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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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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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4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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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21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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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정사진. (2)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래리가 주안 스튜디오로 쳐들어왔다.

사무실에서 마주한 래리의 눈빛을 보고 류지호는 옅은 한숨을 쉬었다.


‘눈빛만 봐도 알겠다.’


워낙 뜨겁게 쏘아대는 눈빛이었기에 그의 불만을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다.

류지호는 일단 화가 나 있는 그를 달래야 했다.


“걱정 마세요. 장편영화도 아니고, 단편은 한 달이면 끝납니다. 물론 해야 할 일을 소홀히 하지도 않을 거고요.”


래리는 눈에서 힘을 풀지 않고 똑바로 쳐다볼 뿐.


“그만 뜨겁게 쳐다봐요. 난 여자를 좋아하지 남자는 싫어요.”

“류 대표!”


버럭 소리를 지른 래리가 한동안 잔소리를 늘어놨다.

류지호는 묵묵히 래리의 조언을 가장한 설교를 들었다.

고개를 끄덕이거나 맞장구치는 것으로 성의를 보였다.

대부분의 말은 한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려버렸지만.


“결론은 신사동 스튜디오는 별 무리 없이 잘 돌아가고 있다는 말이군요.”

“그게 답니까?”

“수고했어요.”


래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체념한 듯한 그의 표정을 확인한 류지호가 말을 이었다.


“홍보팀 구성은 잠시 멈춰주세요. 오동석씨가 칸에서 돌아오면 함께 논의 해봐요.”

“영화 사업과 통합적으로 구성할 생각입니까?”

“업무는 분담하겠지만, 부서는 통합해서 운영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래리는 그 문제에 있어서는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언제 서울로 복귀할 겁니까?”

“이재호기사가 편집이 손에 익으면요.”


이재호는 류지호의 신포고 방송부 1년 선배다.

올해 인천대에 입학했지만, 학업에 큰 관심이 없었기에 가온에 정식으로 입사했다.

이재호를 인천 스튜디오의 편집기사로 키울 생각이다.


“꼭 지금 찍어야겠습니까?”

“네.”

“비수기에 찍어도 되지 않습니까?”

“뭐라고 해야 할까......”


잠시 뜸을 들이던 류지호가 입을 열었다.


“여름은 정서적으로 시나리오와 잘 안 붙어요. 가을은 할아버지의 죽음을 쓸쓸하게 만들 것 같고요. 그래서 봄이지만 늦봄이 좋을 것 같았어요. 세 계절이 남아있고, 늦봄은 한 계절이 끝나는 시점이지만 여전히 생명이 약동하잖아요. 죽은 자와 남아있는 사람들의 삶이 교차하는 계절이라고 할까?”


래리는 류지호가 말하는 바를 이해하지 못했다.

시나리오를 읽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래리는 설득에 실패했다.

답답함을 가슴에 담고 서울로 돌아갔다.


며칠 후.

인천 스튜디오로 찾아온 윤 팀장 역시 대뜸 물었다.


“영화 찍는다면서요?”

“어떻게 알았어요?”

“회사에 소문이 파다해요.”

“그게 소문 날일인가...?”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지만 윤 팀장은 그 질문에 답했다.


“영화 찍는 게 소문 날일이 아니고, 대표님이 얼마나 잘 찍나 궁금한 거죠. 다들 대표님 벼르고 있어요.”

“벼르다니요?”

“오리엔테이션 촬영 때 대표님이 잔소리가 좀 많았어요? 직원들이 대표님이 직접 웨딩비디오 찍는 모습도 보고 편집한 것도 봤지만 영화에서는 과연 어떨지 궁금한 거죠. 혹시 후진 결과물이 나오면 신나게 놀려댈걸요.”

“어차피 부딪칠 거였는데 잘 됐네요. 직원들의 기대에 부응해야겠어요.”

“언제나 긍정적이시네.”


윤 팀장의 말에는 비꼬는 것이 아니라 약간의 걱정을 담고 있다.

그의 얼굴 표정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윤 팀장도 내가 영화 찍는 게 불안한가 봐요?”

