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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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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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4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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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03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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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쪽

우물을 벗어난 개구리. (2)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G&P 신탁투자회사의 제임스 집무실.

매튜가 안락한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경박하게 다리를 떨고 있다.


“그만 가지? 네가 눈앞에서 얼쩡거리니까 도저히 업무에 집중할 수가 없잖아!”


제임스의 말투가 곱지 않았다.

불쑥 찾아와 신경을 거슬리는 매튜가 달가울 리가 없다.


척.


제임스가 종이뭉치를 책상 앞쪽에 던졌다.


“심심하면 이걸 한 번 읽어봐.”


매튜가 발딱 일어섰다.

냉큼 제임스의 책상으로 다가갔다.


“뭔데?”

“닥치고, 그냥 보기나 해.”

“······시답지 않은 거면 내가 계속 귀찮게 군다.”


매튜가 서류뭉치를 들고, 소파로 돌아왔다.

처음에는 건성으로 훑기 시작했다.

읽다보니 조금 흥미가 동했다.


‘오, 재밌는데?’


미국 전역에서 투자제안서가 들어오는 G&P였다.

하고많은 제안서들은 거기서 거기일 경우가 대부분이다.

심드렁하니 바라보던 매튜의 눈빛이 달라졌다.

한 사람의 사진을 발견하고부터다.


“......이것 봐라?”


그의 반응은 시시각각 변해갔다.

흥미에서 경악으로 말이다.


“제임스! 이거 누가 제안한 거야?”

“누구겠어?”


제임스가 그럴 줄 알았다는 되물었다.


“오 마이 고쉬!”


제안서에 첨부된 사진 속 인물이 낯설지 않았다.

매튜가 읽은 제안서는 류지호가 보낸 가온웨딩비디오 투자제안서였다.


❉ ❉ ❉


G&P 신탁투자회사의 임원 회의실.

류지호와 신효정이 프레젠테이션 리허설에 열중하고 있다.

매튜가 그들의 주위를 맴돌며 말을 걸어보려고 입을 달싹거렸다.

강아지처럼 류지호 주변만 맴돌 뿐.

진지한 분위기를 깰 수 없었다.


으드득.


류지호가 크게 기지개를 켰다.

이때다 싶어 매튜가 얼른 류지호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내가 궁금한 게 있어.”

“뭔데요?”

“웨딩홀이라는 걸 새로 만들거나 인수하면 되지, 뭐 하러 이런 번거로운 짓을 하지?”

“저는 미성년자입니다만.”

“그게 무슨 문제가 되나? 세계적으로 자수성가한 부자들은 다 십대부터 사업을 시작했어.”

“그래서 저도 십대에 사업을 시작했잖아요.”

“얼마면 돼?”

“넉넉하게 오십만 달러 정도?”

“천 만도 아니고 백 만도 아니고 오십만? 씨드머니는 많으면 많을 수 좋을 텐데...?”

“투자제안서 봤다면서요? 이 사업은 돈으로 하는 사업이 아니에요. 간단한 촬영기술과 성실한 태도의 인력이 중요한 요소랄까. 거기에 영업력과 마케팅 정도가 중요해요.”


50만 달러.

이 당시 원화로 대략 3억 5천만 원.

대한민국에서 가장 집값이 비싼 강남의 24평대 아파트 가격이 5000~7000만원이다.

그런 아파트 5~6채를 살 돈.

현재 가온에겐 충분하다 못해 과분한 자금규모다.


“내가 줄게.”

“맷이 돈이 어디 있어서요? 알거지라면서.”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를 팔면 되지.”

“그건 또 무슨 개소리야?


류지호는 너무 황당해 한국말이 튀어나왔다.


“뭐라고? 난 한국말을 몰라. 영어로 해줘.”

“매튜, 정신 좀 차려요. 가문에서 완전히 쫓겨나고 싶어요?”

“비워야 해. 그래야 채우지.”

“불쌍한 이웃을 위해 돈을 쓰면 되잖아요.”

“모르는 사람한테 돈 쓰는 건 아까워.”


