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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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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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4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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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억 달러만 주세요!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류지호는 캐서린의 경고가 떠올랐다.

하지만 흥미가 동했다.


“괴짜들이요?”

“게이 디자이너도 있고, 글로 먹고 사는 대신 알코올에 절어 사는 친구도 있고, 사진 찍는 날라리도 있고, 영화 찍는 악동들도 있고...”

“잠깐!”

“.......?”

“영화 찍는 악동 누구요?”


류지호는 한껏 상기된 표정으로 물었다.


“짐도 있고, 수잔도 있고 또 누가 있더라....”


류지호는 지금 이 시기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악동을 떠올렸다.

존 자무슈, 스팍스 리, 릭 고메즈 그리고 고언 형제.

모두 인디영화의 괴짜들이다.


“저도 데려가요. 당신들의 파티에.”

“정말?”

“거기에 악동들만 와요? 헤이우드 앨런이나 스콜체제는 안 와요?”

“노땅들은 안 와.”

“아직 스콜체제가 그렇게 불릴 정도는 아닌데.....”

“패기를 잃었잖아. 둥글둥글해졌어. 영화가.”

“필모그래피가 쌓이면서 연륜이 붙고 세련되어 가는 과정이죠.”

“할리우드와 뉴욕, 양다리를 걸치는 기회주의자.”

“......!”


매튜의 평가에 류지호가 내심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마르틴은 자유를 잃었어. 그래서 뉴욕은 좋은친구(Goodfellas)를 잃었지.”


매튜는 진심으로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스콜체제는 지금 <굿펠라스>를 촬영하고 있겠구나. 내년에 상이란 상을 휩쓸고 다니고, 갱스터 영화의 3대 대작으로 두고두고 회자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맷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류지호는 스콜체제 감독의 성공을 보며 매튜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졌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꿍쳐놓았던 맥주를 모두 마셔버렸다.


“그러면 난 이만.”

“...예?”

“맥주와 상자는 지호가 대신 처리해줘. 내가 그걸 들고 나가면....!”


매튜가 류지호에게 한쪽 눈을 찡긋했다.

류지호가 박스를 들고 장서실을 나섰다.

웨이터를 불러 빈맥주병의 처치를 부탁했다.

약간의 팁을 찔러 넣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한참 찾았잖아. 어디 있었어?”


캐서린이 추궁했다.


“실내가 답답해서 바람 좀 쐬고 왔어요.“

“술 많이 마셨니?”

“하하. 위스키 한 잔... 그럼 전 이만.”


류지호는 적당히 얼버무리고, 얼른 멀어졌다.

캐서린이 잔소리를 늘어놓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마치 어머니 심영숙처럼.

캐서린은 피했지만, 윌리엄과 대니얼 두 노인에게는 그럴 수 없었다.

한동안 질문 공세에 시달렸다.


“파티는 재미있나?”

“좋은 경험이었어요.”

“뭘 느꼈지?”


대니얼이 은근한 눈빛으로 류지호를 쳐다보며 물었다.


“언젠가 저도 대기명단에 이름이 적히지 않고, 윌리엄 할아버지의 파트너가 아닌, 정식 초청자로 이 파티에 참석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그런 다짐을 하게 되네요.”

“노력만으로 안 될 텐데.”

“죽을 만큼 노력하죠, 뭐.”

“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싶은 야망은 있고?”

“저들처럼 바쁘게 옮겨 다니며 사람들과 커뮤니케이션 하는 게 아니라, 두 분처럼 그들이 먼저 몰려오게 만들고 싶네요.”

“내가 보기에 이번 생에서는 불가능할 것 같은데?”


류지호를 놀리는 것이 아니다.

대니얼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이곳에 모인 이들의 면면은 그들의 배경이 되었든 스스로의 능력으로든 하나같이 비범했으니까.


“두 분처럼 자연스럽게 나이를 먹으면 되겠죠. 몇 명 빼고. 여기 모인 대부분은 예의를 아는 사람이더라구요.”


껄껄껄.


류지호의 농담에 윌리엄이 웃음을 터트렸다.

대니얼이 피식 웃으며 빈정거렸다.


“옐로우 보이에게 한 방 먹었군.”