“단편영화면 부담이 덜하긴 하겠죠. 한 번 찍어보는 것도 좋아요. 이왕이면 필름으로 찍어야죠.”

“윤 팀장이 촬영해보실래요?”


윤 팀장이 단번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힘들어요. 이주희 찍은 걸로 럭셔리 촬영 예약이 얼마나 늘었는데요.”


이주희를 촬영한 것으로 시네마 타입 상위 상품으로 럭셔리 타입이 추가되었다.

사진과 비디오의 패키지였는데, 웨딩포토앨범까지 들어가 있는 상품이다.

패키지 가격은 200만원.

주로 정치인, 대기업 임원, 고위 공직자 자녀들의 예약을 받았다.


“서울예식장에서 예약이 터지네요. 거기서 정치인이나 평창동 부자들이 결혼식을 많이 하니까 이백만원은 껌값인가 봐요.”

“거기는 제휴 예식장이 아닌 걸로 아는데...?”

“높으신 양반들이 찍겠다는데 어쩌겠어요.”

“상류층 자녀들의 결혼준비를 본인들이 직접 할 일은 없을 테고, 비서나 보좌관들이 우리 소문을 들었나 보군요?”

“그래서 말인데, 영화하는 후배들이 잠깐씩 일당 받고 촬영하면 안 되겠냐고 부탁이 들어와요.”

“그저 시간만 때우면서 적당히 찍어오면 곤란해요.”

“영화하는 놈들이라 쪽팔려서도 그렇게 안 할 겁니다. 가오가 있거든요.”

“예약률이 어떻기에 그래요?”

“봄시즌은 다음달에 8개 있어요. 가을이 문제입니다. 매주 예약이 거의 다 찼거든요.”

“럭셔리 타입은 비싸서 어쩌다 한 번씩 찍을 줄 알았는데 예상 밖이네요.”

“연예인이 찍었다고 하면 돈 좀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도 그렇게 하고 싶어 하니까요.”


부자들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 심리가 그렇다.


"윤 팀장 혼자 소화하기에는 무리가 있겠네요. 믿을 만한 사람으로 윤팀장이 알아서 뽑아서 쓰세요."

"감사합니다."

“다른 촬영기사들의 불만사항이나 건의사항은 없어요?”


윤 팀장은 한동안 촬영기사들의 요구사항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줬다.

류지호는 자잘한 것들이라 즉시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약속했다.

한 가지 의아했던 것은 충무로 스태프를 소개시켜주겠다고 한 것이다.


“윤 팀장이 단편영화 촬영을 하겠다고 나설 줄 알았어요.”

“저는 이미 충무로 떠난 몸입니다. 저보다 잘 찍는 후배가 있어요. 걔랑 작업해 보세요.”


류지호는 현재로서는 영화판에 이렇다 할 인맥이 없었다.

그가 기억하거나 친했던 스태프들은 90년대 후반에 잠재력을 폭발시키기 시작한다.


“오 실장에게도 부탁하겠지만, 윤 팀장도 스태프 추전 좀 해주세요.”

“걱정 마세요.”


류지호는 최준영에게 단편영화 촬영팀에 합류하겠냐고 은근슬쩍 떠봤다.

최준영 역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지금의 생활에 만족하는 걸로 보였다.


‘잘 된 건가? 아니면 내가 한 사람의 인생을 나쁜 쪽으로 바꾼 건 아니겠지?’


찜찜했다.

최준영이 촬영기사로 힘겨운 말년을 보냈다고 해서 이번에도 그럴 거라는 보장은 없다.

공연히 자신이 웨딩비디오에 끌어들여 최준영이 후회하는 삶을 살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 들었다.


‘형이 영화를 하겠다고 하면 충분히 준비된 상태에서 충무로에 나가도록 도우면 돼.’


류지호가 생각을 멈추고 윤 팀장에게 지시사항을 전달했다.


“가온 소속 기사들에게 한 달의 한 번은 극장에서 영화를 볼 수 있도록 티켓을 구입해 돌려야겠어요.”

“......?”

