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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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최근연재일 :
2024.09.14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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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23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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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정사진. (4)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하재근의 학교 후배가 클래퍼보드, 충무로에서는 ‘딱딱이‘라고 부르는 보드판을 김인륜과 이경재 사이 공간에 가져다댔다.

클래퍼보드는 촬영의 시작 신호이면서, 편집 시에 씬과 커트, 테이크 등을 찾기 쉽도록 하는 가이드 역할을 하며, 녹시녹음 된 사운드와 촬영 필름의 싱크(동기화)를 맞추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충무로에서는 보드(슬레이트) 위에 달려 있는 검정과 흰색 사선으로 칠해진 클랩스틱이 서로 마주칠 때 ‘딱’ 소리가 난다고 해서 ‘딱따기‘라고 불렀다.

또는 슬레이트(slate)라고도 불렀다.

참고로 미국과 영국에서는 필름을 로딩하고 촬영과 관련한 데이터를 기록하는 클래퍼로더(세컨 어시스턴트 카메라)가 클래퍼보드를 치거나 클래퍼맨을 따로 고용되지만, 한국에서는 연출 스태프 막내가 주로 역할을 수행한다.


“슛(Shoot)!”

"모두 조용!“


드디어 회귀하고 첫 촬영, 첫 씬, 첫 커트, 첫 테이크가 시작되려 하고 있다.


두근두근.


류지호의 심장이 두방망이질 치는 것 같았다.

기분 좋은 긴장이고, 설렘이다.


“조용!”


붐맨이 다시 한 번 촬영시작을 상기시켰다.

촬영현장이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다.

그 사이를 뚫고 류지호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의 입에서 우렁찬 촬영시작 사인이 터졌다.


“레디...! 카메라.”

“롤.”


촬영팀 세컨 어시스턴트가 카메라의 스위치를 올렸다.


“사운드.”


류지호의 사인에 나그라(Nagra) 레코더를 매고 있는 동시녹음기사가 콜 했다.


“스피드.”


클래퍼맨이 촬영 정보를 읊었다.


“씬 4, 컷 원, 테이크 원.”


딱!

클랩스틱이 경쾌하게 부딪쳤다.


“액션!”


촬영장에 다시 한 번 고요함이 내려앉았다.


3. 2. 1.


드르륵.


사진관 문 열리는 소리가 정적을 깨트렸다.

김인륜과 이경재가 사진관을 빠져나온다.

두 배우가 걸어가는 템포에 맞춰 카메라가 레일 트랙 위를 미끄러졌다.

류지호는 손자 역할을 하는 이경재에게 약간 들뜬 느낌을 주문했다.

짜장면을 사주겠다는 할아버지의 약속에 손자의 마음이 급했다.


[할아버지, 빨리 와. 빨리!]

[할애비는 천천히 갈게.]


모니터가 없어 류지호가 실시간으로 촬영을 확인할 수 없다.

순전히 감으로 판단을 내려야 했다.


“컷! NG! 한 번 더 갈게요.”


김영복 기사는 달리(dolly)를 미는 조수와 포커스를 담당하는 조수에게 이번 테이크에서 미진했던 것에 대한 지시를 내렸다.

카메라에서 조금 떨어져 있던 류지호가 카메라로 다가갔다.

그리고 카메라 옆에서 김인륜 배우를 향해 똑바로 걸어갔다.

촬영장 어디에 있건 항상 카메라의 우측으로 다가가 거기서부터 배우에게 걸어가는 버릇.

류지호만의 루틴이다.

현실세계에서 자신이 창조한 영화세계로 들어가는 것 같은 자기최면.

겉멋일 수도 있다.

누군가에는 꼴값 떠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누가 뭐라던, 류지호는 매번 그렇게 했다.

냉철하고 명료한 이성으로 작업하자는 생각은 어느 순간 날아가 버렸다.

류지호는 감상적인 태도로 돌변했다.


“선배님, 걷는 속도는 좋습니다. 그런데 아픈 태가 너무 나요. 지금보다 조금 덜 거친 호흡, 걷는 게 힘겨운 느낌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아요.”

“일부러 아픈 사람인 걸 내보이지 말라는 말이지요?”

“맞아요. 경재는 지금처럼만 해줘.”

“네에!”


이경재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배우와 충분히 이야기를 나눴다고 생각한 류지호가 돌아섰다.


아~


카메라 너머의 스태프들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멍청이. 또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꿈을 꾸고 있었구나.’


후우.