하아.


류지호는 절로 한숨이 터졌다.

실로 대책이 없는 인간이다.


“네가 자무슈에게 한 말을 전해 듣고 영감을 얻었어. 내 정체성을 깨닫게 되었다고나 할까? 난 유랑자이며 그레이엄 사람들과는 이질적이야. 그래서 난 이방인이었던 거지.”

“헛소리 하지 말아요.”


한심하고 답답하고 짜증이 치미는.

류지호는 더 대화를 하다가는 속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건 그렇고 왜 온 거에요?”

“가끔 이렇게 얼굴을 비춰야 내 재산을 동결시키지 않거든. 내 돈인데 마음대로 꺼내 쓸 수 없어. 젠장!”

“......?”

“미리 상속을 해주지나 말던가. 하늘에 떠 있는 파이야. 먹을 수가 없잖아!”

“패밀리 오피스의 기본업무 중 하나가 자녀 상속과 관리에요.”


신효정이 한국말로 류지호에게 귀띔을 해줬다.


“지호, 난 널 돕고 싶어.”

“왜요?”


당연한 의문이다.

한때 매튜는 G&P 전략투자팀에서 경력을 쌓고, 예일대 경영대학원에서 MBA를 마쳤다.

그는 월가에서 일하면서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디든 착하고 성실하게 살면 호구 소리 들으며 손해만 본다는 거다.

반면에 자기 몫을 악착같이 챙기며 약삭빠르게 살면 성공한다.

착하고 부지런하며 인정이 많은 사람들은 성공 근처에도 못 가보고 꾸역꾸역 살아간다.

손해를 좀 보더라도 올바른 길을 걷는 사람은 친구들에게 찬사를 받을지언정 딱 거기까지.

매튜가 좋아하는 부류는 늘 바보같이 당하는 순박한 사람들이다.

정작 그 스스로는 전혀 그렇게 살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 없었지만.

류지호란 꼬마는 똑똑하면 똑똑했지, 결코 헐렁한 녀석이 아니다.

그런데 흥미가 막 동했다.

이 꼬마와 어울리면 뭔가 재미난 일들이 마구 벌어질 것 같은.

그런 예감이, 느낌이... 팍팍 온다는 거다.


“말했잖아. 모르는 사람에게는 돈을 주고 싶지 않다고.”

“저는 아는 사람입니까?”

“그럼! 우린 아주 진하게 함께 파티도 즐겼잖아.”


매튜가 눈을 찡긋했다.


“......!”


류지호는 순간적으로 쥐어졌던 주먹을 슬그머니 풀었다.

그리고 귀에 쏙쏙 박히는 명료한 음성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제발 도어스의 짐 모리슨 흉내는 집어치워요. 당신의 시간은 지금도 속절없이 흘러가고 있단 말입니다. 당신에게 준비된 삶은 이번 한 번뿐이란 걸 생각하면서 살란 말입니다.”

“그거 알아?”

“......?”

“네가 말하는 걸 보다보면 영락없는 윌리엄 아저씨를 보는 것 같아. 나의 아버지 대니얼 같은 인간의 유형이 아니어서 천만다행이긴 한데, 때로는 모든 걸 내려놓고 즐겨야 해. 넌 너무 시리어스 하다고. 안 그래요, 미스 신?”


매튜가 신효정에게 동의를 구했다.

그녀는 매몰차게 고개를 돌려 외면해 버렸다.


“당신이 이렇게 답답하게 구는데, 내가 어떻게 즐길 수가 있어요. 제발 정신 좀 차려요.”

“브루투스 너 마저...”


매튜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다.

류지호는 그에게서 관심을 끊어버렸다.

더는 재벌가의 돌아이와 대거리하며 심력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다시 현실로 돌아와야 했다.

타이밍 좋게 신효정이 류지호에게 물었다.


“다음 계획은 뭐죠?”

“이들에게 없는 게 뭘까 고민하고 있어요.”

“파커와 그레이엄에게 없는 것..... 말입니까?”