“촬영기사 사무실에는 항상 MTV뮤직비디오나 대가들이 찍은 영화를 틀어놓도록 해주세요. 영화잡지와 촬영관련 신간이 출판되면 구입해서 비치해 놓으시고요.”

“웨딩비디오는 한계가 있어요.”

“비록 지금은 웨딩비디오를 촬영하고 있지만, 가온에서 촬영기사를 하던 누군가가 미래에 좀 더 전문적인 촬영분야로 진출하지 말라는 법이 없잖아요.”


모든 영화인들을 도울 수도 지원할 수도 없다.

적어도 자신의 품에 들어온 사람들만큼은 지원하고 싶은 것이 류지호의 마음이다.

류지호처럼 영화라는 직업에서 성공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비참하게 죽는 영화인이 없기를 바랐다.


❉ ❉ ❉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유명한 휴양 도시 칸(Cannes).

해마다 5월이 되면 이곳에서 세계3대 국제 영화제인 칸 영화제(Festival de Cannes)가 열린다.

섬을 따라 이어진 끄르제트 거리(Bd. de la Croisette)는 세계에서 모인 유명인과 영화배우가 숙박하는 최고급 호텔을 비롯해, 고급 레스토랑, 부티크 등이 들어차 있다.

거리의 서쪽 끝에 있는 건물 팔레 드 페스티벌(Palais des Festivals)은 칸 영화제의 주요 행사장이다.

마켓 참가증을 목에 건 오동석이 팔레 드 페스티벌로 들어갔다.

오동석이 프랑스 칸으로 날아오고 일주일이 바람같이 지나갔다.

일주일간 열심히 극장과 필름 마켓을 돌아다녔다.

도시 곳곳에서 벌이지는 이벤트와 유명 해외스타는 오동석의 관심사항이 아니다.

오로지 흥행 가능성이 있으면서도 가격 부담이 적은 좋은 작품을 찾는 게 목표다.

필름 마켓이 열리고 있는 팔레 드 페스티발에는 전 세계에서 모인 수많은 배급사들이 영화 포스터를 붙이고, 해외 바이어들을 상대로 홍보가 한창이다.

84년 전까지만 해도 영화수입자격을 가진 국내영화사는 20개였다.

영화수입이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뀌면서 수입배급업체도 몇 배로 늘어나게 되었고, 자연히 해외영화 로열티가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할리우드 액션영화, 인지도 높은 배우가 출연하는 영화는 국내 업체들끼리도 판권 구매 경쟁이 치열했다.

사실 외화를 수입하는 일은 도박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싼값에 사온 영화가 대박을 칠 수도 있고, 비싼 로열티를 지불한 영화가 쪽박을 찰 수도 있는 게 영화흥행이다.


“한국에서 오셨다고요?”

“예. WaW이라는 신생배급회삽니다.”

“아쉽게도 한국은 이미 영화배급이 끝났습니다.”

“그렇습니까?”


오동석은 할리우드 메이저의 6개 부스에서 똑같은 말을 들어야 했다.

당연했다.

이미 직접배급과 대행업자들이 정해져 있었다.

남은 미국영화는 독립배급 영화들이다.

한국관객들이 흥미를 보일만한 영화가 아니다.

그래도 혹시 몰라 오동석은 열심히 발품을 팔았다.

이탈리아 영화사 부스들이 모여 있는 곳에 발을 들인 순간.

오동석의 시선을 잡아 끈 영화가 있었다.

엄브렐러 엔터테인먼트에서 배급하는 <시네마 천국>이다.

올해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올라있는 영화 가운데 한편이다.


“반갑습니다. 엄브렐러 엔터테인먼트 부스 방문을 환영합니다.”

“한국에서 온 동석 옵니다.”


오동석은 부스 관계자와 악수를 나누고 상담에 들어갔다.

이 당시 이탈리아 영화를 수입하는 한국의 영화수입업자들은 주로 에로영화풍의 야한영화들을 수입해 변두리 극장에 배급했다.

