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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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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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4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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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09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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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불생무록지인 지부장무명지초.... (1)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류지호는 막바지 인테리어 공사를 하고 있는 연하대의 아네모네로 향했다.

류지호에 대한 호칭이 정리된 모양이다.


“류 실장 왔어?”


채연지가 류지호의 손을 잡고 아네모네 안으로 이끌었다.

아직 집기들이 들어오지 않은 휑한 실내.

류지호가 해외잡지를 검토하며 머릿속으로 그렸던 인테리어 그대로다.

채연지가 기대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어때?”


류지호는 일단 대답을 유보하고 실내를 돌아봤다.

출입문 벽면은 통유리로 둘러 시원한 느낌이 들었고, 안쪽 벽은 붉은 벽돌과 황토색 벽돌이 돌출되고 때론 평평하게 비규칙적으로 마감되었다.

천장은 높았다.

홀에서도 주방의 일부가 보일 수 있도록 개방형으로 인테리어 했다.

모던한 카페 분위기와 전통적인 주점이 혼합되었지만, 21세기에도 손색이 없을 만큼 그럴 듯 해보였다.

마지막에 화장실까지 확인한 류지호는 만족감을 드러냈다.


“멋지네요.”

“돈이 얼마가 들였는데.”

“연하대 개강에 맞춰 오픈할 수 있어요?”

“가능할거야.”

“고생하셨네요.”

“고생은 뭘.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그것도 그러네요. 개강하면 단골손님들에게 모니터링 해보세요. 가격, 안주의 맛, 분위기 같은 것들이요. 불량한 고등학생은 절대 받지 마시고, 손님 물 관리에 신경 쓰시고요.”

“장사는 맡겨둬. 내 전문이야.”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았네요.”

“호호호. 공자 앞에서 문자 쓴 격이지.”


한동안 채연지와 미국여행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후 류지호가 선물을 꺼냈다.

유명한 명화가 프린팅 되어 있는 스카프다.


“미국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만 판매하는 스카프에요.”


물 건너 온 물건은 무조건 자랑거리.

짝퉁도 아닌 오리지널이면 말 할 필요도 없다.

미국 뉴욕, 그것도 미술관에서만 파는 거라고 하자 채연지의 입이 함지박 만해졌다.

류지호는 신포동으로 이동했다.

신신예식장의 정종택 이사를 만났다.

봄 시즌 예약률에 대한 이야기부터 업계의 동향에 대해 여러 대화를 나누고는 역시 선물을 꺼내놓았다.


“뭐, 이런 걸 다 사오고.... 용돈도 모자랐을 텐데.”

“따님 갖다 주세요.”


정종택에게는 타임스퀘어 M&M 월드에서 사온 초콜릿을 선물했다.

동인천에 나온 김에 신포고 방송실로 찾아가 친구들을 격려하고, 다방에서 장문식을 만나 경호원들에 대한 뒷조사 내용을 들었다.


“정신병으로 병원치료 받은 기록은 없어. 둘 다 운동하는 것 말고는 별다른 취미생활도 없고, 술담배도 안하고, 걔들 고자인지 여자도 안 만나. 나도 처음에 그 보고서 읽고 걔들 절간에서 내려온 중인 줄 알았다.”

“군대는 자연스럽게 제대한 겁니까?”

“불명예제대는 아냐. 군 생활도 꽤 잘했대.”

“다행이네요. 수고하셨어요.”

“수고는 뭘....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류지호가 경호원들 뒷조사 내용이 담긴 서류를 가방에 챙겼다.

장문식이 기대가 섞인 어조로 물었다.


“자, 그럼 난?”

“수고비 챙겨 줬잖아요.”

“자식이! 나는 합격이냐고?”


류지호가 의아한 얼굴로 장문식을 빤히 쳐다봤다.


“네가 내 후다 딴 거 모를 줄 알았냐? 어디서 아마추어를 풀어서 이 형님 뒤를 캐?”


