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석빙고
뜨거웠던 자체 청백전의 열기를 느낀 지가 엊그제 같았는데, 어느새 1달이 넘게 흘러갔다. 경기가 끝나고 며칠 뒤에 첫눈까지 내리며 겨울의 시작을 알렸고, 이제는 본격적인 겨울이 찾아왔다.
그동안은 바쁘긴 해도 기본적으로 야구 훈련을 중심으로 큰 변동은 없는 일정을 소화했었으나, 실내 훈련장이 갖춰져 있지 않은 지금으로써는 전처럼 훈련을 하면서 보낼 수는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뭘 하고 지냈을까? 바로 노가다를 하면서 지냈다. 임시로 지어놨던 배재학당 구장의 관중석 보수 공사와 동대문 구장의 건설 현장에도 투입되었다.
배재학당 학생들과 우리 단원들 또한 적지만 용돈 벌이 정도는 할 수 있는 금액과 식사를 제공하기로 하고 건설 현장에 투입했다. 그리고 우리 단원중 일부는 한강으로 보내 얼음을 캐는 작업을 하게 했다.
얼음을 캐게 한 것은 내년부터 시험하게 될 경기장 내에서 음식을 판매하기 위한 과정의 일환이었다.
당연하게도 이 시대에는 아직 현대에 널리 쓰이고 있는 형태의 냉장고가 아직 등장하지도 않았고, 냉장고가 있다고 하더라도 전기조차 상용화되지 않은 시대이기에 냉장고에서 만들어낸 얼음을 사용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이 시대라고 한여름에 얼음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석빙고라고 불리는 고대의 냉장고가 이미 삼국시대부터 존재해 왔으니 말이다. 이 석빙고는 지금도 한양 곳곳에 생각보다 많이 존재하였다.
특히 국가에서 관리하는 관영빙고 이외에 사빙고라는 민간에서 관리, 운영하는 석빙고 또한 존재하였는데, 이 사빙고의 숫자가 오히려 더 많을 정도였다.
그래서 돈만 있다면 한여름에도 얼음을 구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얼음을 이용한 음식들을 몇천, 몇만이나 되는 관중들에게 제공하려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상황이 나올 수도 있었다.
음식에 얼음을 사용한다는 것은 단순히 얼음을 직접 이용하는 빙수나 얼음 동동 띄운 음료 같은 음식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생선이나 고기 등을 보존하는 데에 사용하는 얼음까지 따져야 한다. 그런 식으로 접근하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는 상황이 이해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상황을 대비해 지금부터 우리의 손으로 얼음을 조금씩 비축해 놓자고 결정한 것이다. 다행히도 혜림의 뒷 배경 덕분에 사빙고의 운영권을 손에 넣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물론 나중에 듣게 된 후일담으로는 얼음 업자들의 이권 다툼 문제가 여간 복잡하게 얽힌 것이 아니라 마냥 쉬운 일은 아니었던 것 같지만, 아예 이 사업에 들어올 엄두도 못 내는 사람들에 비하면 운영권을 얻었다는 사실 자체가 손쉽게 해낸 것이겠지.
그런데 얼음을 저장할 공간은 마련되었지만 이제 사람이 문제였다. 얼음을 채취하는 인력이 이미 다른 사빙고를 운영하는 이들 때문에 모자랐기 때문이다.
얼음을 채빙하는 부역을 장빙역이라고 불렀는데 이 부역은 최악의 고역으로 꼽힐 정도로 악명이 높아 이를 피해 달아나는 부역민들이 속출할 정도였다고 한다.
물론 돈만 많이 준다면야 해결될 문제이긴 했고, 혜림이 힘을 쓴다면 쉽게 해결될 일이긴 했지만, 야구장 건설부터 해서 혜림 역시 벌여놓은 사업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고종의 지원 덕분에 당장은 문제가 될 건 없었지만, 이제 곧 그 사건이 터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언제까지 고종의 지원에 의지하고 있을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므로 이런 작은 사업 하나부터 한푼이라도 아껴야 했기에 나를 포함한 우리 단원들 일부가 이 작업에 투입하기로 한 것이다.
