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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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최근연재일 :
2024.09.14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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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사고 싶어요. (1)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뉴욕 이스트 할렘에 위치한 레스토랑 라오스(Rao’s).

유명인들이 레스토랑 테이블을 사서 죽을 때까지 소유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연회비는 무려 2만 5천 달러.

게다가 고객들이 대를 이어 테이블을 사기 때문에 예약은 하늘에 별 따기.

심지어 전화 예약은 받지도 않는다.

안쪽 지정석에서 영화감독 헤이우드 앨런이 십대 아시아계 여학생과 식사를 즐기고 있다.

테이블에 앉지 못한 케일이 바(Bar)에 앉아 가벼운 칵테일을 즐기고 있다.

그레이엄 가문의 자선파티에서 류지호에게 망신을 당한 바로 그 케일이다.

케일이 무심코 출입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후다닥.


그는 자리를 박차고 출입구를 향해 달려갔다.

달려가면서도 옷매무새를 점검하는 걸 잊지 않았다.


“Sir. 오랜만에 뵙습니다!”

“반갑네.”


윌리엄이 손을 내밀자, 매우 영광스럽다는 자세로 케일이 악수를 했다.

류지호는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

류지호도 마찬가지.

솔직히 그가 누군지 기억도 못한다.

류지호의 신경은 온통 여학생과 식사를 즐기고 있는 헤이우드 앨런에게 가 있다.

식사를 하고 있는 십대 여학생은 앨런 감독의 양녀다.


‘스캔들이 터지기 전이지 아마.....?’


문득 저들의 스캔들을 신문사에 팔아볼까 쓸데없는 생각을 해봤다.

케일과 악수를 나눈 윌리엄이 성큼성큼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류지호가 얼른 그의 뒤를 쫒아갔다.

그는 케일을 없는 사람 취급해버렸다.

케일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옐로우 몽키 자식이....!”


윌리엄은 파커가의 지정석에 앉았다.

그런 후, 근처 테이블에서 식사 중인 몇몇 노인들과 가볍게 눈인사를 나눴다.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는 분위기다.

번잡스럽게 인사를 나누는 이들은 케일을 제외하고 없었다.

윌리엄이 인자한 표정으로 류지호에게 음식을 설명했다. 그 광경에 케일의 배알이 뒤틀려버렸다.

덜컥!


레스토랑을 빠져나온 케일의 앞으로 비서가 달려왔다.


“벌써 나오십니까?”

“방금 윌리엄과 함께 들어간 노란 원숭이 자식.”

“파커가의 럭키 보이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 자식.”

“그는 왜?”

“뉴욕에 왜 온 건지 알아봐.”

“관광하러 온 모양입니다.”

“그게 다야?”


케일이 자신의 차량이 대기하고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비서가 냉큼 따라붙으며 말을 이었다.


“그레이엄가의 망나니 매튜와 어울리며 독립영화 감독들과 파티를 한답니다.”

“감독 누구?”

“주로 조엘, 에단과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인디영화 찍는 형제?”

“형제의 영화에 투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가난뱅이 주제에?”


비서가 재규어 운전석 문을 열어주고, 옆으로 비켜섰다.


“얼마짜리지?”

“500만 달러 미만 아니겠습니까?”

“겨우?”

“뉴욕이니까요.”


참고로 할리우드 평균 제작비는 80년 940만 달러에서 90년 2600만 달러까지 상승한다.

뉴욕에서 인디영화를 찍는 감독들은 보통 그 제작비의 십분의 일로 영화를 찍는다.


“워싱턴의 테드 아저씨한테 연락해. 미팅 잡아.”

“서클 픽처스의 테드 회장님 말씀이십니까?”

“그래.”

“용무는 뭐라 전할까요?”

“괜찮은 감독과 영화 스크립트를 소개시켜준다고 해.”


케일은 그렇게 말하고 재규어 운전석에 앉았다.


부르릉.


케일이 운전하는 재규어가 라오스 레스토랑을 떠난 그 시간.


달그락.

종업원이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담긴 접시를 파커가 테이블에 세팅했다.


“자, 들자.”

“잘 먹겠습니다.”


류지호는 G&P의 투자결정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대범한 척 굴려고 했다.

생각처럼 여유롭지 않았다.

스스로 초조해 하고 있다고 생각한 류지호는 열심히 매튜와 어울렸다.

