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r. 할리우드!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최근연재일 :
2024.09.14 09:05
연재수 :
962 회
조회수 :
4,127,573
추천수 :
127,041
글자수 :
10,687,409

작성
22.02.22 10:00
조회
7,765
추천
196
글자
22쪽

영정사진. (3)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여의도에 위치한 서울방송문화원 내 TMT 강의실.

TMT 아카데미는 대한민국의 모든 영상매체에 아역부터 청소년 연기자를 공급하고 있는 최대 규모의 연기학원 및 매니지먼트다.

오늘 강의실에 한곳에 오디션장이 급조되었다.

아역 연기자 십여 명과 부모들이 쪽대본을 보며 연기연습에 한창이다.


드르륵.


캐스팅 실장이 앞서고 이어 류지호와 하재근이 들어왔다.

창가 쪽에 앉아있는 아이를 보며 류지호가 눈에 이채를 띠었다.


“안녕하세요. 이번에 단편영화를 연출할 류지호감독입니다.”

“애들아, 감독님께 인사해야지.”


캐스팅 실장이 아역 연기자들에게 인사를 시켰다.


“안녕하세요.”


아이들이 발딱 일어서서 배꼽 인사를 했다.

류지호가 마주 고개를 숙여 인사를 받아줬다.


“반가워요. 어머님들도 반갑습니다.”

“잘 부탁드려요, 감독님.”

“훤칠하시네요. 배우 하셔도 되겠어요.”


아역 연기자들의 부모들이 아부 섞인 인사를 했다.


“대본 연습은 많이 했어요?”

“네!”

“씩씩해서 좋아요. 긴장하지 말고, 편안하게 연기 보여줘요. 떨어진다고 너무 실망하지 말고요.”


캐스팅 실장이 류지호와 하재근을 한쪽에 마련된 테이블로 이끌었다.

하재근은 조감독 자격으로 아역 오디션에 참가했다.

부모들이 아이들의 손을 잡고 강의실에서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시작하시죠.”


차례로 아이들이 강의실로 들어와 지정연기를 보였다.

류지호는 아역들에게 쓸데없는 지적이나 조언을 입에 담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아이들의 연기를 지켜봤다.


“경재 들어와.”


캐스팅 실장의 부름에 열 살 가량의 남자 아이가 강의실로 들어왔다.

이경재.

이전 삶에서 류지호와 작은 인연이 있었다.


‘반갑다. 경재야.’


아역에서 시작한 연기자들은 청소년에서 성인으로 넘어갈 때 천상과 지옥을 오간다.

성공적으로 성인 연기자로 안착하는 경우는 백에 하나가 될까 말까 한 것이 현실이다.

이경재는 아역에서 청소년 시절까지는 제법 많은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 했다.

성인 연기자로 넘어가는 고비를 넘지 못했다.

극심한 스트레스로 술을 입에 댔고, 체중이 엄청 불어나면서 연예계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건 모두 이전 삶에서의 이야기일 뿐.

현재는 똘망똘망한 눈동자와 장난꾸러기 같은 얼굴의 귀여운 꼬마 아이다.


“안녕하세요. 이경재입니다.”

“반가워요. 엄마아빠가 연극배우죠?”

“네.”

“부모님들께 연기 많이 배웠어요?”

“아니요. 그냥 친구들하고 놀듯이 연기하래요.”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귀찮아서? 아님 연기 가르쳐주기 싫어서?”

“하하하. 경재에게 잘못된 습관이 들까봐 그러는 거예요.”


이경재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긴장 좀 풀렸어요?”

“처음부터 긴장 안 했는데요?”


큭.


하재근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자 시작해 볼까요?”


류지호의 말에 이경재는 감정을 잡았다.


후루룩.


이경재는 손가락으로 젓가락 모양을 만들어 짜장면을 먹는 시늉을 하면서 연기를 시작했다.


✻ ✻ ✻


공다연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차갑다.

연기를 할 때 빼고는 좀처럼 웃는 법이 없다.