류지호는 가볍게 호흡을 고르고, 카메라를 향해 똑바로 걸어갔다.

이번에는 감상에 젖거나 감정적이지 않았다.

오로지 찍어야 할 커트만 머릿속으로 그렸다.


“레디! 카메라. 사운드. 액션!”


다시 촬영이 재개되었다.


[할아버지, 빨리 와~ 빨리!]

[할애비는 천천히 갈게.]


할아버지에게 손자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소중한 존재다.

그는 사진관에서 일 할 때 손님들에게 친절하고 자상한 사진사였다.

손자와 자주 놀아주지도 못했고 맛있는 것도 먹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헉헉.


겨우 몇 발 내딛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할아버지의 호흡이 거칠다.

그걸 알 리 없는 손자는 할아버지를 재촉한다.


[빨리빨리.]

[인석아, 천천히 가. 할애비는 빨리 가기 싫어.]


손자는 할아버지의 손을 잡아끌기도 하고, 뒤에서 밀기도 한다.

손자는 자신의 마음도 몰라주고 여유를 부리는 할아버지가 야속하다.

그래서 심통이 난다.


[할아버지, 중국집에 먼저 가 있을게. 빨리 안 오면 할아버지는 불어터진 자장면 먹을지도 몰라.]


할아버지는 저만치 앞서 달려가는 손자를 본다.

그리고 동네 풍경을 눈에 담는다.

40년 넘게 매일 지나다닌 이 길이 이리도 길고 멀었던가.

문득 걸음을 멈춘다.

자신이 일군 사진관이 보인다.

할아버지를 연기하는 김인륜 배우의 얼굴에 회한이 진하게 묻어나왔다.

특별한 기교를 부리지 않아도 배우로서 수년 간 쌓은 연륜이 자연스럽게 드러났다.


“......!”


이 장면은 원 씬 원 커트 느낌의 달리(dolly)를 이용한 롱테이크로 찍었다.

와이드 앵글로 여백이 많은 화면을 의도했다.

할아버지가 움직이는 것에 따라 골목의 벽 배경이 계속 바뀌면서 그가 살아온 삶의 굴곡을 은유적으로 담았다.

때론 회색 벽이, 때론 붉은 벽돌 벽이, 때론 페인트가 벗겨진 벽이 그리고 담쟁이넝쿨 벽이 할아버지가 움직이는 것에 따라 계속해서 배경이 바뀌었다.

카메라는 매우 느리게 움직였다.

간간이 손자가 불쑥불쑥 화면으로 들어왔다 나가는 것으로 심심한 롱테이크 샷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쉬운 촬영이 아니다.

일곱 번의 테이크 끝에 류지호에게 느낌이 왔다.


“컷!”


류지호와 김영복 기사가 서로 눈을 맞췄다.


“김 기사님 어때요?”

“전 좋아요.”


촬영에는 문제가 없었다는 대답이 나왔다.

최종결정은 감독의 몫이다.


“오케이!”


바짝 조여졌던 촬영현장의 긴장감이 일순 풀어졌다.


“할아버지와 손자 각각 단독 딸게요. 김 기사님, 달리에서 카메라 안 내리셔도 됩니다.”

“감독님, 달리에 앉아보세요. 사이즈 한번 확인해 보시구요.”


류지호가 달리에 앉아 뷰파인더에 눈을 댔다.


“너무 타이트 한 것 같아요. 저 뒤에 벽도 같이 보였으면 좋겠어요.”

“렌즈 50mm로 바꾸고, 막내는 저기 카메라 앞에 서봐.”


노출을 재고, 줄자로 카메라와 인물간 거리를 재는 등.

다시 촬영부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롱테이크 촬영이라 필름이 빨리 소모되었다.

촬영팀 세컨 어시스턴트는 체인징 암백에 손을 넣고 부지런히 매거진에 필름을 로딩했다.

참고로 16mm 필름 400피트 한 캔으로 대략 11분을 찍을 수 있다.


“감독님, 타이트 한 것도 따놓으시죠?”

“예. 좋아요.”


시간과 여건만 허락한다면 다양한 커트를 최대한 확보해 둘수록 좋다.

그래야 편집으로 발휘할 수 있는 창의력의 범위가 넓어진다.

또한 가급적 현장에서 촬영기사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편이 좋다.

흔히 영화현장에서 감독과 촬영기사를 부부라고 표현한다.

궁합이 좋고 사이가 좋을 때는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불러일으키지만, 이혼직전까지 간 부부처럼 사이가 틀어지면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싸움만 하다가 영화를 망치게 된다.

