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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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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4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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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26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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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정사진. (8)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세트촬영을 할 수 있는 사운드 스테이지(sound stage), 녹음실, 옵티컬 실, 시사실, 편집실, 현상소, 영화단체 사무실 등 각종 영화 관련 시설과 협회가 한 건물 안에 둥지를 틀고 있다.

이 당시만 해도 한국영화의 산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곳이다.

바로 남산에 위치한 영화진흥공사다.

류지호가 건물로 후문 겸 주차장 방향으로 들어갔다.

원래 관계자 외에는 출입할 수 없는 곳이다.

류지호가 하도 당당하게 행동해서 누구 하나 제지하는 이가 없다.

건물 지하층에 수많은 방 가운데 한 곳으로 들어가자, 스크립터 홍진아가 반갑게 맞이했다.


“왔니?”

“일찍 왔네? 잘 쉬었어?”

“쉬긴... 강의 받느라 지겨워 죽는 줄 알았어.”

“하하. 기사님께 인사하고 올게.”


류지호가 방문한 사무실은 영화 편집실이다.


“기사님. 저 왔어요.”

“....어.”


하체는 부실하고, 배는 올챙이배처럼 튀어 나온데다가 돋보기안경을 쓴 40대 초반의 남자가 성의 없이 인사를 받았다.

그랜드벨어워즈 편집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유능한 편집기사 박성덕이다.

현재는 상업영화 두 편을 편집 중이다.

한편은 한창 촬영 중이었고, 다른 한편은 네가필름 커팅만 남겨두고 있다.

박성덕 기사는 꽤나 넉살이 좋은 성격이다.

어린 류지호에게 스스럼없이 대했다.


“저 방에 세팅해 놨어. 뷰어 다룰 줄 안다며?”

“다뤄봤어요. 동시 사운드는 신경 안 쓰고 순서작업만 해두면 되죠?”

“순서만 해둬. 사운드 맞추는 건 우리가 알아서 하니까.”

“고맙습니다. 기사님.”

“고맙긴, 돈 받고 하는 건데.”

“학생작품처럼 건성으로 해주시면 안 됩니다.”

“화낸다.”


박성덕이 짐짓 화내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하지만 그의 눈을 웃고 있었다.


“야~ 감독! 근데 너희 집 부자냐?”

“아니요.”

“영복이가 그러는데 이거 찍는데 천만 원 들었다며?”


단편영화에 무슨 돈을 그리 들였냐는 소리다.

비아냥거림으로 들릴 수도 있다.

류지호는 일일이 해명하는 것도 난감해 말을 돌렸다.


“식사는 저희끼리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신경 안 쓰니까, 우리 신경 쓰지 말고 알아서 잘 챙겨 먹어.”

“수고하세요.”


넉살도 좋고, 사람을 참 편하게 해주는 사람이다.

이래저래 류지호의 첫 작품은 좋은 사람들과 작업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좌라락.

탁.

딸깍!


류지호는 러프 커트(rough cut) 직전 단계인 순서 편집을 시작했다.

순서편집은 1차 편집 전단계로 뒤죽박죽 촬영 된 필름에서 NG 커트를 걸러내고 영화 씬 순서대로 모든 OK와 KEEP 커트를 붙여놓는 과정이다.

류지호는 필름 뷰어(Film Viewer)라는 장비를 이용해 OK와 KEEP 커트를 골라냈다.

이 장비는 나무 판때기 중앙에 환등기 역할을 하는 뷰어가 고정되어 있고, 그 양 옆으로 손잡이가 달린 필름 거는 기둥이 각각 설치되어 있다.

사용법은 간단하다.

필름이 걸린 부분의 손잡이를 사람이 직접 손으로 돌리며 환등기에서 영상을 확인한 후, 잘라야 하는 부분에서 멈춘다.

스플라이서(Splicer)라는 기구 끝에 달려있는 작두 같은 장치로 필름을 자르고, 붙여야 할 각각의 필름의 끝부분을 스플라이서 중앙에서 서로 정확하게 맞춘 후에 투명테이프를 발라 덮개를 꾹 눌러주는 방식으로 작업을 한다.

류지호가 OK와 KEEP 테이크를 골라 영화의 순서대로 붙이는 사이, 홍진아는 NG필름을 따로 모아 봉투에 분류해 담았다.


“누나, 봉투 겉에 씬 넘버와 커트 넘버 꼭 적어놔야 돼.”