류지호는 내심 깜짝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왜요? ‘넌 내게 모욕감을 줬어’ 라고 말하고 싶어요?”

“다음부턴 뒷구멍으로 야료 부리지 말고, 그냥 다이다이로 툭 까놓고 물어봐.”

“생각보다 덜 조폭스럽다더라구요.”

“난 민간인은 안 건드려.”

“민간인을 건드리지 않는다고 해서 조폭이 활빈당이 되는 건 아니죠.”

“활빈당? 우린 정치깡패 아닌데?”

“홍길동전에 나오는 의적 무리에요. 부자 재물을 빼앗아 가난한 민초들 도와주었다는.”

“우리가 가난한데 누굴 도와. 그럴 거면 건달이 왜 됐겠냐?”

“장부장님하고 저하고는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이 딱 좋아요.”

“새끼가... 먹물 좀 빨았다고 문자 쓰는 거 봐라~”

“너무 가까이도 하지 말고, 너무 멀리도 하지 않는 관계. 그렇게 지내요 우리.”

“똥물 묻히기는 싫다?”

“양지로 나와서 떳떳하게 살면 한 번 생각해 볼게요.”

“아오! 이 새끼를 확 담궈 버릴 수도 없고. 형수님만 아니면 그냥 콱!”


장문식이 얄미워 죽겠다는 듯 가슴을 두드렸다.


“나중에 험할 꼴 당하지 말고, 빨리 전업을 하는게 좋을 걸요.”

“내 직업이 어때서? 밤무대 가수들 케어해 주고 정정당당하게 수수료 떼 가는 엄연한 연예사업자야.”


당사자에게 물어보면 절대 정정당당하다는 소리 못들을 텐데도 잘도 지껄이는 장문식이다.

류지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는 이만 가볼게요.”

“야, 뭐 잊은 거 없어?”

“......?”

“이거, 치사하고 쫀쫀한 자식일세!”

“......?”

“나는 선물 없냐?”


가볍고 건들거리는 투가 이럴 때 보면 영락없는 양아치다.

하지만 그는 절대 만만하게 볼 조폭이 아니었다.

신효정이 해결사 사무실을 통해 알아본 결과 꽤나 가려진 게 많은 사람이다.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베일에 가려진 히트맨.

얼마나 일처리가 깔끔한지 전과가 한 번도 없는 폭력조직의 행동대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뒷골목 누구나 인정하는 칼잡이.

특전사 출신의 보디가드를 긴장시킨 진짜배기 건달이었다.


“자요. 아우들하고 나눠 먹던가 하세요.”


류지호가 가방에서 M&M 초콜릿을 꺼내 테이블에 놓고. 다방을 빠져나갔다.

장문식이 상자를 개봉해 초콜릿 하나를 꺼내 입안에 넣었다.

초콜릿을 입안에서 살살 녹이던 장문식이 툭하고 말을 내뱉었다.


“물 건너와서 그런가? 달콤하네. 쓰벌~”


❉ ❉ ❉


송골송골 맺힌 땀이 흙바닥에 뚝뚝 떨어지고 있다.


“헉헉.”


류지호는 폐가 찢어질 듯한 고통에 가쁜 숨을 토해냈다.

용연국민학교 운동장.

태권도복을 입은 관원들이 운동장 여기저기에 널브러져 있다.

류지호는 고개를 돌려 단상을 바라봤다.

팔짱을 끼고 장승처럼 서있는 홍관장이 악마처럼 보였다.


“쉬었으면 오리걸음 왕복 실시!”


홍 관장이 손가락으로 100미터 달리기 라인을 가리키며 명령했다.

류지호가 이를 악물고 오리걸음을 했다.


‘난 선수도 아닌데 왜 이걸 해야 하는 거냐고!’


류지호는 속으로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가벼운 마음으로 도장을 찾아갔더니 홍 사범이 다짜고짜 류지호를 이곳으로 이끌었다.

선수로 뛰는 관원들의 동계체력훈련이라는데, 류지호는 자신과 무슨 상관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반항을 했다.

