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화가 피어날 때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게임

새글

리메리온
작품등록일 :
2024.03.14 20:08
최근연재일 :
2024.09.18 23:32
연재수 :
35 회
조회수 :
1,142
추천수 :
4
글자수 :
166,901

작성
24.07.24 16:49
조회
25
추천
0
글자
13쪽

석탄을 전부 넣어라

DUMMY

황혼이 저물어가는 때, 새하얀 빛을 머금어온 도시의 건물들은 붉은 빛에 물들기 시작한다.


사람이 사는 도시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적막만이 감싼 지금 거리에 나온 이들은 니키타 일행 뿐이었다.


고요 속을 헤집으며, 침묵 위에 작은 파문을 일으켜가며 걸어간 그 끝에 보인 것은 어느 작은 선술집이었다.


그 선술집은 '세련되다' 라는 표현과 '후지다' 라는 표현 사이에 머무는 건물로 귀족이나 고위 신관들에게 전혀 어울리는 장소는 아니었다.


허나 안내해주는 여자는 익숙하다는 듯 어떠한 거리낌 없이 선술집의 문을 열고 그 내부로 망설임 없이 걸어 들어갔다.



"제 역할은 여기까지. 그럼 모쪼록 건실한 이야기가 되시길 바랍니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밖으로 걸어나갔지만 이 상황은 명백히 부담되는 상황이다.


장소가 부담되는가?


돈이 좀 있는 평민들이 취하기 위해 오는 선술집인데 그럴 리 없다.


시간이 문제인가?


오히려 아무도 돌아다니지 않을 시간이기에 문제될 일이 없다.


선술집이 열려있다는 사실, 이것 하나 만으로도 충분히 이질감을 안겨주었다.


작은 가게라 할 지라도 죽은 거리 위에 홀로 장사하는 모습이.


심지어 오로지 단 한 테이블의 손님들을 위해 열린 가게라는 사실이 이질감을 강하게 심어주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성녀 후보님."



"저야말로 제국의 위대한 검의 후손을 마주할 수 있는 영광을 누리게 되어 영광입니다."



테이블에 일어나 인사를 올린 이는 분명 그녀가 맞다.


창문과 조준경을 사이에 두고 보였던 그 인물임은 틀림없었다.


허나 지금 눈 앞에 있는 그녀는 시신을 보고 어쩔 줄 몰라하던 소녀가 아니다.


철저하게 가면을 쓰고 과장된 복장으로 자신을 감춘 뒤 나온 뛰어난 연기자이다.


그녀는 냉소적인 눈빛으로, 입은 온화한 미소를 띄우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술과 안주는 임의로 주문했습니다만 괜찮으신지요?"



"괜찮습니다. 성녀 후보님의 추천을 받은 음식인데 어찌 거절하겠습니까."



자리에 앉자 기다렸다는 듯 주방에선 시원한 술과 치즈, 소세지가 나왔다.


소세지는 처음 보는 이들에겐 특이할 수 있겠지만 신성국의 소세지는 오로지 내장과 피로 만들어진다.


신성국에서 종교적인 위치에 오른 이들은 절대로 짐승의 살을 먹지 않으며 내장과 피, 뼈를 먹어야 하는 법이 존재한다.



"...너 자신을 주린 이들에게 줄 수 있어야 고개를 들어 올릴 수 있을지니..."



"팔로스 교리 2장 1절 첫 문장이로군요. 요즘도 팔로스 교리를 읽는 분이 계시다니 드문 분이시군요."



당연하지만 니키타가 그런 것에 흥미를 가질 만큼 신실한 신도가 되려는 것은 아니다.


니키타는 그저 보였기에 읽었을 뿐.


이 또한 살아남기 위해 닥치는 대로 정보를 수집해가며 읽어온 결과물에 불과할 뿐이다.



"신성국에 이런 가게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사람 내음이 짙은 가게라, 마음에 듭니다."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허나 이 가게는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을 닫을지도 모릅니다."



"이리 맛있는 안주가 마지막이라니, 정말 아쉽군요."



벨리타는 그녀의 눈을 마주치지 않은 상태로 말하였다.


주제에 관하여 먼저 말을 꺼낼 이는 급한 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일까.


니키타는 지금 상황에 대해 파악할 방도가 전혀 없었다.