차마 배재학당 학생들을 이 고된 작업에 보내는 것은 돈의 문제가 아니라 이 나라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몹쓸 일이라고 생각하여 우리 단원중 일부를 보내게 되었다.
물론 혜림은 이마저도 우리 단원들은 이렇게 고된 일에 힘을 쓸 사람들이 아니라면서 극구 반대하였지만, 지난 반년간의 고된 훈련도 소화해낸 데다가, 근 한 달을 건축 노가다 현장에까지 투입되어 일을 해봤기에 몸 쓰는 일에 어느 정도 자신이 붙어있었으므로 혜림을 어떻게든 설득해냈다.
이날 투입된 인원은 나와 한진, 그리고 김산과 김훈, 남상혁, 이윤수 그리고 현정훈과 야구단원 이외에도 YMCA 소속 인원 3명을 포함한 10명이었다. 아직 성인이 아닌 단원들은 배재학당 학생들과 마찬가지 이유로 새벽조에는 빠지게 되었다.
다행인 점이라면 현정훈이 언제 또 이런 일을 해본 건진 몰라도 경험자라고 하여 우리를 진두지휘하게 되었다. 게다가 전에 함께 일한 적이 있다는 숙련자들까지 데리고 왔는데, 파면 팔수록 정훈도 산전수전 다 겪은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자자! 모두 옷은 단단히 껴입고 왔지요? 그럼 다들 도구를 들고 출발해봅시다!”
처음으로 현장에 투입되었을 때는 정신이 아찔했다. 얼음을 채빙하려면 한강이 꽁꽁 얼어 얼음의 두께가 12cm는 넘어야 했는데, 그 정도로 얼음이 얼려면 당연히 기온도 뚝 떨어져 있어야 한다.
게다가 웬만큼 추운 날씨가 아닌 이상, 낮에는 얼음이 녹을 염려가 있다고 하여 밤에 작업하게 되었는데, 낮에도 온갖 방한용품을 두르고도 한기가 속으로 들어오는 마당에 밤에 나오게 되면 어느 정도겠는가? 찬 바람까지 휭휭 불어대니 정말이지 죽을 맛이었다.
“아으 거참 얼어 죽겠네.”
“이걸 대체 누가 하자고 한 거야? 그 양반 면상 한번 보고 싶네.”
다 들린다 김산아···. 그래도 내가 하자고 한 일이라 양심이 찔리기는 했으므로 뭐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나온 이상 할 건 해야지 하고는 채빙하는 작업을 시작했는데, 이게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일단 새벽 2시에 나오는 것부터가 고역이었다. 일찍 자고 왔다 해도 새벽에 일하는 것 자체가 고역인데, 거기에 찬바람까지 맞는 건 군대에서 경계 근무 설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게다가 육지 쪽에 불을 지펴놓기는 했으나 효과는 미미하여, 사실상 달빛 하나에 의존해야 할 정도로 시야까지 제한되었다. 안 그래도 얼굴까지 털로 된 방한용품으로 싸매고 있었기에 더욱 갑갑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할 건 해야지···.
처음 맡은 일은 톱질로 얼음을 썰어 내는 것이었다. 물론 이는 초보자에게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고, 정훈도 우리가 제대로 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지는 않았던 것 같고, 그냥 체험이나 해보라고 시킨 일 같았다.
-쓱삭 쓱삭
“에헤이, 그렇게 하는 게 써는 게 아닌데 말이지. 그래 저 양반처럼 썰어야 하는 거요.”
정훈이 데려온 인부가 지목한 것은 다름 아닌 한진이었다. 한진은 처음 하는 얼음 써는 일까지 꽤 능숙하게 해내고 있었는데, 정말 먼치킨이 따로 없는 것 같다.
“흠···. 자 지금부터 내가 지목하는 사람들은 지게를 지도록 합시다.”
일을 몇 번 시켜보더니 정훈은 톱질을 할 인원 몇 명을 선발하였고, 나머지 인원은 썰어진 얼음을 육지까지 지게로 나르는 일을 맡았다.
물론 나 역시 이 일을 맡게 되었는데, 이 역시 보통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단순 노동 강도는 이쪽이 더 괴로웠다. 그도 그럴 것이 썰어 낸 얼음의 무게가 보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 덩이당 대충 20kg 정도는 되는데 이걸 3덩이씩은 날라 줘야 작업에 속도가 붙는다고 했다.