하지만 홍 관장이 류지호를 선수들 사이에 밀어 넣었다.

운동장 구보 후 스트레칭과 휴식, 오리걸음 후 스트레칭과 휴식, 왕복 발차기 후 스트레칭과 휴식.

단순 행동이 쉴 새 없이 반복되었다.

2시간이 지났을 때부터 훈련을 받는 관원들에게는 악다구니 밖에 없었다.

하체단련이라는 명목으로 행해지는 학대.

류지호는 비인간적인 훈련방식에 반항을 했다.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허벅지는 터질 것 같았고, 종아리는 바늘로 콕콕 찌르는 것처럼 아파 미칠 지경이다.

씩씩 숨을 내뱉으며 다들 홍 사범 앞에 도착했다.


“눈빛들 조오타~.”


선수부 관원들이 후들거리는 다리를 진정시키기 위해 이를 악 물었다.


“어때 버틸 만 해?”

“···예.”


구보와 오리걸음, 발차기만 죽어라고 했는데 버틸 만 하냐고?

류지호가 고우찬을 돌아봤다.

땀을 비 오듯 흘리고 있었지만, 견딜 만 한 모양이다.


“스트레칭하며 편히 쉬어라.”

“편히 쉬려면 아무것도 안해야죠.”


류지호가 투덜거렸다.

고우찬이 한쪽에 놓여있는 주전자와 컵을 가져와 선배들에게 물을 따라줬다.

도장 선배들이 냉수를 벌컥벌컥 마시고 한마디씩 늘어놨다.


“으아, 달다.”

“이 맛에 체력훈련 한다, 나는.”

“게토레이보다 역시 냉수가 최고여~”


류지호는 냉수로 차오른 열기를 일단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

자신의 곁으로 홍 관장이 다가오자 류지호가 따졌다.


“저는 선수도 아닌데 왜 이 짓을 해야 하는 겁니까?”


홍관장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미국 물 좀 빼주려고.”

“미국에서도 매일 아침마다 태권도 수련 빼먹지 않았습니다만.”

“그게 수련이었겠냐? 체조였겠지.”

“저는 그걸로 충분하다고요.”

“스승한테 대들 체력이 남았나 보다? 몇 바퀴 더 돌아볼 테냐?”


류지호는 더는 투덜거리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윌리엄은 기업가로서의 자세를, 아버지 류민상은 성현들의 글귀를, 홍관장은 육체와 정신을 단련시키는 것을 가르친다.

그들 모두 류지호를 아끼는 마음은 같았지만, 가르침의 방식은 달랐다.

가끔은 그들의 충고와 가르침이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시험문제를 반복해서 푸는 것 같았다.

그들의 관심과 애정이 싫지 않았지만, 하루 빨리 성년이 되길 소망하는 류지호다.

그래야 이런 말도 안 되는 가르침을 받지 않아도 될 테니까.


“단전호흡은 꾸준히 하고 있냐?”

“예.”

“내가 소싯적에 전통무예를 수련하는 선사들을 찾아다니며 귀동냥으로 이것저것 주워들은 게 많다. 어떤 분은 우리처럼 몸으로 수련하는 거와 달리 먹물로 무예를 익히는 분도 계셨지. 아마 너처럼 대가리 굴리는 놈하고 그분들이 죽이 잘 맞을 거야.”


홍 관장은 전통무예를 학문적으로 접근하는 학자들을 예로 들며 생각이 많은 류지호의 태도를 꼬집었다.

고우찬이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혹시 그분들이 관장님께 단전호흡을 가르쳐 주신 분이이세요?”

“그래.”

“그 분들은 내공이 있어요?”

“하여간 무협지가 순진한 애들 다 버려놨어. 왜 어깨 너머로 배워서 내공이 안 생겨?”

“진짜 내공이 생기는 거예요?”

고우찬이 깜짝 놀라 물었다.


허.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흘린 홍 관장이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뗐다.


“가부좌하고 앉아 봐라.”


