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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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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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4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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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24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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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정사진. (5)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씬6 준비할게요.”


추리닝 바지에 슬리퍼를 신고, 상의는 깔끔한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양복저고리를 걸친 아버지의 모습이 우습다.

아버지는 아들의 놀림을 농담으로 응수한다.

영정사진을 찍는 내내 아버지고 아들이고 어둡지 않다.


[내 마지막 모습... 멋지게 찍어봐라.]


카메라 앞에 앉아있는 근엄한 할아버지에게 손자가 끼어든다.


[할아버지, 표정이 무서워. 좀 웃어. 김치.]

[김치.]


할아버지는 손자의 재롱에 껄껄껄 웃는다.


찰칵.


중형필름카메라 뷰파인더에 들어있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아리플렉스 카메라가 찍었다.

영화 카메라가 스틸카메라를 찍고, 스틸 카메라는 할아버지를 찍었다.


찰칵.


사각의 프레임 안에 들어있는 늙은 아버지.

아들은 정성을 다해 촬영에 임한다.

장례식이 끝나면 일반적으로 영정사진을 태운다.

아들은 가족 앨범 속에서 추억으로 남겨질 아버지의 사진이 아니라 태워 없어질 사진을 찍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아들이 직접 자신의 아버지가 죽은 후에 영정으로 걸릴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뭐랄까 묘한 슬픔과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킨다.


“NG!"

"다시 갈게요.“

“NG!"


간단한 커트였지만 공다연은 계속해서 실수를 연발했다.

영화 촬영은 드라마에 잠깐 출연하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공다연이 입술을 달싹이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상당히 불안해 보였다.

류지호는 이럴 때 밀어붙이는 것 보다는 기다려주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는 걸 알고 있다.


“잠깐 쉬겠습니다. 담배 한 대씩 피우고 오세요.”


조명이 꺼졌다.

류지호가 애플박스를 들고 공다연에게 다가갔다.

자신감이 넘쳤던 공다연은 잔뜩 움츠려 있었다.

류지호는 공다연 옆에 애플박스를 깔고 앉았다.


“힘들지?”

“몰입이 잘 안 돼. 왜 그런지 모르겠어.”

“내 얘기 들어볼래?”


공다연이 침묵을 지키는 것으로 허락했다.


“김인륜 선배님이나 박인철씨는 경험이 풍부해. 여유 있지. 그분들이 단순히 경험이 많고 마음에 여유가 있어서 몰입을 잘하고 캐릭터를 잘 소화하는 걸까? 아닐걸. 그분들은 진심으로 자신이 연기하는 인물을 이해하고 있는 거야.”

“나도 열심히 연구했어.”

“물론 그랬을 거야. 이해하는 척, 캐릭터에 빠져드는 척 할 수 있겠지. 근데 인물을 깊게 이해하려면 공감부터 해야 해. 마음을 열고 네가 연기해야 할 인물에 다가가야 한다는 거지.”

“공감......”

“연애를 생각해봐.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진심이 없는데 상대에게 ‘난 당신을 믿어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공감하고 그를 이해하려는 진심이 없는데 상대에게 어떻게 감동을 줄 수 있겠어. 배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자신이 인물을 공감하지 못하고 진심이 빠져있는데 어떻게 관객을 감동시킬 수 있겠어. 그렇다고 감동을 구걸할래? 아니면 관객을 속일래? 그건 사기꾼이지, 배우가 아니잖아.”

“......?”

“감독이 되려는 나와 배우가 되려는 너에게 필요한 건 공감이야. 인물을 해석하고 연구하기 전에 진심으로 공감해야 해. 다연이 넌 스타가 될 수 있을지도 몰라. 광고를 찍고 뜰 수도 있고, 뮤비를 찍고 뜰 수 있어. 잠에서 깼더니 스타가 되었더라는 꿈같은 일이 벌어지지 말라는 법이 없지. 하지만 오래오래 연기를 하며 살고 싶으면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하려고 해봐. 그건 너와 나 같은 딴따라들의 숙제야.”


류지호는 그걸 풀지 못해 이번 삶에서까지 밀린 숙제를 가지고 왔다.

이전 삶에서는 숙제에 대한 어떤 답도 적어내지 못했지만, 이번 삶에서는 뭐라고 적어볼 작정이다.