“이거 못 쓰는 거 아니야?”

“나중에 박 기사님이 NG 테이크도 확인할 수 있으니까 꼼꼼하게 분류해 둬.”

“알겠어.”


류지호는 삼 일간 편집실로 출근하며 순서편집을 했다.

순서편집 된 필름에 동시녹음 사운드를 씽크 시키는 시간이 며칠 걸렸다.

러프커팅까지 끝나자, 박 기사가 류지호를 편집실로 불렀다.

필름 편집장치의 대명사는 독일제 스틴백(Steenbeck)이다.

테이블 형태에 화면을 볼 수 있는 스크린 두 개가 중앙에 있고, 스피커가 스크린 양쪽에 달려있다.

필름편집과 사운드 편집을 동시에 할 수 있는 편집기다.


“느슨해.”

“담백한 거죠. 잔기술 안 부리고 직구로 팍.”

“아리랑 볼인데? 영화가 심심하잖아. 이걸로 어디 영화제에서 뽑아주겠냐?”

“진정성이 안 느껴지세요?”

“안 느껴지는데?”

“기사님 감수성이 닭가슴살이네요.”

“닭가슴살?”

“퍽퍽하다고요.”


박성덕은 류지호와 시답지 않은 농담을 주고받으면서도 손은 쉬지 않고 놀렸다.

손을 분주하게 몇 번 움직여 필름을 자르고 붙인 후 재생시켰다.


“감독아~”

“예?”

“이 씬은 그냥 롱테이크로 가자. 이 씬에 아빠, 엄마 단독 들어가니까 잡스럽다. 분위기도 다 깨지고.”

“길지 않아요? 소년의 감정이 중요한데....”

“카메라가 계속 움직여서 괜찮아. 여자 배우가 중간중간 들어왔다 나갔다 해줘서 심심하지도 않고. 탑에서 풀 쇼트였던 것도 엔드에서 바스트로 사이즈가 달라져서 프롤로그처럼 씬의 완결성도 있고.”

“언제는 루즈하다고 하시고선.”

“내가 만져주니까 씬 넘어가는 게 엄청 부드러워져서 그렇지.”


류지호와 박성덕은 오래 알고 지낸 사이처럼 스스럼없이 대화를 이어갔다.


위이잉.

틱.... 탁! 슥!


레버를 돌려 포워드, 리워드... 정지.

어림짐작으로 정지시키는 것 같은데, 정확한 포인트를 집어 자르고 붙였다.

박성덕의 손놀림은 한마디로 예술적이다.

이런 테크닉은 수도 없는 반복 작업으로 손에 익었을 터.

사실 손재주보다 더 중요한 것은 편집감이다

단순히 시간순서에 맞는 흐름으로 장면을 늘어놓는 것이 아닌 쇼트 하나하나에서 받게 되는 감정과 정서를 파악해 흐름을 잡아가는 것이 진정한 편집이다.


“그건 왜 잘라버려요!”

“가만 있어봐.”


감독으로서 공들여 찍은 쇼트가 가차 없이 잘려나갈 때는 위액이 솟구치는 느낌이 든다.

속이 쓰리고, 팔다리가 잘려나가는 아픔이 밀려온다.

그래도 류지호는 박성덕을 성급하게 말리지 않았다.


‘편집점 잡기가 애매해 앞에서부터 찍었는데, 지금 박 기사가 잘라낸 부분부터 찍어도 될 걸 그랬구나....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더니 이렇게 보니까 실수투성이였네.’


박성덕이 편집하는 광경을 지켜보며, 류지호는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콘티와 비교해 봤다.

콘티를 짤 때와 촬영할 때 보다 편집에서 더 많은 공부가 된다는 말이 맞았다.

박성덕이 연속성을 깨는 인서트를 뜬금없이 넣었다.

그것으로 상징적인 몽타주가 만들어 졌다.

<영정사진>은 도드라지는 갈등이 있는 영화가 아니다.

그럼에도 커트의 길이를 달리 하니 제법 인물 간 미묘한 감정의 삐걱거림이 살아났다.

40분이 넘었던 순서편집본이 1시간 뚝딱뚝딱 만진 것으로 10분이 줄어들더니, 그 날 저녁 편집실을 나설 때는 24분으로 확 줄었다.

다음날 편집을 시작할 때 박성덕이 보여준 편집본의 러닝타임이 더 줄어있었다.