TMT의 연예인 지망생들 사이에서 사이보그 미녀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을 정도다.

서울방송문화원은 전국에서 연예인 지망생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복도를 걸어가다 보면 잘생기고 예쁜 십대들이 발에 채일 정도로 많다.

이들은 단역출연이든 조연급 출연이든 드라마 경험을 해 본 이미 준 연예인들이다.

공다연 역시 몇 편의 드라마에서 단역으로 출연한 바가 있다.

그녀의 공주병은 여전했다.

스스로 준연예인 처지가 되었지만, 그녀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사실 이곳에서 연기수업을 듣는 십대들은 모두 그렇다.

외모 자신감이 지나쳐 평범한 사람들을 하찮은 존재로 보는 경향이 있다.


“아~ 공다연.”


또래의 남학생이 다가왔다.


“우리 이렇게 또 우연히 만나네요.”


남학생의 말에 공다연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슬슬 점심 먹을 시간인데.... 학원 앞에 있는 경양식에서 점심을 먹을까 하는데... 같이 갈래요?”


도리도리.

공다연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거부의사를 나타냈다.

우연히 만났다고 말했지만, 남학생이 이곳에서 계속해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안다.

공다연이 수업 받는 요일을 어떻게 알았는지, 매번 저런 식으로 접근해 왔다.

상투적인 말을 지껄이며 수작을 부렸다.

예전 같았으면 공다연도 은근슬쩍 넘어가 주었을 지도 몰랐다.

지금은 아니다.

좁은 인천 바닥에서도 자신의 외모 때문에 날파리들이 많이 꼬였다.

한국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이곳 연기학원에는 자신의 외모에 버금가는 전국에서 모인 여자애들이 많았다.

남학생 몇몇은 끊임없이 그녀들에게 접근해 친한 척을 했다.

그런 걸 즐기는 여학생도 있고, 소 닭 보듯 하는 여학생도 있다.

공다연은 후자다.

연예인이 되겠다고 인천에서 여의도까지 출퇴근을 하고 있는데 연애질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혹시 벌써 점심 먹었어요?”


이번에도 공다연은 대답 대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데 왜?”

“입맛이 별로 없어요.”

“아. 그래요.”


남학생이 안타깝다는 듯 중얼거렸다.

공다연은 내심 한숨이 나왔다.

‘밥맛 떨어지니 그만 가줘‘ 라는 뜻을 입맛이 없다는 말로 돌려서 말했는데, 그걸 못 알아듣는다.

공다연은 어서 빨리 남학생이 사라져 줬으면 했다.

슬슬 짜증이 치밀어 오르려고 하고 있었다.


“아무리 입맛이 없어도 식사는 하는 게 좋지 않겠어요? 오후에 연기수업 받으려면 굶으면 힘들 텐데. 막상 근사한 음식을 보면 입맛이 돌지도 모르잖아요.”

“괜찮아요.”


공다연이 짧은 한마디와 함께 발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남학생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공다연의 뒤를 따라오며 말을 붙였다.


‘그년 진짜 까탈스럽네....’


남학생은 서울도 아니고 인천에서 올라온 여자애 마음을 빼앗은 것쯤은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 남학생의 계획은 처음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일단 경쟁자가 너무 많았다.

공다연을 노리는 사내 녀석들이 한두 명이 아니다.

남학생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절대적 믿음이 있었다.

자신도 TMT 남자연기 지망생 가운데 수위를 다투는 외모다.

자신이 말만 걸어줘도 얼굴을 붉히는 여학생이 한두 명이 아니다.

그런데 공다연은 쉽게 넘어오질 않았다.

오기도 생기고 자존심도 몹시 상했다.

일주일이면 끝날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도 공다연은 남학생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아니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학원에서 소문이 퍼질 대로 퍼졌다.

오늘 매듭을 짓지 못하면 망신만 당하고 모든 게 끝이다.

마음이 다급해진 남학생은 여유를 잃었다.