“연기해야 할 캐릭터 자체가 되던 캐릭터와 네가 경험한 공통된 어떤 감정을 연기하던. 내면이 단단해야 해. 그래야 무너지지 않아. 다연이 넌 어릴 때부터 주목을 많이 받아와서 그것에서 멀어지면 못 참아. 그런 네가 배우로 살다보면 분명 주목을 못 받게 될 수도 있어. 그걸 받아들일 자신 있어?”


공다연은 쉽게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녀는 류지호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할 바보가 아니다.

류지호는 길었던 사설을 멈추고, 영화 이야기로 돌아왔다.


“영숙이 캐릭터를 어떻게 연기할까 고민하기 전에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려고 해봐. 친구들에게 따돌림 당하고, 한 번도 친구를 가져 본 적 없는 외로운 영숙이를 진심으로 공감해봐. 인생에서 가장 싱그러울 나이 십대에 사진 한 장 찍어본 적 없고, 심지어 수학여행 때도 졸업사진에서도 구부정하게 위축돼 반 친구들 사이에 숨어서 사진을 찍었을 그녀를 떠올려봐. 그리고 성인이 되기 전에 십대의 마지막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어 용기를 내 사진관을 찾아왔을 그녀를.”


류지호의 낮고 잔잔한 음성을 들으며 공다연은 머릿속으로 영숙이란 여자를 상상했다.

류지호는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어 몰랐지만, 다른 배우들도 똑같이 들었다.


어허허헐.


김인륜이 특유의 바람빠지는 웃음소리를 흘렸다.


“선생님, 류 감독이 19살이라면서요?”

“어른스럽지?”

“저는 조금 징그럽습니다. 십대면 뭔가 겉멋도 들고 그래야지 너무 진지하잖습니까?”

“난 어린 친구가 겸손하니 보기 좋기만 하구만.”

“저번에 찍은 드라마 PD는 되게 까칠했는데, 류 감독이 자상하긴 합니다.”


공다연이 메이크업을 고치고 다시 카메라 앞에 앉았다.

화장이 아니라 홍조가 심한 사람처럼 보이는 볼터치.

짙은 색깔의 립스틱은 나이를 들어 보이게 만들었고, 과도한 파운데이션과 아이섀도는 화장이 서툰 어린 여자로 보이게 만들었다.

그녀는 한 번도 제대로 화장을 해본 적이 없는 영화 속 스무 살 여자가 되어있었다.

카메라 앞에 선 공다연에게 김인륜이 입을 열었다.


“배역에 크고 작은 건 없어. 배우는 항상 연기를 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해.”

“예. 선생님.”

“긴장하지 말고, NG 내는 걸 무서워하지도 말고.”

“감사합니다. 선생님.”


김인륜 배우가 공다연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거렸다.


“슛!”


다시 공다연 분량을 찍어 나갔다.

몇 번 더 NG가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김영복 기사를 비롯해 스태프들이 공다연에게 괜찮다며 편안하게 연기하라고 격려했다.

배우는 매번 새로운 사람들과 일할 수밖에 없다.

배우는 바뀌는 촬영현장에서 상처를 받을 수도 있고, 용기를 얻을 수도 있다.

공다연에게 이번 영화현장은 후자로 기억될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의 출연분량을 모두 찍었음에도 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박인철이 연기하는 모습을 보며 공다연이 나직이 감탄했다.


“멋지네.”


마당에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아들.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찍고 난 후 가슴에 묵직한 한이 자리 잡았다.

언젠가는 아버지를 떠나보내야 한다.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을 준비할 수밖에 없는 안타까움.

서글픔.

수많은 감정으로 범벅된 한스러움이 아버지를 향한 죄스러움으로 돌변했다.

그 감정이 가슴을 난도질 한다.

그때 아내가 슬그머니 다가와 놀린다.


[동수 아빠. 울어요?]

[지금 울어버리면 아버지가 떠났을 때 울어줄 수가 없잖아.]

[병원에서는 뭐래요?]

[심장이 약해져서 무리하지 말라는 말 밖에는... 매번 하는 얘기만 듣고 왔어.]

[당분간 사진관에는 못 나가시게 해야겠어요.]

[입원 하면 좀 좋아. 노인네가 고집만 쎄서는.]