“......?!”


2분 42초짜리 씬이 1분 10초대로 줄어 있다.

군살이 빠지며 훨씬 임팩트가 있었고,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다 들어있다.

단적인 예가 김인륜 배우와 박인철의 정자 씬이다.

요구르트를 따서 나눠 마시는 부자지간의 정겨운 모습이 보이다가 풀 샷으로 빠진 쇼트가 붙었다.

김인륜 배우가 느닷없이 쓰러지고, 박인철이 허둥대다가 업고 뛰어가는 것에서 컷.

곧바로 씬이 바뀌면서 약을 먹는 김인륜 배우로 넘어갔다.

심지어 그의 얼굴 위로 며느리의 다음 씬 대사가 선행되어 들리는 것으로 편집했다.

몽타주기법처럼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기 위해 짧게 연결한 것이 아니다.

쇼트 마다 길이가 절묘했다.

속도감이 있으면서 스토리도 충분히 전달되고, 인물들의 감정도 다 들어있다.

괜히 전문가가 아니다.


“좋네요.”

“뭐 이 정도 가지고... 많이 배워둬. 이런 기회는 자주 오는 게 아니다.”


즐거워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류지호에게 박성덕이 넌지시 충고했다.

류지호는 이전 삶에서부터 수많은 영상을 보았다.

지금 이 시기에는 꿈도 꾸지 못할 것들도 경험 했고, 실제 찍고 편집한 경험이 있었다.

감독은 자신이 창조한 세계와 이야기에 매몰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편집기사는 그런 면에서 자유롭다.

쇼트의 순서, 길이만 달라도 보는 사람에게 전달하는 바가 달라진다.

그리고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다.

박성덕은 류지호가 그렸던 기승전결을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씬의 순서를 바꾸고, 어떤 쇼트는 과감하게 생략해 버렸다.

씬과 커트를 대폭 압축했음에도 스토리는 이해가 된다.

류지호가 의도했던 은유와 상징이 더 명료해졌다.


“동어반복적인 쇼트들도 덜어내 주세요.”

“내가 감독이냐?”

“하하. 알겠슴다. 제가 고를게요.”


삼 일간 작업한 것만으로 영상의 깊이가 달라졌다.


‘한 발만 떨어져서 봐도 많은 걸 볼 수 있다고 하더니...’


그렇다고 감독이 일방적으로 편집기사에게 끌려가서는 안 된다.

감독은 자신의 영화에서 고집을 피워야 할 때는 피워야 한다.

영화가 많은 전문가들의 협업으로 이루어지는 모두의 영화이지만.

결국은 감독의 영화다.

따라서 류지호는 몇 가지 부분에서 박성덕과 의견대립이 있었다.

그중 가장 첨예하게 부딪친 건 엔딩장면이다.

류지호는 할아버지가 언덕길 넘는 커트와 손자가 언덕을 넘어와 사진관으로 들어가는 커트를 찍어온 그대로 붙여달라고 요구했다.

반면에 박성덕은 할아버지 커트의 앞부분을 대폭 잘라내자고 했다.

어차피 손자가 사진관 안으로 들어가는데 굳이 할아버지 커트에서 사진관을 나서는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냐는 것이다.

고민스러운 부분이다.

박성덕의 의견이 맞는 것일지도 몰랐다.

편집기술적인 면에서는 타당했다.

그의 의견을 따르면 압축적이면서 세련된 편집을 얻을 수 있다.


“타협해요.”

“타협이 어디 있어? 좋으면 좋은 거고, 후지면 후진거지. 어린놈이 꼼수부터 배우려고 들어?”

“마지막으로 제 이야기 들어보시고 마무리 하는 걸로 해요.”

“해봐.”


박성덕이 등을 의자에 깊숙이 기대고, 다리를 꼬고 앉았다.


“커트로 나누지 말고 씬으로 나눠요. 할아버지 커트 다음에 페이드 아웃(F.O)을 길게 넣는 거죠. 한 10초 정도? 그러면 마지막 커트가 에필로그가 되요. 앞 커트는 제가 양보할게요. 사진관을 길게 보여주던 걸 할아버지가 이제 막 나서는 걸로 앞부분을 드러내는 거죠. 믹싱할 때 드르륵 문 열리는 소리를 선행시킬게요.”


박성덕은 곧바로 스틴백에 앉아 류지호가 말한 대로 편집을 바꿨다.