신효정은 그런 게 과연 있을까 고개를 갸웃거렸다.


“젊음의 활력 아닐까? 고리타분하고 보수적이며 또...”


매튜가 언제 시무룩했냐는 듯 대화에 끼어들었다.

류지호는 그를 무시하고 생각에 잠겼다.


‘내가 할 수 있는 것. 현재 내 능력으로 이들을 도울 수 있는 게 뭐지? 스토리, 상상력 그리고 미래 지식.‘


때로는 영화나 소설이 현실을 한참 앞질러 간다.

SF소설이나 영화가 과학자들을 자극하는 것처럼.

엉뚱한 발상이 누군가에게 영감을 줄 수도 있다.


“신변호사님, 패밀리 오피스에 대해 제게 설명 좀 해보세요.”


패밀리 오피스(family office).

부자 혼자서 엄청난 재산을 관리하고 지키는 건 힘들다.

때문에 창업주는 자신의 가치관을 받들어 가문의 유·무형 자산을 보호하고 관리하는 전문 업체가 필요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패밀리 오피스다.

가문의 자산 배분, 상속·증여, 가업 승계, 세금 문제 등을 관리해 가문의 부를 지키는 역할을 했는데, 대부분 자선 재단의 형태로 활동한다.

종종 자산운용사나 헤지펀드 형태를 띠기도 한다.

바로 G&P처럼.

패밀리 오피스의 기원은 왕실의 자산과 집안 업무를 총괄하는 집사 사무실로 거슬러 올라간다.


“금융업계 악당 스탠리모웬 알지?”


매튜가 또 다시 끼어들었다.


“그 모건 패밀리의 ‘하우스 오브 모웬’이 미국 최초의 패밀리 오피스야. 패밀리 오피스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것은 석유왕 락커팰로였고.”


신효정이 매튜의 설명을 확인해줬다.


“맞습니다. 1982년에 만든 ‘락커팰로 패밀리 오피스가 공식적인 첫 패밀리 오피스로 알려졌습니다.”


또 다시 매튜가 물었다.


“패밀리 오피스를 왜 만들었을 것 같아?”

“......”

“무능한 상속자와 세금으로 인해 재산이 줄어드는 것을 막기 위함이야.”


패밀리 오피스는 증권거래위원회 등에 보고할 의무도 공시의무도 없다.

자기 돈 가지고 자기가 투자하는 것이기 때문에 불법적인 행위만 없으면 투자전략도 굉장히 광범위하고 상속, 증여, 절세, 창업주 가문의 지배권 유지 등 다양한 역할을 한다.

신효정이 구체적인 설명을 이어갔다.


“핵심은 패밀리펀드(FLP, family limited partnership)라고 할 수 있어요. 가문의 재산을 운용하기 위한 펀드인 거죠. FLP를 통해 이자소득이나 배당 등을 자녀들에게 지급하면 미혼자녀의 경우 해마다 1만5천 달러까지 증여세가 면제 됩니다. 결혼한 자녀의 경우는 3만 달러. 아들, 손자, 며느리 등이 12명에 이른다고 가정하면, 결혼한 상태를 기준으로 연간 36만 달러에 대해선 증여세를 한 푼도 내지 않아도 되는 셈입니다. 다만, 후손이 펀드 자체를 상속받으면 지분에 따라 상속세를 내야 하죠. 미래에 벌어들일 수익은 상속세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미국 세법의 규정 때문에 FLP은 상속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어요.”


두 가문의 방계가족까지 모두 포함하면 얼마나 될까.

가문의 구성원 모두가 억만장자 혹은 슈퍼 리치는 아닐지라도 펀드로 모인 돈은 어마어마할 것이다.

그런 펀드로 금융투자와 부동산 투자로 이익을 보는 것으로 끝이다.

그 돈의 일부를 가문의 구성원들 복지에 투자하면 어떻게 될까.

패밀리 오피스의 기원이 집사 사무실에서 비롯되었다.

그렇다면 21세기형 집사 시스템은 뭘까?