감독과 메인 스태프의 소통과 존중은 좋은 작품으로 가는 중요한 밑거름이다.


“다음 장소로 이동할게요!”


사진관 앞거리 씬 촬영이 끝나고, 다른 골목으로 이동했다.

추리닝 바지에 양복저고리를 입은 할아버지가 사진관으로 향하는 장면을 찍었다.

약간 구부정한 자세로 걸어가는 김인륜 배우의 모습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저절로 자신들의 할아버지를 떠올리게 했다.

짠하면서도 그리운.


따릉따릉.


자전거를 탄 김재욱이 할아버지를 빠른 속도로 지나친다.

설레발을 잘 치는 김재욱이다.

혹시나 오버를 할까봐 류지호는 시키는 대로만 하라고 신신당부했다.

다행히 김재욱은 류지호의 기대에 부흥했다.


“컷! 오케이. 다음 경재 커트 찍을게요.”


할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한 후 책가방을 메고 터덜터덜 걸어가는 손자의 장면을 찍었다.


“아침에 찍은 장면 기억나지? 할아버지는 힘든데 네가 빨리 가자고 재촉하고 등도 떠밀고 했어. 아직 찍지 않았지만 중국집에서 할아버지 짜장면도 빼앗아 먹었고.”

“나 때문에 할아버지가 아픈 거라고 상상하면 되요?”


척하면 착이다.

열 살 밖에 안 된 녀석이 잘도 알아듣는다.

이경재는 똘똘한 녀석이고, 눈치까지 빠르다.


“슛, 가요!”


영화나 드라마는 거의 대부분 같은 장소, 같은 시간대를 모아 촬영한다.

배우의 경우 경험이 없으면 이런 식의 촬영에 애를 먹기도 하는데, 이경재는 그런 것 없이 잘 적응하고 있다.


“밥 먹고 하세요!”

“식당은 동네 초입의 미림식당입니다.”


고우찬과 김재욱이 스태프들을 찾아다니며 점심식사 시간임을 알렸다.

덩치도 크고 힘도 좋은 두 녀석은 무거운 물건을 옮기거나 촬영을 방해하는 동네 주민들을 제지하는 등 나름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현장 뜨지 말고, 그냥 짜장면 시켜서 먹죠?”


김영복이 애플 박스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제안했다.

땅바닥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있던 류지호가 웃으며 물었다.


“첫날부터 너무 달리시는 거 아니에요?”

“언제 거기까지 왔다 갔다 해요. 귀찮게.”


김영복의 말을 들으며 류지호가 엉덩이를 툭툭 털며 일어섰다.


“밥은 제대로 식당가서 먹죠. 커피도 한잔씩 하고 여유롭게 담배도 피우고요.”


김영복은 연출부들과 식당으로 향하는 류지호를 가만히 바라봤다.

단편을 많이 찍어 본 영화감독도 아니고, 겨우 고등학생 나이의 감독이다.

프리프로덕션을 함께 하면서 김영복은 류지호에게 여러 번 놀랐다.

사실 오전에 촬영하며 놀란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행복한 우리 젊은 날>을 감독한 배창훈이나 <만수와 칠수>의 박광우 감독이라면 저 나이에 저랬을까.

류지호는 미래가 기대되는 똘똘한 영화학도다.

김영복이 한쪽에서 껄렁하게 서있는 고우찬을 불렀다.


“야! 잠깐 와봐.”

“넵. 감독님!”

“감독 아니야 인마. 그냥 기사라고 불러.”

“넵. 기사님.”

“류 감독하고 친구라고 했지?”

“불알친구입니다.”

“류 감독이 이번 영화가 처음인 거 맞아?”

“작년부터 웨딩비디오 찍고, 방송부 때 뮤직비디오도 찍었습니다. 영화는 처음 찍어보는 겁니다.”


김영복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고우찬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기사님, 이상하죠? 그러려니 하세요. 지호, 아니 감독님이 이런 거 할 때 눈깔이 돌아가요. 친구들끼리는 신 내렸다고 하는데, 완전 딴 사람으로 돌변한다니까요.”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김재욱이 말을 보탰다.


“완전 애늙은이에요. 이 영화 찍어서 잘 나오면 비디오로 출시한대요.”

“비디오 출시?”

“이런 거 네 개 찍어서 옴니버스인가 하는 걸로 만든대요.”


픽.


김영복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비웃음이 아니다.