3일 만에 윌리엄과 마주했다.

윌리엄은 식사 내내 류지호에게 가온웨딩 투자에 대한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다.


“곧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겠구나.”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겠어요.”

“재미는 있었고?”

“무척이요. 뉴욕에서 친구도 몇 명 사귀고요.”

“그 짧은 기간에? 뭐하는 친구냐?”

“사진 찍는 친구도 있고, 영화감독 형제도 있어요.”

“영화감독이라.... 그들 영화에 투자하고 싶으냐?”


윌리엄은 단번에 류지호의 속셈을 눈치 챘다.


“예.”

“차라리 그 돈으로 네가 영화를 찍지 그러냐?”

“장편상업 영화는 아직 일러요. 십대가 찍은 영화를 누가 극장에 걸어주겠어요.”


윌리엄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미국에서라면 어찌어찌 독립배급사를 통해 상영할 수 있 수도 있겠지만, 한국에서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다른 건 일단 지르고 보면서 영화만큼은 지나치게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것 같아.”

“저는 애면서 애가 아니니까요.”

“자신이 애늙은이라는 걸 쉽게도 인정하는구나.”

“사실인걸요.”

“영화사업은 돈이 많이 필요하지. 인맥도 무시 할 수 없고.”

“전부는 힘들지만, 일정 지분에는 참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인디영화라 제작 예산이 적거든요.”

“너처럼 바쁘게 사는 십대도 없을 것 같구나.”


하하.

류지호는 웃음으로 대답을 피했다.


“예술가의 재능이란 것이 타인의 평가를 먹고 자라나는 법이야. 그렇기 때문에 타인의 평가가 없는 재능은 독인게지. 타인의 평가가 없으면 스스로 재능에 잡아먹혀. 왜 그런 줄 아느냐?”

“자신의 내면으로만 한없이 빠져들어 헤어 나올 수 없기 때문이에요.”

“맞다. 남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만의 세계. 그 안에 갇혀 헤어 나오질 못하게 되면 우린 그를 얼른 의사에게 보내야 하지. 내면에 침잠하는 건 정신 질환자들이 흔히 보이는 증상이거든.”

“......?”

“반면에 재능 넘치는 사업가에게 타인의 평가는 중요하지 않아. 사업은 오직 수익을 냈나 못 냈나 그것만 중요하지. 하지만 예술은 결과에 더해 평가가 아주 중요한 법이야. 그것이 전문가가 하느냐 즐기는 사람이 하느냐 하는 건 중요하지 않지. 그들의 평가에 따라 결과물의 가치가 달라지는 것이 중요할 뿐.”


류지호는 묵묵히 윌리엄의 말을 경청했다.


“넌 처음으로 네가 살던 작은 세상을 벗어나 새로운 세상을 경험해 본 거란다. 네가 만들어야 할 세상이란 도화지에 이제 겨우 선을 하나 그은 거지. 조바심을 가질 필요는 없단다. 너에게는 수많은 기회가 기다리고 있어. 준비되지 않은 자에게 기회란 놈은 손에 잡혀주지 않는 법. 초조해 하지 말고, 여유를 가져보려무나.”

“제 시간이 오려면 아직 멀었겠지요?”

“이제 열여덟 살이니까.”


그렇기에 고언 형제에게 선뜻 투자를 하겠다는 마음을 먹을 수 있었다.

자신보다는 훨씬 더 잘해낼 수 있고, 더 간절한 이들이니까.

분명 현재는 그랬다.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지만.


“감사해요, 할아버지.”

“응, 뭐가?”


류지호는 그저 웃을 뿐.

윌리엄은 그의 웃는 모습이 좋아 보여 마주 미소를 지어보였다.


❉ ❉ ❉


뉴욕에서 400Km 떨어진 워싱턴 D.C.

서클 픽처스(Circle Pictures)의 회장실에 고언 형제가 와 있다.

케일 역시 한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다.


“당신들이 우리와 함께 한다면 20세기 팍스와 이야기를 진행해 볼 수 있습니다.”


서클 픽처스의 제작 프로듀서 잭스가 형제에게 말했다.


“너무 앞서 가는 이야기입니다.”


에단이 잭스의 말에 제동을 걸었다.