“...응?”

“기사님, 한 번만 제 뜻 때로 해주세요. 네에~?”


류지호가 박성덕의 팔을 붙잡고 되도 않는 애교를 부렸다.


“징그러워 인마! 절루 가! 안 떨어져!”

“제가 맛있는 거 사드릴게요. 참치회 좋아하시죠? 아니면 다금바리? 참돔? 제가 쏠게요. 네?”

“알았어. 해 줄게. 이 팔 좀 놔.”


류지호는 갖은 아양과 저녁식사 공약을 내세워 자신의 뜻을 관철시킬 수 있었다.

열심히 바뀐 씬을 다듬는 박성덕을 보며 류지호가 투덜거렸다.


“그냥 해주면 되지 꼭 한 번씩 튕기더라.”

“뭐?”

“아녜요. 고생하셨다고요.”


오랜만에 작업한 영화 편집이다.

일주일의 편집시간은 재창조의 시간이었다.

류지호가 시나리오를 쓸 때 예상치 못한 것들.

그것들이 편집으로 만들어지는 마법을 경험한 시간이다.

류지호는 힘을 뺐다.

아집도 버렸다.

류지호의 시야가 조금 더 확장되는 시간이기도 했다.


❉ ❉ ❉


류지호가 서울예전 정문 옆에 붙어있는 건물로 들어갔다.

건물 지하로 내려가 기웃거리자, 직원이 다가왔다.


“어떻게 왔어요?”

“단편영화 녹음 때문에 왔습니다.”

“단편?”


직원이 대번에 무시하는 투로 되물었다.

류지호는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

입장 바꿔 생각해보면 직원의 응대도 이해할 수 있다.

한영스타디오는 이 시기 충무로 영화녹음의 80%를 소화하는 녹음실이다.

학생이 단편영화를 들고 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설령 가지고 온다고 해도 그걸 작업해 줄 가능성 또한 없다.


“이경운 기사님 계세요?

“회장님요?”


류지호가 한영스타디오의 회장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자 직원이 살짝 놀랐다.


“전화 드렸더니 2시까지 오라고 하셔서요.”

“누구라고 전해줄까요?”


직원의 태도가 친절해졌다.


“류지호 감독이라고 전해주세요.”

“잠시 기다리세요. 회장님 녹음 들어가셨는지 확인해 보고 올게요.”


잠시 후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갔던 직원이 돌아왔다.


“안으로 들어가서 C스튜디오로 들어가세요. 그곳에 계세요.”


류지호가 스튜지오 지하의 좁은 통로로 들어갔다.

통로는 동굴 같았다.

마치 흑마법사의 연구실처럼 어둡고, 음침했다.

간간이 폴리(poly. 효과음)를 만드는 기괴한 소리가 들려왔다.


스각스각.

끼리릭.

으흐흐흥.


공포영화 효과음이라도 녹음하는지 별의 별 괴상한 소리가 폴리 작업실에서 흘러나왔다.

이전 삶에서 연출부를 할 때 이곳 녹음실에서 실제 닭의 목을 비틀어 사운드를 따는 걸 목격하고 기겁했던 기억이 불현 듯 떠올랐다.


“공포의 집도 아니고....”


밝고 화사한 분위기에서 작업을 해도 되는데 굳이 어두침침한 조명 아래서 작업하는 이유를 지금도 이해를 못하는 류지호다.


똑똑.


C 스튜디오 푯말이 붙은 녹음실에 노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십니까.”


류지호가 녹음실에 들어서자마자 넙죽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믹서 콘솔 앞에 머리가 새하얗게 샌 빼빼마른 노인이 류지호를 맞이했다.

이경운 회장.

25년간 무려 2000편의 영화를 녹음한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녹음역사의 산증인이다.

영화를 했던 그리고 앞으로 하게 될 후배로서 류지호는 존경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어서 와라. 네가 어제 전화했던 감독이냐?”

“예. 기사님! 류지호라고 합니다.”

“허허. 날보고 기사라고 부르는 놈은 오랜만이네.”

“회장님이라고 불러드릴까요?”

“아니다. 나 아직 현역이다. 조수놈들이 뒷방으로 날 밀어내려고 자꾸 회장으로 불러대는 게 마음에 안 들었는데 듣기 좋아.”


이경운이 흐뭇한 웃음을 흘리다가 입을 뗐다.