관객을 몰입시키고 설득시키기 위해서는 배우의 말투부터 섬세한 동작 하나까지 신경 써야 한다.

두 배우는 실제 부부처럼 보일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그야말로 맛깔난 연기를 선보였다.

박인철은 간간이 대본에 없는 애드리브를 넣었다.


“컷!”


몇몇 스태프들이 류지호를 돌아봤다.

연기도 좋고, 두 배우 합이 좋은데 왜 끊었지?

배우와 스태프들은 의아했다.

궁금함을 참지 못한 김영복이 류지호에게 다가왔다.


“박인철씨하고 김수희씨 연기 잘 하는데 왜?”

“잘했어요. 그래서 오케이예요.”

“그럼 더 길게 찍지 왜 끊었어요?”

“지금으로 충분해요.”


류지호는 박인철의 연기욕심이 정도를 넘는 순간을 포착했다.

그는 이 장면에서 자신의 연기역량을 어필하고 싶어 했다.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감독은 항상 전체를 보며 연출을 해야 하는 거다.

그래서 컷 사인을 냈다.

하재근과 한수호도 류지호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두 배우 연기는 좋았어요. 박인철 배우나 김수희 배우의 역할은 충분했어요. 더 나가면 영화 전체로 볼 때 이 씬이 쓸데없이 비대해지고, 캐릭터가 의도한 것 이상의 의미를 뽐내게 되면서 할아버지와 손자의 씬들에 영향을 미칠 수 있어요. 딱 지금 정도가 적당해요.”

“조연으로써 딱 그 정도 역할만 해야 한다는 거야?”


한수호가 물었다.


“매순간 관객의 시선과 집중을 붙잡아둬야 하는 상업영화는 다를 수 있어. 내가 찍는 건 20분에 조금 못 미치는 러닝타임의 영화야. 이것도 담고 저것도 담다보면 영화가 산으로 갈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관객에게 영화 전반에 깔려있는 정서를 전달하고 싶은 거지 단발적인 재미를 주려고 하지 않아서 그래. 두 배우에게는 미안하지만.”


하재근과 한수호가 뭔가 골몰히 생각에 잠겼다.


“형들, 내가 한 말에 진지해질 필요는 없어. 정답은 없어. 난 지금 찍고 있는 영화에서 그런 판단과 선택을 한 거야. 다른 걸 찍었다면 선택과 판단이 달라졌을 거야.”

“그런데 왜 인서트나 클로우즈업은 많이 땄어?”

“편집에 확신이 없어서 그래. 때로는 열 마디의 대사보다 담뱃재를 터는 박인철씨의 떨리는 손 클로우즈업이나 애잔한 얼굴 클로우즈업이 훨씬 많은 걸 전달할 수 있어. 그 위로 아내의 말이 들려오면 좀 더 편집된 커트가 풍부해 지겠지. 누구나 예상 가능한 도식적인 커트바리 말고 다른 걸 궁리해 보고 있어. 형들도 일만 하지 말고 나라면 어떻게 찍을까를 항상 고민해 봐.”


류지호가 가진 유일한 장점은 영화를 많이 봤다는 것이다.

뛰어난 성과를 낸 영화감독들 역시 누구하나 영화광이 아닌 사람이 없다.

그들과 류지호의 차이는 단 하나.

류지호는 영화를 보고 흉내 내는 것에 급급했다.

명감독들은 자신의 것으로 재해석하며 끊임없이 독창성을 고민한다.

류지호는 그저 허리우드 키드였을 뿐.

그러니까 자신만의 영화철학이 확고하지 않았기에 어디선가 본 듯하고 익숙해서 지루한 영화가 나온 것이다.


- 모방의 의심을 두려워해 남의 작품을 보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다. 중요한 것은 영향이나 모방이 아닌 얼마나 독창적으로 재해석 했느냐 하는 것이다.


영화 거장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한 말이다.

류지호는 다양한 영화를 여러 번 많이 보는 것을 넘어 그 속에서 자신만의 표현방식이나 영상언어를 찾아야 했다.

그것을 찾게 된다면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영화를 만들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렇게 5회차 촬영이 끝났다.

모든 스태프와 배우들이 이틀의 휴식시간과 재정비 시간을 가졌다.