명종 필름이나 지미픽처스 정도에서 유럽의 예술영화를 수입해 배급했는데, 수익적인 측면에서 재미는 별로 보지 못했다.


“<시네마천국>은 한국배급업체와 계약이 끝났습니까?”

“한국에는 아직 팔리지 않았습니다.‘


<시네마천국>을 5만 달러에 못 미치는 가격에 판권구입을 했다.

통상 한국수입업자들이 이탈리아 에로영화를 수입하는 가격이다.

칸 영화제가 끝난 시점에 구입했다면 몇 배의 가격을 지불하고 구매했을 터.

이때까지 아무도 몰랐다.

<시네마 천국>은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그랑프리(Grand Prix du Jury)를 수상하고, 내년에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하게 된다는 것을.

영화 한 편을 무사히 계약 마친 오동석이 부지런히 부스들을 돌아다녔다.

해외 배급사 관계자들과 안면을 익히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다음 마켓에서도 만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애니메이션은 극장 잡기가 어려운데.....”


오동석은 LOG(Laugh-O-Gram)컴퍼니 홍보부스 앞에서 고민에 휩싸였다.

미키마우스로 대표되는 LOG 애니메이션은 어린이들이나 보는 만화영화라는 인식이 강했다.

때문에 서울 메이저 극장보다 예술영화를 상영하는 아트홀쪽 극장에 영화를 걸었다.

지방에서는 시민회관에서 상영되기도 했다.

LOG 애니메이션의 판권구입가는 결코 적지 않다.

극장 잡기도 쉽지 않고, 시민회관을 빌리는 비용이 추가로 들기 때문에 고민스러울 수밖에 없다.


“일단 상담을 해보고, 대표님과 의논해 봐야겠다.”


오동석은 LOG컴퍼니 부스로 들어가 올해 그들의 라인업을 확인했다.

하루 종일 마켓 시사를 보고, 영화 구입상담을 진행한 오동석이 지친 몸을 이끌고, 도시 외곽으로 향했다.


꼬르륵.


배속에서 밥을 달라고 아우성이다.

끄르제트 거리의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는 건 꿈도 못 꿀 일이다.

류지호가 식비와 교통비를 아끼겠다고 사서 고생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지만, 그는 고지식했다.

도시 외곽의 숙소 인근에서 저녁을 해결한 오동석이 호텔로 돌아왔다.

함께 묵고 있는 매튜는 오늘도 어디 파티에라도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밤새 흥청망청 놀다가 새벽에야 호텔로 돌아올 터.

때로는 안 들어오는 날도 있고.


- <시네마 천국>을 계약했습니다.


주안 스튜디오로 출근하는 류지호는 칸 필름마켓에 출장 가있는 오동석과 통화를 했다.


“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이 연출한 영화 말입니까?”

- 예. 대표님.

“......”

- 통상적으로 이탈리아 영화를 수입하는 가격에 계약할 수 있었습니다.

“고생하셨어요.”


경험이나 쌓게 해주려고 출장 보냈던 칸영화제다.

헌데 오동석은 <시네마 천국>의 판권을 구입했다.

그것도 매우 싼 가격에.


- 그 외에 보고 드리고 허락을 구할 게 있습니다.

“편하게 말씀해 보세요.”

- LOG 애니메이션 <인어 공주>가 아직 판권이 팔리지 않고 남아있습니다.

“.....음.”

- 가격도 괜찮고, LOG 영화는 손해는 안 봅니다.

“그렇다면 계약하면 되잖아요? 뭐가 문제죠?”

- LOG에서 조건을 걸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나라 수입사들이 계약을 섣불리 안 하고 서로 눈치만 보고 있습니다.

“조건이 뭔데요?”

- 한국어 더빙을 LOG 본사에서 직접 챙기겠답니다.

“직접 챙겨요?”

- 그렇습니다. 본사에서 디렉터를 파견해 성우 오디션부터 레코딩까지 자신들이 직접 관여하겠다는 거죠.

“그게 뭐가 어때서요?”

- 예?

“뭐가 문제냐고요?”

- 자존심 상하는 일 아닙니까? 한국영화를 무시하는......