“어르신. 사람들은 제게 럭키 보이나 미라클 보이라고 하더란 말입니다. 사회적 지위가 높으신 분께서 동양인 비하적인 언사는 스스로 체면을 깎는 일입니다.”

“뭐?”


윌리엄이 어설픈 영어를 올바른 영어표현으로 바꿔 대니얼에게 들려줬다.

대니얼의 표정이 구겨졌다.


하하하.


윌리엄은 그 표정이 너무 우스워 크게 웃었다.


“맹랑한 녀석.”

“제 멘토가 되시는 어떤 분께서...”


류지호가 고개를 돌려 윌리엄과 눈을 마주쳤다.


“미국에서는 겸손이 때로 자기비하로 비춰진다고 하셔서요. 항상 당당하게 제 할 말을 하라고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무례하게 들리셨다면 사과드립니다.”


류지호가 대니얼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윌리엄이 입꼬리를 올리며 대니얼에게 물었다.


“어때? 내가 잘 가르쳤지?”

“흥. 샌님이라는 평가는 거두도록 하지.”


대니얼이 돌아서서 걸어갔다.

멀어지는 그의 등을 보며 윌리엄이 입을 열었다.


“항상 어른에게 예의바른 줄 알았더니 의외로구나.”

“소소한 투정이에요.“

“뭐에 대해?”

“며칠 간 저를 쇼핑 지옥에 빠트린 것에요.”


크하하하.


윌리엄이 더욱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파티 참석자들의 시선이 잠시 두 사람에게 모였다가 다시 흩어졌다.


“지호는 대니얼이 왜 그랬다고 생각했을까?”

“명품관 투어나 오늘의 상류모임에서 제가 열등감을 느끼지 않는지 허망한 탐욕에 빠지지는 않는지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셨던 모양이에요. 부자다운 오만한 시험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제 스스로가 여느 십대하고 조금은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시골에서 올라온 성공에 목마른 젊은이들은 대부분 너와 정반대의 반응을 보이곤 한단다. 뉴욕에서의 삶에 환상을 품었다가 패배자가 되어 쓸쓸이 이 무대에서 퇴장하지. 그것이 20세기 로마라고 불리는 뉴욕에서 매일 벌어지는 일들이야.”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이질적인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다양한 가치관과 삶의 양식을 존중하는 세계시민의 교양을 쌓아야 했다.

그것이 미국에서 통하고, 세계에서 통할 콘텐츠를 만들어 내는데 가장 기본적인 자세다.

그리고 지구상 어느 곳을 가던 초조해하지 않으면서 당당한 뱃심을 가져야 했다.

자신을 감추고 겸손만 떨다가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류지호가 호기롭게 말했다.


“뉴욕에 있는 동안 미국의 문화적, 사회적 분위기들, 충분히 즐겨 볼게요.”


❉ ❉ ❉


뉴욕은 5개의 자치구로 구성되어 있다.

맨해튼, 브루클린, 브롱스, 퀸즈, 스태튼 아일랜드.

맨해튼이 크기가 가장 작다.

하지만 뉴욕시의 중심이자 세계 경제의 중심이 되는 곳이다.

타임스스퀘어,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메디슨 스퀘어 파크 등등.

할리우드 영화에 나오는 대부분의 뉴욕 풍경이 맨해튼이다.

사실 뉴욕은 단 며칠 돌아보는 것으로 모든 걸 봤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작지 않았다.


“큰오빠, 놀아줘.”


류지호는 레오나를 안아 올려 팔로 받혔다.

그녀는 익숙하다는 듯 류지호의 목을 감쌌다.


“재밌게 놀자.”

“야호!”


류지호는 하루를 일정에서 따로 뺐다.

약속한 대로 레오나를 위해 썼다.

그 전에 류지호가 가방 안에서 곱게 접힌 손수건을 꺼냈다.

레오나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류지호가 펼치는 손수건을 바라봤다.

류지호가 접혀 있던 손수건을 풀어헤쳤다.

오방색의 실 팔찌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라가 주는 선물.”

“아라가 내게?”


류지호가 레오나의 손목에 오방색 실팔찌를 채워주었다.

레오나가 손목을 들어 보이며 활짝 웃었다.


“예뻐.”


기성품이 아니다.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류아라가 손수 짠 실팔찌다.