류지호가 자세를 고쳐 가부좌를 하고 앉자, 덩달아 고우찬도 가부좌를 틀었다.

홍사범과 정사범이 가부좌를 틀자, 선수들도 얼른 따라했다.


“어깨 너머로 배운 호흡 한 번 해봐.”


고우찬은 몸을 꼿꼿이 세우고 숨을 끝까지 들이 쉰 다음 얼굴이 빨개질 때까지 참았다.

그 상태를 유지하면서 머리가 어지러울 때까지 속으로 초를 세었다.

그리고 난 뒤 다시 참았던 숨을 조금씩 일정하게 잇새로 내보냈다.


“스으으으으으-.”


산소부족으로 기절할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고우찬은 호흡을 반복했다.


“그만! 미련한 녀석..”


고우찬은 단전호흡 입문이란 책에 나온 대로 단전호흡을 선보였다.

그런데 홍관장은 딱하다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책에서 이렇게 하라고 나오던데요?”

“단전호흡은 쉽고 안전한 숨쉬기다. 어렵거나 부자연스럽다면 그건 단전호흡이 아니야.”


이래서 모든 수련은 잘못 된 것을 바로잡아 줄 스승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요추2,3변 사이 명문혈과 배꼽을 연결한 아랫배로 하는 깊은 호흡. 폐로 숨을 쉬는 것이 아니라 그 아랫배에 호흡기관이 있다고 상상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단전이라는 아랫배를 풍선이라고 상상해 봐. 그런 후 골반의 중심인 선골의 정중앙을 풍선의 주둥이라고 생각하고 그 곳을 통해 숨이 들어가고 나간다고 생각하고 호흡을 하는 거지. 그 곳을 호흡으로 자극하면 기혈의 흐름이 좋아지고, 뇌에 산소공급이 원활해지지.”

“지호야, 우리 진짜 내공심법 전수 받는 거야?”


류지호가 입술에 검지를 대며 고우찬의 말을 막았다.


“숨을 쉬는 것은 자연스럽고 편해야 해. 호흡이 숨을 쉬는 노동이 되면 안 되는 거야. 우찬이가 조금 전에 했던 그런 것처럼.”


수련생들은 홍 관장의 말을 하나라도 놓칠라 집중했다.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보인다고 생각하는 것이 중요해. 집중해서 바라보고 느껴야 하는 거지. 처음에는 감각도 없고 보이지 않겠지만 말이야. 이걸 내관이라고 하는데, 풀이 하자면 내면을 집중해 의식을 호흡에 집중한다는 말이지. 집중과 몰입. 좀 유식하게 말하면 정기신통일 즉 의식과 호흡이 하나 되는 것이야. 호흡을 행할 때 무의식 속에 들어가는 것이 중요해.”


류지호가 물었다.


“명상을 하다보면 들어간다는 그 무의식이요?”

“집중을 위한 집중이 아니라. 진정한 무의식 세계로 들어가야 하지.”

“그게 실제로 가능한 건 가요?”

“가능해. 무척 어려워서 그렇지.”


고우찬이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그럼. 막 내공도 생겨요?”

“내공이라... 우리 장작불을 피우는 걸 생각해 볼까. 아랫배에 장작을 준비하고, 마음 또는 무의식이라고 칭하는 그 무엇이라는 불씨를 장작에 던져 놓고 숨쉬기라는 바람을 일으켜 단전이라는 공간에 불을 활활 일으키는 거야. 그럼 그 불길이 사지육신의 기경팔맥을 타고 돌지 않을까?”

“오오! 내공심법!”


내공이 실제 하든 그렇지 않든 고우찬이 있다고 믿으면 그만이다.

올바른 수련방법으로 꾸준히 수련한다면 고우찬에게 분명 도움이 될 테니까.