모두가 쉬기만 한 것은 아니다.

감독인 류지호는 당연히 촬영준비를 해야 했기에 쉴 수 없다.

촬영부 역시 현상소에 맡긴 현상된 필름을 확인해야 했다.

짧은 재정비 시간이 후딱 지나갔다.

배우와 스태프들이 다시 촬영을 위해 모였다.

점심과 저녁식사를 하는 조건으로 촬영을 허락 받은 중국집.

보조출연자들이 한쪽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수호형?”

“왜?”

“보출... 엑스트라는 어디서 불렀어?”

“한국예술.”


류지호의 기억에 의하면 1990년대까지 보조출연자 에이전트 업체로 한국예술이 유일했다.

아역 보조출연은 TMT에서 도맡아서 했던 것으로 기억했다.


“잘 했어.”

“그냥 선후배들 불러서 채우지....”


한수호는 보조출연을 따로 부른 것을 돈 낭비라고 여겼다.


“나중에 형도 작업할 때 보면 알아.”

“뭘?”

“돈 주고 쓰는 사람 마음대로 부리는 것과 공짜로 지인들 데려다 찍을 때 고충을.”


한수호가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로 쳐다봤다.

류지호는 그저 얼굴에 미소를 띠울 뿐.

대답 없이 김영복에게로 향했다.


“...으음.”


류지호와 김영복이 머리를 맞대고 앉아 미술작품집에 시선을 고정했다.

두 사람이 진지하게 보고 있는 그림은 <할아버지와 손자>라는 박수근 화백의 1964년 작품이다.

류지호가 연출의도를 설명했다.


“전 회화는 잘 몰라요. 단지 이 그림을 보며 느꼈던 감동을 이 씬에서 표현해보고 싶을 뿐. 조형미나 특유의 질감은 접어두고, 넉넉한 할아버지 품에 안겨있는 손자와 주변에서 보이는 정겨운 이웃들 그것들이 어우러지는 따뜻하고 정감 있는 장면을 만들고 싶네요.”


<할아버지와 손자>

유명한 그림이다.

그림 하단에 할아버지의 품안에 들어있는 손자가 배치되어 있고, 상단으로 쌍을 이룬 4명의 인물이 배치되어 있다.

그림 속 인물들은 모두 짝을 이루고 있다.

할아버지와 손자,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내 둘, 물동이를 이고 가는 아낙 둘.

그들은 서로 정겹게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보인다.

같은 동네에 살고 있어 서로 끈끈한 유대감이 느껴진다.

김영복은 박수근 화백의 다른 그림들도 꼼꼼히 살폈다.


“오케이! 해봅시다.”


김영복이 카메라의 포지션을 잡았다.

덩달아 조감독 한수호가 바쁘게 움직였다.

김인륜 배우와 이경재의 위치를 잡고, 그 주변으로 두 쌍의 보조출연자들을 배치했다.


“감독, 나도 그 그림 좀 봅시다.”


류지호가 그림을 김인륜에게 보여줬다.


“저는 여태껏 할아버지를 구부정하고 좁은 어깨처럼 보여줬어요. 이 씬은 어깨를 펴서 조금은 널찍하게 보여줄 생각이에요. 품안에서 짜장면을 먹는 경재에게 깍두기와 단무지도 챙겨주시고, 입가에 묻은 짜장도 냅킨으로 닦아주시는 시바이(연기)를 넣어주세요.”


류지호는 김인륜과 대화할 때는 영화·방송계 은어를 적당히 섞어서 썼다.

그렇지 않으면 소통이 잘 안됐다.


“내키는 대로 해도 되나?”

“대본에 써놓은 지문을 굳이 따르실 필요 없어요.”

“경재야, 할아버지와 연습 해볼까?”

“네에~”


김인륜과 이경재가 연습을 시작했다.

류지호는 두 사람에게 몇 가지 주의사항만 전달하고 카메라 쪽으로 움직였다.


팟.


조명에서 쏘아진 빛이 공간을 채우기 시작했다.

류지호라고 해서 박수근 화백의 그림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는 건 아니다.

그림에서 특별한 영감을 얻은 것도 아니다.

다만 가족과 이웃들을 정감 있게 그려낸 화백의 따뜻한 마음씨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공감이 되었다.

