거를 가지고 왔습니다!"
형벌 부대 소대장은 손에서 식은 땀이 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애써 태연한척하고는 말했다.
"보고서에 올리겠네. 그건 밖에 치우게."
오스카 바르크만은 마치 훈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 소련군 장교의 머리통을 들고는 쿵쿵거리며 대피소 밖으로 나갔다. 오토 또한 이 광경을 보고 얼이 빠진 상태였다. 바르크만이 돌아오자 다른 형벌 부대원들이 낄낄거리며 물었다.
"목뼈가 쉽게 잘리나?"
바르크만이 자신의 칼을 닦으며 말했다.
"살가죽 찢어내는게 어렵고 목뼈는 잘 잘리지! 인간의 피부는 생각보다 질기거든."
바르크만은 보고서를 작성하는 오토를 보고 뜻 모를 웃음을 지었다.
'오토 파이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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