“뭐가 무시입니까? 그들의 기술과 노하우를 배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지. 다른 업자가 계약하기 전에 당장 계약하세요.”

- 그 사람들에게 일일이 끌려 다니면 꽤 피곤할 텐데요.

“피곤해도 합시다. 우리 영화 더빙 수준을 한 단계 끌어 올릴 수 있는 기회입니다.

- 아, 알겠습니다.

“송금에는 문제없어요?”

- 괜찮습니다. 작년부터 외화송금을 사실상 자유화한 상태라 미국으로 외화 송금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88년까지 정부에서 외화유출 방지라는 명목으로 해외송금액을 철저하게 제한을 두었다.

때문에 영화수입업자는 수십만 달러의 영화를 수입할 때 미국현지에 여러 한인업체와 미리 계약해서 나눠서 외화를 송금하는 편법을 쓰기도 했다.


“거긴 지금 새벽이죠? 피곤할 텐데 얼른 쉬세요.”


류지호는 <인어공주>를 계약하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나서 전화를 끊었다.

기분이 묘했다.

류지호가 고개를 갸웃하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뭔가 되게 뿌듯하고... 큰일을 하나 이룬 거 같기도 하고.”


심은주가 물었다.


“뭐가?”

“그냥... 내가 영화를 두 편 사올 거 같아. 아, 내가 사오는 게 아니라 오 실장이.”

“무슨 영화?”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 먹는 영화랑 LOG 애니메이션.”

“재밌대?”

“나중에 남자친구랑 극장가서 봐. 미안, 누나 아직 남자친구 없지?”

“혼난다.”


심은주가 알밤을 먹이는 시늉을 해보였다.


“우리 직원이 몇 명인데. 맘에 드는 사람 없어?”

“주안은 죄다 연하잖아. 서울로 발령내주고 남자를 고르라고 하든가.”

“여름에 회사차원에서 MT 추진해 볼게.”

“진짜지?”


류지호는 새끼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반드시 그러겠다고 확인을 해줬다.

편집실로 돌아온 류지호가 소파에 자라를 잡았다.


“고등학생이 어른 흉내를 낸다라...”


류지호는 영정사진 단편 시나리오를 각색했다.

고우찬이 한 말에 깨닫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류지호는 현재 십대 청소년 신분이다.

십대가 60대 노인과 중년의 심리와 삶에 대해 알면 얼마나 알겠나.

이것이 영정사진 단편영화를 평가하거나 관람할 사람들의 반응일 것이다.

그렇다면 주제나 스토리를 헤치지 않는 선에서 주인공만 바꾸면 된다.

류지호는 10살 손자의 시선으로 영화를 끌고 나가기로 했다.

새로 손 본 시나리오를 다시 한 번 읽어보았다.


히죽.


류지호는 기분이 좋아졌다.

이전 삶에서 좋아했던 영화를 자신이 만든 회사에서 수입·배급할 예정이고, 단편영화도 찍을 계획이다.

뭔가 영화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 같았다.


❉ ❉ ❉


비범한 재능의 영화감독이 영화를 찍으면 비범한 영화가 나온다고 한다.

평범한 재능은 대체로 평범한 영화를 찍는다고도 한다.

평범한 감독이 뛰어난 예술가들과 작업하면 조금 괜찮은 영화가 나오기도 한단다.

그렇다면 평범한 재능의 감독이 훌륭한 영화를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별것 없다.

독선과 욕심만 안 부리면 된다.

함께 작업하는 예술가들이 맘껏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판을 깔아주면 된다.

그들이 미처 날뛸 때 나서서 제어만 하면 된다.

제어하는 방법?

그들의 말을 잘 들어주고, 그들의 아이디어를 칭찬해 주고, 너무 나가는 것만 제동을 걸어주면 된다.

제일 중요한 건 소통이다.

재능도 평범한데 소통하는 능력이 없다?

그래도 영화감독 할 수 있다.

다만 크게 성공 못할 뿐이다.


“시나리오 잘 봤어요.”

“노멀 하죠?”