류지호가 상당히 재미있는 친구란 생각이 들었다.

일반적으로 단편영화 한편 찍기도 벅찬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비디오 출시까지 고려한다니 평범한 친구는 아닌 것 같았다.

저 나이에 웨딩스튜디오와 영화사를 차린 것만 봐도 이미 범상치 않았지만.


“막내야, 카메라 챙겨라. 밥 먹으러 가자.”


촬영팀 막내가 카메라를 트라이포드에서 분리해 어깨에 걸치고, 식당으로 향하는 김영복을 따라갔다.

점심 식사를 위해 자리를 비운 스태프를 대신해 고우찬과 김재욱이 촬영현장을 지켰다.


“슛 가봅시다!”


점심을 먹고 현장으로 돌아온 류지호는 다시 힘을 내 촬영에 임했다.

다음 촬영지인 동네 정자에 도착하자, 아들 배역의 박인철이 분장을 마치고 대기하고 있었다.

박인철은 평범한 인상이었는데, 연극무대에서 잔뼈가 굵은 배우다.

류지호가 먼저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선배님, 점심은요?”

“저는 오자마자 먼저 먹었습니다. 감독님은 식사 맛있게 하셨습니까?”

“감독은 밥 안 먹어도 배가 부른 법이죠.”

“그래도 일은 밥심으로 하는 건데.... 괜찮겠습니까?”

“한 끼 안 먹는다고 안 죽어요. 저 튼튼합니다.”


류지호가 팔뚝을 들어 보이며 짐짓 호기를 부렸다.

감독은 은근히 체력소모가 심한 직업이다.

매 순간 선택과 결정을 내려야 하기 때문에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연출력은 몰라도 경험만큼은 누구에게 뒤지지 않는 류지호다.

영화짬밥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다.

류지호는 노련하게 페이스를 조절했다.


“감독님! 우린 준비됐어요~”


마을 정자에서의 촬영이 시작되었다.

빌라도 고층건물도 없는 낮은 기와지붕 양옥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80년대 주택가.

회색에 가까운 색깔의 아스팔트가 깔려 있는 삼거리.

정자 옆에 구부정하게 서있는 고목까지.

그냥 카메라를 대면 그림이 되는 그런 풍경이다.


“액션!”


마을 곳곳은 노인과 그의 자식 그리고 손자의 추억이 묻어있다.

이곳 정자 역시 마찬가지다.

아들이 요구르트 뚜껑을 따서 아버지에게 건넨다.

그의 손에는 비닐봉지가 들려있는데, 안에는 두부가 담겨 있다.


[봉지에 든 건 두부냐?]

[된장찌개 끊인다고 애 엄마가 사 오라대. 왜 요? 자시고 싶은 거 있어요?]

[아직 고등어 철 아니지?]

[고등어조림 해드려? 아부지 좋아 하시잖아.]

[됐다. 철도 아닌데....]

[꼭 제철에만 먹으란 법 있나. 내일 해드릴게.]


부자가 나란히 앉아 요구르트를 마신다.

햇살도 따뜻하고, 부자지간의 대화도 정겹다.

그런데 노인의 몸이 옆으로 기울어진다.

느닷없다.


[아버지!]


아들의 찢어지는 외침이 들려오고.

아들이 늙은 아비를 들러 업고, 정자를 떠난다.

정자에는 두부가 담겨있는 비닐봉지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나중에 편집을 거쳐 이 장면 위에 앰뷸런스 사이렌이 입혀질 예정이다.


“컷! 오케바리!”


류지호의 기분 좋은 외침이 촬영장에 울려 퍼졌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첫 날 찍어야 할 분량을 모두 소화했다.

스태프들이 서로의 수고를 치하했다.

이번 영화는 스물이 넘지 않는 규모의 스태프와 배우로 꾸려졌다.

처음에 서먹서먹했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고, 서로 형·동생, 오빠·동생이 되어 있었다.


“수고했어요.”

“고생하셨습니다.”


보통 촬영현장에서 가장 늦게 철수하는 팀은 조명부와 제작부다.

로케이션에서 낮씬 촬영이었기 때문에 꺼내놓은 장비가 거의 없는 관계로 조명팀은 일찌감치 철수 했다.

촬영부는 동국대 근처에 위치한 장비렌탈 전문업체 신성사에 카메라 장비를 반납하고, 서울역 뒤편 세방현상소에 필름 현상을 맡겨야 업무가 끝이 난다.