“거기 앉아봐라.”


류지호가 이경운 옆 자리에 앉았다.

이경운이 거두절미하고 곧바로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어쩌다가 동시녹음을 할 생각을 했냐?”

“현장의 미묘한 소리까지 영화에 담고 싶었습니다. 배우의 연기부분에서도 현장감을 살리고 싶었습니다. 가끔 아드님이신 이상열 기사님이 현장에 오셔서 큰 도움을 주셨습니다.”


툭툭.


이경운이 대견하다는 표정으로 류지호의 어깨를 두드렸다.

동시녹음을 충무로에 정착시키는 것이 숙원인 사람이다.

85년 충무로 영화의 동시녹음이 10%수준이었다.

현재는 40%를 넘어섰다.

충무로 상업영화의 100편 중 60편이 여전히 후시녹음을 하고 있다.

이경운의 입장에서는 학생 작품을 동시녹음했다니 기특하고 대견할 수밖에 없다.


“일단 영화부터 함께 보자.”

“넵. 기사님!”


동시녹음을 해서 가져오니 환대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경운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폴리, 믹싱 심지어 영화음악까지 도움을 받았다.


“녹음작업비는....?”

“엔딩크레디트에 한영스타디오 한 줄 박아줘라. 그거면 돼.”


이경운은 대수롭지 않게 무료로 해주겠다고 말했다.


“류감독 같은 젊은 감독들이 많이 나와야 돼. 동시녹음이 돈이 더 들고, 거추장스럽다고 생각하면 우리나라 영화에 발전이 없어.”


동시녹음에 한이 맺힌 것 같다.

이경운은 무려 한 시간 동안 필요성을 역설했다.

동시녹음을 최고라고 생각하는 그에게는 미안하지만, 미래를 경험한 류지호 입장에서는 동시, 후시 모두 장단점이 있다.

그의 신념과 노력이 한국영화 동시녹음에 이바지한 바가 큰 것이 사실이기에 묵묵히 들었을 뿐.

무조건 동시녹음이 최고라는 말에는 완전히 동의하지 못하는 류지호다.

그의 노력 덕분일까.

1991년부터 동시녹음이 충무로에서 일반화 된다.

어쨌든 한영스타디오의 대표 이경운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사운드의 질이 상업영화 수준으로 올라갔다.


‘이 씬은 대사를 조금 더 살려주면 좋은데...’

‘폴리 불륨 조금 더 키워주지.’


물론 류지호의 성에 차지 않는 부분이 없을 수 없다.


“걱정마라. 내가 알아서 잘 만들어 주마. 옆에서 보면서 많이 배워.”


이경운은 류지호를 안심시키며 손수 작업을 챙겼다.

그런 가운데 류지호는 한 가지 중요한 걸 새삼 다시 깨달았다.

공짜로 호의를 받으면 감독이 작업자에게 요구를 못한다.

정식으로 계약하고 작업하면 감독은 원하는 걸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다.


‘에휴~ 고역이네.’


류지호는 충분히 배울 준비가 되어있다.

이미 알고 있었던 걸 새롭게 되새김질 하고 있다.

하지만 ‘잘 배워둬라’ ‘이건 이렇게 하는 거다‘라고 일방적으로 말하는 선배들을 보고 있자면 슬쩍 지겨워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 ❉ ❉


비록 두 달간의 짧은 경험이었지만, 류지호는 영화가 만들어지는 전 과정을 다시 한 번 밟았다.

실무는 더 이상 재점검할 필요가 없음을 확인했다.

때문에 무엇을 만들 것인가와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가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

이는 영화를 하는 한 평생을 두고 고민하고 탐구해야 할 것이다.

색보정까지 마친 최종 필름을 확인하는 날.

류지호는 김영복과 함께 세방현상소 시사실에 앉아있었다.


타이틀.

<영정사진>.

(Portrait of the Deceased).


“제목 안 바꾸고, 그냥 가기로 했네?”

“외국은 우리나라처럼 증명사진 같은 영정사진을 잘 안 쓴데, 고인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사진으로 쓴다더라고.”


영화를 통해 영정사진을 찍는다는 불편한 삶의 한 순간이 행복한 추억으로 영원히 기억될 수 있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


"좋다."


색보정 된 자신의 영화 색감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필름룩의 감흥은 남달랐다.