형제 중에서 대외적으로 제작을 담당하는 것으로 알려진 것은 동생 에단이다.

잭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의 조건을 제시했다.


“우리는 당신들과 최대 4편을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건 우리가 과연 독립적인 작업을 할 수 있느냐. 그것이 핵심입니다.”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는 당신들이 하고 싶은 영화를 만들기 원합니다.”

“글쎄요. 독립프로덕션이 아닌 이상 그것이 가능할 것이라 믿을 수 없습니다만.”

“우리는 당신들에게 많은 것을 양보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그것이 합리적인 의사결정이라면 말입니다.”

“아시다시피 우리는 <블러드 심플>과 <아리조나 유괴사건>으로 할리우드에서 러브 콜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와 조엘은 그걸 거부하고 있죠.”


소파에 등을 깊숙이 기대고 있던 조엘이 몸을 바로 세웠다.


“독립적인 권한으로 영화를 찍기 원합니다. 누군가 모든 걸 통제하려 한다면 창작의욕이 죽어버리니까.”

“하여간 감독 작자들이란....”


케일이 낮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소리를 듣지 못한 이는 없었다.


“이 분은 누굽니까?”

“극장체인 씨네맥스의 매니저 케일 미첼입니다.”

“제작도 들어가지 않았고, 프로젝트 계약을 협상하는 자리에 극장관계자가 합석한단 말입니까? 우릴 바보로 아셨군요.”

“오해십니다. 여기 케일씨가 당신들을 우리에게 추천했습니다.”

“재능 있는 형제가 있다는 걸 듣고, 내가 이들에게 소개한 거요.”


케일이 턱을 살짝 치켜들고 자랑하듯 말했다.

형제는 케일에게 눈인사로 감사를 표했다.

다시 잭스에게 고개를 돌렸다.


“우리는 당신들의 자유로운 창작을 지지합니다. 따라서 서클 픽처스는 자금 부분만을 관리하겠습니다.”

“.......?”

“현재 두 편의 스크립트를 가지고 있다고요?”

“<밀러스 크로싱>과 <허드서커 대리인>, 두 편 뿐입니다.”


이후 형제는 서클 픽처스의 실무자들과 계약서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양측의 변호사가 동석한 것은 당연했다.

계약을 확신한 케일이 서클 픽처스를 떠났다.

입가에 만족한 미소를 달고서.


❉ ❉ ❉


[서클 픽처스는 조엘, 에단 형제와 함께 영화 제작 계약을 발표 할 예정이다. 고언 형제는 평단의 높은 평가를 얻은 <블러드 심플>을 제작한 바 있다. 에드 포다스 회장은 ‘그들과 우리의 신뢰는 견고하고,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은 매우 흥분 된 일이다’ 라며 큰 기대감을 드러냈다. 이번 계약은 뉴욕영화 중에서 최대 규모인 것으로 알려졌다. 서클 픽처스는 1천만 달러 이상의 예산으로 두 편의 영화를 찍을 예정이며, 메이저 스튜디오 중 하나와 배급 계약을 논의 중에 있다고 밝혔다. 다른 세부 사상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고언 형제는 독립 제작의 전형적인 패턴을 따를 것으로 보인다. 제작은 독립제작 방식을 따를 것으로 보이지만 배급은 스튜디오 중 하나가 될 것으로 보이고. 그것은 팍스(Parks)가 될 것이라고 업계관계자들이 조심스럽게 추측하고 있다.]

- 워싱턴 타임즈 매니 크랙스 기자.


“뭐라고요?”


류지호가 깜짝 놀란 얼굴로 물었다.


“고언 형제가 서클 픽처스와 계약하기로 했다고.”


매튜가 워싱턴 타임즈를 류지호에게 건넸다.

류지호가 신문을 펼쳐 기사를 읽었다.


“가요!”


류지호가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어딜?”

“조엘 만나러!”

“가서 어떻게 하려고.”


류지호가 도로 자리에 앉았다.

살짝 짜증이 치밀었다.

학교생활, 사업, 인생...

역시라고 해야 할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


“진심이었군.”

“장난이라 생각했어요?”

“굉장히 아쉬운 가 봐?”

“그럼요. 그들의 재능은 진짜에요.”

“어떻게 알아? 감이 팍 왔어?”

“그들은 반드시 그렇게 될 거예요. 싹수가 있어요.”


