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화가 피어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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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메리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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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14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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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5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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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나아가리라

DUMMY

해는 지평선 밑으로 가라앉고 식은 몸을 데우기 위해 바람은 거세게 움직인다.


전기 세레니즘의 병사들은 그나마 다행이 훈련을 철저하게 받은 인물들이 대다수였기에 병력의 분배가 상당히 쉬웠다.


거기에 더해서,



"이런, 축제라 하여 조금 늦게 왔는데...상황이 이리 될 줄 꿈에도 몰랐습니다."



지그문트와 그가 속한 길드원들까지 합세하였다.


명목은 길드의 일원으로써 휴가 차 성국 축제를 즐기기 위해 왔다며 그럴 듯하게 둘러댄 덕분에 크게 책 잡힐 일은 없었다.


니키타는 지그문트의 실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그문트는 게임 내 중간 보스임에도 최종 보스보다 강하다 여겨지는 인물이니까.


게임 내 보스전 또한 독특했는데, 설정 상 그의 압도적인 무력을 당해내지 못해 죽기 직전까지 몰렸을 즈음 외부 세력의 개입 덕분에 간신히 진압한다 묘사되었다.


그만큼 그는 강하고, 또한 독한 이였다.


가문을 잃은 이는 자신의 몸을 혹사 시킨 결과 힘을 얻고 이성을 바쳤다.


갈가리 찢겨 벌어진 상처에 들어 찬 것은 복수심이며 흩어진 이성의 빈 자리에는 원망만이 들어찬 이.


그렇기에 그를 일컬어 부른 명칭은,



"네가 그 니키타구나, 반갑다!"



악귀.



"지그문트 레투아니르라고 한다. 편하게 지그문트라 불러."



그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파이프를 입에 물던 니키타에게 손을 건넸다.


모니터 속, 자신의 캐릭터 목을 산 채로 뽑아버린 그 손을 잡기가 꺼려지지만 지금은 아니지 않은가.



"니키타 라 레투아니르입니다."



"오랜만에 '라'의 성을 주게 된 이에게 너무 큰 부담을 안겨주는군. 미안하구나."



니키타는 지그문트의 이런 모습에 너무나 큰 괴리감을 느꼈다.


그르렁거리던 늙고 영악한 짐승의 목울음이 아닌 온화함이 묻어나는 말투.


울분에 퇴색된 분노와 복수에 썩어버린 슬픔을 담은 얼굴이 아닌 말끔함과 강인함이 담긴 얼굴.


진심으로 자신이 아는 그 지그문트인가, 라며 혼란스러운 니키타였다.



"길드 업무로 바쁘다며 소식조차 전하지 않더니, 이제 와서 여기로 온 이유는 뻔한 거 아니냐?"



"이런...벨리타 너도 있다는 소식은 못 들었는데."



한껏 찡그린 얼굴로 다가온 벨리타의 모습에 쩔쩔매며 지그문트는 그녀에게 변명을 늘어놓고 있다.


그의 슬픔과 분노는 오직 가문을 몰락시킨 이들을 향한 것이니, 가문이 굳건하다면 그가 그리 바뀔 일은 없을 것이다.


니키타는 지금의 지그문트에 대한 평판을 잘 알고 있다.


현재의 칭호는 에런트, 즉 떠돌이 기사라는 의미이다.


물론 그냥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는 어쭙잖은 놈들과 다르게 당당히 기사의 작위를 내려받은 실력자다.


기사 서임을 받은 가문은 무려 켈 공작가로, 이는 폄하하지 못할 개인의 위대한 업적과 다름없었다.



"그건 그렇고 준비는?"



"마쳤습니다. 중립을 고수하는 귀족들이 대부분이기에 그들은 따로 피신시켰습니다."



온화하던 그의 눈빛은 이내 날카로운 칼 끝으로 바뀐다.


그가 이 땅에 온 이유는 길드의 이익도, 동생들도 있지만 어린 반수를 눈에 담기 위함이었다.


섬기는 이 없는 자의 칼날에 비춰진 이가 자신임을 깨닫는 것은 긴장해야 하는 일이다.


지금 지그문트의 눈이 그러했다.


길드 소속의 전사가 아닌 그저 한 명의 기사로써 바라보는 것.


자신이 평가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니키타는 가만히 그들의 준비 과정을 짚어보았다.



"작전은? 이에 맞춰서 우리 길드도 힘을 보태줄게."



"브리핑은 빠르게 해줄게."



벨리타와 성녀 후보의 보충을 통해 지그문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이 연회장에 집결해있다는 점을 이용해 수비를 한다, 이건가..."



"그래야 도시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다 계산했어. 물론 저쪽은 도시가 파괴되는 것 정도야 신경 쓰지 않겠지만..."



"대의, 이를 신도들에게 각인 시켜줄 생각입니다."



성녀 후보, 과연 무서운 인물이군.


지그문트는 그리 판단했다.


아군 병사들 중에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인물들이 존재한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 그녀가 선택한 방법은 바로 중립을 유지하는 이들을 최전선에 배치한다는 것.