한수호는 연출부로 지원 나온 학교 후배들을 배웅하러 떠났고, 하재근은 배우들을 가온웨딩 스튜디오 봉고차에 태우고 떠났다.

류지호와 두 친구는 현장에 남아서 쓰레기와 담배꽁초를 주웠다.


“끙.”


류지호가 꽁초를 줍던 허리를 펴며 앓는 소리를 냈다.

고우찬이 그가 들고 있던 쓰레기가 담긴 봉지를 건네받았다.


“힘들지?”

“응.”

“근데 왜 실성한 놈처럼 웃어?”

“재미있어서.”

“영화 찍는 게 재밌어?”

“응.”

“돈 버는 것 보다?”


류지호가 일말의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응.”


그러자 고우찬이 바로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미친 놈!”


김재욱이 단박에 비꼬는 말을 내뱉었다.


“새끼가 돈 좀 번다고 배가 불렀어.”

“난 아직 배고파.”

“그러게 왜 점심을 조금밖에 안 먹었어.”


류지호는 대답 대신 희미한 미소를 그렸다.

내색은 안 했지만, 류지호는 종일 긴장상태에 있었다.

잔뜩 스트레스 받은 상태에서 밥을 양껏 먹으면 자칫 체할 수도 있다.


“대신 저녁은 맛있는 거 먹자.”

“노가다는 삼겹살이야.”

“맘껏 먹어. 너희들도 오늘 고생했다. 큰 도움이 됐어.”

“내가 뭐랬어. 개똥도 약에 쓴다잖아.”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야.”


류지호가 친절하게 김재욱의 말을 바로잡아 줬다.


“그거 좋은 말 아닐걸?”

"왜?"

"개똥이 좋은 말이냐?"

“지호야, 우찬이 말이 맞아?”

“응? 글쎄.”


류지호는 친구들과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마지막으로 촬영현장을 떠났다.

녀석들과 투덕거리다 보니 하루 종일 받았던 중압감이 조금은 사라지는 것 같았다.


❉ ❉ ❉


첫 단편영화 촬영스케줄은 꽤 빡빡했다.

10회 차 촬영이면 충분하다 못해 넘칠 줄 알았다.

그렇지 않았다.

촬영을 하는 김영복과 조명의 김 기사가 의욕적으로 작업에 임했다.

촬영분량이 야외에서 실내로 바뀌면서 더 욕심을 내기 시작했다.

조명에 많은 공을 들였다.

때문에 실제 카메라를 돌리는 시간보다 준비시간이 몇 배가 소요되었다.

류지호는 그들은 제지하거나 빨리 찍자고 재촉하지 않았다.

두 기사 모두 현역이자 프로들이이다.

마냥 시간을 잡아먹을 정도로 무책임하지 않았다.

류지호 역시 그들이 준비하는 동안 마냥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니다.

배우들과 대사와 동선을 맞춰보고, 의도에 맞지 않는 소품이 카메라 화각 안에 들어가지 않는지 꼼꼼하게 확인했다.


팟.


조명이 일제히 들어왔다.

부드러운 빛이 소박한 주택의 거실을 비췄다.

영화의 첫 씬.

가족들의 아침 식사 장면이다.


“레디. 카메라. 사운드. 액션.”


밥상머리에 네 식구가 둘러 앉아 아침을 먹는다.


[아범아. 점심 먹기 전에 사진 좀 찍자.]

[무슨 사진?]

[내 영정사진.]


멈칫.


아들과 며느리가 반찬접시 위를 분주히 오가던 젓가락질을 잠시 멈춘다.


[담에 찍어. 이발도 하시고, 목욕탕에도 같이 가고...]

[목욕탕은 어제 다녀왔다. 점심 전에 찍을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분위기가 가라앉자, 며느리가 가지나물을 시아버지 앞으로 놓아준다.


[아버님, 이것 좀 드셔보세요. 국 더 드려요?]


며느리의 말이 통했을까.

남편은 신색을 고쳐 밝은 얼굴로 대화를 이어간다.


[손수 찍으시게?]

[애비보다 잘 찍는 사진사 아들이 버젓이 있는데 내가 왜 찍어?]

[웬일이래? 잘 찍는다고 칭찬을 다 하시고.]

[누가 들으면 내가 구박만 하는 줄 알겠다, 이눔아.]

[구박은 안 해도 잔소리는 심하셨지 뭘.]

[할아버지 사진 찍어? 무슨 사진?]

[할애비 영정사진 찍어두려고. 우리 강아지도 구경 해볼 테냐?]