류지호는 자신이 집사가 되어 모시는 주군의 재산을 관리하는 상상을 해보았다.

파커의 집사 브래드도 대입해 봤다.

그때.


“어디 가요?.”


매튜의 목소리가 류지호의 상념을 깨웠다.


흥.

신효정이 찬바람을 일으키며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아, 화장실....”


류지호는 순간 매튜를 한 대 칠 뻔했다.

그런 류지호의 기분을 모르는 매튜는 시종일관 뻔뻔했다.


“그냥, 질러. 한 1천만 달러 달라고 해봐.”

“두 어른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분들은 아니잖아요.”

“크게 배팅해야 크게 따지.”

“쓸데없는 이야기는 집어치우고요. 보통 미국투자회사가 외국 금융시장에 진출할 때 어떻게 하죠?”

“그 나라의 금융사에 펀드를 개설하거나. 직접 지점을 신설할 수도 있고, 믿을 만한 신탁회사에 자금운영을 위탁할 수도 있지.”

“한국의 증권시장이 외국인들에게 개방되면 G&P도 한국기업의 주식을 사들이겠죠?”

“당연하지. 저들은 돈 냄새 맡는 데는 귀신들이야.”


류지호는 한국금융시장이 언제 어떤 식으로 완전히 개방되는지 알지는 못했다.

그의 전문분야도 아니었고, 관심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온이라는 제 회사를 전초기지로 삼으면 어떻게 될까요? 어차피 증권시장이 개방되기 전에 한국의 주식을 살 수도 없고, 부동산을 살 수도 없어요. 하지만 그 전에 사전작업을 해둘 수는 있잖아요. 정재계 인맥관리라던가 현지 전문가들과의 네트워크 같은 것들이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네가 하려는 게 금융회사는 아니지 않아?”

“한국에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할 잠재력이 큰 기업이 많이 있어요. 미국의 데스크에 앉아서 숫자로 보는 것과 직접 가까이서 보는 것은 다를 거라고 생각해요.”

“지금이 무슨 대항해 시대인 줄 알아? 전화 한통이면 너희 나라 기업의 주가, 실적, 재무상태 거의 모든 걸 팩스로 받아볼 수 있다고.”


류지호는 자신의 순진한 발상이 부끄러워 볼을 긁적거렸다.


“그, 그런 겁니까?”

“응. 그런 거야.”


매튜가 단정하듯 대답했다.


“영화에 올인 하는 거 아니었어? 금융에도 관심이 있나?”

“그 분야는 좀 귀찮긴 한데, 생각중이에요. 특정분야 펀드 정도 생각하고 있어요.”


돈을 많이 벌게 되면 자체 투자펀드를 만들 생각이다.

할리우드 메이저나 한국의 대기업 투자배급사가 했던 것처럼.

잠시 고민하던 류지호가 벌떡 일어섰다.


“화장실 가?”

“제임스에게요.”


류지호가 바쁜 걸음으로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매튜가 얼른 뒤를 따라갔다.


❉ ❉ ❉


제임스와 류지호가 마주 앉았다.

매튜와 신효정이 둘 주변에 둘러 앉아 흥미진진한 표정을 짓고 있다.


“기업형 패밀리 오피스?”

“가문 개개인의 신탁투자를 뛰어넘어 그 자체로 하나의 기업이 되는 거죠.”

“우리는 네가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벌어들이고 있어.”


프라이빗(private) 회사라고 해서 규모가 작은 것이라 예단하지 말라는 말이다.


“락커팰로나 모웬은 자기들 FLP를 운영하니까 제외하고. 미국 아니 더 나아가 세계적인 슈퍼 리치의 재산까지 관리할 수는 없어요? 아니면 무능한 2세, 3세 후손에게 남겨진 유산을 위탁해서 관리해 주는 건요.”


유산 이야기를 할 때 일행의 시선이 잠시 매튜에게 머물렀다.

류지호는 외부인에게 신탁과 펀드를 개방하는 것에 대해 제임스에게 아이디어를 냈다.

다행히 무시당하진 않았다.