할아버지와 손자의 끈끈한 혈육의 정.

할아버지의 생명이 아들에게로 그리고 손자로 영원히 이어진다는 메시지.

넓은 품안에 쏙 들어가 있어 손자가 느끼고 있을 안정감과 할아버지의 들판처럼 넓고 무한한 사랑.

그들의 주변에서 함께 살아가는 이웃들의 구수하고 정겨운 모습들까지.

류지호가 이 영화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와 정서가 그의 작품 곳곳에 모두 있었다.

그것은 류지호가 감히 넘볼 수 없는 경지다.

박수근 화백이 그림으로 류지호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려준 것처럼.

그는 영화로 관객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조명부가 만들어 준 따뜻하고 포근한 빛의 향연의 도움을 받고, 김영복 기사의 안정감 있는 구도와 자연스러운 카메라 워크에 도움을 받고, 이경재의 통통 튀는 생동감과 김인륜 배우의 연륜 있는 연기에 도움을 받아서....

그렇게 류지호는 관객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슛!”

“조용!”

“레디... 카메라... 사운드...”


딱!


“액션!”


[할아버지는 왜 안 먹어?]

[할애비는 많이 못 먹어. 우리 똥강아지가 이것도 마저 먹어.]

[아빠가 알면 혼나는데...]

[괜찮아. 할아버지하고 똥강아지만 아는 비밀이야.]


와아~


손자는 할아버지가 양보한 짜장면까지 입안에 욱여넣는다.

입가가 짜장으로 범벅이 되어 어디가 입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지경이다.

할아버지는 냅킨으로 손자의 입 주변을 닦아주고, 물컵을 가져와 입에 대준다.


[천천히 먹어 체할라.]

[내가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할아버지 맛있는 거 먹게 해줄게.]

[우리 똥강아지가 언제 이 할애비 맛있는 거 사줄 정도로 돈을 많이 벌까?]

[돈 많이 벌어야 해?]

[나중에 할애비가 하늘나라에서 우리 똥강아지 보러올 때마다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차려주려면 돈이 많이 들걸.]

[얼만큼? 이이이~ 만큼?]


손자가 할아버지 품안에서 두 팔을 벌려 보인다.


[이이이이~ 만큼.]


할아버지가 손자를 따라 팔을 벌려 보인다.

마치 날개 짓을 배우는 어린 새를 품에 안은 어미 새처럼.

이별을 암시하는 할아버지의 대사가 끼어있지만, 이경재의 애교와 김인륜 배우의 ‘어허허헐’ 하는 바람 빠진 웃음소리가 씬 내내 푸근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컷! 오케이!”


인생살이도 그렇지만 모든 일이 술술 풀리는 법은 없다.

영화를 찍다보면 외부적인 요인이건 내부적인 요인이건 문제가 몇 번씩 터진다.

무리 없이 진행되는 촬영에 긴장감이 떨어져서일까.

류지호에게 문제가 발생했다.

불현 듯 의심병, 불안병이 찾아온 것이다.


‘이게 맞나? 맞는 거겠지?’


정신없이 찍어나가다 보면 어느 순간, 감독은 영화가 잘 가고 있는지 불안할 때가 찾아온다.

콘티대로 찍었다.

실력 있는 스태프와 작업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문득 의심이 드는 것이다.

이게 맞나.

혹시 편집 소스가 모자라거나 안일하게 오케이를 남발한 건 아닐까.

찍은 것들이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붙을 수 있을까.

그림만 있고, 알맹이가 없는 거 아닐까.

의심이 든다.

불안해 진다.

류지호에게 그것이 찾아왔다.


‘그냥 교과서적으로 찍었어야 했나?’


순간적으로 촬영장에 홀로 고립된 것 같은 외로움이 몰려왔다.

막막한 기분이 들고,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만 같다.


‘젠장.’


명감독들도 때때로 느끼는 감정이다.

류지호가 못나서 찾아온 불안증이 아니다.

이런 감정을 느낀다는 것은 류지호가 그 만큼 치열하게 작업에 임하고 있다는 걸 반증했다.

겉멋만 들려 기계적으로 작업했다면 만날 수 없는 일종의 중압감이다.


“감독님, 다음 커트 안 찍어요?”