“지호 내 건 없니?”


캐서린이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저택으로 돌아가면 어른들의 선물을 꺼내 놓을게요. 원래는 귀국할 때 드리려고 했는데, 그냥 꺼내야겠네요. 캐서린의 선물에 비하면 정말...”


류지호가 무안한지 손가락으로 볼을 긁적거렸다.


“왜, 준비한 선물이 부끄러워?”

“그건 아닌데.... 선물은 선물이죠. 잠시 캐서린과 함께 한 쇼핑이 떠올라서요.”


캐서린이 장난꾸러기 같은 표정으로 웃었다.


호호호.


실팔찌를 요리조리 살펴보던 레오나가 고개를 들어 엄마를 쳐다봤다.


“엄마, 왜 웃어?”

“큰오빠가 쇼핑이 재미없었나 봐.”

“나도 재미없어.”

“왜 재미가 없었는데? 갖고 싶은 거 많이 사줬잖아.”


류지호가 물었다.


“이런 게 없잖아.”


레오나가 실팔찌를 들어 보이며 대답했다.

말도 참 예쁨 받게 한다.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고, 꼭 전해 줄게.”

“헤헤.”


하루 종일 어린이가 좋아할만한 곳만을 골라 돌아다녔다.

뉴욕수족관, 자연사박물관, 토이숍 등.

레오나는 류지호에게 찰싹 붙어 떨어질 줄 몰랐다.

그 모습이 마치 한국에 두고 온 여동생을 떠올리게 했다.

어머니 대신 아라를 업어 키우다시피 한 류지호다.

레오나도 살뜰하게 챙겼다.

매일 한국에 전화를 걸어 가족들과 통화하고 있지만, 자신만 즐기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저택으로 돌아오자마자 류지호는 선물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캐서린에게는 전통 비녀와 노리개 세트를 선물했다.


“어머, 이건 액세서리야?”

“한국의 여인들이 쪽진 머리를 고정할 때 쓰는 액세서리인데요. 일종의 머리핀 같은 거예요.”


남미계 메이드가 능숙하게 캐서린의 머리를 틀어 비녀를 꽂아주었다.

이어 윌리엄에게는 홍삼, 보성 녹차, 다기세트를 선물했다.


“차이나인가? 한국의 도자기냐?”

“비싼 건 아니에요.”


서양 사람들은 동양의 모든 도자기를 차이나라고 뭉뚱그려 칭했다.

윌리엄은 당장에 집사 브래드를 불렀다.

즉석에서 차를 우려내는 실험에 들어갔다.

당연하다는 듯 브래드는 차를 우리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레오나에게는 색동 한복을 입혔다.


“마음에 들어?”

“응! 예뻐!”

“한국의 전통의상이니?”

“색동저고리라고 해요. 어린이들이 주로 입어요.”

“나중에 한국에 오시면 어머니가 파커 가족 모두에게 한복을 맞춰주신다고 하셨어요.”


레오나는 색동옷을 입고 엄마와 함께 거울 쟁탈전을 벌였다.

저절로 한국에 있는 류아라를 떠오를 수밖에 없는 상황.

마지막으로 제임스에게는 산수화가 그려진 합죽선을 선물했다.

류지호가 직접 발품을 팔아 인사동에서 구입했다.


촤락!


류지호가 능숙하게 합죽선을 펼쳤다 접었다 시범을 보였다.

제임스가 몇 번 흉내를 내보았다.

류지호가 하는 모습이 제법 멋져 보였던 모양이다.


✻ ✻ ✻


저녁식사 후 제임스 가족은 맨해튼으로 돌아갔다.


“차 한 잔 할 테냐?”

“네. 좋아요.”


윌리엄은 선물 받은 다기세트로 보성 녹차를 우려 내놓았다.


“투자를 못 받아서 실망했었느냐?”

“아니요. 그때는 제가 충분한 준비가 되지 않았어요.”

“네 사업계획서를 들고 미스 신이 찾아왔었지. 그때 그녀가 내게 그러더구나, 겨울의 추위가 심할수록 다가오는 봄의 나뭇잎은 한층 푸른 것이라고. 역경에 단련될수록 큰 인물이 될 거라고. 이 할아비는 그녀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그러셨군요.”

“섭섭했더냐?”