디지털 시대의 선명하고, CG로 도배된 그래픽 영상의 잔상이 완전히 사라질 만큼.

아날로그의 향수는 아닌 것 같았다.

극장에서 필름으로 상영하는 걸 보게 되면 어떤 최면효과가 있는 걸까.

질감이라고 해야 할까 물질감이라고 할까.

디지털 영사된 화면을 볼 때 문득 얇아 보인다 혹은 가벼워 보인다는 느낌을 받곤 했었다.

그런데 필름은 왠지 피사체에 두께가 있는 것 같다.

어떤 물질감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느낌이 묘하게 시각적 감각을 자극했다.

지금 시절에는 당연한 것들이 류지호에게는 색다른 경험과 탐구거리를 제공했다.

두 번을 더 영사를 했다.

그러고 나서 류지호가 최종적으로 오케이 결정을 내렸다.

김영복이 자부심 넘치는 표정으로 물었다.


“영화 잘 빠졌지?”

“다들 고맙네. 고생했어, 형.”

“감독인 네가 제일 고생 많았지.”

“난 일개 감독 나부랭이야. 스태프들이 차려놓은 밥상에서 나는 그저 맛있게 먹기만 하면 되는.”


대한민국 최고의 어떤 배우가 영화제에서 한 수상소감을 인용했다.

그걸 알 리 없는 김영복은 류지호의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리며 말했다.


“계속 그런 마인드로 영화해라. 그럼 모든 스태프들이 좋아하는 감독이 될 거다.”


겸손하고 성격 좋은 감독.

소통.

전문가 스태프들을 조화롭게 아우르는 카리스마.

적당한 비즈니스 마인드까지.

이런 것들이 영화감독의 창작활동을 제한하는 요소일지도 모른다.

영화감독은 어쩌면 창작의 자유가 일정 부분 제한된 환경 속에서 이런저런 타협을 하며 뭔가를 만들어 내는 직업일지도 몰랐다.

다시 영화작업을 해보면서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모든 감독에게 해당되는 건 아니지만...’


류지호가 영화와 멀어진 만큼.

그 거리를 좁히기 위해서 그는 달리고 또 달려야 했다.

프랑스 누벨바그 감독 프랑소와 트뤼포는 영화감독이 된 계기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면...


[솔직히 잘 모르겠다. 난 그저 조금, 더 조금, 영화와 가까워지려고 했던 것뿐이다.]


라고 말했다.


작가의말

즐겁고 행복한 주말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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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정사진. (8) +9 22.02.26 7,814 192 21쪽
93 영정사진. (7) +3 22.02.26 7,443 179 18쪽
92 영정사진. (6) +6 22.02.25 7,562 196 19쪽
91 영정사진. (5) +8 22.02.24 7,607 171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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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W.a.W Pictures. (2) +2 22.02.15 8,394 167 20쪽
82 W.a.W Pictures. (1) +4 22.02.14 8,584 184 17쪽
81 자네는 주식투자를 뭐라 생각해? +8 22.02.12 8,469 191 17쪽
80 천불생무록지인 지부장무명지초.... (3) +3 22.02.11 8,416 179 19쪽
79 천불생무록지인 지부장무명지초.... (2) +6 22.02.10 8,622 177 23쪽
78 천불생무록지인 지부장무명지초.... (1) +7 22.02.09 8,881 167 25쪽
77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건 가족뿐. +9 22.02.08 8,769 187 21쪽
76 미래를 사고 싶어요. (2) +5 22.02.07 8,870 188 21쪽
75 미래를 사고 싶어요. (1) +5 22.02.05 9,168 181 26쪽
74 우물을 벗어난 개구리. (3) +6 22.02.04 9,109 200 29쪽
73 우물을 벗어난 개구리. (2) +9 22.02.03 9,279 194 27쪽
72 우물을 벗어난 개구리. (1) +2 22.02.03 9,328 184 22쪽
71 10억 달러만 주세요! +11 22.02.02 9,495 205 25쪽
70 뉴욕 사교계 데뷔? +5 22.02.02 9,320 187 25쪽
69 상류사회의 일상이란. (3) +8 22.01.29 9,440 211 20쪽
68 상류사회의 일상이란. (2) +4 22.01.28 9,314 210 17쪽
67 상류사회의 일상이란. (1) +6 22.01.27 9,813 204 19쪽
66 충성을 다 하겠슴다! (4) +6 22.01.26 9,468 205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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