눈 앞의 성녀 후보에 대한 정보는 오로지 엘프였다는 사실 하나 뿐.


그녀가 사망한 뒤 모든 엘프들이 성국을 비난하며 동시에 지속적으로 성국으로 들어오던 물자들을 통제할 정도로 그들을 뿌리 깊게 혐오하게 되었단 사실 뿐이다.


침묵이 가라앉는다.


따스한 조명 아래 따뜻한 안주를 먹고 있지만 공기는 차갑다.


이 자리는 귀족의 자리다.


인간이 만들어낸 허무하되 절대 허황되지 않은 압도적 지위들의 자리.


여긴 저들에게 맡겨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잠깐 바람만 쐬러 가볼게."



"응. 여유롭게 쐬다 와."



니키타는 저들에게 방해되지 않게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가게 밖을 나섰다.


기이하게 어둠이 내려앉은 바깥이 가게 안보다 더욱 따스하게 느껴졌다.


그는 곧장 자신의 향초에 불을 붙여 입에 물었다.


저 안에서 분명 파벌 싸움에 대한 이야기가 들려올 것이다.


니키타는 저들의 좋은 수단으로 활용될 요소가 전혀 없는 존재라 생각했기에 그는 차라리 밖으로 나온 것이었다.


필터까지 향초를 태우자 니키타는 불 마법으로 꽁초를 완전히 연소시켰다.


그리고 다시 가게로 들어가기 위해 몸을 틀자,



"반갑습니다, 니키타님."



기척 없는 움직임과 조용한 목소리.


게임 속 언급 그대로의 특징에 니키타는 알 수 있었다.


드디어 그들이 움직였다고.



"제가 요구한 날부터 시간이 꽤 걸렸군."



예상했다.


엘프들은 천성적으로 어둡고 더러운 것을 싫어한다.


몸에 이질적인 무언가가 묻는 것은 극소수의 경우를 제외하고 상당히 불쾌해 한다.


그렇기에 니키타는 지금 자신의 눈 앞에 온 인물의 뜻을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이는..."



"진위 여부의 파악이 늦어졌나보군. 어둠숲에 그리 관심을 가지지 않았으니 당연한 결과겠지."



"...죄송합니다. 저희 엘프가 해야 할 의무를 대신 지우게 되어 진심으로 유감이라..."



그야 그렇겠지.


니키타는 엘프들에게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았었다.


저들이 하나로 뭉치는 것은 생존 문제에 직결되지 않는 한 일어날 수 없는 일.


그렇기에 분명 그들의 왕에게 전해 졌을리가...



"아버지께서 전해 달라 부탁하셨습니다."



아버지?


아버지라고?


엘프들이 아버지라 부르는 이는 오로지 단 둘 뿐이다.


자신을 길러준 아버지와,


엘프들의 왕.



"우선 니키타님께서 반수의 몸이심에도 불구하고 어둠숲을 관리해왔음을 인정, 이에 따라 <라 파레온>에서 니키타님을 전적으로 지원할 의사가 있음을 밝힙니다."



엘프의 지원이라니.


엘프는 한 번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는 이들이다.


자신들이 내뱉으려는 말은 정령의 목소리를 통해 전해진다 믿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몸 속에 자신과 정령님이 공존한다 생각하기에 스스로를 가꾸고 소중히 여기기 위해 노력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더러운 것, 어두운 것을 피하는 것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그런 그들이 직접 지원한다는 말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지원을 약속해준다는 뜻과 다름없었다.


그것도 겨우 개인에게 말이다.



"또한 저희는 니키타님이 가지신 선천적인 문제를 해결할 방법 또한 알고 있습니다."



"마력 결핍을 말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부작용이 존재하긴 하지만 이를 해소할 방법은 존재합니다."



엘프에게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하다니.


하지만 이러한 문제가 쉽게 해결될 리 없다.


이 세계는 균형을 추구한다.


하나의 작은 작용조차도 그 만큼의 반작용이 되어 돌아오는데 자연적으로 얻어낸 종족을 바꾼다면 어찌 되는가.


그 막대한 인과율은 자신을 무자비하게 짓누를 것이다.


이러한 사안은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이에 관한 논의는 이후 저희 <라 파레온>의 초대에 응해주신다면 자세히 설명해주시겠다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니키타에게 작은 상자를 건네주었다.