“그렇지는 않아요. 단지.”

“단지?”

“미스 신이 놓치고 있는 것이 있다고 생각해요. 작은 그릇에는 적은 물만 담기고, 큰 그릇에는 더 많은 물을 담을 수 있다는 것을요.”


단순히 큰 투자가 큰 이익을 얻는 다는 말이 아니다.


“네가 그릇이 큰 사람이란 의미냐?”

“사람의 그릇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제게 그릇을 주고 물가에서 물을 길어오라고 시키신다면 저는 큰 그릇을 달라고 하겠어요. 작은 그릇으로 여러 번 왔다 갔다 하는 것보다 한 번에 길어오는 것이 힘들어 중간에 쉬어가더라도 저는 큰 그릇을 사용하겠어요.”

“안전하게 갈 것이냐, 힘들더라도 무모한 도전을 할 것이냐?”

“작은 그릇으로 여러 번 오가면 다리만 튼튼해지지만, 큰 그릇을 들고 오가면 팔과 다리가 함께 튼튼해지지 않을까요? 물론 넘어지면 큰 낭패를 보고, 물을 길어온 후에 퍼져버릴 수도 있지만.... 그건 두 그릇 모두에 해당될 거라고 생각해요.”

“재미있는 비유구나.”

“물가가 가까우면 의미 없는 가정이에요.”


호로록.

말을 마친 류지호가 차를 마셨다.


“주식에 투자한 것으로 충분하지 않아? 돈을 많이 벌고 싶은 것이냐?”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요.“

“똑 부러지게 말하던 지호는 어디 갔지? 이럴 때는 또 애매하게 말을 하는구나.”

“현재 할 수 있는 것부터 시도하고 경험해보고 싶어요. 실패하더라도 데미지가 작은 것으로요.”

“실패를 염두 해 두고 일을 벌였다는 것이냐?”

“예.”


윌리엄은 망할 생각을 하면서 사업을 시작했다는 말이 재밌었다.

젊은 창업자의 장점일까?

류지호에게서 청춘을 담보삼아 과감히 경험과 실패를 맞바꿀 배짱이 엿보였다.


“주가도 많이 올랐다고 하던데, 그것은 그대로 놔둘 생각이고?”

“전장에 나가는데, 뒤에 적을 두고 나가는 장수는 없잖아요.”

“적이라고?”


윌리엄 표정을 굳히며 물었다.

헌데 류지호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가난이라는 적이요.”

“전쟁터는 또 뭐고?”

“인생은 전쟁터고 하루하루는 전투라잖아요. 후방을 안전하게 다져놔야죠.”


윌리엄은 류지호와의 대화가 점점 재미가 있었다.


“허허. 어린 녀석이 너무 신중한 것 아니야?”

“신중해야죠. 사업이건 인생이건 장난이 아니잖아요.”

“내가 얼마든지 도울 수 있는데? 이미 일정부분은 내 도움이 있었다만? 투자를 얻어내는 것도 능력이야.”

“파커 패밀리는 특수한 경우에요.”

“가족 사이에도 함부로 돈 거래를 하면 안 되는 법이지.”


윌리엄이 말하며 찻잔을 들었다.

대화가 멈췄다.


호로록.


잠시 두 사람은 차를 음미했다.


“앞으로 무얼 할 생각이냐? 결혼비디오로 만족 할 테냐?”


언제고 류지호가 대답해야 할 질문이다.

잠시 할 말을 정리한 류지호가 입을 열었다.


“처음 돌아왔을 때... 어릴 때는 무얼 해야 하나 방황했던 적도 있었어요. 방송제 때 비디오를 찍으면서 알겠더라고요. 천직이라는 것이 멀리 있는 게 아니구나.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다른 것보다 조금 더 잘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천직이 아닐까.”


윌리엄은 대화하는 내내 한시도 류지호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처음 보았을 때 어딘지 죽어있던 회색 눈.

오죽하면 윌리엄이 신효정에게 ‘생선의 눈깔‘이라 표현했을까.

지금은 그때와 상당히 달랐다.

눈빛이 맑게 빛나고 있다.


“할아버지......!”

“......”

“영화를 할 겁니다. 그리고 영화처럼 살겠어요.”