류지호는 확신을 담아 대답했다.

선댄스 영화제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킨 바가 있으니, 매튜도 어느 정도 동의했다.


“내 미래도 한 번 점쳐봐.”

“술부터 끊고, 마리화나도 멀리하고, 파티도 줄이고, 무엇보다 삶의 목표부터 정하세요.”

“불가능한 조건을 거는군.”


흐흐흐.

매튜가 실실 웃었다.


“바보같이 웃지 말아요. 정들어요.”

“가자!”

“어딜?”

“배신자들 처단하러.”


두 사람은 그 길로 밀러스 크로싱 즉 처단장소를 찍을 예정인 코엔 형제를 찾아 나섰다.


❉ ❉ ❉


“우리의 신뢰를 헌 신발짝 내팽개칠 줄 몰랐어.”


매튜가 다짜고짜 따졌다.

조엘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지호가 너희들 영화에 투자하고 싶다고 분명히 밝혔잖아. 내 체면을 봐서 우선권을 줄 수도 있지 않았어?”

“지호는 충분히 좋은 친구이긴 해. 하지만 그의 아버지도 아니고, 파커가도 아니고, 이제 열여덟의 지호를 우리가 어떻게 믿겠나?”


맞는 말이다.

알지도 못하는 나라에서 온 어린 친구가 하는 말을 덥석 믿어버리기에 그들은 이미 산전수전을 모두 겪어 보았다.


“내가 보증을 서지.”

“지금이 농담이나 할 때인가, 사리 분별 좀 하지.”


조엘이 매우 점잖게 매튜를 타일렀다.

에단이 한 발 뒤로 물러섰다.

평소와 달리 형이 정색을 했다.

할 말 다하는 형제 사이라 해도 비즈니스 부분에서는 서로 조심했다.

지금은 형에게 맡겨야 할 때.

다만 속내까지 그렇지는 않았다.


‘<블러드 심플>을 찍기 위해 돈을 구하러 다니며 온갖 창피를 다 당해놓고도 형은 아직 정신을 못 차렸나?’


분위기가 격해질 것 같아 류지호가 나섰다.


“진정해요. 먼저 조엘, 서클하고 계약조건은 어때? 당신들에게 유리한 조건인가? 독립적인 제작을 보장한대?”

“대부분 우리 뜻을 존중해 줬다.”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어 버렸다.

말하기 싫어하는 조엘의 모습에서 류지호는 동생 에단을 공략했다.


“촬영은 언제 하려고 했어?”

“돈이 구해지는 대로.”

“제기랄!”

“그렇게 아쉬워?”

“매우. 몹시!”

“내가 서클에 말을 해볼게.”

“에단, 그들은 엔젤투자자가 끼어드는 걸 싫어할 거야.”


조엘이 동생에게 현실을 지적했다.


“지호가 너희들의 엔젤이 되어 줄지도 모르잖아. 그 옛날 브로드웨이 뮤지컬에 자금을 댄 어떤 부자처럼.”


매튜가 오랜만에 진지하게 형제를 설득했다.

그는 1920년대 자금부족으로 브로드웨이 뮤지컬 공연이 불가능했을 때 후원했던 부자에 대한 고마움으로 공연관계자가 부자를 엔젤로 칭했던 것에 비유해 말했다.


“난 비록 60년 전의 그런 뉴욕 부자는 아니지만, 당신 영화를 지원할 정도는 가능해.”


류지호는 한국주식에 투자한 돈을 빼서라도 이들 영화에 동참하고 싶었다.

열렬한 자세로 형제를 설득했다.

결국 완고한 조엘이 질린 다는 얼굴로 항복을 선언했다.


“어디서 이런 정신 사나운 친구를 데리고 왔어.”


조엘이 매튜에게 화살을 돌렸다.


“원래 차분한 녀석인데 너희의 빅팬인가봐.”


매튜가 낄낄거리며 대답했다.


“지호, 네가 잘 몰라서 그런데. 우리 영화는 잘 안 팔려.”

“알아.”

“그런데도 돈을 내놓겠단 말이야?”

“내가 당신들의 영화를 좋아한다니까!”

“진짜 돈이 많은 모양이네?”

“아니.”

“근데 왜?”

“내가 당신들의 영화를 보면서 배울 수 있는 감독이 되어줘.”