차라리 이번 전투를 통해 자신을 의심하는 이들을 전부 쳐낼 생각인 것이다.


저런 발상이 성녀 후보에게서 나올 수 있다니.


아니, 성녀 '후보'이기에 가능한 발상인가.



"그렇다면 내가 나설 명분은? 그게 없지 않은가."



"그 정도는 간단하지요. 다만 문제는 저희 병력의 운용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병력이 그만큼 부족하다는 의미입니까, 아니면.."



"부족하다는 뜻이야, 오빠."



에리카가 나섰다.



"이 골목의 넓이를 기준으로 방어진을 구축한다 생각하면 1문 당 창병 및 방패병만 약 80명의 병사를 채워 넣어야 해. 이를 총 4개의 부대로 쪼개야 하는데..."



"그렇군, 병사가 부족하군."



"맞아. 각 입구마다 우선순위를 매겨 병력을 배치한 뒤 남은 인원은 겨우 20명에 불과해. 그것도 방패병 15명에 마법사 5명 뿐이라..."



"방법이 있지, 그럼!"



그 말에 지그문트는 슬쩍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한 곳에 고정했다.


그 자리에서 지그문트의 말을 듣던 모두가 그의 시선의 끝을 향하였다.


그곳엔 작은 여우가 파이프를 입에 문 채 가만히 자신의 꼬리를 손질하고 있었다.


그 여우는 그제야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을 의식하고 당황스런 눈빛을 보였지만 어찌하겠는가.


무엇 때문에 저들이 자신을 바라보는지 묻기도 전에, 하지 않겠다는 말을 내뱉기도 전에 이미 모든 것은 결정이 났다는 듯한 저 표정.



"니키타."



지그문트는 니키타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자네의 도움이 필요하네."



* * *



북문, 니키타는 연초를 입에 문 채 땅을 계속해서 팠다.


지그문트와 같은 길드 소속의 인원들은 무언가에 대하여 토론을 하고 있었으며 병사들은 의욕이 없어 보였다.


다른 관문들은 현재 성녀 후보, 이다의 지휘를 받는 지휘관들이 담당하고 있지만 북문은 처음 보는 인물이 지휘를 담당하고 있으니 의욕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네가 레투아니르 공작가의 양자구나!"



그의 길드원들은 니키타를 살갑게 대해주었다.


사실 니키타는 지그문트가 속해있던 길드명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야 본편 기준 레투아니르 가문의 몰락과 연쇄 작용으로 지그문트를 도운 대가로 길드는 철저하고 확실하게 제거 당하였다.


이 세계에서 길드는 하나의 기업과도 같은 위치에 존재한다.


상업과 용병업, 또는 제조업에 농업까지 겸하기도 하는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이름에서 오는 신뢰이다.


그렇기에 길드는 수많은 방식으로 그 이름을 일리고, 신뢰를 쌓아 상품을 판매한다.


약초나, 짐승의 부산물이나, 무기나, 사람이나 상관없이 말이다.


본편 시작 전에 사라진 길드인 만큼 니키타는 길드명을 알지 못하지만 병사들이 그나마 그들로부터 위안을 얻는 모습을 보면 상당한 명성을 쌓았으리라.


니키타는 그들의 명성에 안주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제 아무리 강자라도 독을 마셔도 죽는 법이고 병에 걸려도 죽는 법이다.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내딛은 곳이 함정인지, 들이마신 숨이 독무인지 행동 하나하나를 준비해야 한다.


강자라면 모를까, 니키타는 지금 자신에게 유리한 지형을 만들 생각이었다.


그러한 고민 끝에 니키타는 결국 도로를 뒤엎고 땅을 파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어째서 땅을 파고 계시나요?"



열심히 땅을 파던 니키타에게 말을 건 이는 지그문트 옆에서 같이 움직이던 마법사였다.



"저들의 공격을 원할하게 억제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렇군. 상대의 병사들은 전원 성국 내 기사단 소속이다. 무거운 갑주를 입은 이들에게 험난한 지형은 불리하겠지."



지그문트에게 이 정도는 당연히 파악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다만 그런 그조차 니키타가 땅을 파내며 무언가 집어넣는 모습은 이해되지 않았다.


그에게 직접 물어보는 것보다 그 상황이 펼쳐졌을 때 구경해보고 싶었다.


귀수를 사냥한 이의 전투법을 직접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 * *



황혼이 내려앉자 새하얀 건물들은 붉게 물들어 앉았다.


밤의 도깨비들이 찬란했던 태양의 사지를 찢고 내장을 꺼내며 흩뿌린 피는 도시 전체를 물들이고 있었다.


흩뿌려진 피가 검게 엉겨 붙기 시작할 때 들려온 소리는 밤을 찬양하는 까마귀의 찬시가 아닌, 이빨을 갈아낸 칼의 굶주린 소리도 아닌 땅의 울음소리였다.


그저 땅에서 태어난 피조물들일 뿐이다.


눈앞에 다가오는 저들은 이익을 취하고자 하는 이들이며, 우리 또한 이익을 취하고자 하는 이들이다.