그래서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을 했다.


덥석!


“잠시 얘기 좀 해요. 튕기는 것도 한두 번이지 거절만 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잖아.”


남학생이 거칠게 나왔다.

그와 동시에 공다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익!


공다연이 금방 따귀를 올려붙일 것만 같았다.

남학생도 이판사판이다.

그때.


“다연아, 공다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공다연이 남학생 너머에 시선을 뒀다.

류지호가 천천히 걸어오는 모습이 시야에 잡혔다.

그의 곁에서 고릴라처럼 생긴 남자가 쉴 새 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다.

평범한 고등학생 류지호는 더 이상 없었다.

근사한 슈트가 그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신시켰다.

공다연이 드물게 말을 더듬었다.


“지, 지호?”

“오랜만이다.”


류지호가 인사를 건네며 공다연의 어깨에 올려 있던 남학생의 손을 붙잡아 털어냈다.


“어, 어떻게 왔어?”

“전철타고 대방역에서 버스 갈아타고 왔지.”


류지호가 놀란 얼굴의 공다연을 쳐다보며 농담을 던졌다.


“누구?”


남학생이 류지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공다연에게 물었다.

류지호가 대신 대답했다.


“다연이 친구.”


공다연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학원생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던 미소다.

남학생이 입술을 깨물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여기서 깔끔하게 포기해야 했다.

하지만 남학생은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었다.

체면이 걸려 있었기에.


“거기 너! 우리 밥 먹기로 했으니까 그만 가봐.”

“다연아, 얘랑 밥 먹기로 했어?”

“아, 아니!”


공다연이 강력하게 부인했다.


“그렇다는데?”


소란이 일어나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어차피 남학생은 망신을 당했다.

뭐라도 시도해 보고 얼굴이 팔리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내가 연속극에 나온 거 못 봤어? 나 연예인이야.”


가당치도 않은 말을 주절대는 남학생을 깔끔하게 무시한 류지호가 공다연에게 물었다.


“연기 수업은 받을 만 해?”

“으, 응? 응!”

“그래, 열심히 해. 넌 성격만 고치면 뭘 해도 될 수 있어.”

“야! 그런 말은 왜 해?! 너 죽을래?”


공다연이 빽 소리를 지르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제야 그녀의 본 모습이 나왔다.

성질 나쁜 암고양이처럼 도도하고, 안하무인의 그녀.


“하하. 그래야지. 본래 공다연으로 돌아왔네?”


류지호가 웃음을 입가에 달고 그녀를 놀렸다.

공다연은 분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톡 쏴댔다.


“으으. 재수 없어. 넌 오랜만에 봐도 달라진 게 하나도 없냐?”


남학생은 완벽하게 소외되었다.

꿰다 논 보릿자루도 아니고 그냥 길가에 돌멩이처럼 방치 됐다.


“거치적거리니까 넌 저리 비켜봐.”


고우찬이 남학생을 잡아끌어 옆으로 밀쳐냈다.


이익.


남학생은 발끈했다.

하지만 고우찬의 험악한 인상을 보고는, 섣부르게 대들지 못했다.


“너, 넌 뭐야?!”

“나? 저기 다연이 친구의 친구.”


고우찬이 한 번 더 남학생을 한쪽으로 밀어냈다.


“비켜 봐. 다연아, 나 기억하지?”


공다연이 특유의 잘난척하는 어투로 대답했다.


“응. 지호 꼬붕이잖아.”

“아씨, 내가 주안 일짱이거든.”


작년 방송부연합 MT 이후 류지호를 피했던 공다연이다.

공다연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편안하게 자신을 대해주는 류지호가 무척 고마웠다.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그 날의 섭섭함과 앙금이 남아있었지만.


“내가 나온 드라마 봤어?”

“무슨 드라마 나왔는데?”

“나쁜 놈. 매정한 놈. 날 뻥 찼다고 이젠 관심도 없냐?”

“촌스럽게 뭘 그런 걸 챙겨 봐. 어련히 알아서 잘하려고.”