김영복이 물었다.

류지호는 재빨리 머리를 흔들어 부정적인 감정을 털어냈다.


“김 기사님, 우리 잘 가고 있는 거 맞죠?”


류지호에게 부끄러움은 없다.

상의할 것이 있으면 마누라에게 물어보면 된다.

부부사이에 부끄럽고, 털어놓지 못할 게 뭐가 있을까.


“왜 요? 불안해요?”

“솔직히 그래요.”

“감독님은 잘하고 있으니까, 복잡한 생각 말고 앞으로 찍을 것만 생각하세요.”

“그렇게 말해주니 힘이 불끈 나네요.”


하하하.


김영복이 화통하게 웃어 재꼈다.

걱정도 팔자다.

땀 흘려 열심히 일하는 자는 괜한 걱정 하지 않는 법.

또 쓸데없이 근심하지도 않는다.

걱정근심을 한 방에 날려버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

땀 흘려 일에 몰두하는 것이다.


“자, 다음 씬 갑시다!”


감독에게 시간은 빨리 가고, 스태프에게 더디게 간다.

영화감독들이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다.

어느덧 촬영 회차가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하재근의 표정이 어두웠다.

류지호는 뭔가 문제가 생겼음을 눈치 챘다.


“형, 문제 생겼지? 혹시 장소섭외가 틀어졌어?”

“......?”


하재근은 쉽게 입을 뗄 수 없었다.

한창 촬영에 집중해야할 감독에게 부담을 주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사실대로 말해줘야 대책을 세우지. 혼자 끙끙 앓지 말고 속 시원하게 털어놔봐.”

“상갓집 찍기로 한 집주인이 약속을 엎어버렸어.”


하재근의 말을 듣고도 류지호는 침착했다.

사실 유명 스타가 나오지 않는 영화에 선뜻 장소를 제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촬영불가를 일방적으로 통보한 주택의 경우 며칠을 사정사정해 겨우 허락을 얻었다.

류지호는 웃음이 나왔다.


“하하하. 쉽게쉽게 찍으면 영화가 아니지.”


사소한 문제는 몇 번 있었지만, 지금까지 별 무리 없이 진행되었다.

날로 먹은 것 같은 느낌.

무난하게 모든 촬영을 마쳤으면 서운했을지도 몰랐다.


“도저히 설득이 안 돼?”

“장소사용료를 주겠다고 해도 싫다고 하네.”


돈을 주겠다고 해도 촬영을 거부한다는 건 결코 뜻을 바꾸지 않겠다는 의미다.

스태프들이 모두 감독만 바라봤다.

그들도 문제가 생겼음을 알게 된 것이다.

감독인 류지호가 빠른 결정을 내려줘야 했다.


“일단 점심에 나하고 다시 한 번 가봐.”


작가의말

행복한 하루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8

  • 작성자
    Lv.99 용갈장군
    작성일
    22.02.24 10:41
    No. 1

    "어쩌다 배우" 에서는 진정한 배우가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민과 공부와 노력, 그리고 진지함과 희생이 있는지를....
    "Mr헐리우드" 에서는 영화 작업이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와 고뇌가 함께 하는지를 ....
    두 작품을 보며 알게 됩니다.

    그러면서 "내 인생 또한 그러했구나"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99 요리선생
    작성일
    22.02.24 11:04
    No. 2

    구로사와 감독을 좋아하지만 1991년 일본에서 본 '8월의 광시곡(八月の狂詩曲)은 끔찍한 충격으로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88 lo******
    작성일
    22.02.24 11:15
    No. 3

    11장의 허리우드 키드란 표현이 이해 안가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OLDBOY
    작성일
    22.02.24 13:14
    No. 4

    잘 봤어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84 검대검
    작성일
    22.02.24 13:19
    No. 5

    90년대 영화중에 정지영 감독의 헐리우드키드의 생애가 있었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무한땅꼬마
    작성일
    22.03.09 00:19
    No. 6

    잘 보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2 세레스틴
    작성일
    22.03.25 18:49
    No. 7

    류지호가 그림을 김인륜에게 보여주었다. 이름 오타있네요.
    영정사진 씬은 매번 볼때마다 좋아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44 트뤼포
    작성일
    22.03.26 13:13
    No. 8

    수정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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