결국, 한낱 짐승들의 떼쓰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런, 레투아니르 공작가 여러분께서 반란에 가담하시다니, 유감입니다."



비릿한 미소를 띄운 여성은 지그문트를 바라보았다.



"그런가요? 이런, 전 그저 성국에 관광 차 오자마자 칼로 위협이나 받다니...이를 어찌 받아들여야 합니까, 카세."



"이미 그 이름은 버린 지 오래입니다. 전 그저 신의 말씀을 따르는 한낱 시종에 불과하니..."



"당신이 믿는 신이 다른 신인가 봅니다. 시종 교육하나 병신같이 하는 꼴 보니 대충 어떤 신인지 감이 오는군요."



니키타는 조용히 상황을 주시하였다.


지그문트의 입에서 나온 이름, 카세.


단 한 번도 게임 내에서 언급된 적이 없던 전 성녀의 이름.


잊어도 될 이름일지 모르지만 니키타는 어딘가 걸리는 발음이었다.


게임 속 중요한 요소일지도 모른다는 이 불편한 의구심 때문에 기억해둘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두며 칼자루에 손을 올렸다.


호흡을 조절하자.


마력을 억제하자.



"감히 신성 모독을 입에 담으시다니...직접 신께 보내어 벌을 받게 만들어 드리지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병사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어림잡아 본 병사 수는 북문에 수비를 담당한 병사 수의 20배는 넘어 보일 만큼 어마어마한 물량이었다.


그 물량은 어지러이 뛰쳐나오지 않고 하나의 흐름이 되어 덮쳐오고 있었다.


금속의 파도.


일반적인 방법이라면 저들을 막기 상당히 버거울 것이지만 지금은 아니다.


흐름이 강해 맞설 수 없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다른 방향으로 쳐내어 흐름을 방해하면 되지 않는가.



"전원! 방패 앞으로!"



지그문트의 외침과 함께 병사들은 방패와 창을 앞으로 내세워 팔랑크스 대형을 유지하였다.



"반드시 밀리면 안된다! 밀리면...!"



지그문트의 말은 끝까지 들리지 못했다.


대지가 치솟았다.


거대하고 날카로운 울음소리와 함께 단번에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른 것이다.


용솟음친 흙은 떠오른 자들을 집어삼켜 바닥으로 추락하는 듯 보일 지경이었다.



"이...무슨...!"



지그문트는 순간 니키타를 돌아보았다.


니키타가 땅을 헤집으며 심었던 그것이 원인인가?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이걸 만들어 낸거지?


새하얀 여우는 누구의 시선조차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자신의 적들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여우 한 마리는 썩은 핏덩이를 짓밟으며 송곳니를 드러내었다.


처음 겪는 전장, 처음 겪는 다수의 전투 속으로 그는 당연하다는 듯 여린 앞발을 내밀었다.



"저들의 기세는 꺾였다! 이단을 토벌하라!"



지그문트의 외침과 함께 본격전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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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가 피어날 때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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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지금 필요한 것은 NEW 12시간 전 3 0 11쪽
34 그녀가 기억하는 방법 24.09.14 8 0 12쪽
33 힘차게 발을 내딛는다 24.09.12 10 0 11쪽
32 비로소 여우는 인정을 받고 24.09.10 15 0 12쪽
31 여우는 자신의 송곳니를 찾게 된다. 24.09.09 16 0 11쪽
30 여우는 그제야 작은 숨을 토해낸다 24.09.06 19 0 11쪽
29 선택받은 땅을 향하여 24.09.02 24 0 12쪽
» 우린 나아가리라 24.08.05 23 0 12쪽
27 석탄을 전부 넣어라 24.07.24 26 0 13쪽
26 출항을 알리노라 24.05.24 27 0 12쪽
25 결국 승선하고 만다 24.05.12 25 0 10쪽
24 그렇게 떠밀려진 그는 24.05.05 26 0 12쪽
23 선택지는 없다고 24.05.04 25 0 9쪽
22 모두가 말한다 24.04.27 25 0 10쪽
21 승선을 해야 하냐고 24.04.17 26 0 9쪽
20 소년은 물었다 24.04.16 30 1 10쪽
19 작은 선물을 안겨준다 24.04.15 31 0 11쪽
18 그를 감싸준 이는 24.04.13 34 0 10쪽
17 시선은 그에게 집중되고 24.04.11 36 0 10쪽
16 외전. 어둠은 쫒아오고 24.04.09 37 0 7쪽
15 행복해지자 24.04.07 39 0 7쪽
14 어둠 속을 빠져나가 24.04.06 39 0 8쪽
13 가슴까지 차기 전에 24.04.05 40 0 11쪽
12 발목이 잠기고 24.03.24 41 0 9쪽
11 허나 이는 가르침이라 24.03.22 42 0 9쪽
10 마주한 것은 공포요 24.03.21 41 0 12쪽
9 용기내어 다가가니 24.03.20 43 0 9쪽
8 많은 준비를 마치고 24.03.19 43 0 9쪽
7 거울을 마주하기 위해 24.03.18 44 1 10쪽
6 피어날 준비를 마친 이이다 24.03.17 46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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