“다연아, 난 봤어. 예쁘게 잘 나왔더라.”

“넌 안 봐도 돼.”

“흥. 나도 다연이 너 관심 없어 왜 이래.”

“고릴라는 입 다물어.”


공다연은 잠시 가식을 내려놓고, 재회의 기쁨을 나눴다.

세 사람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복도 저 멀리로 멀어졌다.


“......?”


남학생은 홀로 남겨져 뻘쭘해진 상황.


“나만 바보 된 건가?”


어이없고, 황당하고, 당황스러운 남학생이다.

공다연에게 수작부리다가 바보취급 당한 이 남학생.

1994년 MBS 미니시리즈로 데뷔해 10여 년간 공중파 3사를 넘나들며 왕성하게 활동하게 되는 한류스타 한명훈이다.

훗날 이날의 에피소드를 방송에서 이야기 했다가, 류지호와 공다연이 기억하지 못해 한 번 더 체면을 구기게 된다.

이날의 일화는 한류스타 한명훈의 흑역사였다.

본인만 기억하는.


❉ ❉ ❉


배우 캐스팅, 장소 헌팅, 포스트 프로덕션 업체 선정, 콘티작업 등등.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시간이 지나 갔다는 말이 실감나는 보름간이었다.

모든 준비가 끝이 났다.

드디어 단편영화 촬영을 앞두고 있다.

영화촬영의 시작을 '크랭크 인(Crank In)' 한다고 한다.

영화용어에서 크랭크는 트라이포드와 카메라를 연결하는 부품을 뜻한다.

즉 촬영을 시작한다는 의미는 카메라를 크랭크에 연결 혹은 부착한다는 뜻이 되고, 때문에 영화촬영 시작을 크랭크 인이라고 칭했다.

반대로 크랭크에서 카메라를 떼어내면 영화촬영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크랭크 아웃(Crank Out)' 또는 ‘크랭크 업(Crank UP)'이라 하고 있다.

참고로 이 용어는 한국에서만 쓰는 표현이다.

유래를 알 수 없는 콩글리시라고 할 수 있다.


“손발도 안 맞춰보고 바로 가는 거야?”


조감독으로 참여한 하재근이 우려를 드러냈다.

류지호는 웨딩촬영을 하는 기사를 현장에 투입할 때도 연습을 많이 시킨다.

헌데 그보다 더 어려운 영화촬영을 무턱대고 시작하려고 하고 있었다.


“오전 촬영하다보면 손발이 맞춰 질 걸요? 다들 프로들이잖아요.”


첫 촬영은 동네길과 마을 정자 그리고 사진관 앞거리 등 주로 로케이션 촬영으로 잡았다.

낮장면(Day Scene) 위주로 비교적 부담 없는 커트 위주로 찍을 예정이다.


“일단 밥부터 먹고 천천히 오늘 분량 확인해 보자구요.”


시간이 돈이다.

따라서 스태프들은 새벽에 집합했다.

촬영이 예정된 동네 근처 식당에서 아침을 먹었다.

이것부터가 여느 단편영화와 달랐다.

스태프에게 아침을 먹이는 단편영화 제작현장은 없으니까.


“감독님, 저희가 준비할 동안 커피 한 잔 하면서 콘티 확인하세요.”


소화도 채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촬영팀과 조명팀이 분주하게 현장으로 움직였다.


“뭐가 급하세요. 소화도 시킬 겸 커피 한 잔씩 하세요.”

“우린 현장 가서 마실게요.”


모든 스태프들이 움직이는 가운데 혼자 콘티만 보고 있는 건 다소 민망한 일이다.

그러나 촬영현장에서 각자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있는 법이다.

감독이 부지런 떤다고 해서 현장이 잘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제작부 허드렛일을 도와주기 위해 합류한 김재욱이 달려왔다.


“지호야, 촬영기사님이 오래.“


하재근이 호통 쳤다.


“류지호 감독님이라고 불러!”