“격투기가 많이 깊어지면 명상을 하지. 저기 홍 사범처럼. 명상이 곧 호흡법이고, 호흡법이 곧 내기를 다스리는 법이거든. 하다못해 검도를 끝내도 묵상을 하지. 내공이 안 생기면 또 어때? 매일 단전호흡을 하면 긴장을 풀어주는 호르몬을 증가시켜줘, 스트레스 해소와 정신적 안정과 집중력을 활성화 해준다. 질병치료와 예방에 도움이 되지. 단전호흡을 하면 머리가 맑아지고 장이 따뜻해지게 되어 생리적으로는 입에서 침이 나오게 된다. 즉 자연치유력이 극대화 되어 몸이 아주 건강하게 되지.”


‘내공이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그냥 몸으로 때우라는 말인가?’


고우찬은 홍 관장이 이야기한 것에 절반도 이해하지 못했다.

이후로 두 시간을 더 체력훈련을 받았다.


“오늘도 고생했다.”


류지호와 관원들은 파김치가 되어 목욕탕으로 향했다.

관원들이 샤워를 마치자, 홍 사범이 열탕으로 들어갈 것을 명령했다.


“피로한 몸을 뜨거운 물에 담그면 신진대사를 높여줘 손상된 세포를 회복하게 하는 단백질을 생성시킨다고 한다. 그리고 뜨거운 탕 속에서 신체 감각에 의식을 향하면 약간의 명상을 하는 효과도 있다고도 한다. 운동하고 샤워로 땀만 닦아내지 말고, 열탕에서 피로를 푸는 습관을 들여라.”


고우찬의 입에서 절로 기분 좋은 탄성이 흘렀다.


“으아~ 조오타.”


그 옆으로 류지호가 자리를 잡았다.


“민아는?”

“잘 있어.”

“잘 만나고 있는 거지?”

“엉.”

“잘 해줘라.”

“내가 맛있는 거 얼마나 많이 사주는데.”

“그러다 민아 돼지 된다.”

“돼지 되면 어때. 내가 좋으면 그만이지.”

“놓치지 마라. 너한테 과분한 애야.”

“당연하지.”


류지호는 몸의 물기를 닦아내고, 거울 앞에 섰다.

한 동안 이발을 하지 않아 머리카락을 잘라야 하나 고민하는데.


‘어?’


류지호는 뭔가 어색했다.

옆에 서있는 고우찬의 키가 어쩐지 줄어든 느낌이 들었다.

거울에서 뒤로 몇 걸음을 물러나 자신의 몸을 유심히 살폈다.

꾸준히 운동을 했더니 몸이 불었다.

허옇고 빼빼마른 체형은 사라지고 살이 붙고 근육이 붙어 있다.

거울에 비친 류지호의 얼굴.

적당히 까무잡잡한 피부에 이목구비가 뚜렷해졌다.

분명 최원석이나 한수호처럼 미남은 아니다.

짙은 눈썹과 선명해진 이목구비, 살짝 가무잡잡한 피부 톤이 은근히 남성미를 풍겼다.

성장기여서 그런지 운동도 꾸준히 하고, 잘 먹다 보니 전체적으로 살도 찌고, 근육도 단단해 진 것 같았다.

게다가 키도 조금 자란 것 같고.


‘내일 도장에 가면 키부터 재봐야겠어.’


운동을 꾸준히 한 덕분에 기초체력이 좋아졌고, 체형은 교정돼서 탄탄해졌다.

단전호흡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한 덕분인지 안색까지 맑아졌다.

이전 삶의 찌푸린 표정에서 환골탈태해 자신감 넘치는 건강한 표정을 짓는 청년이 됐다.


‘헉!’


류지호의 등 뒤에서 고릴라 한 마리가 출몰했다.


씨익.


한 인간과 고릴라 한 마리가 거울 속에서 웃고 있었다.


“땀 빼니까 양키 물 좀 빠져?”


고우찬이 옷을 갈아입으며 류지호에게 물었다.

류지호의 지인들은 미국에 다녀온 것을 부러워하기도 하고, 헛바람을 우려하기 했다.


“한 십년 살다 왔냐? 겨우 이십일 있었는데, 무슨 미국 물이 들어. 물맛만 보고 온 거야.”