[영정사진? 그게 뭔데?]

[......]

[아버지 사진... 특별히 신경 써서 찍어드릴게.]


그렇게 아침식사는 평소와 같이 흘러간다.


“컷!”


류지호는 이 씬을 다양한 앵글의 커트로 쪼개지 않고, 마스터 쇼트로 끝을 냈다.

대신 카메라가 움직였다.

인물의 섬세한 감정을 담는 바스트 쇼트(B.S)나 클로즈업(C.U)을 제외하고, 풀샷(F.S)과 롱샷(L.S)은 대체로 카메라를 움직였다.


“관객이 거의 인지를 못 할 정도로 무빙을 해주세요.”

“움직이는 듯 아닌 듯... 뭐 그런 거요?”

“예.”


류지호가 요구한 느낌을 찾기 위해 촬영팀은 수십 번의 리허설을 했다.


“액션!”


창문을 통해 쏟아진 따뜻한 아침 햇살이 화목한 가정의 분위기를 잘 살려주고 있다.

활짝 열려진 장롱.

할아버지는 늘어진 러닝셔츠위로 와이셔츠를 차려입고, 거울 앞에서 넥타이를 매보고, 몇 벌의 양복저고리를 번갈아 입어보기도 한다.

비죽비죽 흐트러진 흰머리를 빗으로 빗어 넘긴다.

바지는 추리닝. 상의는 와이셔츠의 양복저고리 넥타이까지 맨 할아버지.

손자는 그런 할아버지의 모습이 낯설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다.

쫑알쫑알 할아버지 곁에서 참견하고, 심술부리고.

영정사진을 설명할 때는 무섭다고 울음까지 터트린다.

어린 손자에게 할아버지가 없다는 것, 죽는 다는 건 무섭고 서러운 일이다.

아역들은 참 잘 운다.

이경재라고 다를 것이 없다.

울어야 하는 연기를 시키면 곧바로 눈물을 뚝뚝 흘린다.


“컷! 좋습니다.”


이경재는 류지호의 오케이 사인에 언제 울었냐는 듯 방실거렸다.

형·누나들이 지나가며 던지는 칭찬 한마디가 이경재는 그렇게 좋을 수 없다.

류지호는 누나들에게 둘러싸여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있는 이경재를 보며 생각했다.


‘영악한 강아지 같네.’


어쨌든 이경재의 밝고 명랑한 성격은 촬영장에 활력을 주고 있는 건 틀림없다.


❉ ❉ ❉


5회차가 되면서 스태프들의 손발이 톱니바퀴처럼 잘 맞아가기 시작했다.

따라서 촬영은 막힘없이 술술 진도가 나갔다.

류지호는 가온웨딩을 래리 킴에게 떠맡기고 오로지 촬영에만 몰두했다.

엄청난 열정을 보였다.

하루 5시간을 자면서 단편영화에 매달렸다.

모니터로 현장에서 실시간으로 촬영영상을 확인하고, 현장편집에 길들여진 류지호다.

그것이 안 되니, 무척 답답했다.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마냥 답답해만 해서는 답이 없다.


‘적어도 내가 관여하는 영화에서 모니터 시스템을 우선적으로 도입해야겠어.’


단편을 찍지 않았다면 무심코 넘겼을 일이다.

현장 모니터 시스템은 스태프들의 효율을 몇 배 끌어올릴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꼰대 촬영기사들의 저항이 있겠지.’


알 바 아니다.

류지호는 현장 모니터 도입을 앞당기기로 마음먹었다.

일단 함께 작업하는 김영복부터 설득할 필요가 있다.


[감독에게 시간은 빨리 가고, 스태프에게 더디게 간다.]


영화감독들이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다.

어느덧 단편영화 촬영이 중반을 넘어서고 있다.


“지호야, 나 왔어.”


공다연이 류지호의 단평영화 촬영현장에 나타났다.


“오후에 오라고 했는데 벌써 왔어?”

“내꺼 찍기 전에 촬영하는 거 구경하려고.”

“김인륜 선배님께 인사드려. 스태프들에게도 인사하고.”


류지호는 공다연에게 단역 출연을 제의 했다.

작은 역할이라서 단칼에 거절할 줄 알았다.

도리어 공다연이 꼭 출연시켜달라고 매달렸다.

자신을 골탕 먹이려고 하나 의심이 들었다.

그런데 꽤 진지하게 임하는 걸 확인하고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작가의말

행복한 하루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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