권위가 무너지면 안 된다.

단순히 사회에서 말하는 위계질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감독으로서의 권위.

이건 아주 중요하다.

하재근은 아는 것이다.

권위가 무너지면 이놈 저놈 다 기어올라 감독의 위치는 바닥으로 떨어진다는 걸.

사소하지만 그래서 호칭이 중요하다.

류지호는 이 현장에서 아역 배우를 제외하고 가장 어리다.

그런데 포지션은 현장의 총사령관인 감독이다.

후배고 친구고 누구라도 감독에게 존중을 보여야 한다.

그래야 실수가 없다.

찔끔한 김재욱이 감독님이란 호칭이 입에 붙지 않는지 우물쭈물 했다.


“재욱아, 김인륜 선배님 오실 시간 됐어. 큰 길 가서 기다리고 있다가 모시고 와.”

“네!”


김재욱이 씩씩하게 대답하고 달려갔다.

류지호가 하재근과 함께 촬영 장소로 향했다.

김영복 기사가 조수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는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일단 레일부터 내려.”

“달리 레일은 몇 조 깔아요?”

“일단 4조 깔 건데, 감독 오면 확인하고 깔자.”


류지호가 촬영을 진행할 동네 길로 걸어왔다.


“충무로에서도 보기 힘든 발전차까지....”


스크립터로 참여한 하재근의 후배 홍진아가 다소 질렸다는 듯 중얼거렸다.

게다가 충무로에서도 낮촬영 시에는 발전차를 쓸 일이 없다.


“누나, 저거 사용료 공짜에요.

“그래도 기름값이 장난 아닐 텐데.....”

“밤씬이 그렇게 많진 않잖아요. 충분히 감당할 수 있어요.”


하재근 역시 황당하기는 마찬가지다.


“조명기사가 발전차까지 대절할 줄은 몰랐어.”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거죠.”

“무슨 이해관계?”

“입봉하기 전에 무엇으로 경험치를 쌓겠어요. 비록 16mm 영화지만, 예산 안에서 하고 싶은 거 다해보고 다양한 시도를 해보자고 했어요. 당연히 마다할 이유가 없죠. 오퍼레이터가 아니라 직접 디렉션을 해볼 수 있는데.”

“촬영회차가 늘었잖아.”


처음 계획했던 촬영 횟수를 넘기면서 제작비도 함께 상승했다.

류지호가 부담감을 느낄 정도는 아니다.


“뭐... 가온웨딩이 잘 나고 있으니 돈 걱정 할 건 아니지만.”


류지호는 잠시 멈춰 서서 분주하게 촬영 준비하는 스태프들을 바라봤다.

충무로 영화현장은 스태프들의 처우가 열악하다.

미리 계획해 놓은 일일촬영계획표 대로 진행되는 법이 거의 없다.

매 촬영마다 쫓기듯 촬영을 한다.

촬영현장에서 조수들이 분주히 뛰어나다는 것이 미덕처럼 여겨지고, 감독들의 고함소리가 들리는 것이 자연스러운 분위기다.

제작비에 항상 쪼들리다보니, 기한 내 촬영을 마치려면 며칠 밤을 지새가며 촬영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오랜만에 봐도 짠하네....’


류지호는 자신의 연출부 조수시절이 떠올랐다.


‘그땐 내가 뭐하고 있나 매번 회의가 들 곤 했었는데.’


다행히 스태프들의 표정은 밝았다.

누구 하나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사람이 없다.

모두의 눈에는 불타는 열정이 있었다.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영화 일은 훨씬 고되다.

그야말로 좋아서 하지 않으면 못 할 짓이다.


‘얼마 만에 돌아온 영화현장인지.....’


오랜만에 촬영장을 마주하자 류지호의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류지호는 눈을 감고 설렘과 긴장이 복합적으로 얽혀있는 감정을 음미했다.


“감독님.”


김영복 기사가 감상에 젖어있던 류지호를 일깨웠다.