“지호 아이디어는 한 번 생각해 볼 만 하다고 생각해. 어중이떠중이 말고 제대로 된 진짜 부자의 재산까지 관리하는 자산운용사 혹은 유산관리 전문 자산운용사를 새로 만들어도 되겠지. G&P는 락커팰로 집안 보다 늦게 시작했지만, 꽤 건실한 노하우를 가지고 있잖아.”


매사 헐렁하던 매튜가 드물게 진지한 음성으로 말했다.

류지호가 자신의 생각을 보탰다.


“G&P금융서비스. 슈퍼리치가, 아니 그냥 고객이라고 할게요. 고객이 G&P금융서비스에 전화만 하면 전문컨설턴트가 붙어서 가문헌장 제정, 패밀리펀드 설립, 절세 및 상속 제반 사항 가이드, 때에 따라서는 세금이 싼 나라로 해외 이전 등을 도맡아 처리해주는 거죠.”


진지하던 매튜가 갑자기 설레발을 쳤다.


“이런 미친! 진정한 왕조의 신탁이 탄생하는 거야!”


흔히 락커팰로와 모웬, 로텐 실트 등 패밀리 오피스의 신탁을 왕조의 신탁이라 불렀다.

류지호는 알지 못했지만, 락커팰로 금융서비스는 40조의 펀드를 운용하게 된다.

아직 먼 이야기지만.

제임스가 한쪽에 앉아있는 신효정을 돌아봤다.

그녀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노트를 들어보였다.

지금 이야기 되는 내용을 적고 있다는 의미다.

일종의 회의록를 작성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부자들의 신탁을 운용하는 것이 부담스럽다면 다른 방식도 생각해 볼 수 있어요. 체계적인 서비스로 무장한 기업형 패밀리 오피스가 등장하면 서비스 영역도 확대될 거라 생각해요. 재산 관리에 그치는 게 아니라 가문의 모든 걸 챙기는 종합서비스를 할 수도 있어요. 말 그대로 21세기 집사 서비스라고 할 수 있겠네요.”


제임스와 매튜가 서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한때 이들도 다른 부자들의 신탁을 받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새롭진 않다는 의미다.

다만 부자들을 위한 종합 집사서비스는 신선한 아이디어다.


“왜 그런 아이디어를 나에게 들려주는 거지?”

“밑져야 본전이라서.... 상상한 걸 말해 본 거에요. 사업성은 솔직히 잘 몰라요. 매번 저와 한국의 가족들이 파커로부터 받기만 하는 것 같아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어요.“

“네가 말한 것들을 사업계획서로 정리해 월가의 아무 은행에 가서 흘리면 그걸 수천만 달러를 주고 사려고 할 걸?”

“설마요.“

“지호 이 미친놈아, 네가 지금 말하는 것들이 어떤 가치가 내포되어 있는지 정말 몰라서 하는 말이야?”


매튜가 흥분해서 소리쳤다.


“모르긴 뭘 몰라요. 쥐뿔도 없는 사람들은 생각 못할 수도 있지만, G&P 같은 금융자본은 생각해 볼 수 있는 사업 아니에요?”


신효정은 메모를 멈추고,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류지호를 바라봤다.

가문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만든 게 패밀리 오피스다.

누가 그런 목적으로 만들어진 패밀리 오피스를 다른 금융서비스로 발전시킬 생각을 하겠는가.

물론 레만 투자은행 파산이라는 대형 사고가 터진 이후부터 뉴욕의 금융권에서 이런 집사 서비스가 매우 활성화된다.

심지어 한국과 중국 재벌들도 미국의 패밀리 오피스를 따라 한다.

먼 미래의 일이다.


“금융을 몰라서 할 수 있는 생각인가?”


제임스가 중얼거렸다.


“왜 제임스에게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지?”


매튜가 약간 심통 난 얼굴로 류지호에게 물었다.


“저와 파커는 남이 아니잖아요.”

“그레이엄은?”

“레오나의 외갓집? 그냥 친한 사이?”

“내가 파티도 데려가고, 친구도 소개시켜 줬다는 걸 잊었어!”