“그럼 영화를 찍지 왜 결혼식비디오를 찍고 있어?”

“제 힘으로 시드머니를 마련하고 싶어요. 십대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요.”

“다른 걸 시도해 볼 수 있을 텐데?”

“지금은 할 줄 아는 게 없어요. 비디오 찍는 것 말고는.”

“제임스는 네가 주식 투자와 사업에 재능을 보인다고 하더구나. 그 방면으로 공부를 하면 되지 않아? 이 할아비는 네가 공부를 꽤 잘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만.”

“제 길이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이미 저는 제 길을 정했거든요.”

“그 길, 이 할아비에게 미리 말하지 그랬느냐?”

“그럴 수 없었어요.”

“왜?”

“그랬다면 할아버지는 영화를 찍으라고 돈을 듬뿍 안겨주시거나 영화사를 통째로 사서 저한테 주려고 했을 걸요. 그 때 파커 사람들은 정말 뭐든 해주려고 했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하하하.


윌리엄이 서재가 떠나가라 대소를 터트렸다.

꾸며서 이야기 하는 것인지.

사실을 솔직하게 말하는 것인지.

윌리엄 같은 이들은 이야기를 듣다 보면 안다.

적어도 거짓말이나, 미리 준비한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재밌다.

그리고 대견했다.


“사람을 보라고 제게 충고하셨어요. 100억을 제게 준들 그 가치가 파커 패밀리와 비할 수 없잖아요.”

“지금 이 이야기를 대니얼이 들었어야 했는데. 아쉽구나. 정말 아쉬워....”

“예?”

“아니다 아무 것도.”

“인디언 모터사이클 아세요?”

“오토바이 메이커 회사 아니냐?”

“맞아요. 그 회사에서 만든 엔진으로 경주대회에서 최고속도를 기록한 사람이 버트 먼로라는 분이에요. 그분이 기록을 세운 나이가 63세에요.”

“그 사람... 참으로 정력적이구나.”

“그분은 밀링머신으로 30분 걸리는 부품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 수작업으로 무려 40시간 동안 직접 깎아냈다고 해요. 자신만의 머신을 만들기 위해 10년 동안 매일 15시간 이상을 쏟아 부었고요. 그가 그랬어요. 꿈을 좇지 못한다면 식물인간이나 다름없다고. 자기는 그저 전속력으로 달리고 싶은 것뿐. 누가 뭐래도 그게 자신의 삶이라고 말했대요.”


류지호는 영화 <세상에서 가장 빠른 인디언>의 대사를 인용했다.

버트 먼로는 일평생을 속도에 삶을 바쳤다.

결국 ‘속도의 신‘이라고 불렸다.

나이 63세에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는 인디언 모터사이클 최고속도 190.07 마일(시속 305.9km)의 공식 기록을 세운 불세출의 인물이다.


“영화란 작업이 취미가 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파커가 도와주면 쉽게 뭔가를 얻을 수 있어요. 하지만 그것이 온전히 제 것이 아닐 것 같아 싫어요. 실패는 제게 지긋지긋한 친구에요. 이번에는 그 놈을 멀리하고, 성공이라는 저 멀리 있는 친구를 사귀어 볼 겁니다. 재능이 조금 부족하면 어때요? 버트 먼로처럼 10년 20년 최선을 다해 제 머신의 부품을 깎고 다듬으면, 그처럼 최고가 될지도 모르잖아요.”

“그렇지. 넌 그보다 젊으니까.”


잠시 망설이던 류지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 G&P에 벤처투자 파트가 있다고 들었어요.”

“있지.”

“그들에게 투자유치를 위한 사업설명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싶다?”

“예.”

“흠. 그들은 네 사업의 규모에 만족하지 못할 걸.”

“그렇겠죠.”


수긍하는 류지호의 표정은 흔들림이 없었다.

아직 실리콘밸리 스타트업 투자도 활성화가 되지 않은 시기다.

게다가 미국 기업도 아니고.


“무엇으로 그들을 설득할 테냐?”

“그들이 원하는 걸 보여줘야죠.”

“그게 뭐지?”

“규모를 원하면 키울 수 있다는 비전을 제시하고, 막대한 이익을 원하면 그걸 충족시켜줄 구상을 공개해야겠죠.”