“어디부터 시작해서 어디서 끊을 겁니까?”

“씬 4 말하는 거죠?”

“김인륜 선배하고 경재가 사진관에서 나와서 걸어가는 장면이요.”

“롱 테이크(long take)로 가기로 한 거 말하는 거죠?”


그렇게 한동안 두 사람은 오전 촬영분량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영화를 잘 찍는 방법?

없다.

아니 류지호는 모른다.

알았다면 이전 삶에서 그가 삼류감독으로 살지 않았을 테니까.

그렇다면 새로 시작하는 지금.

류지호는 어떻게 해야 할까.

프리프로덕션 단계에서 충분한 준비를 한다.

연출력의 바로미터인 콘티에 힘을 쏟는다.

가슴은 감성적으로 머리는 명료한 이성으로.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에 자신감을 가져야 했다.

영화를 찍는 순간순간이 입봉이자 유작이라는 마음가짐으로 하얗게 불태운다.

결과는 관객에게 맡기면 된다.

프랑스의 어떤 비평가는 말했다.

영화감독은 때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잘해낼 수 있다고.

평범한 재능의 감독이 다른 뛰어난 예술가들과 협업을 함으로 비범한 작품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는 의미다.

약간의 비아냥거림이 담긴 말이긴 해도 영 틀린 말은 아니다.


“어서 오세요, 선배님.”

“감독.... 내가 제대로 찾아온 거 맞지?”

“잘 찾아오셨어요.”


김인륜 배우는 촬영현장에서 움직이는 인원을 보고 놀랐다.

단편영화라고 알고 왔는데, 발전차에 달리 레일에 스태프 숫자까지도 많았다.

이경재의 엄마도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전문가로 보이는 헤어·메이크업 여성 스태프 두 명이 곧바로 이경재의 메이크업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헤어·메이크업팀은 영화·드라마 전문 스태프가 아니다.

가온웨딩의 협력업체 미용실에서 일당을 받기로 하고 지원 나온 스태프였다.


“거기....”


김인륜 배우의 부름에 김재욱이 얼른 달려갔다.


“자네는 부서가 어딘가?”

“제작부입니다!”

“내가 깜박하고 콘티를 안 가지고 왔어. 남는 콘티 있으면 한 부만 줘 봐요.”


류지호는 단편영화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에게 콘티를 사전에 나눠주었다.

참고로 ‘콘티‘라는 용어도 일본식 잔재다.

할리우드에서 쓰이는 continuity라는 개념을 일본에서 제멋대로 해석한 후에 스토리보드라는 개념 대신 콘테(コンテ)라고 했는데, 이것이 한국으로 넘어와 다시 콘티가 되었다.

영어권에서는 콘티뉴이티라는 개념이 따로 있고, 한국에서 콘티라고 불리는 촬영 전반의 설계도를 스토리보드(storyboard)라고 한다.

이 당시 충무로와 방송계에서는 흔히 ‘줄콘티‘라고 하는 글자로 된 연출계획만 존재했고, 대체로 콘티 작업물(스토리보드) 없이 현장에서 즉석으로 연출을 했다.

그런데 류지호는 단평영화를 찍는 주제에 스토리보드까지 완벽하게 준비했다.

비록 그림 실력이 형편없어서 눈사람 모양에 코와 눈을 그려 인물을 표현했지만, 엄연히 스토리보드 양식을 따라서 작성했다.

영화의 모든 씬과 컷에 대한 카메라 위치, 앵글, 무빙, 미장센, 배우의 심리상태 및 동선, 심지어 연출 의도도 기록되어 있다.

모든 스태프가 스토리보드를 보면 따로 대화를 나눌 것 없이 촬영을 준비할 수 있을 정도로 섬세했다.

흔히 감독의 연출력은 콘티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한다.

그 안에 감독의 창의력, 미학, 주제의식, 연출역량 등이 모두 들어있기 때문이다.


슥.


붐 마이크가 아리플렉스(Arriflex) 16BL(imped) 카메라 너머에서 불쑥 들어왔다.