“매튜, 정신 사나우니까, 입 다물어!”


제임스의 꾸중에 매튜가 장난으로 대꾸했다.


“엣... 서얼~”


다시 분위기가 차분해지자 류지호가 입을 열었다.


“아직 내 말은 끝나지 않았어요. 끝까지 들어보고 판단해 주세요.”

“아, 미안. 계속해봐.”

“제가 미스 신에게 듣기로 G&P는 기본적인 패밀리 오피스 업무 외에 캐서린의 로펌에서 가문의 일원들에게 법률 서비스도 한다고 들었어요. 그럼 의료서비스도 할 수 있고, 자녀들의 진학과 유학 등 교육 서비스도 할 수 있지 않겠어요? 또 두 가문처럼 유서 깊은 가문들은 품위유지와 여러 가지 이유로 호화로운 삶을 영위할 텐데, 그들의 개인 요트나 항공기 구입과 관리, 품격 있는 문화생활 가이드, 쇼핑, 여행 그 밖에 집사가 하는 모든 걸 서비스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매튜가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런 미친! 규모가 점점 커지는구만.”


제임스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지난 87년의 월가 대재앙의 예처럼. 너의 그 예측과 전망 그리고 이런 엉뚱한 아이디어는 어디서 오는 거지?”


내심 뜨끔한 류지호다.

하지만 새로운 삶에 어느 정도 적응해서인지 나날이 뻔뻔해지고 있었다.


“뭔가를 창작하는 사람들은 때로는 현실보다 앞서 가요. 만날 공상과 아이디어로 먹고 살아야 하는데, 남들보다 상상력이 부실하면 어떻게 살아남겠어요. 지금 말한 것들의 경우 저는 사업, 돈으로 접근한 것이 아니라 상상의 나래를 펼쳐본 거예요. 꿈을 꿔본 겁니다.”

“꿈을 꿔봤다고?”

“당연하죠. 제 아이디어가 아무리 그럴 듯해도 아무나 시도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파커나 그레이엄 같은 미국 10대 부자쯤 되어야 한 번 해볼까? 부자들이 미쳤다고 아무에게나 돈을 맡기겠어요? 그래서 나라면 G&P로 뭘 할 수 있을까를 상상해 봤어요. 상상 속에서는 망할 걱정이 없잖아요.“


매튜는 내심 놀라 자빠질 지경이다.

윌리엄과 자신의 누이 캐서린이 입이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던 소년.

또 자신의 조카를 구해준 은인.

당연히 호감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편지에 적은 몇몇 예측과 전망들은 그의 나이를 뛰어넘는 시야를 보여주긴 했다.

그래서 흥미를 가졌던 것도 사실.

요 며칠 그와 어울리며 알게 된 것은 도저히 18살의 생각과 주관이 아니라는 거다.

뉴욕에 와서 G&P를 보고, 거기서 얻은 단편적인 정보들로 훌륭하게 조합해 아이디어를 떠올린 건 정말 칭찬할 만한 일이다,

소름끼치는 것은 이 어린 친구의 말들이 영 허황된 아이디어가 아니라는 것이다.

영화감독이니 웨딩비디오니 어쩌구 하면서 갈피를 못 잡는 것처럼 보이지만.

인재다.

어찌 두 노인들이 탐내지 않을 수 있을까.

앞으로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두 가문에서 제공하는 육성코스를 통과해 성장한다면 미래의 동량이 될 가능성이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지호, 넌 영화를 해서는 안 돼. 난 반대야.”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있던 매튜가 강력히 주장했다.

그의 뜬금없는 주장에 류지호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넌 하버드나 예일. 아니아니, 미국이 아니어도 돼. 어디서든 최고의 교육을 받고, 월가에서 실무를 쌓는 다면, 언젠가 G&P를 무찌를 수 있어!”


매튜가 침을 튀겨가며 열정적으로 말을 토해냈다.

제임스가 버럭 화를 냈다.


“G&P를 무찌르긴 뭘 무찔러 이 멍청아!”