“아, 몰라.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영화를 하면서 살 거야.”

“바로 그거야! 당신들이 하고 싶은 영화를 하고 살아달라는 말이었어.”


조엘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음 영화는 꼭 너와 하지.”

“약속할 수 있어?”


류지호는 당연히 <밀러스 크로싱>보다 <바톤핑크>를 자신과 함께 한다면 더 바랄게 없었다.

<파고>라면 더욱 환영이고.

2000년대 최고의 촬영감독 중에 한 명.

할리우드 감독들이 1순위로 떠올리는 촬영감독 중에 한 명.

로저 A 딕스.

<바톤핑크>부터 코엔 형제와 함께 하기 시작한다.

뛰어난 감독 곁에는 항상 뛰어난 촬영감독이 있다.

무조건 인연을 맺어 두는 것이 좋다.


“난 한 입으로 두말하는 성격이 아냐.”

“당신들의 고집은 잘 알고 있어.”

“우리의 고집? 그럴 리가!”

“암튼 약속한 거야. 아니, 말로 하는 약속보다...”

“난 내 스스로가 딱히 유대인인인 것에 자부심을 느끼지는 않는데, 단 하나 나의 할아버지로부터 배운 것은 꼭 지키는 편이지.”

“그게 뭔데......?”

“약속.”

“그럼 계약서 써. 다음 작품은 나와 한다는. 내가 제작비를 낼게.”

“진정해. 지호!”


매튜가 나섰다.


“오늘은 이 정도에서 이야기를 정리하지. 여기 지호는 반드시 조엘 당신 영화에 투자할거야. 그리고 계약서도 작성할 거고. 하지만 오늘은 아니야.”


유대인들은 철저히 계약을 중심으로 인간관계를 지켜나간다.

한 번 약속한 것은 어떤 경우에도 지킨다.

약속을 신중히 하기 위해서 그들은 정보라는 정밀한 판단도구를 활용한다.

매튜 같은 월가 출신도 마찬가지.

이후 대화는 소소한 일상과 영화에 관한 이야기로 채웠다.

류지호는 고언 형제와 헤어지기 전에 덕담을 건네며 격려했다.


“이번 영화 꼭 잘되기 바랄게.”


결과적으로 <밀로스 크로싱> 투자는 불발됐다.

그럼에도 형제와의 인연은 계속될 것이다.

그들의 다음 영화는 함께 하기로 했으니까.

<바톤핑크>라면 더할 나위 없는 일이 될 것이지만, 첫 술에 배부를 순 없는 법.

앞으로 계속해서 인연을 이어가면 될 일이다.

케일은 류지호를 곤란하게 만들려고 했겠지만.

그의 방해공작은 결국 류지호를 도와주는 꼴이 되어버렸다.


✻ ✻ ✻


“영화계약이란 말입니까?”


신효정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녀는 또 류지호가 무슨 일을 벌이는 건지 도통 가늠이 되지 않았다.


“친구의 영화에 투자하기로 했어요.”

“친구? 매튜는 아닐 테고, 내가 모르는 미국 친구가...”

“이번에 뉴욕에 와서 사귀었어요.”

“그가 누군지 내게 말해 줄 수 있어요?”

“조엘과 에단. 형제가 함께 인디영화를 찍어요. 데뷔작으로 선댄스에서 최고상을 수상하고 <아리조나 유괴사건>의 흥행성공으로 주목을 받은 이후로 얼마 전 영화투자를 받아 내년에 새 영화를 찍을 예정이죠.”

“난 영화는 잘 몰라요. 하지만 인디영화를 한다는 자들 중에 엉터리도 많다는 건 알아요. 영화투자에 관심이 있다면 차라리 할리우드를 알아보는 것이 현명해요”

“좋은 조언이에요. 하지만! 그들은 진짜배깁니다“


신효정은 가만히 류지호의 눈을 마주했다.

어딘지 즐거워하는 눈동자.


“관심이 없다면 캐서린의 로펌으로 가겠어요.”


신효정은 류지호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내심 한숨을 쉬었다.

정말 예상한 대로 움직이는 법이 없는 학생이다.

천지분간 못하는 천둥벌거숭이도 아니고.


“좋아요. 일단 어디까지 협상이 이루어졌는지 제게 말해줘요. 그래야 도움을 줄 수 있으니까.”