“끄아아아악···.”
이 날씨에 얼음을 3덩이나 든다는 것은 절로 악 소리가 나는 일이었다.
아무리 지게에 지고 간다고 하더라도 60kg을 들고 간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생각보다 무게는 잘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대신 등에 한기가 직접적으로 느껴지고 앞에서는 바람이 불어와서 쌍으로 미치겠다는 더 큰 문제가 생겼지만 말이다.
그래도 일단 육지에만 가져다 놓으면 할 일이 끝난다는 점은 다행이었다. 이후에는 오전반 인부들이 석빙고까지 옮기기로 되어 있으니 말이다.
한겨울이라 얼음이 녹아내릴 일도 없고, 애초에 어느 미친놈이 이걸 훔쳐가려고 하겠는가? 설령 도둑놈이 있다고 하더라도 불침번이 있으니 이에 대한 걱정은 없었다. 다만 지금 이 순간이 너무 고될 뿐···.
또 미치겠는 부분은 한기가 느껴지는데도 몸을 써서 그런지 열이 올라오면서 땀이 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일을 직접 해보니 왜 부역을 하던 사람들이 도망을 간 건지 백번 이해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그래도 하다 보니 영겁의 지옥 같은 시간일지라도 어찌어찌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다. 지게에 있던 얼음을 나르고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얼음이 꽤 많이 쌓여 있었다.
“자자! 다들 고생 많았고 이제 들어가서 쉽시다!”
마지막 얼음 채집을 마치고 직접 얼음까지 실어온 정훈의 입에서 나온 끝났다는 말이 그렇게 달콤할 수가 없었다.
“만세!”
나뿐만이 아니라 이 일을 처음 경험한 모든 단원의 입에서 만세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리고 든 생각은 이거 두 번은 못 할 것 같다였다. 혜림이 하지 말라고 말릴 때 그냥 하지 말 걸 그랬다···.
그래도 이왕 시작한 거 가오가 있으니 한 번은 더 나가봐야 체면이 좀 설 것 같았다. 상상만으로도 벌써 눈앞이 아찔해지는 순간이었다.
어쨌든 지금은 일이 다 끝났으니 집으로 들어갈 시간···이 아니라 새벽 일찍 시작하는 국밥집에 가서 뜨끈한 국밥 한 그릇 때리고 집에 들어가게 되었다.
힘들어 죽겠을 뿐만이 아니라 얼어 죽을 것 같기까지 했던 고된 일을 마치고 먹는 국밥은 그야말로 천상의 맛이었다. 이런 일에 괜히 단원들을 끌어들인 것 같아서 찔리는 마음에 국밥은 내가 사기로 했다.
소설로 벌어들이는 수익이 꽤 쏠쏠한 편이었기에 내 용돈은 넉넉했으므로 이 정도는 충분히 쏠만했다. 근데 어어··· 그렇다고 거기 국밥 두 그릇 시키지는 마라!
국밥까지 한 그릇 때리고 나서 정말로 집에 가서 꿀 같은 잠을 청하게 되었다. 우리가 고생한 걸 아는지 바닥이 아주 뜨끈하게 데워져 있었기에 눕자마자 바로 눈이 감기었다.
···
···
···
아이고···
일어나자마자 든 생각은 몸이 심상치 않다는 것이었다. 삭신이 쑤신다는 느낌을 정말 오랜만에 받아보는 것 같았다.
지난 반년간 한진의 특제 훈련 일정을 통해 물살투성이던 몸을 환골탈태 수준으로 변화시켰다고 생각했는데 자만이었나 보다. 사람은 겸손할 줄을 알아야 하는 것 같다···.
위안거리일지는 모르겠으나 다행히도 나만 이런 게 아니라 유경험자인 정훈과 그냥 신체 자체가 어나더 클래스인 한진을 제외하고 함께 작업했던 단원들 모두가 앓아누웠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하하하 그래그래 이건 사람이 할 일이 못 되는 거였어. 이번 일의 교훈은 아무래도 혜림 말을 잘 듣자가 된 것 같다.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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