류지호는 윤 팀장이 소개시켜준 김영복 촬영기사와 미팅을 했다.

계절이 봄인데도 반팔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탄탄한 체격을 자랑하는 서글서글한 인상의 남자다.

이전 삶에서 류지호는 그와 인연이 없었다.

90년대 후반부터 블록버스터와 여러 흥행영화를 촬영하며 재능을 꽃피우고 충무로의 대표적인 촬영감독이었던 인물이다.


“이야기는 심심한데 다 읽고 나니까 묵직한 여운이 남더군요. 감독님이 직접 쓰신 겁니까?”

“제가 썼습니다.”

“각색은 누가 했습니까?”

“따로 각색 작가를 쓰지는 않았습니다.”

“할아버지 대사나 주인공 아버지 대사는 고등학생이 쓸 수 없는 대사발인데...”


김영복 기사가 미심쩍은지 말끝을 흐렸다.


“제가 애늙은이란 말을 많이 듣는 편입니다.”

“하하하. 감독님이 정장 입은 모습을 보니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습니다.”


김영복이 악의 없는 농담을 던졌다.

류지호가 자신보다 한참 어림에도 꼬박꼬박 감독님이란 호칭을 사용하는 김영복이다.


“제가 일찍 사업을 시작해서 직장인처럼 옷을 입게 되네요.”

“종원이형한테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웨딩비디오를 찍으신다고요?”

“네.”


충무로 선배인 윤종원은 자신의 회사 대표가 어리지만 강단이 있다고 했다.

비디오카메라도 능숙하게 다루고, 편집기술도 제법이라고도 했다.

시나리오도 나쁘지 않았다.

단편영화치고 예산이 넉넉한 것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사업으로 돈도 많이 번다면서 왜...?"

“친구들하고 창업할 걸 찾다보니 웨딩비디오를 찍게 되었고, 연극영화과에 진학할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아, 그러셨구나. 영화가 돈 까먹기 딱 좋아요. 충무로에 함부로 들어왔다 큰코다친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감독님은 왜 영화를 하려고 해요?”

“기사님은 왜 영화 하세요?”


류지호가 미소 띤 얼굴로 반문했다.


“좋으니까요. 재미있어요. 영화가.”

“저도 그래요.”


하하하.


김영복이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가식적으로 웃는 것 같지 않아 듣는 사람도 가슴이 시원해지는 느낌이다.

류지호가 본론을 꺼냈다.


“오늘 만나자고 한 건 촬영을 수락하시겠다는 거죠?”


김영복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든든하네요. 다음 작품은 언제 들어가세요?”

“9월 말 쯤....”

“현상하고 색보정까지 봐주실 거죠?”

“벌써 세방현상소에 말해뒀어요. 단편 하나 찍을 거 같다고.”

“후우. 김 기사님이 찍으면 세방에서 학생작품이라고 홀대 받을 일은 없겠네요.”


류지호가 과장되게 안도하는 시늉을 해보이며 농담을 던졌다.


하하하.


다시 한 번 김영복이 대소를 터트렸다.

이전 삶에서 들었던 소문 그대로.

김영복은 호탕하고 예의바른 사람처럼 보였다.


“세방에 일이 많이 몰릴 때 16mm 들고 가면 박 차장한테 많이 혼나긴 하죠.”

“잘 부탁드려요. 신사동 스튜디오에 WaW 사무실이 있어요. 언제든지 오세요.”

“감독님, 술 해요?”

“예.”

“조명하는 김 기사랑 신사동으로 한 번 넘어갈게요. 소주 한잔 합시다.”

“언제든지요.”


김영복은 감독이 어리다고 얕잡아 보지 않았다.

류지호 역시 영화 선배에 대한 예의를 갖추면서도 어려워하지 않았다.

대체로 영화감독은 배우와 스태프로부터 그 위치에 걸맞은 존중을 받는다.

그렇기에 권력을 휘두르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감독은 독재자가 될 것인가 관리운영자가 될 것인가로 갈린다.