항상 점잖고 깔끔한 태도의 제임스가 성질을 부리는 모습이 생경했다.


“어른들과 이야기 해 볼 필요가 있겠어. 87년 주가대폭락의 영향으로 월가가 여전히 어려운 상황이야. G&P의 새로운 활로가 될 가능성이 보이는 것 같다. 고맙다. 지호.”

“진짜 실현 가능한지 알지도 못하면서 말해 본 건데. 고마워할 것까지야.....”

“이게 진짜 사업화 된다면 볼 만 하겠어. 앤서니와 파커가의 잘난 형들이 어떻게 나올지 기대가 된단 말이지. 크크크.”


매튜가 악동 같은 표정을 지으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렸다.


“......!”


류지호는 키득거리는 매튜를 보며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공연히 오지랖을 떨어 파커가 가족사에 발을 담근 건 아닌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토닥토닥.


제임스가 다가와 류지호의 어깨를 두드렸다.


“때론 엉뚱한 짓을 벌여 걱정을 끼치기도 하지만. 우리의 기대에 부응해줘서 고맙다.”

“부족한 저를 편견 없이 봐주셔서 제가 고맙죠.”


제임스의 눈빛에는 따뜻한 기운이 흘러 넘쳤다.

매튜가 제임스의 반대편에서 류지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노인네들이 하도 인재라고 칭찬을 늘어놔서 재수가 없진 않았는데, 인정할 수밖에 없네.”

“맷, 나는 뛰어난 인재가 아니라 그저 운이 조금 좋을 것뿐이에요.”

“운도 실력이야. 기회를 살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아.”

“잘되길 바라요. 그래야 나도 나중에 G&P에 돈을 맡기죠. 그렇다는 건 포브스가 선정하는 100대 부자 끄트머리에라도 제 이름을 올릴 수 있다는 거 아니겠어요?”


류지호가 너스레를 떨었다.


하하하.


일행이 웃음을 터트렸다.

간단한 금융거래만 할 줄 알았던 류지호다.

그런 류지호가 던진 아이디어 하나가 미래의 두 가문의 후계구도를 흔들게 될 줄은 이곳에 모인 이들은 꿈에도 몰랐다.


❉ ❉ ❉


G&P의 최고임원 전용 회의실.

넓은 실내는 두 면이 유리창으로 되어있어 맨해튼의 마천루가 보이고, ‘ㄷ’ 자 모양의 테이블과 고급스러운 가죽시트 의자, 테이블 끝에는 빔 프로젝터 스크린이 걸려있었다.

윌리엄과 대니얼, 제임스 부부와 투자 팀장 및 임원 몇 명이 자리하고 있다.

한편에는 참관인 격의 매튜와 앤서니도 자리하고 있다.


스르륵.


캐서린의 비서 로라가 회의실 문을 열었다.


저벅.


류지호와 신효정이 안으로 들어왔다.

깔끔한 옷차림, 단정한 머리 그리고 꼿꼿이 펴진 허리와 목.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는 류지호는 자신감이 넘쳐보였다.

사실 이 정도로 발표 자리가 커질지는 몰랐다.

투자자들에게 보여야 할 인상은 자신감 있는 태도다.

대기업 투자팀과 영상위원회 피칭 프로그램을 떠올리면 오늘의 브리핑은 아무것도 아니다.

류지호는 그런 최면을 스스로에게 걸었다.

지금 이 자리가 훨씬 더 무겁고 중했으니까.

실내를 둘러보다가 매튜와 눈이 마주쳤다.


찡긋.


매튜가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 것인지.

류지호의 긴장을 풀어주려는 나름 배려인지.


“안녕하십니까!”


류지호는 깍듯이 예의를 갖춘 후, 회의 테이블 끄트머리에 섰다.

호기심을 품은 시선을 보내는 사람도 있고,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도 있다.

때로는 냉정한 시선을 던지고 있는 사람도 있는데, 결코 호감의 느낌이 아니다.


“지호, 이리 와.”


윌리엄이 손짓으로 류지호를 불렀다.