“물맛은 어떤데?”

“달더라.”


류지호는 뉴욕 생활이 너무 달콤해서 중독될 뻔 했었다.


“다음엔 나도 데려가 너 혼자 재미 보지 말고.”

“그래야지. 우리 모두 큰물에서 놀아보자.”

“...지호야?”

“왜?

“너 중학교 때는 이렇지 않았잖아?”

“대오각성이라고 있어.”

“무협지에서 나오는 말?”

“무협지 좀 그만 봐. 그러고 보니 내가 미국 가 있는 동안 공부 소홀히.... 야, 어딜 도망가!”


후다닥.


고우찬이 서둘러 옷을 입고, 목욕탕을 빠져나갔다.

류지호가 공부하자고 하면 난감해지기 때문이다.

고우찬은 마냥 도망칠 수만은 없었다.

두 달 후에 검정고시를 봐야 했기 때문에.


“나 좀 그만 괴롭혀 이 원수야!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가 개봉해 흥행에 성공을 거두자, 중고교생들 사이에서 영화제목이 유행어 아닌 유행어가 되어있었다.


“당연히 성적순은 아닌데, 성적이 높으면 선택지가 많아져. 전문대는 가보자. 민아가 서울 소재 대학 다니면 쪽팔려서 어떻게 만날래?”


여자 친구 이야기가 나오자 고우찬의 튀어나왔던 입이 쑥 들어갔다.

입시공부에 바쁜 황재정까지 팔을 걷어붙이고 고우찬의 공부를 봐줬다.

고우찬은 검정고시가 끝나면 해방될 줄 알았다.

하지만 학력고사 시험을 봐야 한다는 걸 고우찬은 이때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 ❉ ❉


류지호는 미국행으로 3주간 자리를 비웠다.

밀려 있는 일들을 정리하느라 바쁜 시간을 보냈다.

만날 사람도 많았고, 벌여놓은 일들을 점검해야 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되자, 류지호는 짬을 내서 신소연에게 편집요령을 가르쳤다.


위이잉. 딸깍.


신소연은 무척 진지한 표정으로 편집기를 조정했다.


“웨딩비디오 편집의 기본은 튀지 않게 샷을 부드럽게 연결하는데 있어.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한 씬 안에서 내용을 잘 전달하고, 보는 사람이 씬의 목적을 잘 인식할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붙이는 게 기본이야.”

“이미지 라인이나 180도 법칙을 어기면 튀는 거지?”


180도 법칙은 화면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주된 피사체가 둘 이상일 때, 피사체들을 잇는 가상선을 설정한 후 촬영 시에 가상의 선으로 나뉜 두 개의 공간 중 한곳에서만 찍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공간의 왜곡이 없고, 피사체의 시선이나 운동 방향의 혼란이 생기지 않는다.


“이미지라인에 얽매일 필요는 없어. 클로우즈 업으로 찍은 인서트를 삽입한 후 카메라를 반대편으로 넘겨 찍은 커트를 연결해도 되고, 풀 샷으로 완전 빠졌다가 넘겨도 돼.”


류지호의 목이 순간 갈라졌다.

신소연이 냉큼 음료수 캔을 류지호에게 내밀었다.


"고마워.“


류지호가 캔을 따서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두 사람이 엉켜서 몸싸움을 벌이는 장면이나 베드씬은 이미지라인이 의미가 없어. 무시해도 돼. 감독이 특정한 것을 강조하고 싶을 때 일부러 이미지 라인을 어기기도 하고. 그러니까 기본은 지키되 곧이곧대로만 하면 편집이 단조로워져.”


이어 류지호는 신소연이 작업하던 샷을 몇 개를 골라 편집해 시범을 보여줬다.


벌컥.


편집실 문이 열리고, 황재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허허. 남녀가 유별한데, 골방에서 둘이 뭐해?”

“보면 몰라? 편집하잖아.”