은은하게 고목의 향이 풍겨오는 고급진 상자를 받아 열자 그 안에는 나무를 깎아 만든 파이프가 담겨있었다.



"이는 아버지께서 직접 준비해주신 선물입니다."



작고 가볍되 손에 착 감기며 옅게 박하향이 올라오고 있었다.



"상자 안에 든 잎은 아마란스를 히스 꿀에 버무려 말린 제품입니다. 몸 전체적인 회복에 큰 도움이 되실 겁니다. 상자 안 '설명서'는 꼭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아마란스는 <라 파레온>이 관리하는 가장 거대한 숲 위더우드에서 희귀하게 자생하는 꽃이다.


상처 회복은 물론이며 몸에 있는 모든 부정적인 것들을 제거해준다는 그 꽃을 선물해주다니.


엘프들이 이 꽃을 선물한다는 것은 귀한 이에게 주는 보답과 같은 의미이다.



"감사합니다. 근 시일 내에 찾아뵙도록 하지요. 그럼 일전에 '부탁한 일'은 잘 처리해주시길."



"그럼 숲이 당신을 품어줄 수 있기를."



그리 말하자마자 엘프는 눈 앞에서 사라졌다.


저들이 니키타가 생각하는 그들이라면 반드시 임무를 수행해낼 것이다.


니키타가 여기에 엘프들을 끌어들이는 데에 이유가 존재했다.


제국의 멸망과 대륙 전쟁의 발발 원인은 주인공의 주도 하에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정확히는 주인공 주변으로 모인 이들이 직접적인 원인이다.


세레이오를 바로 죽이면 되는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는 바로 직접적인 원인들에 의해 가로 막힌다.


세레이오는 저들의 중심이 되어줄 뿐, 그녀가 없어도 저들은 세상에 거리낌 없이 불을 지를 자들이다.


또한 제 아무리 현실이 되었다 할 지라도 그녀가 죽었을 때 끼칠 영향은 미지수이기에 굳이 고르고 싶진 않았다.


허나 이번 성녀 후보인 엘프가 사망하며 라 파레온과 성국 간의 관계가 틀어진다면 숲에서 활동하는 추방자들, 잊혀진 신을 숭배하는 사교도들을 억제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그녀가 죽지 않게 만들기만 해도 충분히 성국과 라 파레온이 저들을 각각 억제해줄 것이다.


허나 권력 투쟁이 과열된 지금 그 정도 만으로 끝낼 수 있을까.



"절대 불가능하지."



이미 두 척의 배는 나란히 항해하지 않는다.


서로 마주 본 채 돌진하는 치킨 게임으로 바뀌고 말았다.


모두가 타륜에 손을 놓은 채 서로를 응시할 뿐인 이 상황은 누군가 죽어야 끝난다.


그렇다면 그는 거리낌 없이 자신이 살아가게 만들 이를 도와줄 것이다.


니키타는 파이프에 잎을 넣은 뒤 천천히 불을 붙이며 상자 안 바닥에 깔린 쪽지를 펼쳐보았다.


시나몬 향, 산딸기 향에 이를 감싼 옅은 꿀 향까지 마치 어느 숲 속을 그대로 가져온 듯한 향이 입 안을 가득 차올랐다.


니키타는 가게 인근에 쭈그려 앉아 빛 하나 없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파이프를 즐겼다.



"니키타."



에리카였다.


어느새 가게 밖으로 나와 니키타 옆에 앉아있었다.



"이야기는?"



"잘 진행되었어. 상대에게 불평이 없도록."



술집 내부에서 에리카와 벨리타는 성녀 후보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사건의 전말을 알 수 있었다.


현 성국 내 경전 해석에 관해 나뉜 두 파벌 간의 밥그릇 싸움과 제국 및 인근 국가에 미칠 영향까지.


모든 사항을 고려하여 이야기가 이뤄진 끝에 레투아니르 가문은 그녀를 돕기로 한다.



"언니는 지금 성녀 후보님이랑 술을 들이붓는 중이야. 난 부담스러워서 밖으로 도망친 거고."



"공작님은 별 이야기 안 하셨지?"



"응. 선 결정 후 통보인데도 그다지 역정을 내진 않으셨어."