윌리엄이 자신의 옆 빈자리의 팔걸이를 손바닥으로 탁탁 치며 말했다.


“뭐가 그리 급해. 이리 앉아 봐라.”


류지호가 의자에 앉자, 윌리엄이 컵을 류지호의 손에 쥐어 주었다.


“목부터 축이고 해.“


약간 달짝지근한 맛이 나는 것이 차 종류인 것 같았다.

당분을 섭취하고 기력을 차리라는 걸까.

류지호는 컵을 내려놓고, 대니얼에게 감사를 표했다.


“무례하다고 느끼실 수 있는 요청이었는데, 흔쾌히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알면 되었다.”


대니얼이 사무적인 어조로 대답했다.

윌리엄이 찻잔을 내려놓고, 류지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래, 준비는 잘 해왔느냐?”

“예!”

“씩씩하게 대답하는 것을 보니 안심이 되는구나.”


대니얼이 툭하고 딴죽을 걸었다.


“긴장을 풀어주는 건 반칙이야.”


윌리엄이 태연한 얼굴로 말을 받았다.


“투자할 사안인지 들어보자는 것이지, 발표자의 스킬을 평가하는 건 아니잖아.”

“여태 딴 놈들은 그냥 오자마자 했어. 여기 모인 이들은 비싼 몸들이라고.”

“그 잘난 녀석들이 열여덟 살 때 10만 달러를 벌어봤나?”

“수십 배의 수익을 내고 있잖아. 단순비교는 아닌 것 같은데?”


윌리엄의 신랄한 말이 이어졌다.


“아이비리그에서 곧바로 들어온 애송이들도 5만 달러를 가져가지. 그 똑똑하고, 대단한 젊은이들은 그저 자존심을 집에 두고 출근해서는 상사에게 아첨을 살살 늘어놓으면서 위에서 내려온 보고서나 찍어버리면 그만이야. 연봉 50만 달러를 주고 채용할 회사가 월가를 제외하고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기 때문에 다들 기고만장하지.”


윌리엄의 독설에 회의실 공기가 얼어붙었다.

대니얼처럼 으르렁거리는 독설 투는 아니다.

그럼에도 위엄이 넘쳐흘렀다.


“준비됐으면 이제 해 봐.”


류지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신을 바라보는 윌리엄 그리고 제임스와 짧게 시선을 마주쳤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들의 눈빛으로 느낄 수 있다.

응원하고 있다는 것을.


“만나서 반갑습니다. 한국에서 온 류지호입니다. 제가 비록 올해 열여덟이라 해도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다는 걸 잊지 말아주십시오. 한 명의 비즈니스맨으로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류지호가 슬쩍 회의실에 앉아있는 청중들과 눈을 마주쳤다.

별 감흥 없는 표정들.


“고백하자면 저는 G&P가 얼마만큼 대단한지 알지 못했습니다. 미국에 오고 나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나름 배짱이 두둑하다고 생각했는데, 조금 긴장되긴 하네요. 막상 G&P를 움직이는 분들을 뵈니 다들.....”


류지호가 잠시 말을 멈췄다.


“인상도 좋고, 친절하신 분들 같아 보여 안심입니다.”


픽.


몇몇 팀장이 옅은 비웃음을 흘렸다.

류지호는 흔들리지 않았다.

차분하게 인사말을 이어갔다.


작가의말

잡설 : 습작이나 리메이크나 매니지먼트에서 계약제안을 꽤 받았습니다. 유료화로 돈을 번다는 것을 떠나서 다른 플랫폼에서도 연재가 되면 더 많은 분들이 읽어봐 주실 수 있을 것입니다만... 피드백도 더 많이 받을 수 있을 것도 같고.... 과연 돈을 받고 팔만한가에 대한 확신은 아직 없는 것 같습니다. 작년에 단행본 E-북을 내보려했었는데 잘 안 된 일도 있었고... 이러다가 계약제안이 뚝 끊기면 차라리 맘이 편해질 것도 같습니다.

보람 찬 하루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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