“이거 저번 주에 찍은 환갑잔치잖아. 이미 고객에게 넘긴 거 아니었어?”

“왜 비디오에 장난을 쳐 놨냐고 컴플레인이 들어왔다.”


뮤직비디오처럼 편집해 넣어줬더니, 연세 많은 어른들이 정신 사납다고 연속극처럼 해달라고 항의가 들어왔다.

사람마다 취향이 달라 뮤직비디오를 좋아하지 않는 고객들도 없지 않았다.

다만 연속극처럼 해줄 수는 없냐고 요구하면 난감해진다.


“아무리 우리가 퀄리티가 높으면 뭐해. 누가 알아주기나 하나. 웨딩비디오를 친구들끼리 돌려보는 것도 아니고 자기만족....”

“어? 잠깐.”


황재정이 류지호의 말을 잘랐다.


“웨딩비디오를 친구들끼리 돌려보면 어떻게 되는 거냐?“

“야동이냐?”

“야동이 뭔데?”

“야한 비디오. 포르노.”

“그럼 야비나 야포로 불러야지 왜 야동이라고 하냐?”


류지호는 말문이 막혔다.

야동이라는 말이 일반화되는 건 90년대 후반 컴퓨터로 동영상을 보면서 부터다.


“우리 스튜디오에서 웨딩비디오 찍은 신랑신부 친구들이 있잖아. 나중에 그 친구들 나온 것만 모아서 편집해서 팔면 어떻게 될까?”

“돈 주고 안 살 거 같은데? 그냥 기념으로 주면 몰라도.”

“그런 거냐?”

“너 같으면 돈 주고 사겠냐?”

“아니.”

“모든 부부가 웨딩비디오를 평생 소장하면서 볼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이사 가다 잃어버리고, 어디 처박아 놓았는지도 모르고 살고 그럴 걸?”

“그럼 이야기가 있는, 영화 같은 웨딩비디오를 만들면 되잖아.”

“스토리를 짜는 사람이 따로 있어야 돼. 결혼식도 일종의 기념식인데 그냥 찍어 온 걸 이어 붙인다고 스토리가 생기겠냐?”

“영화 편집하는 사람들은 다르지 않을까?”

“만들 수야 있지. 근데 결혼식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또 추억을 담기 위해 찍은 웨딩비디오가 영화가 되면 주객전도지.”

“오락프로는 그냥 놀라고 시키고, 그걸 찍어서 보여주는 거 아냐?”

“오락프로에 왜 구성작가가 있겠냐? 그냥 시시덕거리고 의미 없는 짓거리를 하는 연예인에게 캐릭터를 부여하고 그런 캐릭터들끼리 상호작용하면서 사건이 생기고 갈등이 만들어지고 그렇게 스토리가 생기는 거야. 그저 식순에 의해 진행되는 판에 박힌 결혼식만 찍은 걸로는 무리야.”

“감독이 되겠다는 놈이 고민도 안 해보냐?”

“감독, 작가, 편집은 각기 다른 역할을 하는 거야. 배보다 배꼽이 더 커져. 현실적으로 생각해봐 현실적으로.”

“상상이 현실이 될 수도 있지.”

“좋은 말이긴 한데... 그렇게 하는 게 뭐가 중요한데?”

“사람들이 과연 좋아할 것인가 아닌가. 그래서 팔릴 수 있을 것인가 없을 것인가.”

“너 돈독 올랐냐?”

“사업가 마인드라고 해줘 새끼야!”


류지호가 신소연이 메모하고 있는 노트를 눈으로 훑었다.


“소연아 넌 뭘 적어?“

“그냥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거 같아서.”

“아냐. 다 쓸데없는 얘기야. 적을 필요는.... 야동은 왜 적어놨어?”

“포르노라고 적을 수는 없잖아.”

“좋은 거 가르친다.”


황재정이 이죽거렸다.


하하하.


오랜만에 친구와 만담을 하고보니 류지호는 유쾌해졌다.