아직 이런 자리는 서툴다는 사실을 공작 또한 알고 있다.


그렇기에 분명 가벼운 호통만으로 끝낼 것이다.


둘은 이미 그 정도 짐작하고 있었기에 가벼이 이야기할 수 있었다.



"...적은 얼마나 돼?"



에리카는 어째서인지 니키타가 알고 있을 것이란 듯 질문했다.


그라면 분명 혼자 조사를 하고 다녔을 것이라고.


이번에도 혼자 조사한 것일까.


혼자 위험하게 상대를...



"글쎄? 하지만 기습에서 전면전을 택할 정도라면 병력의 수는 비슷, 또는 우위에 있지 않을까?"



그 말을 들은 에리카는 순간 다행이다, 라는 안도감이 스쳐갔다.


스쳤다 할지라도 불안했기에, 그 안도감은 생각 이상으로 그녀에게 크게 다가왔다.



"혼자 조사하려 하지 말고 앞으로 우리에게 이야기해줘."



"응, 그럴게."



에리카의 안도감이 무색할 만큼 니키타는 이미 그 규모를 파악하고 있었다.


'설명문'에 적힌 것은 후기 세레니즘의 병력 규모 및 핵심 인물, 또한 전투 시작일에 관한 정보들이 다수 적혀있었다.


이틀 뒤 새벽에 시작이면 준비할 시간이 부족하다.


이제야 저들의 동향을 파악한 전기 세레니즘이 준비가 되어있을 리는 만무하니까.


최대한 준비를 해둘 생각으로 니키타는 어떤 방식으로 저들을 막아 세울 지 고민하였다.



"아, 맞아. 아버지가 통신으로 우릴 도울 인원들을 미리 보냈다 하셨어."



"미리?"



"응. 이렇게 휘말릴 줄 알고 계셨던 모양이야. 누구냐면..."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지그문트 오빠와 같은 길드 소속의 인원들이라 하셨어."


작가의말

많이 늦었습니다...취업 준비하는 중에 짬짬이 쓰다 보니 너무 오래 걸렸네요...ㅠㅠ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국화가 피어날 때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35 지금 필요한 것은 NEW 12시간 전 3 0 11쪽
34 그녀가 기억하는 방법 24.09.14 8 0 12쪽
33 힘차게 발을 내딛는다 24.09.12 9 0 11쪽
32 비로소 여우는 인정을 받고 24.09.10 15 0 12쪽
31 여우는 자신의 송곳니를 찾게 된다. 24.09.09 15 0 11쪽
30 여우는 그제야 작은 숨을 토해낸다 24.09.06 19 0 11쪽
29 선택받은 땅을 향하여 24.09.02 23 0 12쪽
28 우린 나아가리라 24.08.05 22 0 12쪽
» 석탄을 전부 넣어라 24.07.24 26 0 13쪽
26 출항을 알리노라 24.05.24 26 0 12쪽
25 결국 승선하고 만다 24.05.12 25 0 10쪽
24 그렇게 떠밀려진 그는 24.05.05 26 0 12쪽
23 선택지는 없다고 24.05.04 24 0 9쪽
22 모두가 말한다 24.04.27 25 0 10쪽
21 승선을 해야 하냐고 24.04.17 25 0 9쪽
20 소년은 물었다 24.04.16 30 1 10쪽
19 작은 선물을 안겨준다 24.04.15 30 0 11쪽
18 그를 감싸준 이는 24.04.13 34 0 10쪽
17 시선은 그에게 집중되고 24.04.11 36 0 10쪽
16 외전. 어둠은 쫒아오고 24.04.09 37 0 7쪽
15 행복해지자 24.04.07 39 0 7쪽
14 어둠 속을 빠져나가 24.04.06 39 0 8쪽
13 가슴까지 차기 전에 24.04.05 40 0 11쪽
12 발목이 잠기고 24.03.24 41 0 9쪽
11 허나 이는 가르침이라 24.03.22 41 0 9쪽
10 마주한 것은 공포요 24.03.21 41 0 12쪽
9 용기내어 다가가니 24.03.20 42 0 9쪽
8 많은 준비를 마치고 24.03.19 43 0 9쪽
7 거울을 마주하기 위해 24.03.18 44 1 10쪽
6 피어날 준비를 마친 이이다 24.03.17 46 0 1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