류지호는 고언 형제와의 사적인 관계를 제외하고, 영화투자와 관련된 사항만 이야기 했다.


그리고 며칠 후.

류지호는 신효정과 매튜를 대동하고, 고언 형제를 다시 만났다.


“2만 달러는 한국으로 돌아가면 바로 돌려줄게요.”

“괜찮아. 파티 한 번 안 하면 돼.“


시나리오 개발 비용으로 소요되는 자금을 매튜가 빌려주기로 했다.

미국 시나리오작가 협회에 등록된 회원의 최저 집필료가 대략 3만 달러다.

정상급 작가는 300만 달러 이상을 받는다.

2000년대 들어서면 최저 7만 달러, 최정상급 작가는 500만 달러 이상을 받기도 한다.

류지호는 일단 고언 형제의 다음 영화에 대한 개발을 지원하고, 스크립트(시나리오)가 나오면 구체적인 사항을 논의하기로 했다.

형제가 앞으로 쓰게 될 스크립트에 대한 제작권리를 선점한 것이다.

물론 후속작 사니리오가 언제 나올지 기약이 없다.

그럼에도 계약 자리는 훈훈하게 마무리가 되었다.


싱글벙글.


류지호는 기분이 무척 좋았다.

그를 보며 조엘이 입을 열었다.


“지호는 똑똑한 척은 다하더니 실상은 정말 멍청한 것 같아.”

“당신들은 스티븐 아들러와도 다르고 존 자무슈와도 달라. 당신들이 영화를 만드는 이유를 잊지 말아줘. 그러면 난 언제든 당신들을 응원할 거니까.”


심상치 않은 류지호의 말과 눈빛이다.

형제는 그와 계약한 것이 잘한 선택이었나 하는 고민에 빠졌다.

재미있을 것 같아 살짝 가벼운 마음으로 약속했다.

그런데 류지호는 어딘지 집념의 화신이다.

반드시 자신들의 영화에 투자하고 말리라는 집념.

영화가 흥행을 못하면 그 충격은 어떻게 감당하려고.

매튜가 류지호를 놀렸다.


“그렇게 좋아? 아주 입이 찢어지겠다.”

“좋지. 이 보다 더 좋을 수 없어.”

“우리가 이번 영화에서 망하면 어떻게 하려고?”


에단이 우려 섞인 어조로 물었다.


“그게 무슨 상관인데? 당신들은 당신들의 영화만 생각해. 그게 날 도와주는 거야.”

“너처럼 우릴 믿어주는 사람은 흔치 않았어.”

“에이. 고언 사단이 있는 걸 내가 아는데......”

“네가 즐겁다니까, 우리도 기분은 좋네.”


류지호는 <밀러스 크로싱>이 망했는지 돈을 벌었는지 알지 못했다.

상관이 없었다.

세상의 많은 영화천재들을 가까이서 보며 배울 것이다.

그들의 영화관과 세계관 그리고 인간과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

그들이 관객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어떤 고민을 하고 어떤 태도로 접근하는지.

이론서와 영화만 봐서는 결코 알 수 없는 것들.

그런 것들을 들여다 볼 것이다.

편견이 있었다면 부술 것이고, 그들이 가지지 못한 장점이 있다면 발전시킬 것이다.

돈을 버는 것은 부차적인, 작은 보너스일 뿐.


“가자. 파티다!”

“친구들을 불러야겠어, 형.”


매튜가 형제에게 귀여운 협박을 날렸다.


“공돈 생겼으니 근사한 곳으로 우릴 모셔야 할 거야.”

“흥. 부자는 꺼져버려!”


고언 형제는 아지트라는 곳으로 일행을 안내했다.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맥주를 즐기고 있는데, 뚱뚱한 체격의 잭 굿맨이 합류했다.

그는 대뜸 일행들을 뉴욕 뒷골목의 펍으로 데리고 갔다.

그곳에서 무지막지한 술파티가 벌어졌다.

잭은 어릴 적 미식축구를 해서 그런지 대화 내내 자신이 응원하는 미식축구팀에 대한 자랑만 늘어놓았다.

언젠가부터 잔혹한 캐릭터가 대중에게 각인되어 있는 잭이다.

실제로는 매우 유쾌하고 장난꾸러기 같은 모습을 보였다.