3주간 부족한 영어실력으로 미국인들을 상대하다가 죽이 맞는 친구와 맘껏 대화를 나누니 너무나 편했다.

황재정이 진지한 어조로 류지호에게 말했다.


“안 된다고 생각하지 말고, 좀 긍정적으로 고민 해봐.”

“누가 안 된다고 했어 어렵다고 했지.”

“아유. 이 비관적인 새끼!”

“어째 너하고 나하고 캐릭터가 바뀐 거 같다?”

“아메리칸 뉴시네마 영화만 보지 말고, 할리우드의 밝고 명랑한 영화 좀 봐.”

“난 이제 이것저것 안 가리고 잡탕으로 영화 보니까 걱정하지 마.”

“주관 없는 새끼....”


류지호는 황재정과의 대화가 재미있었지만, 이쯤에서 멈추기로 했다.


“자, 만담은 이 정도에서 접고, 서울 같이 가려고 온 거야?”

“응.”


인천의 가온웨딩은 봄 시즌까지 네 곳의 예식장과 제휴가 되어있고, 박상우를 중심으로 신포고 방송부 출신들이 촬영과 편집 업무를 책임지기로 정리가 되었다.

이미 그들은 일 년이란 시간동안 충분한 경험을 했기에 믿고 맡길 수 있었다.

따라서 류지호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서울진출에 집중할 수 있었다.

류지호가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외삼촌 올 시간이다. 재정아 가자.”

“오케이!”

“소연아, 남은 편집은 너 혼자 할 수 있지? 무리다 싶으면 가편집만 해둬.”

“응. 맡겨줘.”


신소연이 야무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래. 수고해.”


쓰담쓰담.


류지호가 신소연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고 편집실을 빠져나갔다.

순간 신소연과 황재정의 눈이 딱 마주쳤다.


“......!”


홍당무가 된 볼을 감싸 쥐며 편집기로 몸을 돌리는 신소연이다.


딸칵!


편집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어떻게....”


신소연은 붉어진 뺨을 손등으로 연신 문지르며 부끄러워했다.


작가의말

행복한 하루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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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7

  • 작성자
    Lv.99 요리선생
    작성일
    22.02.09 11:29
    No. 1

    작가님은
    명심보감을 정말 좋아하시나 보다
    순자선생 왈
    天不生無祿之人하고 地不長無名之草이니라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88 lo******
    작성일
    22.02.09 14:51
    No. 2

    잘봤어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OLDBOY
    작성일
    22.02.09 16:11
    No. 3

    잘 보고 있어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아우에이
    작성일
    22.08.26 19:41
    No. 4

    운동하고 열탕에서 몸 푸는거... 어디서 생긴 미신일까여? 운동선수들 냉탕에 들어가든데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37 도레솔
    작성일
    22.12.24 22:42
    No. 5

    온탕이 근육이완효과가 있긴 하죠.. 30분정도의 온찜질이 피로회복에 좋긴 해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6 습관성탈골
    작성일
    24.03.20 00:55
    No. 6

    저때는 과한 운동에 온탕,열탕 들어가고 그랬어요.
    모르니깐 무식한거죠.
    근데 고3 여자애 편집실에서 연습시켜서 뭔 개썅욕 들어먹으려고 그러죠? 소설이 점점 이상해지네.
    친구란 놈도 그래요. 친구끼리도 저렇게 삐딱한말 계속하면 친구들이 껴줘요? 아니말로 말 좉같이 한다고 욕을 날리건 싸대긴를 날리지. 점점 무리수를 두시네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96 습관성탈골
    작성일
    24.03.20 00:59
    No. 7

    명심보감은 좋은말이 전부죠.
    근데 그걸 물고 뜯고 맛보고 즐기던 유교 탈레반 새킈들이 사람 아니었는데 무슨. 툭하면 어린애들 오입질에, 농민들 멍석말이에, 세금 과다 징수에, 마음에 안들면 잡아다 족치는게 양반들인데 혁명이 안나게 족치는거 하나만 잘하는나라.

    찬성: 1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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