“방금 전까지 영화를 하겠다고 했다, 지호야.”

“후우. 그러니까요.”


류지호는 살며시 한숨을 쉬며 맞장구를 쳤다.


“현재의 한국영화시장은 할리우드의 B무비 영화 시장보다 작아요. 인프라는 말할 것도 없고요. 그에 비하면 웨딩산업이 훨씬 규모가 크고 안정적이죠. 현재는 대기업의 자본력이나 할리우드 스튜디오 아니면 한국영화판에서 비벼보지도 못해요. 인프라나 관객수나 기술이나 모든 것이요.”


윌리엄이 장난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아까 전의 패기는 어디 갔지?

“10억 달러만 주세요. 제가 대한민국의 영화판을 접수할게요.”

“그것이면 되겠냐?”

“일단 그걸로 미국처럼 주요 도시에 멀티플렉스 상영관을 만들고, 콘텐츠가 필요하니까 매년 한국영화 20편에 투자, 제작하고, 멀티플렉스가 운영되기 전까지 운영자금이 필요하고 또...”

“그만 하면 됐다.”


파커 가문은 수십조 재산을 가지고 있다.

윌리엄 독단으로 10억 달러(대략 7000억 원) 투자결정, 못할 것도 없다.

다만 그에 걸맞은 사업이어야 한다는 전제가 붙는다.

제아무리 레오나를 구해준 가문의 은인이더라도 밑도 끝도 없이 퍼주진 못한다.


“돈을 벌기 위해 혼자서 엄청난 돈을 들여 인프라를 만드는 것도 웃기잖아요. 그 투자금이 언제 회수될지도 모르는데. 영화를 찍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서울 관객 100만 명의 기록을 세우는 흥행영화가 한편 나와도 제작자가 가져가는 돈은 실제 얼마 안 돼요. 그리고 실제 한국영화 평균 관람회수는 일 년에 2편도 안되고요.”


윌리엄은 가만히 류지호의 열변을 들었다.


“두 번의 결혼시즌을 실제 해보니까 웨딩비디오가 왜 아직은 수요가 없는지 알게 되었어요. 소비자의 소득수준, 새로운 문화에 대한 수용력 등 다 시기와 타이밍이 있더라고요.”


스마트폰 같은 혁신적인 것들이 나타날 때, 개발 되자마자 출시되는 것이 아니다.

출시되었다고 곧바로 불길처럼 유행이 번지지도 않는다.

그것과 연동된 분야와 소비자의 욕구가 맞아 떨어져야 하는 것이다.

앞으로 영화투자를 하든, 영화를 직접 제작하고 연출하게 되던, 그것이 통할만한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한다는 걸 류지호는 웨딩비디오 사업을 하며 알 수 있었다.

선도자의 입장도 마찬가지다.

까딱 잘못하면 기껏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놓고도 열매는 다른 사람이 따먹을 수도 있다.

충동적으로 일을 저지르다간 남 좋은 일만 시킬 가능성이 높다.


탁.


윌리엄이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해봐.”

“예?”

“맨해튼에 있는 그들에게 네 비전을 보여 봐.”

“정말이요? 제게 기회를 주시는 거예요?“

“그렇게 경험을 쌓아. 축적된 경험은 결코 배신하지 않는 법이니까. 경험이 가장 훌륭한 스승이다.”


벌떡!


류지호가 일어서서 윌리엄에게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감사합니다!”


류지호는 기쁨을 참지 못하고 그 기분을 여과 없이 표정과 몸짓으로 표출했다.

윌리엄 역시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물으마. 대학은 어떻게 할 생각이냐?”

“가야죠.”

“이왕이면 뉴욕으로 오면 좋겠는데....”

“그건 조금 더 고민해 보고요. 처음 유럽을 생각 했었는데... 암튼 미국으로 올 생각이에요. 매우 재미있을 것 같아요.”

“기대하마.”

“대학에서 제대로 여자 친구를 사귀고 싶어요. 캠퍼스 커플도 제가 해보고 싶은 것 중에 하나거든요.”


류지호는 농담인 듯 진담인 듯한 말로 마무리했다.


“그렇지. 남자에게 여자는 매우 중요한 존재이지.”


한동안 서재에 윌리엄과 류지호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 ❉ ❉


티타임을 마친 류지호는 저택 정원을 산책했다.