신효정은 그에게 붙잡혀 미식축구 이야기만 지겹도록 들어야 했다.

이어서 고언 사단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하나둘 펍에 모습을 드러냈다.

조엘의 아내 프랜시스 맥도먼, 사무엘 레이미 감독, 마지막으로 조니 M 터투로가 합류했다.

훤칠한 키와 건장한 체격을 갖춘 터투로는 영화 <바톤핑크>에서 예민한 예술가를 훌륭하게 소화했지만, 실제로 보니 주먹 쓰는 역도 꽤 잘 어울릴 것 같았다.

그는 마르틴 스코체제가 <컬러 오브 머니>의 주연을 시키고 싶어 할 만큼 재능이 있는 배우였고, 결국 고언 형제와 만나 그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한다.


“아시아에서 온 부자야.”


에단이 친구들에게 류지호를 소개했다.


“하하. 부자는 아니고, 앞으로 그렇게 될 겁니다.”


류지호는 고언 사단이라 불리는 이들과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광각렌즈를 스태디캠에 달고 찍은 것 맞지? 그 추격씬은 정말 압권이었어. 유머와 템포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크... 어떻게 그 사이에 아이가 후드를 뒤집어쓰는 장면을 넣을 생각을 한 거지?”


류지호가 에단에게 <아리조나 유괴사건>의 추격씬에 대해 칭찬 했다.


“혹시 사무엘과 <이블 데드>를 찍으며 영감을 받았어?”

“그와 친구이긴 하지만, 특별히 그 영화를 찍으며 따라했다고 하기는 무리가 있어. 나는 배리와 항상 많은 대화를 하거든. 형은 배우들과 주로 소통 하고.”


매튜는 주로 배우들과 대화를 나눴다.

신효정 역시 즐거운 표정으로 대화에 동참했다.

류지호는 에단과 사무엘과 주로 대화를 했다.


“내가 창의적이라고? 그건 모르겠는데, 그건 다른 사람들이 판단할 문제야. 그런데 난 썩 괜찮은 직업을 가지고 있기는 해. 영화감독이라는.”


그렇게 말하고, 조엘이 씨익 웃었다.

류지호는 쿨한 반응을 보이는 조엘을 보며, 왜 형제가 18편의 영화를 미친 듯이 찍었는지 알 것 같았다.

<허드서커 대리인>의 흥행실패로 잠시 슬럼프를 겪기도 하겠지만, 이들은 영화에서만큼은 매우 부지런한 형제다.


“영혼 어쩌구 떠들고 예술로 거들먹거리는 영화쟁이 놈들과는 말도 섞지 마. 우린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영화를 찍는 거지, 투자자에게 아부하기 위해 영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야. 자기만족을 위해 영화를 찍을 거면 차라리 자위를 하는 게 나아. 투자자에게 아부를 하고 싶다면 그를 호텔로 불러 엉덩이를 까고 하룻밤을 침대에서 보내는 편이 훨씬 이롭다고.”


술에 취한 에단이 횡설수설했다.


하하하.


류지호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의 말이 우스워서.

천만에.

한 때 영화인들과 충무로 뒷골목에서 막창에 소주를 마시며 밤새 영화이야기를 나눌 그 때처럼 즐거웠기 때문이다.


‘재밌다.’


류지호는 비디오를 찍을 때, 편집을 할 때. 예식장으로부터 수금을 할 때, 즐겁고 재미있었다.

예식장과 협상을 할 때도, 새로운 장비 고를 때도, 촬영기사를 지휘 할 때도, 가온이 찍은 비디오를 받으며 환하게 웃는 신혼부부를 볼 때도 웃었다.

하지만.

행복해서 웃는 것이었을까.

그렇다고 단언할 수 없었다.

즐겁게 일하는 것과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일을 하며 행복감에 젖는 것은 같으면서도 분명 다르다.

자신이 하고 싶은 걸 평생 하며 살 수는 없다고.

그 스스로 그렇게 말했고, 그런 충고를 주변사람들로부터 수도 없이 들었다.

이번엔 다를 것이다.

저들 형제처럼 좋아하는 일을 실컷 하며 살 것이다.

그때가 되면 류지호는 자신 있게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아직은 그럴 수 없지만, 곧 그런 날이 올 것이다.


작가의말

즐겁고 행복한 주말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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