비범한 영화감독이 관리운영자로 겸손을 떨면 재능 낭비가 되고, 평범한 재능의 감독이 독재자가 되면 엉터리 영화가 나올 확률이 높아진다.

이전 삶의 류지호는 명백히 후자였다.

첫 영화부터 실력 좋고 인성이 좋은 촬영기사를 만났다.

좋은 스태프와 일하는 건 감독에게 큰 힘이 된다.


“택시!”


김영복과 헤어진 류지호가 택시를 잡아타고 여의도로 이동했다.

방송국 앞 설렁탕집에 앉아 20분을 기다리자, 낯익은 연기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친절한 동네 할아버지 같은 인상의 김인륜 배우다.

류지호는 얼른 입구로 달려가 넙죽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어허허허.”


김인륜 배우가 특유의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냈다.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연기자의 길로 들어선 특이한 이력의 원로 배우다.

순박하고 서민적인 역할을 주로 많이 하고 있다.

친근한 이미지 때문에 자상하고 평범한 아버지 배역에 잘 어울렸다.

올 하반기에 드라마 <대추나무 사랑걸렸네> 촬영을 시작한다고 했다.


“오늘 만나기로 한 감독이유?”

“류지호입니다. 선배님.”

“반가워요. 류 감독.”


류지호가 김인륜 배우를 테이블로 안내했다.


“지금까지 식사를 안 하신 거예요?”

“감독이 온다기에 낮술 한 잔 하려고 했지요.”

“말씀 편하게 하세요. 한참 어립니다.”

“그래도 감독한테 그럴 수가 있나요.”


낮술을 한다기에 김인륜 배우가 말술일 것이라 짐작해 류지호는 내심 긴장했다.

그런데 뼈해장국을 시켜놓고, 소주 두 병을 나눠 마셨다.

적당히 분위기가 풀어질 정도만 술에 입을 댄 것이다.


“좋아요. 찍읍시다.”


김인륜 배우는 시나리오는 읽지도 않고 단박에 수락을 했다.

어린 감독이 열정적인 게 보기 좋아 출연을 결정했다고 했다.

류지호가 보기에 약간 취기가 올라 충동적으로 허락을 한 것 같았다.

시나리오를 쓰며 떠올렸던 할아버지 이미지에 딱 떨어지는 배우를 캐스팅할 수 있었다.

아들과 며느리 배역은 윤종원이 국방부 홍보영화를 하며 알게 된 매니저를 통해 소개를 받았다.

오디션을 보고 낙점을 했는데, 둘 모두 연극배우다.

이제 아역 배우만 뽑으면 캐스팅을 마무리할 수 있다.


작가의말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됐습니다. 즐겁고 행복한 일들만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PS. middlem님 후원감사드립니다. 성실 연재로 보답드리겠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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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7

  • 작성자
    Lv.99 OLDBOY
    작성일
    22.02.21 10:21
    No. 1

    잘 봤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88 lo******
    작성일
    22.02.21 14:36
    No. 2

    드디어 첫 무비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yd*****
    작성일
    22.02.21 16:06
    No. 3

    첫 작품! 과연..!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2 검선
    작성일
    22.02.21 16:45
    No. 4

    이제 프롤로그 가 끝났군요. ㅎㅎ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99 무한땅꼬마
    작성일
    22.03.08 21:37
    No. 5

    잘 보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3 雲祖
    작성일
    23.05.19 00:54
    No. 6

    최준영은 언제 만난거지? 통째로 들어내고 한줄로 끝인가.
    드뎌 영화촬영으로 넘어가네. 제발 이름이나 명칭은 기존대로 썼으면.. 시네마낙원보다는 시네마천국이잖음.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26 yyyre
    작성일
    24.06.22 21:12
    No. 7

    찾아보니 log가 디즈니 전신이더군요. 외국기업이나 외국인은 본명 써도 문제없을텐데. 아니면 본명과 유사해서 독자가 쉽게 유추 가능하도록 만드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전에 나온 경일자동차도 찾아보니 현대의 전신에서 따온 이름이더군요. 독자가 검색안해도 알 수 있는 이름이면 좋겠습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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