“......!”


김인륜 배우와 이경재 엄마가 또 다시 놀랐다.

단편영화를 찍는 주제에 동시녹음이라니.


“김 기사....”

“예. 선배님!”


김인륜 배우의 부름에 김영복 기사가 대답했다.


“이 영화감독 뭐하는 청년이야?”

“네?”

“뭐하는 청년이기에 단편영화를 이렇게 요란하게 찍느냐 말이야.”

“하하. 우리 감독님이 조금... 아니 많이 유별나긴 합니다. 겪어보시면 아시겠지만 뭘 하나 해도 허투루 하는 친구가 아니니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헐헐헐.


김인륜이 특유의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냈다.

혹시 단편영화로 사기치고 에로영화를 찍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도 했다.

카메라를 잡고 있는 친구가 유명한 영화 촬영감독 조수인 걸 알기에 촬영장을 떠나지는 않았다.


휙휙.


붐맨이 인물의 동선에 따라 붐 마이크 부빙을 확인했다.

김영복이 붐맨에게 주의를 줬다.


“거기서 마이크 더 들어오면 프레임에 들어온다.”


붐맨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 갈까요?”


류지호가 스태프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외쳤다.


“가시죠.”

“준비됐습니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행복한 하루 되십시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1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Mr. 할리우드!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95 사장님이자 감독님이야. +9 22.02.28 7,861 207 19쪽
94 영정사진. (8) +9 22.02.26 7,814 192 21쪽
93 영정사진. (7) +3 22.02.26 7,443 179 18쪽
92 영정사진. (6) +6 22.02.25 7,562 196 19쪽
91 영정사진. (5) +8 22.02.24 7,607 171 21쪽
90 영정사진. (4) +7 22.02.23 7,662 199 22쪽
» 영정사진. (3) +11 22.02.22 7,766 196 22쪽
88 영정사진. (2) +7 22.02.21 8,030 184 23쪽
87 영정사진. (1) +4 22.02.19 8,411 177 23쪽
86 기업에게 국경은 없다! +5 22.02.18 8,297 180 26쪽
85 광고는 역시 스타 마케팅! +3 22.02.17 8,390 191 27쪽
84 W.a.W Pictures. (3) +4 22.02.16 8,328 183 23쪽
83 W.a.W Pictures. (2) +2 22.02.15 8,394 167 20쪽
82 W.a.W Pictures. (1) +4 22.02.14 8,584 184 17쪽
81 자네는 주식투자를 뭐라 생각해? +8 22.02.12 8,469 191 17쪽
80 천불생무록지인 지부장무명지초.... (3) +3 22.02.11 8,416 179 19쪽
79 천불생무록지인 지부장무명지초.... (2) +6 22.02.10 8,622 177 23쪽
78 천불생무록지인 지부장무명지초.... (1) +7 22.02.09 8,881 167 25쪽
77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건 가족뿐. +9 22.02.08 8,769 187 21쪽
76 미래를 사고 싶어요. (2) +5 22.02.07 8,870 188 21쪽
75 미래를 사고 싶어요. (1) +5 22.02.05 9,168 181 26쪽
74 우물을 벗어난 개구리. (3) +6 22.02.04 9,109 200 29쪽
73 우물을 벗어난 개구리. (2) +9 22.02.03 9,279 194 27쪽
72 우물을 벗어난 개구리. (1) +2 22.02.03 9,328 184 22쪽
71 10억 달러만 주세요! +11 22.02.02 9,495 205 25쪽
70 뉴욕 사교계 데뷔? +5 22.02.02 9,320 187 25쪽
69 상류사회의 일상이란. (3) +8 22.01.29 9,440 211 20쪽
68 상류사회의 일상이란. (2) +4 22.01.28 9,314 210 17쪽
67 상류사회의 일상이란. (1) +6 22.01.27 9,813 204 19쪽
66 충성을 다 하겠슴다! (4) +6 22.01.26 9,468 205 19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