“신변이 중간에서 장난질을 친 다면 함께 가기 힘든데....”


신효정의 태도가 어딘지 우스웠다.

자신의 똑똑함을 과대평가하고, 자기중심적으로 사고하는 사람들.

함께 일하면 매우 피곤하다.

아니, 그런 이들은 언제고 사고를 친다.

통제할 수 없는 독선적인 사람.

아무리 뛰어난 인재라고 하더라도 방해만 된다.


‘그녀와 툭 터놓고 이야기를 해야 하나? 아니면 모른 척 넘어가?’


옛말에 길이 멀어야 말의 힘을 알 수 있고, 날이 오래 지내야만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계속해서 고문변호사로 남을지, 아니면 해고될지.

신효정 본인에게 달렸다.


‘부디 옳은 말을 했을 때 들을 준비가 되어있기를.....’


이제라도 그녀와 자신의 관계를 바로잡으면 된다.

류지호가 저택으로 돌아오자마자 집사 브래드를 찾아갔다.


“필요한 것이 있으십니까?”


시종일관 흐트러짐 없이 공손한 브래드다.


“혹시 제가 업무를 볼 수 있는 공간이 있을까요?”

“어떤 업무를 보실 겁니까?”

“프레젠테이션 준비를 하려고 합니다. 필요한 것들이 한 장소에 있었으면 좋겠네요.”

“무엇을 준비해 드릴까요?”

“컴퓨터와 프린터. 오버헤드 빔 프로젝터를 준비해 주세요. 지금으로서는 그게 답니다. 그리고 미스 신을 불러주세요.”

“알겠습니다. 2시간만 제게 시간을 주십시오.”

“고마워요.”

“별 말씀을.”


브래드는 정확히 2시간 만에 류지호가 잠자는 방 옆에 업무용 공간을 세팅해 주었다.

이런 이들이야말로 진짜 프로가 아닐까.

신효정으로 복잡했던 머리가 브래드의 일처리로 조금은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신효정이 저택으로 왔다.


“신변호사님.”


류지호는 전에 없이 진지했다.

프레젠테이션 때문이겠거니.


“제 나이를 보지 마세요.”

“.....?”

“제가 함께 일하거나 컨택하는 사람들은 모두 열 살 이상 나이가 많은 사람들입니다. 저를 그들처럼 동등한 위치로 대할 수는 없습니까? 미국에서 공부하셨잖아요. 그것도 하버드라는 세계 최고의 학교에서. 한국의 꼰대들처럼 ‘미성년자는 능력이 안 돼‘라거나 ’어린놈이 뭘 할 수 있겠어‘ 그게 미국에서 공부한 사람이 취할 태도는 아니지 않습니까?”

“어린 아이로 대한 적이....”


신효정이 잠시 말을 끊었다가 이어 말했다.


“....없다고 생각해요.”

“과연 그랬을까요?”

“전도유망한 파트너로 생각합니다.”

“제가 뭔가 증명해 보이기 전에도 그랬을까요?”

“......”

“저를 겪어본 사람들이 절 패기만 넘치는 애송이로 대하던가요? 웨딩비디오를 하며 인연을 맺은 정종택 이사님, 고등학교 선배인 박상우 기사님. 아네모네 채 사장님. 그리고 수억 달러를 움직이는 제임스 파커.”


신효정은 류지호가 말하는 바를 알아듣지 못할 바보가 아니다.


“제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나요?”

“제게 아부하거나 잘 보이려고 애쓰실 필요 없어요. 그저 파트너로 생각하셔야 할 겁니다. 아니면 신변호사님과는 제가 일을 못합니다.”

“그게 다에요? 그렇게 하면 함께 갈 수 있다는 거군요.”


류지호는 신효정이 충분히 알아들을 것으로 생각했다.


‘나와 함께 끝까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려면 부디 자의적으로 판단해 멋대로 뭔가를 하지 마세요.‘


류지호는 그녀가 현명한 선택을 하기를 바랐다.

그녀는 류지호의 부채장부 어디에도 이름이 적혀있지 않다.

언제든 인연을 끊을 수 있단 의미다.


작가의말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뜻한 바 모두 이루시는 한 해가 되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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